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복이 많은 성종의 후궁 숙의 홍 씨((淑儀 洪氏) 이야기♡ 숙의 홍 씨((淑儀 洪氏)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홍일동과 측실 노 씨와의 사이에서 2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지금도 남양주시 별내면 응달마을에는 성종 대왕의 다섯째아들이며, 숙의 홍 씨의 둘째 아들인 회산군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고 있다. 마을 앞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따뜻하고 평온한 길운이 맴도는 마을이다. 누가 봐도 북향과는 거리가 먼 남서향의 매우 양지바른 마을인데 왜 응달마을이라고 부르는지? 의문이 들지만 아직까지 그것을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곳에도 지금은 개발이 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가 되었다.∼♡♡ 성종은 4명의 왕후와 8명의 후궁 사이에서 자녀를 16남 12녀로 28명을 낳았다고 하는데 성종의 28명의 자녀 가운데 10명의 자녀를 10번째 여인인 숙의 홍 씨가 그러니까 12명의 여인이 낳은 자녀가 28명인데 그중에 10명의 자녀를 숙의 홍 씨가 낳았다고 하니 숙의 홍 씨가 얼마나 주상전하의 큰 총애를 받았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여기서는 광범위한 조선 왕실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 중에 작은 곁가지 하나인 성종의 10 번째 여인 숙의 홍 씨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전개 하고자 한다.∼♡♡
그녀의 증조부 홍징은 고려 말 공민왕의 장인인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의 사위였으며 공민왕의 손윗동서이다. 염제신의 아들이면서 이인임의 수족이었던 염흥방과는 처남 매부 관계라서 무진피화 때 염흥방 일파로 몰려 아버지 홍징과 자식들은 처형되었는데, 그녀의 할아버지인 홍상직은 가까스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져 전남 장성으로 은둔해 터를 잡았다.∼♡♡ 참고로 무진피화 얘기를 하자면 고려말 여러 차례 몽골족의 침입으로 몽골족(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 최 씨 무인 집권 시대가 펼쳐지는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염신재의 사위인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에 신비 염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간신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기도 한 우왕을 왕으로 보위에 올려놓고 權臣 염신재의 아들인 염흥방이라는 사람이 무진피화라는 권신들의 권력 싸움에 휘말려 상대 진영인 최영, 이성계 군벌 일당에게 멸문지화를 당할 때 공민왕의 손윗동서인 홍징(洪徵)의 집안과 손아랫동서인 이송(李竦)의 집안도 함께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홍징(洪徵)의 아들인 홍상직(洪尙直)은 전남 장성으로 피신하고 이송의 열두 살짜리 이천(李蕆)과 이온(李韞) 어린 형제가 산속에서 헤메고 있을 때 어느 고마운 산승이 이들을 바위굴(巖穴)에 숨겨 주어서 살아났다고 한다. 당시 홍상직은 나이가 많은 성인이었고 이천과 이온 형제는 열두 살, 열 살짜리 연약한 어린 아동이었다. 산속을 화를 피해 헤매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래도 죽지 않고 굳세게 살아서 홍상직의 집안과 이천과 이온 형제의 집안은 대를 이어서 오늘까지 오게 되었지. 일찍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조실부모한 외로운 고아 형제가 얼마나 어떠한 고생을 하며 살았을지는 보지는 못했어도 피부로 느껴진다. 이런 이송의 아들이 학문과 과학을 꽃피웠던 세종 시대에 과거에 나가서 급제하고 등용되어 귀히 쓰인 과학자 이천(李蕆)이다.∼♡♡ 염제신의 사위이며 공민왕의 동서인 홍징과 이송이 아닌가? 그럼 홍상직(洪尙直)과 이천(李蕆)은, 같은 염제신의 외손자인 것이다. 문헌에는 이송의 이름을 李悚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족보에는 李竦으로 되어있다. 족보를 제작 편집하는 사람은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의 심정으로 큰 사명감을 갖고 기록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족보의 기록을 더 우선시하여 여기서는 李竦으로 기록한다. ∼♡♡ 여기서 숙의 홍 씨의 가계도와 사료들을 찾다가 수귀 홍 씨의 증조부 홍징(洪徵)과 우리윗대 12대조 할아버지 이송(李竦)이 동서지간이며, 숙의 홍 씨의 조부인 홍상직(洪尙直)이 우리 윗대 13대조 할아버지 이천(李蕆)과 이종사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족보를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우리 윗대 13대조 할아버지인 이천은 시호가 익양공(익양공)인데 육군사관학교에 익양공 할아버지의 시호를 따서 익양관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건조한 최초의 잠수함의 이름이 이천호라고 한다.∼♡♡ 홍상직의 아들들은 장남 홍귀동과 차남 홍일동(1412~1464)이 있었는데, 이중 홍일동이 계유정난에 참여해 원종공신 2등 훈에 책록되었다고 한다. 홍일동의 실제 벼슬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노비에게서 서자로 태어난 삼남이 홍길동이다.∼♡♡ 홍일동과 동시대의 사람인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라는 고문헌에 숙의홍씨의 아버지인 홍일동은 유명한 대식가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은 진관사에서 생활할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리때, 두붓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그 사람이 산 아래 왔을 때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홍일동은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었다. 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홍일동은 사실임을 아뢰었고 세조는 장사(壯士)라고 말했으나 평상시에는 미숫가루를 먹고 맑은 술만 마셨으며 밥을 먹지 않았다. 1464년에 홍일동이 명 사신을 접대하다가 홍주에서 폭음으로 죽었을 때 사람들은 배가 터져 죽었다고 생각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관사라는 절은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 기슭에 있는데 내가 그곳에 여러 차례 소풍을 갔었던 곳이다. 경복궁에서도 비교적 가까이 있는 사찰이라서 대신들이 그곳에 가서 식사를 하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도 대식가가 있다. TV에 많이 나오는 예쁜 아가씨 성함이 쯔양이라고 하던데 그녀는 종일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고 한다.∼♡♡ 숙의 홍 씨의 흔적을 찾던 중 의정부시 녹양동 산38-1번지에 숙의 홍 씨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선 먼저 지도상의 위치를 확인했다. 삼복더위가 지나면 언제 시간을 내어서 그곳을 찾아봐야겠다. 그럼 지금부터 숙의 홍 씨의 가계도를 보면서 숙의 홍 씨를 둘러싼 모든 것을 알아보자.∼♡♡ 왕실의 여인으로 가장 임금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가장 자식을 많이 출산한 여인임에도 숙의 홍 씨는 적서 차별이 심한 조선조에 서자로 태어난 죄로 비에 오르지 못하고 숙의로 생을 마감했다.∼♡♡ 숙의 홍 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궁중에 들어와 궁중연회를 구경하였는데, 이때 자을산군(성종)이 숙의의 관상을 보고 "이 아이의 관상이 남다르니 뒷날 필시 귀한 자식을 많이 낳으리라"라고 하였다. 이어 다른 사람과 혼인을 금하도록 하였고, 더 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궁에 들라 명하였다. 이에 숙의 홍 씨가 선뜻 응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임금은 다시 입궐하라고 권하였고 그래서 성종의 여인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 아버지를 따라 궁중에 들어가서 궁중연회를 구경할 수 있었을까? 그의 집안은 보통집안이 아니었다. 아버지 홍일동은 세조가 집권하는 계유정난에 공신으로 당시의 실세였다.∼♡♡ 숙의 홍 씨((淑儀 洪氏)가 14세 되던 1470년(성종 1년) 성종은 숙의에 어의를 보내어 건강상태를 살펴보게 하였고, 또한 대궐에서 궁중의 법도와 왕실의 예절을 알고 익히도록 했다. 입궁한 지 2년이 지난 후, 성종은 숙의와 혼인하여 숙원(종4품)에 봉했다.∼♡♡ 《숙의 홍 씨 묘갈명》에 따르면 14세에 선발되어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1481년 봄(25세)에 종4품 숙원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궁녀로 들어와 승은 상궁이 되었고 첫째 혜숙 옹주와 둘째 완원군을 낳은 후에야 정식으로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이 사망할 당시, 종3품 수용으로 있었고 연산군 때는 정3품 소용으로 진급되어 있었는데, 아들 완원군이 갑자사화에 연루되는 바람에 규례대로 직첩을 빼앗기고 폐출당할 뻔하였으나 패출은 당하지 않고 수용으로 강등되었으며, 나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다시 후궁의 예우를 받아 종2품 숙의가 되었고 자수궁에서 살게 되었다.∼♡♡ 완원군, 회산군, 견성군, 익양군, 경명군, 운천군, 양원군 등 7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낳은 덕분에 이들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오늘날에는 이 왕자들의 후손들이 합심하여 공통 조상인 숙의 홍 씨의 제사도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큰아버지가 홍귀동이며, 아버지는 홍일동이란 인물이고, 아버지의 이복동생이 그 유명한 측실소생인 홍길동이다. 그는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과는 매우 다른 인물로, 흉악했던 도적이었기는 하다. 그런 흉악한 인물이 허균의 붓끝에서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당대에 소외되었던 서자 서녀들의 한을 풀어주는 의적으로 캐릭터가 변형되었다고나 할까? 언제 한번 실존 홍길동과 소설속의 홍길동을 비교분석을 해 보는것도 참 흥미로울 것 같다.∼♡♡ 숙의 홍 씨는 7남 3녀라는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을 정도면 굉장히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을 텐데도, 성종으로부터 수용의 첩지만을(소용, 숙의로의 진급은 성종 사후) 받은 이유는 모친이 정실이 아닌 측실 즉, 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왕실에서는 서자라도 왕의 자식이면 왕비의 양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일반 양반 가문에서는 첩의 자식을 정실의 자녀로 입적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세조 때의 반정공신인 홍일동의 딸이니 친정 집안 덕분에 그녀가 후궁이 된 것이었지만, 결국 서녀였기에 온전한 양반이라고 할 수 없었고, 성종에게 그토록 총애를 받고 많은 자녀를 낳았음에도 측실의 딸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후궁 중 최고의 품게인 정1품 빈까지는 책봉될 수 없었다.∼♡♡ 참고로 다음은 숙의 홍 씨의 가족 관계이다. 조부:홍상직, 백부:홍귀동, 부:홍일동, 서숙부:홍길동 적모: 남평 문씨, 큰오빠:홍효문, 작은오빠:홍효성, 언니:김약균의 처 생모:노씨(홍일동의 측실) 남편:성종 장녀:혜숙옹주 이수란, 장남 : 완원군 이수, 차남 : 회산군 이염, 삼남 : 견성군 이돈, 차녀 : 정순옹주 이복란, 사남 : 익양군 이회 오남 : 경명군 이침, 육남 : 운천군 이인, 칠남 : 양원군 이희 삼녀 : 정숙옹주 이여란 고려 말엽 우왕 당시부터 조선이 건국된 이후 중동조에 이르기까지 왕실에서 일어났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더듬어 보았다고나 할까. 숙이홍씨의 차남인 회산군은 후세가 없어서 그의 동생인 견성군의 아들을 입양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오늘날 남양주군 별내면 응달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땀흘려 일하며,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을 쓰려고 여러 가지 사료를 찾다가 알게 되었지만 우리 윗대 12대 할아버지가 숙의홍씨의 할아버지인 홍상직과 이종사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려말 우왕 당시에 권신들의 알력으로 인해 외가의 일에 휘말려서 외손들도 삼족을 멸하게 되는 멸문지화를 당했음에도 홍상직과 이천, 이온 형제는 가까스로 화를 피하여 마치 소나무의 씨앗들이 바람에 날려서 세상에 번식이 되듯이 그의 후손들이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널리 퍼져서 살고 있다. 당시 멸문지화를 당하는 현장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홍상직의 손녀는 훗날 궁중의 후궁인 숙이 홍 씨가 되고 같은 처지였던 이천과 이온의 자손들은 숙이 홍 씨와 동시대를 살면서 그당시 일어났던 기묘사화의 난을 피하여 이온의 손자는 가족들을 데리고 경북 안동시 풍산으로 피신을 했었지.ㅎㅎ 나는 지금까지 이천의 후손들의 행방은 몰랐었는데 이천의 묘소가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오창리 칠봉산기슭에 있는 것으로 봐서 내 생각에는 후손들이 그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지는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바람에 날리는 수천억 개의 솔 씨앗 중 하나가 그 씨앗 하나가 지금은 경기도 의정부로 날아와서 노년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귀하신 몸이었던 숙이 홍씨를 만났다고나 할까ㅎㅎ 이렇게 숙의 홍씨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삼복더위를 잊은채로 이렇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