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알타이 산맥 북쪽 초원로의 파지리크에 위치했던 박혁거세의 뿌리인 월지족은 흉노에게 중앙아시아로 쫓겨 왔다가 재차 공격을 받고 대월지와 소월지로
나뉘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고, 중앙아시아에
위치해있던 김알지의 뿌리인 사카족은 흉노의 공격을 받고 흉노의 제후국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카족이었던 신라 김씨 왕조 시조인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오늘날 흉노족이라고 오인 받게 된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자의 추론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가 바로 <KBS 역사추적>의
방송 내용이었다. 즉, 방송에서는
한반도, 몽고,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발견된 고대인들의 유골에서 채취된 DNA를
분석하여 신라 김씨 왕조가 흉노와 관계가 있음을 밝히려고 했는데, 그
결과가 부계 DNA를
분석한 <그림
3-32>와
모계 DNA를
분석한 <그림
3-33>이다.
인류유전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하플로그룹은 Y-염색체
(Y-DNA) 하플로그룹과
미토콘드리아 DNA(mtDNA) 하플로그룹으로
이는 유전 집단을 정의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Y-DNA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오직 부계 혈통을 통해서만 전달되며, 반면에
mtDNA는
어머니에게서 남녀 모두의 자식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어머니에게서 아들에게 전달된 mtDNA는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mtDNA는
결국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오직 모계 혈통을 통해서만 유전된다. 결국
부계 DNA 분석은
Y-DNA를
이용한 것이며, 모계
DNA 분석은
미트콘드리아 DNA 분석을
통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
3-32> 부계
DNA 분석
결과에 의하면, 신라는
스키타이인, 늑도와
함께 같은 그룹에 속하고, 흉노는
몽골인과 함께 다른 그룹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그림
3-33> 모계
DNA 분석
결과에 의하면, 신라는
스키타이인과 우즈벡, 그리고
서흉노와 같은 그룹에 속하고, 부계에서
신라와 같은 그룹으로 분류되었던 늑도는 조선과 한국 현대인, 그리고
몽고 현대인과 함께 다른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방송에서는 모계 DNA 분석
결과에서 신라와 서흉노가 같은 그룹에 속하는 것에 대해 신라와 서흉노 간에 인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한
해석은 아마도 원래 방송이 의도했던 신라 김씨 왕조와 흉노간의 관계가 있다는 추정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자료를 보면 부계 DNA의
경우 신라인과 흉노는 아예 다른 그룹으로 분류되어 있고, 같은
그룹으로 분류된 모계 DNA의
경우도 신라와 서흉노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가
이러한 DNA 분석방법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바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통계의 판별분석에서 사용되는 ‘데카르트
거리(cartesian distance)’ 방법을
적용해보면, 서로간의
거리가 멀수록 당연히 혈연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같은 그룹으로 분류된 모계 DNA의
경우도 약간의 혈연관계는 있을지라도 그 정도는 아주 약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이미 신라 김씨 왕조가 흉노가 아닌 사카족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필자에게는 그 DNA 분석
결과의 의미는 다르게 해석되었다. 즉, 부계
DNA 분석에서
신라가 스키타이와 같은 그룹에 속하는 것은 필자가 파악한 연구 결과 그대로였다. ‘신라’라는
유골이 박씨 왕조의 월지족이든 혹은 김씨 왕조의 사카족이든 간에 둘 다 아리안 계통이기 때문에 역시 아리안 계통인 스키타이 유골과 같은 그룹에
속하는 것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으며, 이것은
필자의 연구 결과를 지지해주는 또 하나의 과학적 증거였다.
또한
부계 DNA 분석
결과에서 ‘늑도’에서
발굴된 유골이 신라 및 스키타이와 같은 그룹에 속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을
본 후에 몇 가지 미심쩍은 부분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자가 직접 DNA 분석을
실시한 이광호 교수와 통화한 결과에서도 확인되었지만, 늑도는
필자가 생각한대로 경남 사천의 늑도였다. 그리고
필자가 분석 자료에서 나오는 늑도가 사천 늑도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던 이유는, 사천
늑도의 고분에서 선도성모 집단의 표지 중 하나인 옹관이 발굴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늑도
고분에 묻혀 있는 고대인도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아리안 계통이었기 때문에 아리안 계통의 스키타이와 역시 아리안 계통의 신라 고인골이 같은 그룹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미심쩍게 생각해서 분석을 실시한 연구자에게 문의 전화를 한 것은 다른 부분 때문이었다. 필자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부계 DNA 분석에서는
신라, 늑도, 스키타이인이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데, 모계
DNA에서는
늑도의 고인골이 신라와 스키타이와 같은 그룹이 아니라 조선과 한국현대인과 같은 그룹에 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필자 나름으로 고민해 본 결과,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었다. 즉, 파지리크
지역에서 거주했던 월지족이 아리안 계통의 남자와 몽고 계통의 원주민 여자가 결혼하여 이루어진 종족이라면, 역시
몽고 계통에서 한반도로 건너 온 것으로 알려진 한민족(조선과
한국현대인)과
같은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림
3-9> 파지리크
고분에서 발견된 카펫의 기사도 때문이었다. 파지리크
고분에 묻힌 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뿌리를 둔 월지족인 것을 안 이후로 필자는 왜 월지족들이 페르시아에서 머나먼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파지리크까지
왔을까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자료에 의하면 스키타이인들은 초원로를 이용하여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무역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월지족 역시 페르시아에서 초원로를 통해 무역을 하기 위해 파지리크까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
3-9> 기사도에서
아리안계통의 기사가 몽고 계통으로 추정되는 여제사장을 만나는 장면 때문에 필자의 머리에는 자꾸만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지나친
상상일 수도 있지만 필자에게 떠오른 생각은, 그림
속의 기사가 키루스 대제의 병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키루스 대제는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사게타이족을 이끄는 여왕이 취한 병법은 일종의 퇴각전술로서 며칠간 계속하여 후퇴만을 거듭하면서 키루스대제를 내륙 깊숙한 곳으로 유인한 후에
일거에 격파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계속 후퇴를 거듭하다보면 초원로에 위치한 알타이 산맥까지 이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과 그 전투의 패잔병들이 그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몽고 계통의 원주민들과 만난 장면을 카펫에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필자의 상상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 지역에서 아리안계통이 정착하게 되었다면, 그들의
피에는 아리안계통의 DNA와
몽고계통의 DNA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키루스대제가 전투에서 죽은 시점인 기원전 530년은
파지리크 문화가 형성된 시점으로 알려진 기원전 6세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필자의 상상은 신라인 유골에 대한 DNA 분석결과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즉, 신라인의
유골에 대한 부계와 모계 DNA 분석
결과 모두에서 신라가 스키타이와 같은 그룹에 속한다는 것은, 샘플
유골의 경우 신라 유골은 남녀 모두 순수한 아리안계통인 것이며 몽고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지리크 지역의 월지족이 아리안계통의 남자와 몽고계통의 여자와의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파지리크 거주자들의 형성기원에 대한 필자의 상상이 아직 전적으로 부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분석에 사용된 ‘신라’ 유골이
박혁거세의 월지족이 아니라, 김알지의
사카족이라면 굳이 이 유골에 몽고계통의 피가 섞일 필요는 없다. 아무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할 ‘누란의
미녀’ DNA 분석에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
후 다시 떠오른 생각이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한반도로 이동했던 아리안 계통의 남자(부계
DNA)가
그 이전부터 늑도에 거주하고 있던 고대 한국 원주민 여자(모계
DNA)와
결혼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 메디컬 스쿨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카들에게 문의 메일을 보내는 한편, 과학자들의
연구 사이트인 BRIC에
가입하여 문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분석을 실시했던 연구자에게 직접 문의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해당
연구자에게 메일을 보낸 후 직접 통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해당 연구자와의 통화 결과, 샘플이
적어서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해당 샘플의 경우에는 필자의 생각처럼 아리안 계통의 남자가 늑도에 거주하고 있던 고대 한국 여자와 결혼했을 때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또한
그 연구자는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이런저런 애로 사항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즉, 이런
연구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진행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정부나
대학당국에서는 빠른 아웃풋을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정부나 대학당국의 지원 없이 개인적인 자투리 시간을 투자해서 연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대학에 몸담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 연구자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이런 연구풍토에서 세상을 놀랄만한 연구결과를 낸다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