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3.6.29.목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사도12,1-11 2티모4,6-8.17-18 마태16,13-19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
-기도, 고백, 유언-
어제는 몸살 감기에 심한 열로 꼼짝 못하고 수도원을 찾은 여러 수녀님들의 고백성사만 드리고
많이 누워서 지낸 날입니다.
마침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았고 마침 외출하는 수녀님의 친절한 도움으로 수녀님의 차로
병원앞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고 잘 처방받아 다시 회복되어 강론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사건 역시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라 믿습니다.
몰라서 우연이지 믿는 이들의 눈에는 모두가 은총의 섭리요 하루하루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날마다 제 나름대론 온힘을 다해 쓰는 강론입니다.
어제 강론에 대한 어느 자매의 답글이 참 반가웠습니다.
“시들고 사라지는 자연의 변화 안에서 저는 삶의 허무와 슬픔을 느끼는데, 신부님은 주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를 생각하시며 정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으세요. 글 감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 졸저의 제목입니다.
오늘처럼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다 보면 절실한 물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양대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저절로 떠오르는 성가 291장 일부를 나눕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착하신 목자 성 베드로여 천국문 여는 으뜸 사도로
주님께 소명받으셨으니 우리의 도움되어 주소서.
간택된 사도 성바오로는 주님의 사랑 사로잡히어
온세상 두루 다니시면서 부활한 주님 전하셨도다.”
위 가사에서 보다시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도로 전혀 다릅니다.
서로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보완하면서 일치임을 우리 역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체험합니다.
참으로 서로 같아서가 일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끊임없이 바라보며 살아갈 때 다양성의 조화요 일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입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주님과 함께
힘껏 책임을 다하며 사는 이들이 살아 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제 주변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같이 힘든 세상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니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격려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기도, 고백, 유언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성인들은 교회의 사람이요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강하니 교회 공동체에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점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일치합니다.
언제나 강론 끝부분에서는 자기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꼭 당부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두분 사도의 품이자 뿌리내린 기름진 밭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감옥에 갇혀있던 베드로의 생환과정에서 교회공동체의 기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즉시 기도는 응답되어 주님의 천사의 개입으로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의 감격에 벅찬 고백입니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둘째,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고백의 언어입니다. 참된 언어가 고백의 언어입니다.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진실한 사람, 겸손한 참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말을 하고 말이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삶의 꼴을 형성하는데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고백은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요!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
“주님, 당신을 희망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도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을 통해 자기의 신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며 제자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화두같은 물음이 “예수님은 누구인가?”입니다.
구구한 답들이 많습니다만 이에 만족치 못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답이 정확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감격한 주님은 이런 고백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며
고백 역시 은총임을, 은총의 고백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은총의 고백이요 고백의 축복입니다.
이어서 축복과 더불어 하늘 나라의 열쇠라는 엄청난 책임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셋째, 유언입니다.
임종어가 유언이요 평생 좌우명이 또 묘비명이 될 수 있습니다.
미리 임종어를 예상하여 평소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임종어가 좌우명이 나의 모습을 주님을 닮은 참나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모해 갈 것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저에겐 사도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전력투구, 최선을 다해 살아온 주님의 전사, 복음의 전사 바오로 사도의 장엄한 고백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요! 평생 지침으로 삼고 하루하루 이렇게 살 때 그대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일 것입니다. 성 베드로의 평생 좌우명이자 묘비명은 다음 두 말마디일 것이라 제 나름대로 추측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을까요?
늘 기도하는 것이며, 늘 고백하는 것이며, 늘 유언을 좌우명으로 삼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렇게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저의 유언이자 좌우명이요 묘비명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동안 많이 인용했지만 저에겐 늘 새롭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