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산저산 꽃이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 되고 보면 월백설백 천지백허니
모도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김소라 - 단가 - 사철가
아래는 이 곡의 원래 창시자인 김연수 명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드라마틱한 녹음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것인데 읽어볼 만 합니다.
50∼60년대의 판소리계를 석권하던 김연수 명창이 지어 부른 단가, 사철가의 내용입니다. 사계절을 주제로 한 음악 하면 으레 우리는 비발디의 악곡 사계를 연상하지, 여기 김연수의 노래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지요. 아니 김연수의 사철가를 떠올리기는 커녕 사철가라는 우리의 노래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게 우리의 실정입니다. 얼른 생각해 보아도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단 외국의 예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가(詩歌) 중에도 사계절을 읊조린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연수 명창의 사철가는 인생론적인 애상을 짙게 풍겨 주어 단연 우리의 심금을 적셔 주는 엄지의 위치에 선다고 합니다.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은 인생은 비록 백년을 산다고 해도 영원한 세월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석화(擊石火)의 순간, 즉 번쩍이는 부싯돌의 순간과 같다고 전제하면서 계속 인생행로의 덧없음을 노래해 가는 저의는 인생을 허무주의적 페이소스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월백설백(月白雪白) 천지백(天地白)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라고 자탄한 사설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철가는 인생과 자연의 관조적 합일을 바탕으로 우리의 숙명적 유한성을 담담하게 객관화한 데 더욱 공감되는 감흥이 있습니다. 이 같은 애상적 포에지가 김연수 특유의 구성진 음악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한결 적절한 비애미를 짜 내고 있는 노래가 곧 사철가입니다.
사실 단가 사철가는 김연수의 '백조의 노래'입니다. 백조가 죽을 때는 마지막 노래를 남긴다는 전설처럼 김연수 명창은 죽기 전 이 사철가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가 작고하기 얼마 전 당시 동양 방송 PD로 근무하던 필자는 김연수 명창을 모시고 방송 녹음을 했습니다. 그 때 그가 고수 이정업의 반주로 판소리 몇 대목과 함께 불러 준 노래가 사철가입니다. 오랜만에 녹음하러 온 그의 모습은 다른 때와는 달리 초췌했습니다. 녹음이 끝난 후 그는 전에 없던 주문을 해 왔습니다. 방금 녹음한 사철가를 조용히 다시 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 녹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쁘다고 총총히 돌아가던 여느때에 비하면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조용한 사무실 한구석에 녹음기를 틀어 놓고 방금 녹음한 사철가를 육중한 침묵과 함께 들었습니다. 사무실의 창살에는 희뿌연 석양이 쏟아지고 방송국 옆을 지나는 서소문길 공항로에는 부질없이 분주하게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비록 백 년을 산대도 인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하시는 이가 몇몇인가'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명창의 눈은 지그시 감겼고, 병색으로 창백해진 표정에는 깊은 우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철가가 끝나자 두 명인의 콤비는 말도 없이 사무실 문을 나섰습니다. 얼마 후에 김연수 명창은 유명을 달리했고, 명창이 작고한 그 다음해에 당대의 명 고수 이정업 옹 역시 '저승에 가서도 북 반주를 해 달라'던 명창의 권을 좇아서인지 끝내 타계하고 말았습니다.
사철가의 노래가 더욱 우수의 정념을 더해 주는 것은 바로 이처럼 '김연수 명창의 백조의 노래'였다는 간절한 사연이 묻어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는 단가 첫 대목처럼 꽃을 보며 봄을 느끼는 계절이 되었다. 봄을 노래한 국악곡이 한 두가지가 아니건만, 유난히 사절가의 첫대목이 귀에 쟁쟁한 까닭은 지난 해 CD로 나온 김연수 명창의 단가의 멋에 아직까지 흠뻑 취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음반은 1969년에 녹음된 것을 다시 CD로 낸 <단가집>인데 여기에는 김연수, 박초월, 박록주, 성우향이 부른 단가의 명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김연수 명창이 부른 '이산저산'은 <사시풍경>이라는 이름으로 맨 처음에 들어 있는데, 무르익은 멋을 한껏 머금었다가 툭 뱉어내듯이 운을 떼는 '이산저산'이 참으로 멋지다.
그런데 김연수 명창이 부른 '이산 저산'은 뿌리깊은 나무 단가 음반에 담긴 정권진의 '이산 저산'이나 영화 <서편제>에서 아름다운 산경치를 배경으로 유봉(김명곤역)이 부르던 '이산 저산'과 달라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라는 가사를 기대하고 이 음반 을 듣는데, 김연수 명창은 '이산 저산 꽃이피면 산림풍경 너른 곳 만자천흥 그림병풍...'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노래의 제목도 어디서는 노래의 첫 대목을 따서 '이산 저산'이라 하기도 하고 단가사설을 모은 책이나 음반에서는 아를 <사절가>, <사철가> 또는 <사시풍경>이라고 하니, 왜 이렇게 둘쭉날쭉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두 노래를 음반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두 자료를 사설에 바탕을 두어 비교 해 보면 다음과 같다.
[뿌리 깊은 나무]음반에 담긴 정권진의 <이산 저산>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느냐?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錄陰芳草勝花時)라' 예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寒露霜楓) 요란허여,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黃菊丹楓)도 어떠한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여 은세계 되고보면, 월백(月白) 설백(雪白) 천지백(天地白)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와,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 보소. 인간이 모두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滿盤珍羞)는 불여생전일배주(不如生前一杯酒)만도 못하니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마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마라 가는 세월 어쩔그나. 늘어진 계수나무 끌어다가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國穀偸食)허는 놈과 부모 불효 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잔 더 먹소, 들 먹게"하면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지구 음반에 담긴 김연수의 사시풍경(이산 저산)
이 산 저산 꽃이 피면 산림풍경 너른 곳 만자천흥 그림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 간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일러라.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숨심하네.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왓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가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렀으니, 작반등산 답청놀이며 피서 임천에 목욕구경 여름이 가고 가을된들 또한 경개 없을 손가 상엽홍어이월화라 중양추색 용산음과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허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천산비조 끊어지고 만경인종 없어질적 백설이 펄펄 휘날리면 월백 설백 천지백 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일레라. 그렁저렁 겨울이 가면 어느덧 또하나 연세는 더 허는디 봄은 찾아 왔다고 즐기더라. 봄은 갔다가 연년이 오건만 이내 청춘은 한 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는가. 어와 세상 벗님네들 인생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인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집착허시는 이가 몇몇인고. 노세 젊어 놀어 늙어지며는 못노나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이 허면 늙어지면서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하고 한가할 때 틈타서 좋은 승지도 구경하며 할 일을 하면서 놀아보자.
이 두 노래는 네 절기의 아름다운 풍광은 연년마다 어김없이 순환되지만 사람은 한 번 늙어지면 인생의 봄이라 할 젊음이 다시 오지 않으니 세월을 아껴가며 살라는 권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하다. 다만 김연수의 '이산 저산'에는 각 계절의 아름다움을 수식한 문구가 정권진의 '이산 저산' 보다 더 많이 보완되어 있고, 수식어구가 정확하게 들어있다. 그리고 노래의 끝 부분에서 김연수의 '이산 저산'에는 늙기 전에 놀되 너무 허망이 놀면 후회되는 일이 많으니 한가한 틈을 타 노는 것이 좋겠다고 마무리된 반면 정권진의 '이산 저산' 에서는 불효하고 죄지은 놈부터 저 세상으로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끼리 넉넉하게 즐겨보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어 뒷 맛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노래의 음악적인 면에서는 두 노래가 거의 유사한데, 김연수 명창의 '이산 저산'은 역시 사설의 발음이 정확하고 사설에 맞는 음악표현이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감칠맛이 나고 정권진 명창의 '이산 저산'은 훨씬 담백한 쪽에 가깝다. 두가지 '이산 저산'은 이렇게 부분적인 차이점을 지닌 두가지의 판으로 남아 있는 셈인데, 요즘은 영화 <서편제> 덕분인지 뿌리 깊은 나무의 것이 더 널리 불리우는 것 같다.
그런데 한명희 저 [우리가락 우리문화]에 소개된 <사절가>글을 보면 이 노래는 1950~60년대에 김연수 명창이 지어 부른 것이라고 되어 있어 '이산 저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연수(호:東杯)는 1907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서당 교육을 통해 한문을 배우고 이어 신학문도 경험한 후 다소 뒤늦은 나이인 스물 아홉에 유성준 명창의 문하에 들어 소리 인생을 시작하여 현대 판소리 전승사에 큰 공헌을 남긴 명창이다. 그는 유성준에 이어 송만갑.정정렬 등을 사사하면서 소리 공부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지만 본디 타고난 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연수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끊임없이 판소리 탐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사설의 전달이 정확하고 극적 표현이 빼어난 소리로 평가받는 '동초제 판소리'를 이루어 냈다.
뿐만 아니라 김연수는 어린 시절부터 쌓은 한문 실력으로 판소리의 사설을 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여 [창본 춘향가]등, 판소리 전 바탕의 창본을 완성하였다. 1962년에는 국립창극단 초대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제자 오정숙에게 동초제 판소리를 고스란히 전수시켜 그의 소리맥을 이어가게 한 뒤, 1974년 3월 9일,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한명희의 글에 의하면 김연수는 작고 하기 얼마 전에 동양방송에서 이 노래를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의 장면을 한명희의 글에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上略)...그가 작고하기 얼마전 당시 동양방송 PD로 근무하던 한명희는 김연수 명창을 모시고 방송 녹음을 했다. 그때 고수 이정업의 반주로 판소리 몇대목과 함께 불렀다. 오랜만에 녹음 하러 온 그의 모습은 다른 때와는 달리 초췌했다. 녹음이 끝난 후 그는 전에 없던 주문을 해 왔다. 방금 녹음한 사절가를 조용히 다시 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녹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쁘다고 총총히 돌아가던 여느때에 비하면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조용한 사무실 한구석에 녹음기를 틀어 놓고 방금 녹음한 사절가를 육중한 침묵과 함께 들었다....(中略)... '인생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이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하시는 이가 몇몇인가.'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명창의 눈은 지그시 감겼고, 병색으로 창백해진 표정에는 깊은 우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절가가 끝나자 두 명인의 콤비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렇다할 작별의 말도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얼마후에 김연수 명창은 유명을 달리했고, 명창이 작고한 그 다음해에 당대의 명고수 이정업 옹 역시 저승에 가서도 북반주 해 달라던 명창의 권을 좇아서 인지 끝내 타계하고 말았다....(下略)"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기도 한 이 얘기를 읽고 다시 듣는 김연수의 <이산저산>의 느낌은 그전에 듣던 것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글을 통해 김연수의 <이산저산>에 북장단을 맞춘 이정업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다가온다.
이정업은 1908년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와리의 예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해금연주와 줄타기 등의 수업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등이 타고난 고수였다고 하는데, 이정업은 1961년에 줄타기 공연 중 사고를 당할 때까지 주로 줄타기 명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이후 그동안 익힌 음악 수업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업 고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정업은 김연수 명창의 수행 고수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절친했는지, 김연수 명창은 작고하기 전 '내가 죽으면 저승가서 누가 내 소리에 북을 쳐주나, 자네를 데리고 가야겠다' 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더니 김연수 명창이 타계한지 보름 만에 이정업 명인도 이승을 떠나고 말아, 이 이야기는 국악계의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김연수 명창이 부르고, 이정업 명인이 북을 잡아 녹음을 남긴 '이산저산'은 곡명이 <사시풍경>, 또는 <사절가>, <사철가>로 각각 달리 언급되는 것은 어떤 연유인지 더 연구해 봐야 할 과제로 부각되었지만, 다같이 '이산저산' 으로 시작되는 사절가의 두가지 판이 있으며, 그 중에 하나는 김연수 명창이 다듬어 남긴 절창이라는 점을 그의 음반을 들으며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현(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첫댓글 역시나??눈망울님은 국악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