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
김병환
무더위
끝자락 말복
쓰름매미
서럽게 울고
반딧불
반짝이는 밤
지붕 위
하얀 박꽃이
모깃불
연기가 매워
살포시
입을 닫는다.
김병환 시인의 <박꽃>은 잔혹할 만큼 뜨거웠던 여름이 제 수명을 다해가는 말복의 밤을 배경으로 합니다.
서럽게 울어 대는 쓰름매미의 울음소리는 계절이 물러가는 마지막 흔적이자, 다가올 가을에 대한 서글픈 예고처럼 들립니다. 까만 밤하늘과 지붕을 배경으로 번지는 반딧불이의 미세한 반짝임은 고요한 정적을 더욱 극적으로 돋보이게 만듭니다.
지붕 위에 수줍게 피어난 ‘하얀 박꽃’은 이 시의 아름다운 주인공 입니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듯 환하게 피어난 흰 빛깔은 어쩌면 여름밤이 간직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의 시선은 그 예쁜 꽃이 맞닥뜨린 작은 시련에 다다릅니다. 피어오르는 모깃불의 맵싸한 연기. 박꽃은 불평하거나 조용히 저항하는 대신, 그저 "살포시 입을 닫는" 정적인 선택을 합니다. 연기마저 매워 입을 다무는 꽃의 행위에서 유약하면서도 묵묵히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양적인 선함과 순응의 미학이 느껴집니다.
말복이라는 계절의 경계, 매미의 슬픈 울음, 반딧불이의 빛, 그리고 연기에 조용히 입을 다무는 박꽃까지. 시인은 거창한 언어 없이도 자연의 미세한 숨소리를 포착해 내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잊고 살던 고향 마을의 따스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일깨워 줍니다. 지붕 위 하얀 박꽃이 살포시 입을 다물듯, 읽는 이의 마음도 조용히 매만져지는 아늑하고 어여쁜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