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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이 아마사를 죽임
삼하 20:4-13
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7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8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13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삼하 20:4-13 / [아마사가 요압에게 암살당하다] 다윗은 맨 먼저 열 사람의 후궁부터 처리하고, 이어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아마사 장군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그대는 유다의 모든 장병들을 삼일 안으로 소집한 뒤 모레 이곳에 와서 보고하시오! 내가 직접 사열을 받겠소!' 5) 그러나 아마사가 정해진 기한내에 돌아오지 않자 6) 왕이 아비새에게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였다. `이제는 세바가 압살롬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로 등장할 것이오. 그가 튼튼한 요새에 들어가기 전에 어서 네 부하들을 데리고 그들 뒤쫓아가시오! 그가 일단 요새에 숨어 버리면, 우리는 헛수고만 하게 될 것이오' 7) 아비새는 곧 요압이 지휘하던 정규군과 그렛 족속과 블렛 족속으로 구성된 다윗의 부하들과 모든 용사들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세바를 뒤쫓았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문을 떠나 8) 기브온의 큰 바위 곁에 이르자, 아마사가 지름길로 급히 달려와서 아비새 앞으로 나아왔다. 이때에 요압은 헐렁한 옷을 높이 추켜 입고 널따란 띠를 띠고 있었는데, 그 허리띠 속에는 단도가 숨겨져 있었다. 그 단도는 다른 사람이 눈치 챌 수 없는 사이에 칼집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면 손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9) 요압은 아마사를 기쁘게 맞이하는 척하였다. `형님, 요즘 어떻게 지내습니까?' 하고 인사하면서 그에게 입맞출 듯이 접근하여 오른손으로는 그의 턱수염을 틀어쥐고, 10) 왼손으로는 아마사가 눈치 챌 겨를도 없이 칼을 빼어 잡았다. 요압이 그 단도로 아마사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땅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요압이 두 번 다시 칼을 쓸 것도 없이 아마사는 그 자리에서 거꾸러져 죽었다. 그러자 요압이 다시 실권을 쥐고 온 군대를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요압은 즉각 자기 동생 아비새와 함께 세바를 뒤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마사를 따라온 군인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주저하였다. 11) 그래서 요압이 자기의 부하 한사람을 아마사의 시체 옆에 세워 놓고 이렇게 외치도록 하였다. `요압을 지지하며 다윗왕 편에 설 사람은 당장 요압 장군을 따르시오.!' 12) 이리하여 군인들은 모두 요압 장군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마사가 길바닥 한가운데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주저하며 멈추어 섰다. 그래서 요압의 부하가 아마사의 시체를 한길 가운데에서 들녘으로 치워 놓았다. 그런데도 군인들은 아마사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길을 지나면서 여전히 그곳을 쳐다보며 조금씩 멈추어 섰기 때문에 요압의 부하가 아마사의 시체를 옷으로 덮어놓았다. 13) 이렇게 되자 군인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요압을 따라서 세바를 잡으러 갔다.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바가 또 반란을 일으킵니다.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4-6) 다윗은 ‘세바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대장으로 ‘아마사’를 임명합니다. 아마사의 임명은 큰 반발을 일으켰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마사는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할 때 압살롬 편에 섰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마사에게 삼일 만에 유다사람들을 군대로 동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반역자였던 아마사에게 유다사람들이 군대로 들어가는 것을 자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마사가 기한 내에 군대를 모집하지 못하자 아비새에게 세바의 반란 사건을 맡깁니다(6). 아비새는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피신할 때 가까이에서 다윗을 보좌했던 장군이었습니다.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7-13) 아비새는 요압의 부대와 다른 부대들과 함께(7) 세바를 쫓기 위해서 출병을 합니다. 그런데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8)라고 말합니다. 아마사는 다윗이 정한 기간보다는 늦었지만 군대를 모집하고 아비새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서 기브온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요압은 다윗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아마사를 죽입니다. 8-10절까지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압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요압은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는데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요압을 등용하지 않습니다.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자 다윗은 오히려 압살롬 편에서 반역을 이끌었던 아마사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에는 아마사가 비록 다윗의 반대 세력이었지만 그를 포용함으로 이스라엘의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다윗의 뜻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뜻대로 되지 못하자, 이번엔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등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압은 평생 다윗을 섬기면서 아브넬을 죽였고, 우리야를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었고, 반역자 압살롬까지 죽이면서 다윗에게 충성을 보인 사람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에 요압은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압은 다윗을 무시하고 아마사를 죽임으로 군의 실권을 장악합니다. 아마사의 죽음을 본 군인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요압의 병사 중 한 청년이 나서서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아마사의 죽음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군대를 수습하기 위해 여전히 요압이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적 용 : 다윗과 요압이 계속 함께 하지만 많이 힘들었습니다. 나는 혹시 누군가에게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그에게 부담이 되는 요압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몸에 좋은 약은 독약’이라는 말이 있지요. 왜냐하면 그 효능으로 인하여 과용하기 때문이지요. 요압은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이나 왕에게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잘 다루는 ‘칼’의 힘과 자신의 재능을 믿고서 말입니다. 살면서 묵묵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어 보여 자신들의 재능이나 계략으로 스스로를 높이지만, 결국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결산할 때 결코 모략이 기도를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높이 세워주실 거라는 믿음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낮추셔도 그분께 순종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 일겁니다.
호크마 주석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소집하고 - 다윗 왕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를 국민병 모집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이러한 조치는 지난번 아마사에게 제의한 약속(19:13)을 이행하기 위한 예비 조치였다. 즉 아마사의 등용 기회를 찾고 있던 다윗은 세바 반란 진압을 아마사에게 맡김으로써, 반란군을 진압하고 요압의 기(氣)를 꺾는 동시에 아마사와의 약속을 이행하는 3중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너도 여기 있으라 - 이는 국민병을 소집하고 아마사도 그곳에 함께 있으라는 말이다. 다윗 왕이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세바의 난을 진압할 군대의 사령관으로 아마사를 임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윗의 이와 같은 조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즉 (1) 다윗은 무엇보다도 아마사를 군대의 총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거칠고 반항적인 요압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며, (2) 또한 압살롬 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내세움으로써, 압살롬의 난에 선봉장(先鋒長) 역할을 한 유다 지파의 사기를 북돋아 주려 했던 것이다(19:13).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의도는 군대 소집의 지체와 요압의 반발로 인하여 실패하고 만다.
=====20:5
아마사가...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 아마사가 군대의 소집을 기한내에 완료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아마사의 무능력에 있었던 것 같다(Payne). 즉, 다윗 왕은 요압에게 하듯이 아마사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아마사는 경험많고 노련한 요압에 비해 실무(實務) 능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졌던 것이다. 그러기에 아마사는 마하나임 전투에서 압살롬의 대군을 이끌고도 요압의 소수 정예병력에 의해 격파당했던 것이다(17:25; 18:6-8). (2) 유다 사람들의 비협조(非協調)에 었었다고 볼 수 있다(Keil, Lange). 다시 말해서 아마사는 반군의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유다 백성들로부터 의혹과 불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다 백성들은 아마사의 모병(募兵)에 응하지 아니한것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19:13)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즉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던 유다 사람들은 반역자요 변절자인 아마사 휘하에 들어가기롤 꺼려함으로써, 아마사의 등용을 방해하였다. 이에 다윗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아비새에게 반란군 진압을 명함으로써 사태를 일단 수습하였다(6절).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백성들과 측근을 무시한 행동으로, 특히 그의 측근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기는 일이었다. 결국 과격하고 정치욕이 강했던 요압은(3:27; 18:14) 질투심과 원한에 의해 반역자 아마사를 살해하고 말았다(10절).
=====20: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 아마사의 지체에 불안을 느낀 다윗 왕이 아비새에게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명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다윗 왕이 아비새를 세바 진압의지휘자로 임명하는 것이 흥미롭다. 다시 말해서 평소 같으면 그동안 이스라엘의 군장(軍長)으로 계속 활약해 왔던 요압에게 명령했을 것이나 이례적으로 동생인 아비새에게 지휘권(指揮權)을 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 다윗 왕은 자신의 명을 어기고압살롬을 죽인(18:14) 난폭한 성미의 요압을 상당히 못마땅해 했음을 알 수 있다(Wycliffe Bible Commentary, Lange).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 세바의 난이 압살롬의 난보다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다윗 왕의 예상이다. 그 근거로서 다윗 왕은 세바의 난과 압살롬의 난 사이의 근본적인 성격 차이를 생각한 듯 하다. 즉, 압살롬의 난은 압살롬 개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세바의 난은 오래 묵은 지파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므로,이번 세바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할 경우, 그 피해는 압살롬의 난 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온 나라에 미치게 될 것이라고 다윗은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판단은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그 세(勢)가 약화된르호보암 때에는 세바의 주창과 같은 구호를 내건 여로보암에 의해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왕상 12:16, 17).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 여기서 '네 주의 신복들'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왕의 시위병들과 정예 군사들을 가리킨다(7절). 한편 여기서 다윗 왕은 지난번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갔을 때 아히도벨이 베푼 모략과 똑같은 지시를 여기서 내리고있다(17:1-3). 즉, 일단 반기의 기치를 든 세바가 자기의 세력을 키워 대항해 오지 못하도록그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전혀 주지 않고 즉각적인 공격을 가할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을 피할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칠 에네누'(* )를직역하면, '우리의 눈을 빼앗을까'란 뜻이다. 즉, 여기서 '히칠'(* )의 기본형'나찰'(* )은 '빼앗다', '찾다'는 뜻이며(창 31:16; 삼상 7:14; 삼상 30:8, 18;호 2:9), 그리고 '눈'(* , 아인)은 신 32:10, 슥 2:10에 관련시켜 볼 때 '가장 가치있는 것' 또는 '중요한 소유물'을 상징하는 말이다(Thenius, Bottcher, Keil).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 왕국의 중요한 소유물들, 그것이 백성이든 아니면 토지이든 성읍이든, 그러한 것들을 세바가 빼앗아 가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다윗 왕의 말이라고 볼 수있다.
=====20:7
요압을 좇는 자들 - 그동안 요압의 통솔을 받아왔던 요압의 정예 군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 - 이들은 왕의 근위병들이었다. 이들의 업무 분담에 대해서는 8:18을 참조하라. 다윗 왕이 이들을 파견할 경우 다윗 궁은 완전히 무방비(無防備)상태가 될 것이었지만, 다윗은 사태의 긴박성을 깨닫고 이들까지 파송하였다.
모든 용사들 - 여기서 '용사들'이란 히브리어로 '깁보림'(* )인데, 이들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다윗 왕을 추종한 다윗의 용사들을 의미한다(삼상 23:13; 27:2). 이들은 압살롬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한결같이 다윗 왕을 보좌하였던 충성된 일꾼들이었다(15:18). 다윗 왕은 이들까지 파견함으로써, 성중에 있는 모든 병력을 세바의 반란 진압에 투입하게 되었다.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 (1) 혹자는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요압이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운 칼이라고 주장한다(Lange). 그러나 만일 그러했다면 아마사는 분명히 요압의 그 칼을 주의했을 것이다. (2) 이렇게 볼 때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요압이 자기의 품속 어디엔가에 숨겨놓은 '단검'(短劍)이었다고 우리는 볼 수 있다(Hertzberg, Wycliffe Bible Commentary). 즉 요압은 자기의 칼을 떨어뜨림으로써 아마사를 안심케 한 후,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마추는 순간 왼손으로 품 속에 있는 단검을 꺼내어 세게 찌른 것이다. 이처럼 요압은 정치적인 원한과 질투로 인해 세번째의 살인(3:27; 18:14)을 하고 말았다. 물론 아마사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요압의 살인은 변명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살해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분노와 질투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변명될 수 없는 죄악이다(마 5:22)). 요압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다면, 그의 원통함을 자신이 해결하려 들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였을 것이다(롬 12:19). 결국 이러한 요압의 방자하고 난폭한 행동은 다윗의 분노를 더욱 사게 되고, 후일 요압을 제거하라는 다윗의 유언(왕상 2:5, 6)을 받은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한 요압을 마침내 죽이고 만다(왕상 2:28-35).
요압과 그동생 아비새가...좇을새 - 이는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한 후 아비새와 더불어 스스로 군대의 지휘자로 나선 것올 보여주는 구절이다.
< 설 교 >
요압의 살인
삼하 20:4-13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세바의 반란은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바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좋아서 다윗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한 마당에 다윗에게 등을 돌리면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다윗을 환영하는 척할 뿐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다 사람과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지를 않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른 채 다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도권을 얻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1절)는 말로 선동하는 세바의 말에 쉽게 동조하여 다윗 좇기를 그치고 세바를 좇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이 반역자인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다윗의 불쌍히 여김으로 다윗 언약에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의 불쌍히 여김을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 마음대로 다윗을 선택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자신들은 숫자가 많음으로 자신들이 떠나면 다윗이 아쉽지 자기들은 아쉬울 것이 없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들의 힘과 세력만을 믿고 행동하는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자란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사람을 뜻합니다.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음을 뜻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주도권을 뺏겨도 괜찮은 것이고, 욕을 먹어도 괜찮은 것이고,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욕을 먹고, 무시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식으로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보다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바의 반란과 같은 것입니다.
세바의 반란과 함께 다윗은 유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이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다윗은 압살롬에 의해 더렵혀진 열 명의 후궁을 별실에 가둬 버리고 동침하지 않음으로서 죽는 날까지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입니다.
사실 열 명의 후궁이 압살롬과 동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들을 궁에 남겼기 때문이고, 압살롬의 힘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은, 후궁들의 죄에 대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다윗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후궁들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구실을 정당화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다윗의 죄에 대해서도 어떤 구실을 동원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후궁들을 생과부로 지내게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며 자신의 수치를 끝까지 상기시키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죄의 자리에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 하셨으면서도 그 죄가 우리의 삶에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부끄러운 자리에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그 어떤 공로도 끄집어 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만을 바라고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결국 평생 생과부로 지내게 된 다윗의 후궁들은 다윗에게 그의 죄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를 증거 해주는 증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안다면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 역시 다윗의 마음으로 교통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다윗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또 다시 다윗의 마음은 외면하고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아마사를 불러 삼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라고 합니다. 세바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아마사가 약속한 기일이 되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5절). 결국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고 명합니다.
아비새가 출동을 하자 요압도 함께 따라 나서게 되고 기브온 큰 바위 곁에서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갔던 아마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압이 ‘형은 평안하뇨’라고 인사하는 척 하면서 칼로 찔러 죽이게 됩니다(7-10절). 그리고 시체를 들판에 버려둔 채 그 위에 옷을 덮어 놓은 요압은 군사를 이끌고 세바를 좇으러 간 것입니다(11-13절).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이유는 아마 다윗이 압살롬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벌하기보다 오히려 군장으로 삼은 것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다윗의 군장이 요압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요압은 아마사에게 밀려난 것이었던 것만큼 다윗에게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장으로 다윗에게 반역을 했던 사람이고, 자신은 다윗과 함께 하여 다윗을 위해 싸웠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거센 반발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요압의 경력만을 살펴본다면 요압은 분명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였습니다. 요압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은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관점에서의 판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볼 때 요압은 다윗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 멋대로 행동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요압이 아브넬과 압살롬과 아마사를 죽였지만, 그 모두는 다윗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 중 누구도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살려주라는 당부까지 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말을 모두 묵살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해 버린 요압이 다윗의 마음에 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에 대해 저마다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죄가 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네가 그러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말로서 자기 정당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 정당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누구에게라도 지기 싫어하는 본성 때문에 그러합니다. 잘못했다는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용납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요압의 살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보다 자기 존재성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의 악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기 존재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 앞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으신 현장인 십자가 앞에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누구도 정당한 인간이 되지를 못하며 누구도 세상에 존재할 가치는 없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섰을 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없는 자들이 모여 서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데 네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역시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아셔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이 열 명의 후궁을 평생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은 그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죄에 대한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과부로 지내야만 하는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서로에게 나의 죄를 보게 하는 증인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언하게 하기 위해 형제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네가 잘못했다’는 것으로 따지고 있다면, 그것은 요압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를 곧게 세우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요압은 비록 자신이 ‘나는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그는 분명 다윗에게 충성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증인들이 바로 요압에게 죽은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였습니다. 요압은 비록 그 몸은 다윗과 함께 했지만 그 마음은 다윗에게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본문처럼 살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사람이며, 예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요압과 같은 착각일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 보며 헌금하는 것 등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게 하신 신자의 관계에서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열심히 고백하는 내가 과연 죄인의 자리에서 죄인된 자로 형제를 만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압은 자신이 볼 때는 반역도 하지 않고 다윗과 함께 한 정당한 자였기 때문에 죽어야 할 자를 살려준 다윗의 은혜의 맛을 알지 못합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기에 요압에게서는 은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옳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서로의 행동을 바라보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악한 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나에게 부어진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서로를 대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그 마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세바의 난
차용철목사(열린문교회) / 삼하 20:1-26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자 온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의 환궁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19:9-10). 그 때 다윗은 자신이 환궁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과 혈통이 같은 유다지파의 소외를 돕기 위해 선도적인 역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19:11-12). 그래서 유다지파가 요단강까지 마중나와 호위하며 길갈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의 편애와 유다지파의 불손한 행동에 대해 크게 반발했습니다 (19:40-43). 그 와중에 세바가 다윗에 대해 반기를 들며 나오게 되고 그로인한 혼란이 있게 됩니다. 1~3절에는 세바 난의 발발, 4~13절에는 아마사의 피살, 14~26절에는 세바 난의 진압에 대해 나옵니다.
1. 세바 난의 발발 (1~3)
다윗의 환궁에 대한 이스라엘 지파들과 유다 지파 간에 갈등이 있을 때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세바 라는 사람이 반란을 꾀하였습니다. 세바 는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족장급에 있는 듯 하고 혈통적으로 사울 왕가와 가까운 듯 하고 사울 왕가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선동가인 듯 합니다. 그를 난류 라고 했는데 난류 (亂類)의 히브리어 이쉬 벨리야알 는 무익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파괴적인 사람 의 뜻으로서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나 아무런 도움도 끼칠 수 없는 아무 쓸모없는 무익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고후6:15 참조). 다른 성경에서 비류 로 번역되기도 했고 (삿19:22, 삼상10:27, 30:22, 왕상21:10, 대하13:7) 불량자 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삼상2:12, 25:17, 25, 잠6:12, 16:27).
세바는 나팔을 불어 다윗의 파문과 자신의 반란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으며 함께 할 업이 없다고 했습니다. 분의 (分誼)의 히브리어 헬레크 는 기업 분깃을 의미하며, 업(業)의 히브리어 나할라 는 유산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곧 자신들의 지파 땅과 사람들이 다윗의 지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에게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 길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돌이켜 세바를 따라 에브라임 산지로 올라갔습니다. 오직 유다 지파 사람들만 다윗을 쫓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세바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이루려는 선동자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언약적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자입니다 (삼상16장). 온 이스라엘이 기름부어 왕으로 세운자였습니다 (삼하 5장).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을 하나되게 했고 주변국들을 정복하므로 이스라엘의 위상을 높인 통치자였습니다. 그러나 실수로 범죄한 이후 여러 정치적 역경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지파들과 유다 지파간의 갈등 표출되었습니다. 세바는 그 정황을 이용하여 자신이 지도자가 되려고 꾀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울 지파로서 유다 지파와 경쟁 관계에 있었고 에브라임 지파를 주축으로 한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은 유다 지파와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다윗에 대한 반기를 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따라 움직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마6:33). 그리고 나누기보다는 서로 연합하여 하나되게 하려 해야 합니다 (엡4:3).
한편 3절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피난길에 오를 때 후궁 10명을 궁에 남겨두었습니다 (15:16). 그것은 압살롬과 그의 군대가 여인들이기 때문에 살해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로 하여금 궁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남겨 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궁에 들어온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라 자신의 왕권 탈취를 과시하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힘있게 하기 위해 10명의 후궁을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서 강간을 했습니다 (16:21-22). 후에 다윗이 압살롬의 군대를 진압하고 다시 예루살렘 궁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 후궁들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어 죽을 때까지 생과부로 지내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다윗이 율법 정신에 근거하여 행한 조치로 보고 있습니다. 후궁들이 율법적으로 불결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 조항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자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고(신 24:1-4), 더욱이 아들과 동침한 경우는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레 18:6-8). 오히려 그들을 율법대로 치리 하려면 죽이거나 성 밖으로 내어 쫓아야 하는데 다윗이 자신의 실수를 생각하여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 않고 긍휼을 베푼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꼭 율법적 정신을 가지고 행한 처사 같지는 않습니다. 혹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아들이 강간한 후궁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더 클 것입니다. 그 추측이 맞다면 그것은 다윗의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다윗도 그 일로 크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지만, 압살롬의 난이 근본적으로 자기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 난이었고 다윗 자신이 피난길에 오르면서 후궁들에게 궁을 지키라고 명했고, 그 후궁들은 궁에 있다가 압살롬에게 강제로 능욕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궁들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후궁들도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어야 하는데 자신이 받은 상처와 분노로 그들을 미워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내가 강간을 당했을 때 남편이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누가 잘못했든지 남편이 심리적으로 받는 충격은 클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아내의 인격을 귀하게 생각하나다면 오히려 아내를 위로하여 상처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생활에서 자신이 상처받은 것만 생각하고 상대가 상처받은 것은 생각하지 못하여 상처를 더욱 깊게 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 아마사의 피살(4~13)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이스라엘 지파들과 유다 지파간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 틈을 타 베냐민 지파 사람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그 난을 진압하기 위해 요압을 경질하고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워 유다 사람들을 소집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소집이 늦어졌고 세바의 무리가 견고한 성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새를 불러 그의 군사로 하여금 급히 세바를 쫓게 했습니다.
아비새의 일군이 세바를 쫓을 때 아비새의 군열에 요압도 함께 했습니다. 다윗의 명과 상관없이 아마사가 아비새 군열과 합류할 것을 알고 그를 살해할 목적을 가지고 함께 갔던 것 같습니다. 결국 세바를 쫓는 아비새 군이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렀을 때 아마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압은 자기의 차고 있던 칼을 느슨하게 매어 고의적으로 떨어지게 하므로 아마사가 경계심을 갖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형은 평안하뇨 하면서 입을 맞추려는 체 하다가 품고 있던 칼로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요압은 아마사를 죽인 후 아비새와 함께 세바를 좇았습니다. 그런데 아마사에 의해 모집된 국민병들은 아마사의 죽음을 보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요압의 정예부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 시체 곁에서 요압을 좋아하고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아마사의 시체를 밭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국민병들이 지나가면서 길에 있는 피와 시체를 보기 위해 머뭇거리자 아마사 시체를 옷으로 덮었습니다. 그제서야 병사들이 요압과 아비새를 따라 세바를 좇았습니다.
아마사가 죽게 된 원인은 아마사 무능력함에도 있을 수 있고, 다윗의 성급한 인사에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요압의 정치적 야욕에 있습니다. 다윗 왕권 초기에 이스보셋 왕권과 대치했을 때 이스보셋의 군장 아브넬과 회담을 통해 평화로운 방법으로 통일하려 했을 때 요압이 자신의 입지를 생각하여 아브넬을 속여서 살해했습니다 (3:27). 또 다윗 왕이 압살롬 난으로 대치했을 때도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했는데 자신의 정치적 소신에 의해 죽이고 말았습니다 (18:14-15). 뿐만 아니라 다윗이 압살롬으로 인해 심히 고통스러워 할 때 찾아와 압살롬의 난을 진압한 군사들을 위로해 주지 않으면 모두 왕을 떠나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상당히 상했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다시 환궁하려 할 때 압살롬을 따르던 군사와 백성들을 끌어 안으려는 목적과 요압을 견제는 목적에서 압살롬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다윗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는데 있어서 아마사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약속도 지키고, 요압을 견제시키는 역할도 하게 할겸 세바 진압을 그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위기 의식을 느낀 요압은 정적을 없애고 2인자 위치를 굳히기 위해 다윗이 세운 아마사를 살해하고 만 것입니다. 다윗은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사건으로 요압에 대한 마음이 더욱 부정적으로 굳어집니다. 그래서 다윗이 임종할 때에 아마사 죽인 사건을 들어 요압을 죽일 것을 유언하게 되고(왕상2:5) 결국 요압은 브나야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왕상2:34).
언제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됩니다 (마26:52). 완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지위를 지키려는 자는 완력에 의해 제거될 날이 오고 맙니다. 결국 세상적 욕망이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 목적을 이루려 하고 그 목적을 이루려 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못하게 됩니다.
3. 세바 난의 진압 (14~26)
세바는 다윗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 북부에 위치한 아벨 (Abel)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한편 국민병을 모집한 아마사를 죽인 요압은 아비새와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아벨 성을 에워 쌌습니다. 그리고 아벨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해자 언덕 (성 주변에 방어용으로 만들어 놓은 참호) 위에 토성(土城)을 쌓았습니다. 성벽 앞에 토성을 쌓는 것은 고대 전쟁에서 성내에서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동시에 성을 공격해 들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요압이 토성을 쌓고 쳐서 무너뜨리려고 했다는 것은 아벨 성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15절).
그 때에 아벨 성에 사는 한 지혜로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요압 군대가 세바 군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아벨 성이 함락될 것을 알았습니다. 아벨 성이 함락되면 성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벨 성을 구하고 성읍 백성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요압과 대화를 청하고 요압과 협상을 합니다. 요압이 대화에 응하자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18-19절). 옛부터 아벨 성은 지혜로운 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분쟁을 많이 해결해 주는 어머니 같은 성인데 어찌 성을 공격하기 전에 상의하여 화해를 시도하지도 않고 전면적으로 공격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20:10-15).
그 여인의 말을 들은 요압은 납득하여 세바를 잡기 위해 성읍을 공격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세바만 내어 놓는다면 공격하지 않겠다고 답합니다. 여인은 지혜로 곧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게 되고 성읍 사람들은 세바를 죽여 머리를 요압에게 던지게 됩니다. 요압은 세바가 죽었으니 나팔을 불어 국민병을 해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윗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은 세바의 난이 진압되자 행정 조직을 재정비하게 되고 요압을 다시 군대장관으로 임명합니다.
아벨 성읍의 지혜로운 한 여인이 위기에서 성읍 전체를 살리고 성읍 백성들을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을 전도서9:13-16의 배경으로 보기도 합니다. 전도서9:13-16에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몰살 당할 위기에 처한 가정을 살린 지혜로운 아비가일에 못지 않은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삼상25:23-31).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고 왕권을 확립하려는 순간 세바의 난이 일어나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다윗의 왕권은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여 하나님이 징계하는 가운데서도 그와 맺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 그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시련은 있을지라도 결코 패망하지 않습니다.
세바의 반역
임병익목사 / 삼하 20:1-26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전쟁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 중에는 민란이란 것이 또한 있습니다. 고대 전제 군주국가에서는 민란을 무조건 왕에 대한 반역행위로 물아 엄히 다스려왔지만, 역사기의 공정한 평가로 볼 때 그것은 왕권의 청포에 대한 민중의 봉기로써 이를 민주회복의 민권운동이라고 보아 오히려 높이 평가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본장은 이른 바 세바의 반란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바의 난의 경우, 그 성격상으로는 민란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를 순수한 민권운동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반란 주동자가 베냐민 족에 속하는 난류에 불과하였으며, 그가 정세판단을 잘못하여 다윗의 정부환도에 따르는 유대와 이스라엘간에 감정의 불일치한 기회를 이용하여 다윗 정부를 도괴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야욕에서 유발시킨 것으로, 말하자면 다윗 왕권에 대한 반역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바의 난이란 곧 압살롬의 딘 평정 후 전후처리상 차질의 기회를 틈타 야기되었던 또 하나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이 반란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또한 신임 사령관인 아마사를 잃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이로 말미암아 남북분열이 편 원인을 형성하는 결과를 빚어냈던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은 또 다른 베냐민 사람인 세바의 영도 아래 공개적인 반역으로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군의 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신임하여 유다 사람들을 이끌어 요단을 건널 때 자기를 맞으러 모여 들었던 세바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격케 하였습니다. 아마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살아있는 원한 때문에 일부러 요압을 무시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요압과 아비새는 아마사가 세바를 추격하는 일에 더딘 것을 보고 다윗의 고용병과 함께 아마사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요압은 반역적으로 아마사를 베고 맹렬히 추격을 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의 성읍에서 세바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때 그 성에 살고 있는 지혜있는 여인이 개입하여 성벽 위에서 요압과 담화하면서 만일 그 성읍이 무사하기만 한다면 세바의 머리를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바 때문에 곤경에 빠진 주민들은 반역자를 처단하고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부터 요압에게 내던졌습니다. 이리하여 그 성읍은 포위가 풀리었고 세바의 모반은 좌절되었습니다.
1. 세바의 반란의 원인(1-3절)
다윗이 예루살렘에 환도하는 일에 유다 지파가 솔선하였습니다(19:14). 이 때문에 이스라엘 열 지파는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19:41-43). 이것을 틈타서 세바가 다윗에게 대하여 반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일은 이런 가운데서도 형통합니다. 다윗의 군대는 세바의 무리를 진압시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난 평정 후 다윗 정부의 환도를 계기로 이를 환영하려는 두개의 계열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족과 유대 족이었습니다. 북방의 왕대한 판도에 산거하는 열 지파를 포옹하는 이스라엘이 선수를 써서 환영준비를 서둘고 있을 때, 다윗은 자신의 출신 지파인 유대가 잠잠함을 보고는 제사장들을 선동하여 왕으로서의 자신의 환도를 환영하도록 주선한 후 이스라엘 족을 전혀 무시한 체 유다 지파만의 단독적인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베냐민 족에 속하는 세바란 자가 분노한 군중들을 선동하여서 이른 바 세바의 반란을 일으켜 다윗 정부에 대하여 정면으로 딴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세바가 전 왕 사울의 출신족인만큼 사을 왕 실각 이래 다윗과 그의 정부에 대하여 오래도록 반감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유대 족으로 하여금 환영의 기선을 잡게하려는 다윗의 계획 때문에 일종의 소외감을 느낀 민중들의 분노의 기회를 틈타서 봉기한 것은 극히 지능적이라 할만합니다. 그러므로 세바의 난의 발생원인을 전적으로 다윗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책임상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수습대책(4-13절)
급보를 접한 다윗은 서둘러 수습대책으로 반란토벌 대장에 군사령관 아마사를 임명하여 3개월내로 모병를 끝내고 반란을 진압하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모병차 나간 아마사가 이유도 없이 정한 기간 내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으므로 다윗은 장군 아비새에게 반란 토벌대장을 경질 발령하였고, 아마사를 대신하여 요압 휘하의 전 장병들과 기타 모든 용사들을 인솔하고 기브온까지 진군했는데 거기서 모병길에서 돌아오는 아마사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요압은 아비새와 같이 세바 반란 토벌 전에 출전 중이었습니다. 요압은 새로 임명된 아마사 장군과 인사를 나누는 척하면서 아마사의 급소를 찔러 즉사케 하고는 자신이 친히 정부군을 인솔하여 세바를 추격하였던 것입니다. 아마사 장군의 참상은 요압의 시기와 질투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군대 내부의 군기가 문란해진 사실을 보게 되는데, 여하튼 지휘봉은 또 다시 요압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요압 장군 지휘하의정부군은 단숨에 벨마가 아벨까지 진격하여 드디어 세바가 은거하는 성을 포위하고 성벽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마침 그 성에 사는 한 지혜로운 여인이 출현하여 요압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자 이에 요합 장군은 우선 스스로가 침략군이 아님을 설명하고 뒤이어 반란군 두목 세바를 잡으려는 것이라고 공격하는 이유를 전하자,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자신이 세바의 목을 잘라 양도할 조건으로 성벽파괴를 일단 중지할 것을 요구하여서 상호간에 이를 약속한 후 즉시 그 여인은 반란군 두목인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목을 베어 성벽 위에서 그 머리를 내어던졌습니다.
이에 요압은 전투 종결의 신호나팔을 불고 군대를 철수하여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였습니다. 일방 다윗은 이번 세바의 난을 평정함에 있어서 역시 우수한 정치력과 명장의 솜씨를 발휘하였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세바의 딘의 진압을 서두른 이유는 비록 그것이 압살롬의 난 보다는 그 규모에 있어서 작았지만, 성격상으로는 더욱 악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압살롬의 난 역시 반란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그것이 성공했을 경우는 정권이 교체되는 것으로 끝나는 성질의 것이지만, 세바의 난의 경우는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할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정확한 정세 판단을 하였기에 가급적 단시일 내의 평정 방침을 세우고 이를 즉각 진압시켰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다윗의 통일 왕국은 솔로몬대까지 지속되어 영화의 꽃을 피웠지만 마침내 르호보암대에 가서는 3대만에 남북을 분열시키고야 말았으니, 이 사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왕들의 범죄의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세바의 난입니다. 실로 죄란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시간적으로 성장하고 공간적으로 팽창하기 마련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아비의 죄가 3, 4대까지 미친다”는 계명의 말씀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야고보의 죄과의 타당성을 옳게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3. 반란의 결과와 교훈(14-22절) 세바의 반란을 쉽게 진압한 것은 아벨 성에 있던 한 여인의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대중을 구원하기 위한 담력 그는 군인들에게 자기의 말을 들어보라고 출선하면서 간곡한 대화를 청하였습니다(16-17절). 이것은 대중을 살리려는 사랑에 불타서 담대해진 자의 지혜입니다.
(2) 역사적인 성을 진멸하려고 침공함에 대한 항거 그는 아벨 성이 옛적부터 “어미같은 성”인데 무슨 이유로 이 성을 멸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를 원하였고, 또 평화로운 해결방법을 찾지 않는 정부군의 과오를 지적하였습니다(18-19절). 이것은 그들이 신 20:10에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든지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고 한 계시된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았으므로 받은 책망입니다.
(3) 불의한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 온 성을 무사하게 한 지혜 그녀는 성읍 사람들을 설득시켜 세바를 죽이도록 하였습니다(21-22절). 대중을 설득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녀가 말할 때에는 그 시점에서 붙잡아야 할 의가 무엇인지 밝혔을 것입니다. 그녀는 다윗을 배반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최후에는 의가 이긴다고 확신하는 자는 담대해지는 법이고, 마음이 평안해져서 마땅히 행할 일을 바로 제시하게 됩니다. 잠 14:1에 “지혜로운 여인은 집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여하튼 요압은 세바의 난 토벌전에도 역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다윗 정부의 공신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지혜로운 여인의 도움으로 반란군 두목 세바의 목을 받아 들고는 일단 전투를 끝내고 대량 살해를 피한 전술은 역시 우직한 그로서 지혜로운 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비록 요압의 흉검은 아마사 외 몇 사람의 장군을 살해하기는 하였으나 그도 역시 하나를 희생하여서 대량 살륙의 참상을 피할만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역시 무관으로서의 요압의 칭찬받을만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바의 난의 경우에서도 가장 원칙적인 죄는 역시 다윗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유대 족속만을 편중한 그의 경솔한 행동이 아마사 장군을 죽게 하였고, 요압을 살인자로 만들고, 세바의 목을 베는 유혈참극을 빚어내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그릇된 판단의 결과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 하더라도 그도 역시 인간이므로 그의 성격상 결함도 있고, 그의 왕국 역시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4. 다윗 정부의 최고 지도자들(23-26절)
23절에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레셋 사람의 장관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일설에 그렛 사람은 블레셋 남쪽에서 온 용사들이고, 블렛 사람은 블레셋에서 귀화한 용사들을 가리킵니다. 브나야는 이들을 다스리는 장관이 되었습니다. 24-26절에 “아도람은 감역관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감역은 세금을 의미하므로, 감역관은 세관장으로 생각됩니다. 사관은 수상 혹은 총리를 의미하고, 서기관은 기록하는 관리를 의미하고, 대신은 비서관을 의미합니다. 다윗 정부의 각료 명단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감역관이 있는데 세금도 걷으며 토목공사를 책임도 지고 백성을 동원시켜 노동을 감역케 합니다. 이것은 다윗 왕국의 왕권 확립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한편 전쟁으로 말미암은 폐허된 경제, 건설을 회복하기 위해 무거운 조세와 가혹한 노동을 부과키 위해 설치된 조직이기도 합니다. 다윗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오직 그의 신앙입니다. 그의 찬란한 업적과 그의 왕국도 영화도 카 지나간 꿈에 불과하지만 오늘까지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신앙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는 그가 성공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신앙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의 가치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반역과 또 다른 죽음
이준원목사 / 삼하 20장 1~13절
어떤 어려움을 당해서 갖은 노력 끝에 그것을 간신히 극복했는데 바로 이어 또 다른 시련이 닥치는 것을 일컬어 보통 ‘산 넘어 산’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뭘 하나 해결했더니 그다음에 또 문제가 오고, 그것을 간신히 해결하니까 또 문제가 옵니다. 산 넘어 산이고 또 산 넘어 산입니다. 지금 당하는 어려움도 힘든데 그다음에 온 것이 더 어려우면 얼마나 힘듭니까?
사실 우리는 한 가지 어려움만 당해도 진이 다 빠지는데, 그 어려움을 극복한 후 곧바로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친다면 막막하고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 어려움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뭔가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힘든 상황입니까?
뭔가를 이루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만 되면 좋겠다. 내가 이것만 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니까 또 다른 것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이것만 되면 진짜 잘되겠다.’라고 했는데, 그것을 하니까 또 다른 게 있습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의 연속입니다. 단기 목표도 있지만, 진짜 목적이 아닌 것, 도구인 것이 나의 목표가 되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해결하면 또 해야 하는 게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이루고 또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이 닥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능력이겠습니까? 지혜이겠습니까? 물론 능력도 지혜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대강절 때부터 다른 말씀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다윗에 대한 말씀으로 돌아왔는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악한가?’라고 느꼈습니다. 뉴스를 보아도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무참히 살해하거나 억누를 때 그렇게 느낍니다. 잔인한 살인사건을 볼 때 인간이 어떻게 이리도 악합니까? ‘과연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마음이 중요합니다. 악한 행동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고, 선한 행동은 선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중요한데, 오늘 성경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내 마음은 어떤가?’ 하는 것을 잘 점검해보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변화시키기로 결단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세바의 반역 (1~3절)
이전 본문은 압살롬 반역 이후 압살롬이 죽자 다윗을 왕으로 복귀시키고 영접한 유다 사람들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논쟁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이니까 아무래도 유다 지파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그를 다시 모셔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불평을 토로했지만, 다윗도 그들을 유대 사람들과 화해시키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이후 새롭게 시작된 다윗 왕국에서 유다 사람들은 일종의 특권 백성이 됩니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유다 지파를 우대하는 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가 특권층이 되고 나머지 지파들은 소외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가 나중에 나뉘게 됩니다.
대화와 토론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다윗도 중재자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자, 세바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달리 이것은 다윗 왕조 내부의 권력 투쟁이 아니라, 백성들의 반 다윗 왕조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윗 왕조가 싫다. 새로운 왕조를 원한다.’라고 하는, 진짜 쿠데타입니다.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1절)
“거기에”라는 말은 요단 강가에 있는 길갈 근처에서 벌어진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 사이의 분쟁 현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무엘서는 세바라는 사람을 언급하는데, 세바도 다윗을 모셔올 때 서로 자기들이 하겠다고 논쟁을 벌이던 그 현장에서 같이 논쟁을 벌이던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서는 세바를 다양하게 묘사하는데, 먼저 그를 “불량배”로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상형을 ‘군자, 부자, 용사’(이쉬 하일)로 불렀고, 그것에 정반대되는 인물을 ‘불량배’로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그냥 ‘troublemaker’라고 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한국의 아이돌 남녀 두 명이 ‘트러블메이커’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생각하며 아름답고 좋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트러블메이커’라고 가사가 나올 때마다 ‘불량배, 불량배’라고 하면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실제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백성을 배려하지 않는 분열과 이기심의 사람(삼상 30:22), 약자를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 사람(삼상 25:25),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삼상 10:27), 종교와 율법을 이용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삼상 2:12, 신 15:9),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자고 선동하는 사람(신 13;14)이 불량배로 불린다.
사무엘서에서 세바를 불량배로 부르는 것은 다윗의 아내 중 하나인 아비가일의 원래 남편이었던 나발을 가리켜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자”라고 하는 나발 이야기(삼상 25장)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문학적 인격 살인입니다. 아예 그렇게 지정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바 이야기와 나발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다윗을 홀대한 나발이 정의로운 역사의 편이 아닌 것처럼, 다윗 왕을 거부한 세바의 행위도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 세바가 베냐민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베냐민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단 세 명에 대해서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먼저 여기 나오는 세바, 그리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 그리고 에스더의 사촌오빠로서 그녀를 키워 주었던 모르드개에 대해서만 사용된 표현입니다. 모르드개가 사울이 실패한 역사적 사명(아말렉에 대한 심판)을 완수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세바는 사울과 그 후손들처럼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거부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그는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왜 나팔을 불겠습니까? 사람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냥 ‘나를 따르라.’ 하는 것보다 나팔을 막 불면서 ‘나를 따르라.’ 하면 훨씬 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여 선동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다.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고 외치는 말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역하는 사람들의 단골 구호가 됩니다. 세바는 다윗을 ‘왕’으로 부르기를 거부하고 그저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19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왕에 대해 불만을 말하면서도 그를 왕이라고 불렀는데(19:43), 세바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시하는 겁니다.
또한 세바는 다윗 왕에게 지분이 하나만 있다고 주장한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과 반대로, 다윗에게 어떤 지분이나 유업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다윗과 자기는 어떤 언약 관계도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세바는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고 외치며, 다윗에 대한 어떤 세금도 내지 말고 부역도 거부하라고 선동합니다. 그런데 그의 선동이 성공을 거둡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2절)
여기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선동한 적이 없는가?’입니다. 선동이라고 하면 ‘나는 없지.’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부추기는 경우가 다 있습니다. 특히 이렇게 사실이 아닌 것을 부풀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는 게 없는가를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하는 겁니다.
성경은 “비그리의 아들”을 따르는 무리를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 표현합니다. 다윗을 따르는 유다 사람들은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요단까지로 범위를 국한합니다.
물론 그것의 표면적 의미는 유다 지파 사람들이 길갈 근처 요단강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다윗 왕을 호위했다는 말이지만,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표현은 원래 이스라엘을 표현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라는 표현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한국식으로 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것과 같습니다. 저 북쪽 끝에서부터 저 남쪽 끝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말은 우리식으로 하면 ‘시청에서 한강까지’ 정도가 됩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표현하던 것과 대조하여, 이제 세바의 반역으로 다윗의 통치 영역이 전국을 아우르는 게 아니라 아주 적게 줄어들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초기에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세바가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그가 왕이 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세바는 압살롬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가 왕이 되지 못했을까요? 그를 표현할 때마다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고 하는 것에 열쇠가 있습니다. 비그리는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부족 이름에 가깝습니다. “비그리의 아들”이라는 말은 ‘비그리 부족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비그리 부족은 베냐민 지파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힘이 없고 변방에 머문 사람들이음에 틀림없습니다.
함께 모인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그 자리에서 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은 그가 “비그리의 아들” 즉 비주류이자 변방 출신이기 때문이고, 그가 일으킨 반란의 동력이 점점 떨어져서 실패하게 된 이유도 그가 변방에 속해 있었으니까 중앙 정치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반짝하다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3절)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윗은 그가 궁에 남겨두고 떠났던 열 명의 후궁들을 가택 연금에 처합니다. 그들에게 음식과 생활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지만,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첩들은 죽을 때까지 생과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후궁들에 대해 한 일이 세바의 난을 서술하는 중간에 삽입된 이유가 뭡니까? 그냥 세바가 어떻게 되었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까? 빼도 큰 상관이 없는데 굳이 이 이야기가 여기 들어가 있는 것은 그 숫자에 힌트가 있습니다. 후궁의 숫자를 보십시오. 열 명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후궁들에게 한 일이 압살롬의 반란과 세바의 반역 이후에 다윗이 열 지파의 지분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에는 이런 표현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숫자라든지 언어유희를 통해 의미를 전달해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왜 여기서 후궁이 열 명이겠습니까? 왜 이스라엘 북쪽 지파들이 열 지파이겠습니까? 둘을 연결시켜서, 앞으로 다윗이 열 지파와 관계가 멀어질 것을 암시해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모든 이스라엘이 자기가 다스리는 땅이지만, 또한 북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치안과 국방과 사법적, 행정적 지원을 제공하겠지만, 그가 열 명의 후궁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이스라엘 열 지파 백성들을 형제처럼 돌보아주지 않을 것을 여기서 암시하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전처럼 온 백성에게 더 이상 ‘사랑받는’ 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가 나이 들어 힘이 약해졌을 때, 또 한 번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암시해줍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비록 큰 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아닙니까? 다윗보다 훌륭한 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아무리 인간이 훌륭해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 이렇게 불완전한 사람이 인간 중에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제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아무리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고 인간이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택도 없고 전혀 미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너무 미치지를 못해서 저 아래 보이지도 않으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게 이를 수가 없으니까, 그것이 가능해지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은 개인적으로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나발이 죽은 후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했고, 원래 아내였던 미갈이 다윗 자신의 도망자 시절에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을 때 굳이 되찾아 옵니다.
사실 법적으로 왕은 이전 왕의 후궁들을 이어받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압살롬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이전 왕의 후궁들을 이어받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다시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왕위를 되찾았을 때 빼앗겼던 후궁들을 회복하는 것도 고대사회에서는 전혀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다윗의 정치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생각해야 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아브라함, 요셉, 다윗 등등)이 정말 훌륭하지만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형편없는 모습이 너무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행동이 왜 정치적인 행위입니까? 다윗은 압살롬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실 이전에 압살롬은 사람들이 추대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과 성관계한 여자들은 절대로 왕의 여자가 될 수 없다는 관례에 따라, 다윗은 압살롬과 관계한 여인들을 자기의 여자로 다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다윗이 후궁들을 가택 연금시키고 그들과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압살롬이 한때 왕이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에서 압살롬은 쿠데타에 성공하여 왕이 된 역적이 아니라 그저 다윗에게 반역한 아들로 기억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정치적인 것들, 술수라면 술수, 방법 등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다윗도 그런 인간이었구나.’ 하고 머무는 게 아니라,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닌가?’ 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전한 화해 없이 다투면서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자고 했는데 결국 그러다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진행했을 때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 특히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대충 덮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나가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노력을 해야 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결과는 맡기지만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2. 아마사와 아비새(4~7절)
“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4-5절)
이제 다윗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얼마 전 요압을 밀어내고 군대 장관이 된 아마사를 불러서 그에게 사흘 안에 유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예루살렘에 대기하라고 명령합니다. 동원 범위가 유다 지역에 국한되기 때문에 사흘은 충분한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사는 다윗이 정한 날짜가 되어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그러자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6절)
다급해진 다윗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세바를 추격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요압이 있는데도 그를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의도적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편한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요압이 자기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도 이런 마음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요압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세바의 반역을 ‘압살롬보다 더 재앙적’인 것으로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세바의 난이 주는 위험을 과장해서 평가합니다. 압살롬에 비하면 별것 아닌데도 엄청날 것이라고 과장합니다.
압살롬이 왕으로 평가되는 것은 막았지만,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들 압살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죽인 요압을 다시 신뢰하여 높은 위치에 올려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명령할 때 ‘너’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요압이 아니라 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압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7절)
아비새가 이끄는 부대는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라고 되어 있습다. 이들은 외국 용병을 포함한 다윗의 최정예 부대를 가리킵니다. 유다 사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떠난 아마사가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으니까, 다윗은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자신의 최정예 상비군을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요압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네 주의 부하들”(6), 즉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세바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는데, 7절에서는 그것을 ‘요압의 따르는 자들’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이 표현은 요압이 이끄는 특수 부대를 말합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요압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바를 추격하는 군대의 실질적 리더가 아비새가 아니고 요압임을 암시해줍니다.
3. 아마사의 허망한 죽음 (8~14절)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8절)
아비새와 요압이 이끄는 정예 부대는 기브온에 있는 “큰 바위” 곁에서 대기합니다. 그때 아마사가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아마사는 왜 정한 날까지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까? 그리고 왜 이때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7마일 정도 떨어진 기브온 큰 바위에 나타난 겁니까? 유다 사람들을 모으려 했다면 예루살렘 남쪽의 유다 지역을 다니며 거기 있어야 하는데, 그런 그가 북쪽인 기브온에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마사가 다윗을 반역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지만, 압살롬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운 것 같지 않습니다. 삼촌 다윗이 그를 군대 장관으로 임명한 것도 며칠 전의 일입니다. 세바의 반역을 진압하라는 명령은 그의 첫 번째 임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윗을 배반할 이유가 전혀 없는 아마사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기브온에 나타났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리로 오라고 전해준 겁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이겠습니까? 요압입니다. 요압이 사람을 보내서 그리로 오라고 한 겁니다. 즉, 요압이 그에게 따로 전령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이 아닌 기브온에서 왕의 정예 부대와 합류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던 겁니다. 이전에 요압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아브넬을 거짓말으로 유인하여 헤브론으로 데리고 온 후 암살했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유였든 간에, 아마사는 다윗이 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기브온으로 옵니다. ‘기브온 큰 바위’는 다윗의 최정예 부대와 아마사 군대가 만날 만남의 장소로 미리 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기브온 큰 바위는 아마사가 별도의 메시지를 받고 예루살렘이 아닌 기브온으로 왔다는 증거가 됩니다. 요압이 사람 편에 아마사에게 ‘기브온 큰 바위 알지? 그리로 와.’라고 한 겁니다.
놀랍게도 기브온 큰 바위는 이전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그것은 2장에 기록된 기브온 전투입니다. 사울이 죽고 그 아들 이스보셋이 따로 왕이 되었을 때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무엇보다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로 여깁니다. 요압은 이에 대한 복수로 아브넬을 다윗 몰래 암살했는데, 바로 그곳으로 몰래 아바사를 불러낸 겁니다.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9-10a절)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방식은 전형적인 거짓과 배신의 암살입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내가 누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슬쩍 거짓말하며 배신한 적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마사가 요압을 신뢰하고 자신의 수염을 잡힌 것은 그가 같은 왕을 섬기는 동료이자 사촌일 뿐 아니라, 요압이 그를 그곳으로 불러낸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만났습니다.
요압은 암살을 위해 검을 보통 차는 허벅지가 아닌 허리에 찼습니다. 또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검집에 담긴 검을 옷 아래가 아닌 옷 위에 찼습니다. 요압은 아마사에게 나아갈 때 일부러 칼집을 떨어뜨립니다. 이제 칼은 칼집이 빠진 채로 요압의 허리에 둘러져 있습니다.
요압이 “내 형은 평안하냐!”라고 인사하면서 오른손으로 아사마의 수염을 잡았습니다. 오른손잡이는 칼을 오른손으로 휘두르는데, 오른손으로 수염을 잡으니까 아마사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압이 공격하려 했다면 왼손으로 수염을 잡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공격할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칼이 허벅지가 아닌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빼서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마사는 요압의 왼쪽에 있는 검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요압은 아마사의 복부를 칼로 찔렀고, 내장이 밖으로 나온 아마사는 즉사했습니다. 두 번 찌를 필요도 없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요압의 칼 솜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압이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가를 말해줍니다.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전혀 치지 않고 있다가 시합에 나가면 어떻게 잘할 수 있겠습니까? 연습을 많이 하고 나가도 잘할까 말까 한데, 연습을 안 하면 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압은 왼손으로 찌르려고 하니까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겠습니까?
이 장면을 종합해보면, 요압이 허리에서 칼을 뽑지 않고 단지 칼끝을 아마사 방향으로 향해 찔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검은 긴 것이 아니라, 단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가까이서 찔러야 합니다. 끄래서 인사하는 척하며 허리에 찬 채로 그대로 찌르는 연습을 엄청나게 한 겁니다. 굉장한 노력을 한 것은 좋은데, 악한 노력이었습니다.
이전에 아브넬을 죽일 때도 거짓으로 전령을 보내어 돌아오게 해서 ‘배’를 찔러 죽였고, 지금도 거짓 전령을 통해 아마사를 기브온으로 오게 한 후 수염을 잡는 형제의 인사를 나누는 척하다가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여러분, 나쁜 일에 성공하려고 연습을 많이 하십니까?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괜찮지만, 악한 일이라면 그 연습은 과연 무슨 연습입니까?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10b절)
아마사의 암살 이후 본문은 세바 추격의 실질적 대장이 요압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사가 없어지니까 요압은 실질적으로 다윗의 군대 장관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요압이 아마사가 데리고 온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11절)
살해당한 아마사의 시체가 땅에 누워 있는데 피가 얼마나 많이 나왔겠습니까? 창자가 나올 정도로 배가 쫙 갈라진 것인데, 그것을 보는 병사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방금 전까지도 자기들의 장군이었는데 저렇게 죽어 있으니까 보고 멍하니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압의 부하 중 하나가 외칩니다. “요압이 좋은 사람은 누구든지,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든지, 요압을 따르라!” 그는 의도적으로 요압과 다윗이 한편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얼마 전 다윗이 요압을 강등시킨 것을 염두에 둔 것인데, 요압을 따르는 것이 다윗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또한 여기서 아마사가 반역자라는 뉘앙스가 그 부하의 구호에서 느껴지는데, 요압은 이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마사가 반역자라고 몰아가는 ‘프레임’을 거는 겁니다. 그런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프레임을 사용할 것을 암시해줍니다. 일단 아마사가 다윗의 명령대로 군인들을 몰고 예루살렘에 오지 않은 것이 반란 행위라는 겁니다. 그런 아마사가 죽었으니까 반란자를 처단한 것이라는 ‘프레임’을 걸었고, 그것을 변명할 수 있는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12절)
그 부하는 사람들이 서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아마사의 시체를 길에서 밭쪽으로 멀리 치웁니다. 아마사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히 도로를 적시니까 사람들이 피를 밟고 걸어가기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체를 길에서 치운 후에도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밭에 버려진 시체를 보기 위해 멈추어 서니까, 요압의 부하는 그 시체를 옷으로 덮어서 그것이 뭔지를 모르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죽은 아마사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병사들의 떨어진 사기를 다잡고 지체된 세바에 대한 추격을 재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의 종이 아마사의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은 역적의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마사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역적이라고 몰아가는 겁니다.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13절)
이때 세바는 이미 모든 이스라엘 지파 영토를 통과해 벧마아가의 아벨로 은신해 들어갔습니다. 그의 부족 비그리 사람들도 세바를 따라 아벨에 집결합니다.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녔다는 말이 있는데(14), 이것은 그가 단순히 도망 다녔다는 의미를 과장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세바가 모든 이스라엘을 돌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아직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세바는 각 지파를 돌아다니면서 일종의 ‘선거 운동’을 하고 유세를 한 겁니다. 다윗이 기약한 사흘이 지나도 아마사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아비새를 대장으로 한 추격대를 서둘러 보낸 것은 바로 이런 세바의 ‘선거 운동’ 또는 유세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사건 진행으로 볼 때 세바가 이스라엘 지파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숨어 있을 때 그 소식이 다윗 진영에 퍼졌고, 결국 거기서 그는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나가는 말]
요압은 예수님이 경고하신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라는 말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칼을 잘 써서 온 이스라엘의 군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적 분노와 질투를 해결하고자 여러 사람을 칼로 죽였습니다. 요압은 칼로써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압에게 칼은 성공을 보장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결국 칼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왕상 2:34).
요압에게는 칼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무엇입니까?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될 수 있고,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될 수 있고, 학자에게는 학문이 될 수 있습니다. 칼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일 때 악한 도구가 됩니다. 돈이든 학문이든 사회적 위치이든, 그 자체로는 괜찮지만 잘못 사용할 때 악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를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주어진 도구로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을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요압이 자기 칼을 잘못 사용한 것은 결국 자기 마음의 죄악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칼이 문제가 아니라, 요압의 마음속에 있던 분노, 경쟁, 시기, 질투, 미움, 교만, 폭력 같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도구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겉으로 우리가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지만, 속으로는 ‘두고 보자.’라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으로는 “잘 지내시죠?”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너는 내가 죽인다.’라고 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겉을 보십니까, 속을 보십니까? 물론 둘 다 보십니다. 특히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행동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도구가 많으면 뭐 하겠습니까? 악하게 사용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내가 가진 도구는 무엇인가? 나에게 지금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선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늘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삶 공부를 하며,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몸을 가꾸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마음을 가꾸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적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로서 세상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성공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반 은총
양인국목사 / 삼하20:1-26.
1.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도록 허락 주신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배려와 상식과 지혜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런 수단들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르는데, 이 은총들은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준다. 그러므로 일반은총이 존중되는 곳마다 사람들은 더불어 복된 삶을 살지만, 이 은총들이 무시되는 곳에는 삶이 황폐해간다.
2. 배려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일반 은총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배려함의 유무에 따라서 공동체 또는 사회의 모습이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과정 가운데 일어난 일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압살롬으로 인한 반란이 진압된 후에 이스라엘 가운데 사소한 일로 인하여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중심인물은 불량배 세바였다. 이 사건의 발단(發端)은 유다지파의 이기적인 마음으로부터 나왔다. 물론 여기 이기적인 마음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함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실제로 유다 지파는 다른 지파 사람들을 배제하고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일을 자신들만 주관하려고 했고, 이로 인하여 다른 지파 사람들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이때 세바의 부추김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19:41-43).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공동체의 하나 됨은 배려함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이 사건의 발단은 유다와 다른 지파들이 서로에 대하여 배려함을 갖지 못함으로 인하여 온 것이었다.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하여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다지파의 사람들은 다윗이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일을 자신들이 주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또한 다른 지파 사람들은 다윗이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이기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왕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일은 모든 지파가 참여해야 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이처럼 각각의 생각이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의 생각을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 중요한 교훈은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문제들은 정당성의 결여로 인하여 오기보다 배려함의 결여로 인하여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문제들의 대부분은 서로에 대한 배려함이 있을 때 해결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 배려함이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유익을 구해주려는 마음과 현재의 이해관계에 대한 유불리(有不利)보다는 모두가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유다지파가 다른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왕의 귀환에 참여했다면, 마찬가지고 다른 지파들에 속한 사람들이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로 하여금 왕의 귀환에 주도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더라면 이스라엘 가운데 또 다시 반역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평화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이 직면한 본질적인 과제는 어느 지파가 왕의 귀환에 주도적인 일을 하느냐에 있지 않았고 반역으로 인하여 분열된 이스라엘을 치유하여 이스라엘을 복된 나라로 세우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모두가 지금 이스라엘이 직면한 본질적인 현실을 보았더라면 어느지파가 왕의 귀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느냐는 문제는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본질적인 것을 충분히 양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려함은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본질적인이 무엇인지 알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일반은총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상식이다. 이것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그 공동체에서 상식으로 인정되는 것을 행할 때 공동체는 세워지지만 이것을 떠난다면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한 후 왕국을 안정시키는 일에서 상식을 벗어남으로 오히려 문제를 일으켰다. 다윗은 세바의 반역을 속히 진압하기 위하여 아마샤를 군대의 총 지휘관으로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의 군사들에게 상식 밖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의 군사를 총지휘했던 지휘관은 요압이었기 때문이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를 오랫동안 지휘해 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압살롬의 반역 시(時) 다윗의 편에서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한 자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군대 총지휘관으로서 그의 권위는 모든 군사들에게 인정되었다. 그러나 아마샤는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자였다. 그런데 다윗은 세바의 반역을 평정하기 위하여 군대의 총 지휘관을 세울 때 요압을 배제하고 오히려 압살롬의 편에서 그에게 속한 군사들을 총지휘하던 아마샤를 세웠다. 물론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윗은 전쟁으로 인하여 흩어진 압살롬에게 속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 되게 하도록 하려는 일에 가장 적합한자를 아마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에게 속하여 압살롬과 싸웠던 군사들 가운데 누구도 이와 같은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윗의 이와 같은 행위는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사는 다윗이 명한대로 기한 내에 군대를 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세바의 반역을 평정하는 일에도 지체되었다. 이것은 다윗이 처음 의도한 것에 대하여 차질이 빚어졌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아비새에게 지휘권을 주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비새가 세바를 향해 가는 동안 아마사를 만났고 이때 아비새와 함께 하던 요압이 아마샤를 살해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또 한 번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 사건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에서 벗어났을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상식에 따라 행할 것이고,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지만 그 일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이해시켜서 그 일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한 공동체는 상식 안에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식에 따라 행할 때 공동체는 세워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일반 은총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혜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세바의 반역으로 인하여 한 성읍이 전멸할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한 여인의 지혜로 인하여 그 성읍이 구원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14절의 말씀이다.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세바가 다윗에게 반역하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다윗의 군사들이 반역을 평정하기 위하여 이 성읍을 둘러싸았다. 이것은 그 성읍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때 그 성읍에 살고 있던 한 여인이 요압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20:18,19)” 여인의 물음에 대하여 요압은 이렇게 대답했다.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20:20)” 여인은 요압의 대답을 듣고 성읍으로 돌아가서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보내었고 요압은 약속대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아갔다. 이처럼 한 여인의 지혜로 인하여 성읍의 모든 사람이 위기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인이라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여인은 약자였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여인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연약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고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는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실제로 지혜로운 여인은 많은 군사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 이것은 힘보다 지혜가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공동체가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지혜로운 사람의 부재로 인하여 공동체가 무너진 예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사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비류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용납할 수 없는 죄를 범했을 때 이스라엘 총회는 그들의 죄를 묻기 위하여 베냐민 지파에게 가서 그들을 넘겨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범죄한 비류들이 자기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이스라엘 총회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양측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을 내었다. 물론 베냐민지파는 이 전쟁으로 인하여 지파 자체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였다(삿19-21장). 이처럼 지혜자의 유무는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반 은총들 가운데 세가지를 마음에 새기자. 그것들은 배려함, 상식, 지혜이다. 정당성보다 배려함이, 특별한 생각보다 상식이 그리고 군사의 힘보다 지혜가 언제나 더 아름답고 위대한 일들을 이룬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를 통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다 더 아름답게 변화 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모든 사람의 복된 삶을 위하여 허락해 주신 일반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더불어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요압의 아마사 살해
삼하 20:4-13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유다군의 출병과 요압의 아마사 살해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4-5절에, 다윗은 아마사에게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일이 지체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다 지파 사람들을 소집할 책임을 아마사에게 맡겼는데, 그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다윗 왕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은 그에게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이전에 압살롬의 군지휘관으로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도 적은 수의 다윗 군대와 싸워 참패를 당했던 것으로도 확인이 됩니다. 그리고 다윗을 배신했었으니 의리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일을 다 아는 유다 지파 사람들이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사보다는 다윗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통해 아마사의 의리 없음과 무능을 충분하게 알게 되었음에도 그를 군지휘관에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아마사를 군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은, 의롭고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는 요압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다지기 위한 인간적인 방편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적합한 인물을 중책에 임명하는 불공정한 인사 정책을 쓴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지체시켰을 뿐 아니라, 이후 요압의 아마사 살해라는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공적인 일에 개인의 사심이 작용하면 부작용이 일어나게 됨을 교훈받습니다. 오직 공명정대한 일 처리만이 모든 일을 순조롭게 해결해 나가는 첩경이 됩니다. 공정하게 행하고 원칙과 정도를 지키는 것이 때로는 답답하고 느려 보일지라도 결국 그 길이야말로 가장 빠른 첩경이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길을 걷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편법과 불법적인 수단을 선택하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정의, 공명정대를 말하지만, 막상 그러한 지름길이 제시되면 눈 딱 감고 따르는 것이 이 시대의 세태입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지름길은 오늘 본문의 경우처럼 처음에는 지혜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문제가 발생하고 손해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주어진 권한을 공명정대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앞으로 주어진 모든 권한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를 결단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6절에,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네 주의 부하’란 ‘다윗의 호위병’을 뜻합니다. 다윗은 세바의 반란이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된 지파 간의 다툼과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그 위험성이 개인적 감정에서 비롯된 압살롬의 반란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세바의 반란을 신속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호위병까지 대동하여 최대한 신속하게 세바의 반란에 대응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위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흔드는 고난과 염려와 근심된 일들은 그것들의 영향을 빠르게 인지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금세 어찌할 수 없는 문제로 눈덩이처럼 커져 버립니다. 작은 갈등이라도 그것을 무시하고 내버려 두면 얼마 가지 않아서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로 발전이 됩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위에 깨어지는 가정들도 그 내막을 살펴보면 별거 아닌 작은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친구들의 우정도, 직장 생활도, 사업운영도 다 아주 작은 일을 소홀히 대함으로, 후에 그 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져서 깨져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육체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질병도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완치율이 100%에 가깝지만, 이를 방치하면 작은 병일지라도 치료할 수 없는 경우로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의 유혹도 작은 것이라고 해서 방치하면 누룩처럼 삽시간에 번져 결국 큰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특히, 이 모든 문제들의 근원이 되는 죄 문제는 더욱 세심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을 작은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는 괜찮다”라고 할지라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작은 죄라도 조심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혹, 죄를 범했을 때는 신속하게 회개하고 같은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열매들인 사회생활, 인간관계와 건강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그 문제가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근심과 걱정이 해결되고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매우 작은 죄라도, 평소 인지하지 못했던 매우 작은 갈등이라도, 마음 깊은 구석에 작은 흔적으로 남아 있는 미움과 분노라도 오늘 완전하게 제거하시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이루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8-10절까지는 요압의 아마사 살해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요압은 먼저, 허리에 찬 칼을 떨어뜨려 아마사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입 맞추는 척하며 긴장을 풀게 한 후, 왼손에 숨겨 들고 있던 칼로 그의 배를 찔러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 말았습니다.
9절의 ‘수염을 잡았다’라는 말은 당시의 인사법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옹하며 입맞춤으로써 친근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보통 수염을 기르고 있었기에 입 맞출 때 수염이 방해되어 수염을 잡아 옆으로 제쳤습니다. 아마사는 이때 요압이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잡고 포옹하며 입맞추었기에 요압의 왼손에 있는 칼을 볼 수 없었고 요압은 이를 틈 타 아마사를 간단하게 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압은 마음속에 악한 흉계를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가장 다정한 모습으로 아마사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압이 마치 ‘사도 바울에게 있던 가시’처럼 다윗의 일생동안 최측근으로 붙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탄이 얼마나 능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8:44에 사탄을 가리켜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합니다. 또, 고린도후서 11:14-15절에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사탄은 성도들 앞에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든지 자신을 대적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자하고 선량한 모습을 하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그럴듯하게 유혹합니다.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사탄의 정체를 간파하고 그 흉계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을 갖추어야 합니다(삼상 16:7).
여러분, 이 시대는 거짓 선지자들과 미혹의 영들로 인해 불법이 성행하고 영적인 혼란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대에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복음을 지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혼돈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과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 사탄의 흉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하루아침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처럼, 신약의 제자들처럼 오랫동안 훈련하고 단련해야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일을 위해 더욱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입으로는 정의, 공명정대를 말하다가도 막상 자신에게 큰 이익이 되면 가차없이 불의조차 행하는 것이 사람의 부패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극복하지 못해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작은 죄라도 깨끗하게 회개하고 믿음의 선한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러한 삶이 마음의 결단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과 연단에 의해서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고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선한 행실로 무장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윗의 정실과 실수
삼하 20:4-10 / skd1
사무엘하 20장 4-10절은 다윗의 리더십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이 사건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내린 결정과 그로 인해 벌어진 파란만장한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가지 소주제—아마사를 등용하다, 아비새를 세우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임—을 중심으로 다윗의 선택과 실수를 살펴보겠습니다.신학 및 종교 연구
1. 아마사를 등용하다
정치적 화합을 위한 선택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에게 군대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삼하 20:4-5). 아마사는 압살롬의 반란 당시 반군의 군대장관이었던 인물로, 다윗에게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용서하고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관용이 아니라, 분열된 왕국을 통합하려는 정치적 전략이었습니다. 다윗은 과거의 적을 포용함으로써 화합과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의 의도
이 결정은 다윗의 관용과 통합 의지를 잘 드러냅니다. 그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보복을 넘어, 왕국 전체의 안정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는 리더로서 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마사가 군대를 제시간에 소집하지 못하면서, 이 선택은 이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2. 아비새를 세우다
아마사가 다윗이 정한 기한 내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자(삼하 20:5), 다윗은 신속히 아비새를 대신 세웁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오랜 충신이자 요압의 형제로, 전투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다윗은 반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 상황의 긴급성을 인식하고, 실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비새의 임명은 다윗이 신뢰하는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사례입니다. 그는 아마사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임무 실패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리더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상황에 맞는 결단을 내려야 함을 보여줍니다.
3. 요압이 아마사를 죽임
가장 극적인 사건은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하는 장면입니다(삼하 20:8-10). 요압은 원래 다윗의 군대장관이었으나, 아마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자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다윗의 명령을 따르는 척하며 아마사를 속이고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후 요압은 아무렇지 않게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습니다. 이는 요압의 야심과 권력욕, 그리고 충성심과 배신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성격을 드러냅니다.
다윗의 한계
이 사건은 다윗의 통제력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충성하면서도 그의 의도를 방해하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고, 이는 리더십의 취약성을 나타냅니다. 훗날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처벌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그를 경계했지만, 당시에는 상황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결론: 다윗의 정실과 실수에서 배운 교훈
사무엘하 20장 4-10절은 다윗의 리더십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화합의 노력: 아마사를 등용한 것은 화합을 위한 용감한 선택이었지만, 그 결과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결단의 중요성: 아비새를 세운 결정은 리더가 긴급 상황에서 신속히 행동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인간관계의 복잡성: 요압의 배신은 리더가 주변 인물들의 동기를 파악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다윗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의 선택과 실수는 우리에게 리더십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용서와 결단,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지혜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하나됨을 추구하자
삼하 20:4-13 / leeapostle
다윗왕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아마사에게 유다사람들을 불러 모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마사는 유다 사람들을 모으라는 명령을 정한 기한내에 완수하지 못한다.
그러자 다윗은 아비새에게 세바의 난을 제압할 것을 명령한다.
그 안에는 요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아마사를 보자 칼로 찔러서 죽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요압을 따라 세바의 난을 진압하러 간다.
본문 속 상황들이 너무나 얽히고 설혀있는듯 보여서 조금은 어지럽다.
다윗 왕은 왜 아마사를 최고 사령관으로 세우려고 했는지...
또 왜 아마사를 대신해 보내는 최고사령관이 요압이 아니라 아비새였는지...
그리고 그렇게 가는 무리들 가운데 아비새는 형의 잘못된 행동을 왜 보고만 있는지...
또 갑자기 등장한 요압의 청년은 무슨 충심으로 요압을 돕는 것인지...
참 마음이 어려운 큐티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됨이 깨진게 외부뿐 아니라 내부까지 깊숙히 침투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일까...? 아마사를 최고 사령관으로 세운것이 자신의 입지 다지기를 좋아하는 요압에게 위협이 된것일까...?
더 깊은 이유는 잘 마음에 묵상되지 않는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어제 보였던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 본문에서 재연되고 있는 느낌이다.
하나됨을 깬 세바의 난을 제압하러 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내부에서 하나됨이 깨어진 모습이 참 마음이 아프다.
오늘 체육대회를 앞두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됨을 추구하라는 의미에서 이런 큐티를 주신 것 같다.
함께하는 많은 청년들이 있는데 나는 제일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지만 그런 것들을 내세우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기꺼이 섬기는 자가 되자.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품인 하나됨을 온전히 드러내고 실천하는 하루가 되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십시오
삼하 20:4-13 / 구례제자교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다윗이 길갈에 이르렀을 때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석하지 못한 유다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의 불평이 있었습니다. 이 불평은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다윗을 위해 일하였다는 명분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이 일로 양쪽이 다툼이 생겼고 결국에는 세바의 선동에 다른 지파들은 다윗에게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윗은 압살롬의 편에서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사에게 3일 내로 유다사람을 모아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마사는 다윗이 명령한 기일이 지나도록 다윗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아비새에게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비새는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랏사람과 블렛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을 이끌고 세바를 뒤쫓았습니다.
다윗에게 속한 모든 용사들이 세바를 추격하고 있을 때에 아마사가 기브온 큰 바위 곁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압은 아마사에게 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그의 칼로 아마사를 찔러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큰길에 버렸습니다. 버려진 시신은 그 어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사의 죽음에 사람들이 이렇게 무관심한 것은 아마사가 압살롬의 편에 속하여 그의 군대장관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사의 시신은 한 청년의 옷에 덮여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군사들은 요압을 따라 세바를 추격하였습니다.
다윗에게 군대장관으로 세워질 것을 약속받은 아마사는 요압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의 죽음에서도 있었습니다. 요압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르고 또한 다윗에게 용납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심판이 없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모든 일에 대한 심판을 솔로몬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결국 요압은 자신이 흘린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오늘 불의한 자가 성공해 보인다고 실망하지 말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배제가 낳은 폭력
삼하 20:1-13 / agaape
1, 세바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선동했습니까?
2, 요압은 어떻게 아마사를 죽였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했습니까?
1, 세바의 반란과 후궁처리(1-3)
베냐민 사람 불량배 세바가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니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는 말로 이스라엘이 반역하도록 충동질 했습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이 다윗을 떠나 세바를 따랐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후궁을 다 잡아 별실에 가두고 생과부로 지내게 했습니다.
2, 아마사의 실패와 죽음(4-13)
왕이 압살롬을 따르던 아마사에게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라고 명합니다. 아마사가 정한 기일에 지체되매 다윗이 요압의 동생 아비새를 세워 세바의 반란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기브온 큰 바위 곁에서 아마사가 맞으러 나오니 요압이 입을 맞추려는 체하며 칼로 그의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세바는 왜 배신에 앞장 섰으며, 다윗이 요압을 배제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먼저, 자기에게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 신의가 배신으로 바뀌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세바는 이스라엘을 충동하여 다윗에게 반역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정치적 지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미련없이 다윗에게서 돌아 섭니다. 세바는 그들의 속 마음을 부추긴 인물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왕’ 다윗이 금새 ‘이새의 아들’ 다윗이 됩니다. 내게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 칭찬은 무시로 변하고, 신의는 배신으로 바뀝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셔도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왕이십니까? 받을 것이 없어도 그 곁을 지키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까?
다음, 다윗의 관심에서 배제된 요압이 아마사를 제거합니다.
아마사는 신의도 없고 충성스럽지도 않은 신하입니다. 본래 압살롬을 따르던 그는 지휘관을 삼겠다는 다윗의 말에 주저 없이 주인을 바꿉니다. 주인을 바꾸는 일에는 빠르고,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일에는 느립니다. 사욕을 채우는 일에는 신속하지만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는 더딘 신하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충성된 종의 기개가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라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순종하는 종입니까? 3절에 다윗은 압살롬과 동침한 후궁들을 가두고 평생 생과부로 살게 합니다. 왕의 명령을 따르다가 봉변을 당한 이들을 포용하기보다 철저히 배제합니다. 처형보다 더 잔인한 처벌입니다. 6절에 요압에 대한 배제는 더욱 치명적입니다. 아마사가 나타나지 않자, 다윗은 요압이 아닌 아비새를 불러 세바의 뒤를 쫒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관심에서 제거된 요압이 아마사를 제거합니다. 요압의 아마사 살해 사건은 다윗의 배제가 불러온 비극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를 빼앗기거나 공동체의 관심에서 제외된 이들이 있습니까? 그들의 상처나 분노가 폭력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도울 일은 무엇일까요? 7-13절에 요압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사적인 복수를 시도합니다. 왕의 명령에 앞서 아마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먼저 실행에 옮깁니다. 적군과 싸워야 할 상황에서 비열한 방법으로 아군을 죽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보다 내 사적인 욕심에 이끌리는 것은 아닐까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놔두고 우리끼리 다투고 있다면, 좋아할 이는 누구이고 슬퍼할 이는 누구일까요?
기도: 주님! 제가 예수님을 언제나 저의 왕으로 모시고 충성하게 하시고, 사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배제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도우소서!
지혜로운 여인
삼하 20:14-19 / 우리교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의미는 성경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을 둘러싼 검은 기운들을 계시로 인하여 인간쪽으로 집중되도록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극도로 민감한 반감을 갖게 됩니다.
‘복음에 대항하는 피조물’로 만들어내므로서 그 실존 배후에 주목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악은 곧 ‘여자의 후손’과 최후의 전쟁을 책임지는 숨어있는 책임자로서 그동안 숨어서 활약해 왔음을 역사 전면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 위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은 진정한 선과 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계속 오해받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여인이 쳐다보는 것과 요압이 쳐다보다는 것이 상호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결과에 있어서는 마치 원하는 바가 같은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전쟁’에 있어 일치되지 않는 의도들이 현실에서는 같은 승리로 인식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아벨성에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을 살리기 위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 앞에 던집니다.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이 여인에게 주신 기업은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과 관련된 일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는 전쟁이 있음도 아울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원칙은 흔히들 ‘산다’라는 말에도 해당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산다’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겁니까?
이 하늘 높은 가을날에 진정 ‘산다’는 것이 어떤 경우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성묘하고 벌초하고 등산가고 주말에 산과 들에서 가을의 정취를 맛보고, 농부들은 가을 추수에 분주하고, 수험생들은 시험에 대비해서 그동안 익혔던 내용들을 다시금 집중해서 총정리하는 급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 ‘산다’에 해당되는 경우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세속적인 삶도 역시 ‘전쟁’이라는 양상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지 않는 자들도 있음을 발췌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름모를 여인에게 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로 주셨다는 그 사실을 지워버리는 그 어떤 것들과의 밀릴 수 없다는 긴장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목숨 지키는 긴장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지켜야 하는 긴장감 말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늘 ‘하나님께서 그저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납니다. 세상을 상식선에서 보자는 겁니다. 별나게 살면 피곤하다는 겁니다. 즉 너의 삶에 훼방되고 방해되고 있는 것을 내놓고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말하는 ‘삶’은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을, 은혜가 아니라 본인들의 행함으로 얻은 보상이라는 차원에서 주입된 것을 방출하는 것이 진정한 ‘삶’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든지, 율법을 지킨다든지 하는 것은 그 본래적 가치를 사수해서 잊지 않고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남기신 약속의 가치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정 ‘성도의 삶’입니다. 촌에서 사과 과수 농사를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삶’이란 바로 과수농사가 잘되고 못되고 와는 상관없이 오늘밤도 내 영혼 데려가면 모든 것이 결국 나의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런 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행함에 대해서 요압이 그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망치 세바를 잡아들이는 것이 요압의 명성을 쌓고 그것으로 인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요압 장군의 삶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유하므로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세바가 요압쪽과 그리고 이 여인이 거할 성쪽,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소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압 장군쪽에서는, 요압 본인이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권력을 넘어뜨릴 위험을 세바가 갖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그저 주심’을 인간적 소유의 대상으로 변질되게 만드는 위험을 세바가 역시 보여 줄 수가 있습니다.
요압과 여인 사이에는 세바라는 공통의 적은, 각각 양쪽에게 다 수용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세바의 죽음을 여인 쪽에서 이해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진 결과요, 요압쪽에서 이해하는 요압보다 못한 존재라는 죽어야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대외적 천명한 셈이 됩니다. 즉 요압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마치 그만큼 이 땅에서 더 오래 살 자격자가 되는 양 오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성도 자체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에 의하면 기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자신이 곧 하나님께서 거저 구원해내신 기업인 것을 나타내면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요압 꼴이 됩니다. 오로지 자신의 노고와 노력으로 자신이 이 땅에서 살 가치가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모두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투입된 것들입니다. 그 중에 제일 위험한 나쁜 요소는, ‘내 힘으로 얻었다’고 여기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세바를 치면서 요압을 동원시키신 겁니다. 이 여인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 10:17-21에 보면,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무슨 전쟁을 벌리고 있는 가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29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우리는 거기에 붙어있는 이끼같은 존재입니다. 여인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유산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유산을 말입니다.
살인을 부르는 욕심
삼하 20:8-13절 / 좋은 군사
출세를 위해 왕인 다윗을 협박하고 아브넬 죽이고 정적인 아마사까지 죽이는 요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도 감행하는 인간의 악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압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고 있으며 오직 자신의 행복과 성공만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10절에 “기록 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압의 모습은 인간 스스로에게는 행복을 위한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1. 권력욕으로 살인을 행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서 다윗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요압이 다윗의 명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임으로 인하여 다윗의 신임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마사에게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장관을 삼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삼하19:13절),
다윗은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을 소집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는 다윗이 아마사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요압은 아마사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그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아마사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계속해서 군대의 실권을 쥐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는 왕을 섬기는 신하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왕과 같이 권세를 누리려는 권력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요압의 권력욕은 다윗 왕의 명을 어기고 다윗이 신임하는 자를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도가 지나쳤던 것입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미움의 대상이 되고 결국엔 제거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께서 율법을 재해석하시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을 범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살인을 불러오는 동기가 그 마음의 악한 생각에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살인 행위를 범하지 않았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생각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약1:15절),
또한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서 섬김을 받으려 하는 인간의 본성적인 권력욕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자기 부인의 자세를 취함으로 모든 죄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평안을 가장한 악인의 궤계입니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러 나아올 때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요압은 아마사를 만났을 때에 그의 수염을 잡고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면서 손에 있는 칼로 그의 베를 찔렀습니다.
요압은 평화를 가장하여 상대방을 방심시킨 후에 살해 하는 속임수를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자의 궤계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팔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인사하며 입을 맞춤으로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눅22:48절),
이와 같이 악한 자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악한 생각을 품고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접근하여 사람을 해칩니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킬 때에도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악한 자가 사람을 해치려고 평화를 위장하며 다가오듯이 사단이 성도를 유혹할 때에도 천사로 위장하여 다가옵니다. 죄의 유혹은 매우 달콤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주의해야 합니다.
겉으로 볼 때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육신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지만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려는 사단의 유혹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러한 사단의 위장에 속지 않기 위하여 영적으로 깨어 경성하며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분별의 지혜를 주셔야만 사단의 궤계를 깨닫고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심판을 받는 살인자입니다.
요압은 아마사.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아브넬도 죽임으로써 그 포악성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의 죄를 처단할 수 없었습니다. 요압은 다윗 왕국을 세우는데 있어서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다윗 왕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군부의 실력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면서 요압의 죄를 징벌할 것을 지시했고 솔로몬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반란에 가담한 죄를 들어 그를 죽였습니다.(왕상2:5-6, 28-33절),
하나님께서 요압의 살인한 죄에 대해 공의로 심판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한 마음을 품고 의인을 죽이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공의입니다.
세상의 악한 자들이 권세를 누리며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 대하여 공의로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보면 악행을 행한 자들이 대부분이 역사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명이 다하여 죽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해서는 내세에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시어 심판을 행하실 때에 모든 악한 자들의 악행을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보응이 있음을 깨달아서 절대로 악한 마음을 품지 말고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악으로 대항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맡기는 지혜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4. 말씀을 정리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사람의 욕심으로 살인을 부르게 되고 그러한 악행을 행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을 받게 됨을 교훈 받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악인들이 평화를 가장하여 악한 궤계를 품고 의인에게 접근함을 배웠습니다.
악한 세력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의지하여 언제나 바른 길로 행함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