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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 K Army T가 여기저기 눈에 띄는 걸 보니 흐뭇합니다. 모르긴 해도 B.T.S 효과로 보입니다. 밀리터리룩 < Army >반팔은 얼추 20년 전(2005)에 출시했고, 필자가 부대 찾아다니며 카탈로그를 뿌려놓은 것도 오늘날 빅 히트에 일조했을 것입니다. 만약 매형이 내 말 듣고 아미 랜드 프랜차이즈를 했다면 태성(주) 뿐 아니라, 마크사 전성시대가 다시 한번 왔을 것입니다. 에예공! 돈을 벌려면 반드시 운도 따라줘야 하는 건 맞는 말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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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데리고 아침을 해결하러 온 딸기 아빠가 살짝 얄미운 이유를 아시나요? 모든 일에는 역 기능과 순기능이 섞여 있습니다. 또한 그 사건의 틈을 통해 새로운 사건이 연쇄되기 때문에 언제 역기능과 순기능이 뒤바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이념 갈등이 <암살자들 2026>로 또 한 번 홍역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다들 죽자고 덤비니까 어느 편들기도 불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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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의 정치적 상처와 영웅을 기억하면서도, 어떻게 그들의 이름에 현재의 판단을 맡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날의 나르시시즘은 무엇일까?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박근혜-윤석열 치세 동안 레드콤플렉스를 이용해 국민들을 가스라이팅 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나마 박정희는 '인권 탄압'과 '레드 콤플렉스'로 독재를 했지만 산업화를 이루고 하부구조의 틀을 놓았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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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마르크스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낳았어요. 우리 시대의 불온 사적 '막스'가, 서구에서는 '마르크스'를 빼고 지성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지경입니다. 니체-프로이트-마르크스-퐁티-하이데거-베르크 손-화이트 헤드-레닌- 루카치-그람시-알티세르-랑시에르-바디우-발리바르-지젝은 마르크스주의를 이어줍니다. 여전히 빨갱이만 팔면 표를 찍어 주고, 불안과 공포로 정치생명을 이어가는 극우 보수집단이 정치의 하향 평준화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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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정희를 <주인 기표>로 삼고 있는 자들이 <암살자>를 보고 미쳐 날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진보진영에도 노무현을 <주인 기표>를 만들어 노무현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는 좌파 파시즘 세력을 만들었어요. 노무현 팔이로 '그림자 투사'를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득권을 챙기고 국민의 삶에는 무관심한 노무현 팔이 정치인들(문빠, 노빠)을 이젠 걸려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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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는 빨갱이를 팔고, 한쪽에서는 노무현을 팔아 기득권을 챙기는 <주인 기표>가 판치는 조국은 희망이 없습니다. 민주주의 가치를 이제 와서 20년 전 노무현 감성팔이로 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시간이 변해도 오직 노무현 <주인 기표>가 한 인간(집단)을 지배하다 보면 현재를 살 수가 없어요. "무의식에는 시간이 없다"(프로이트) '그림자 투사'는 개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시간과 하등의 관계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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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들이 살아있는 이상 합리적 사고가 들어올 수 없고, 상처받은 자는 결코 현재를 살 수 없다 그 말입니다. 쾅! 쾅!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훌륭한 영화는 '소외 두기'를 하여 '거리 두기(낯설게 하기)'를 하게 합니다. 빨갱이 콤플렉스 <주인 기표>, 노무현 콤플렉스 <노무현 기표>를 가진 자들에게는 결코 합리적 이성이 작동할 수 없어요. 과거의 정치적 상처와 영웅을 기억하면서도, 어떻게 그들의 이름에 현재의 판단을 맡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2.
R.O.K Army T가 여기저기 눈에 띄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다. 모르긴 해도 BTS의 ‘ARMY’ 효과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밀리터리룩 Army 반팔은 얼추 20년 전에도 있었고, 필자가 부대를 찾아다니며 카탈로그를 뿌리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뿌린 작은 씨앗 하나쯤 오늘날 어디엔가 남아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매형이 그때 내 말을 듣고 아미랜드 프랜차이즈라도 벌였다면 어땠을까. 에예공! 돈은 실력만으로 버는 것이 아니라 때와 운까지 맞아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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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뒤섞여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한 사건이 끝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사건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끝난 것이 반드시 끝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사건은 기억과 언어를 통해 현재로 되돌아오고,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치적 사건을 다시 만들어낸다. 영화 한 편을 둘러싸고 대한민국의 오래된 이념 갈등이 다시 소환되는 것도 그래서 흥미롭다. 문제는 어느 편이 옳으냐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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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미 지나간 역사적 인물의 이름 앞에서 지금도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가? 여기서 라캉의 ‘주인기표’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주인기표는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강력한 이름 아래 정렬한다. ‘이승만’, ‘박정희’, ‘반공’, ‘노무현’, ‘민주화’ 같은 이름들은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자유, 산업화, 독재, 저항, 민주주의, 배신 같은 수많은 기억과 감정을 한꺼번에 불러내는 기표가 된다. 문제는 기억 자체가 아니다. 기억해야 할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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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름이 현재를 판단하는 사고까지 대신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보수정치가 북한과 안보의 위협을 지나치게 동원하여 정치적 반대자를 의심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동시에 진보정치 역시 민주화의 기억이나 특정 정치인의 상징적 자산을 현재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수표처럼 사용한다면 똑같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박정희라는 이름이 오늘의 모든 보수정치를 정당화할 수 없듯, 노무현이라는 이름도 오늘의 모든 진보정치를 정당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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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인물 그 자체보다 그 이름이 우리의 욕망을 조직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여기에 프로이트의 “무의식에는 시간이 없다”는 통찰을 겹쳐볼 수 있다. 과거의 상처는 달력처럼 늙지 않는다.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은 공포와 원한은 수십 년 뒤에도 현재형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말은 오래전의 전쟁과 공포를 즉각 소환하고, 다른 사람에게 특정 정치인의 이름은 상실과 민주주의의 기억을 한꺼번에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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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현재의 사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현재라는 스크린 위에 자신의 과거를 투사하며 싸우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브레히트가 말했던 '낯설게 하기', 즉 '거리두기'일 것이다. 내가 숭배하는 이름에서도 한 발 떨어져 보고, 내가 증오하는 이름에서도 한 발 떨어져 보는 것이다. 박정희를 산업화냐 독재냐라는 양자택일에 가두지 않고 두 얼굴을 함께 바라보고, 노무현 역시 성역화하거나 악마화하지 않고 역사 속 정치인으로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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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결국 어떤 지도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제도가 아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지도자라 해도 그에게 나의 판단권까지 넘겨주지 않는 제도다. '국민주권'의 가장 위험한 순간은 국민이 투표권을 잃었을 때만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할 권리를 어떤 ‘주인기표’에게 넘겨주었을 때도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박정희를 지우거나 노무현을 잊는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이름을 역사 속에 제대로 놓아주는 일이다.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가 현재를 대신 살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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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는 말만으로 오늘의 보수를 선택해서도 안 되고, ‘노무현’이라는 이름만으로 오늘의 진보를 선택해서도 안 된다. 과거의 이름은 기억하되 오늘의 판단은 오늘의 우리가 해야 한다. 그것이 <주인기표>에서 빠져나와 다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첫걸음일 것이다. “기표 없이 사고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주인기표가 다른 판단을 봉쇄할 때 문제가 된다. <주인기표>에서 완전히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기표에 붙잡혀 있는지를 의심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2026.10.6.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