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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뒤돌아 울지 않았다. 울음은 추한것이라 늘 배워왔기에. 엄마가 나의 얼굴은 안타깝게 매만지며 잘 다녀오라 할때도
끅끅거리는 소리를 뒤로 삼키며 울지 않았다. 그를 만나 비행기를 탈때도 발갛게 물든 손끝을 말끄라미 쳐다 보며
입술을 깨물었지, 그 열 세네시간 되는 기나긴 비행에도 난 울지 않았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 Are you okay? "
라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하는 엄마와의 이별이었다. 이민도, 입양도 아닌 그저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유학' 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 My name is Lev. "
그 특이한 이름에 잠시 엄마가 준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엄마 생각을 하는 것도 잊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마오리족의 피가 섞였다고 했다. 온전한 키위(뉴질랜드인)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주민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잘생긴 편이었다. 그 강인한 마오리족의 피가 섞여 왠지 모르게 고집새보이는
도톰한 입술과 움푹 패인 인중, 높게 솟은 코, 그리고 튀어나온 이마와 눈썹 사이로 감춰진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은
전형적인 서양인의 상은 아니었지만, 서양인의 여린 외모와 마오리족의 굳건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꿈꾸었던 금발의 소년은 아니었지만, 연한 갈색의 머리와 연한 색소를 가진 눈은 충분히 나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나보다 한살 많다고는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성숙했다.
" M, My name is Jin-min. "
우물쭈물 말을 건네자 그가 열 시간 만에 대화를 한다는 사실에 감격했는지 커다랗고 마디마디가 튀어나온 손을
불쑥 내민다. 그 뜨거운 손을 맞잡고 있노라니 갑자기 설움이 밀려왔다. 갑작스레 정해진 유학이었다. 나의 의지가 아닌
부모님간의 불화로 인하여 내몰리듯 건너간 타지였다. 그의 손을 꽉 잡고는 울어버렸다. 당황한 그가 무어라 중얼
거리며 나의 어깨를 두어번 쓰다듬어 주었지만 그게 나의 눈물샘을 더욱 자극했는지 그의 어깨가 다 젖어가도록
그의 품에 안겨 울어버렸다.
" Hush…Don't cry, Don't cry… "
어린아이를 다루는듯한 그의 태도에 울면서도 웃어버렸다. 조용히 스튜어디스를 불러 티슈를 몇 장 부탁한 그는
나의 등을 다독이며 영어로 나즈막히 무어라 말해주었다. 울지 마 라는 말과 함께 어설프게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도
했고 열 일곱 이라는 나이와는 맞지 않게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마음이
진정되어 가만히 그의 스킨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옷깃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You looks like rabbit. "
그가 한 손으로 나의 턱을 받쳐들고는 티슈로 나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토끼?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당황스럽다는듯 고개를 창가로 돌리며 말했다. 눈이 빨개서… 라고 중얼거리며.
세 번을 갈아탄 비행이었고, 그 중 마지막은 끔찍하게 흔들리는 자그마한 비행기였지만, 왠지 그와 함께하니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뉴질랜드 인버카길.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오클랜드도, 크라이스트처치도
아니었다. 그 최 남단에 위치한 땅끝마을에서 영국식 영어를 공부한다니,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나긴 비행에
지친 내가 그의 어깨를 베고 잠이 들자 그는 자신의 어깨 사이에 담요를 두툼히 접어 끼워주며 한참을 그렇게
있어주었다. 인버카길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심지어 그는 나를 업고 내리려고까지 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영어로 더듬더듬 말하며 자그마한 짐꾸러미를 들고 그를 따라 내렸다.
짐을 찾고, 밖으로 나오자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양 팔을 슥슥 문지르며 추워… 라고 하얀 입김을 만들며
중얼이자 그가 자신의 파카를 나의 어깨 위에 덧입혀주었다. 그를 바라보자 그는 콧잔등을 문지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분 뒤, 차가 도착하자 그는 그제서야 말문이 트인 듯 자신의 아버지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이름이 진민 이라는 것과 나이는 16살 이라는 것 등등. 그의 아버지는 그의 말이 끝나는
중간중간마다 너털웃음을 흘리며 백미러로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 예쁜 아이로구나. "
그가 듣기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화들짝 놀란 나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걸로 그가 한 칭찬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콧수염을 쓱쓱 문지르며 진한 웃음을 터뜨렸다. 붉은 얼굴이 꼭 인상이 좋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왠지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어둑한 배경에 이지러져 뭉뚱그려져
보이는 가로수와 들판, 그리고 커다란 이층집들에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창문에 둥그런 뽀얀 김을 내뱉으며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 5분 있으면 도착 할거야. "
Lev 가 나의 등 뒤로 중얼거렸다. Kowai Avinue 라는 짙은 풀색의 표지판이 보였다. 코와이 에비뉴? 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자신을 Gilbert 라 부르라던 Lev 의 아버지가 말했다.
" 코와이가 일본어로는 무섭다 라는 뜻이더라더군. 예전에 일본인 학생이 한 명 왔었는데,
주소를 보고 꽤나 재밌어 했었어. "
" 더군다나 우리가 사는 곳은 44번지라,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며 무서워 하기도 했지. "
그가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빨간 지붕의 집이 보였다. 흰색의 건물위에 빨간 지붕이 얹혀져 있는 것이 꽤나 보기
좋았다. 동화 속에 나오는 집 처럼. 앞 마당에는 풀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잔뜩 자라있었고, 빨간 우체통 하나가
입을 벌리고 마중하려는 듯 서 있었다. 흰 울타리가 삐뚤빼뚤하게 정돈되지 않은 채로 자리잡고 있었고, 아이보리색
처럼 보이는 문패는 [Flutter's house] 라는 말이 새겨져있었다.
" Flutter? "
" 풀 네임이야. Lev Flutter. 날갯짓 이라는 뜻이지. "
" 예쁘다…. "
레브가 차 문을 열고 기다란 다리를 내뻗으며 씨익 웃었다. " 내려. " 라는 말을 공중으로 흐트리면서. 그가 내려
한번 크게 기지개를 폈다. 입에서 흰 입김이 나왔다. 종종걸음으로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트렁크로
가 짐을 꺼냈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에 모든걸 다 구겨넣고 들어온지라, 짐은 별로 커보이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이라, 두 손으로 트렁크를 부여잡고는 애를쓰며 한발자국식 움직이자, 길버트가 크게 웃더니 트렁크를 두손으로
들며 성큼성큼 현관문으로 향했다.
낡은 문이 끼릭 하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자마자 퍼져오는 온기에 발끝부터 저릿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 앞 바로 보이는 아이보리색 양탄자와 시선을 조금 위로 하면 보이는 계단, 그리고 그곳을 따라 가지런히
붙어있는 파스텔톤 무지개빛의 액자.
" Gil, 물 한잔만. "
" 너가 가져다가 마셔. "
" 지쳤단 말이야. "
현관문을 들어가자마자 바로 왼쪽으로 꺾으면 보이는 부엌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레브가 지친 듯 말했다.
손 하나 까닥할 힘도 없다는 듯 현관에 놓여져있는 솔로 신발조차 닦지 않은 채 그대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따라주자 고맙다는 듯 손을 두어번 휘저으며 물을 단번에 삼켰다. 아직 시원한 기운이
남아있는 컵을 볼에 대고는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벌떡 일어나 나의 짐가방을 챙겨들었다.
" 방 구경 시켜 줄게. "
길버트가 살짝 웃었다. 콧수염이 따라 움직였다. 그가 나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었다. 나 역시 그에게 손을 흔들
었다. 길버트가 입모양으로 [Good night!] 이라 중얼거렸다. 그의 어린아이같은 태도에 웃음이 나와 입을 가리고
피식, 웃자 복도에서 날 기다리던 레브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말끄라미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 하자 그가 덜컹 거리며 계단위를 올라갔다.
" 여기는 내 방. "
그가 올라가자마자 왼쪽으로 꺾으면 보이는 방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유독 튀는 색깔의 방문이었다.
" 구경할래? "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그의 방은 온통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있어 본래 벽지의 색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다 기괴한 형상의 사람들이었다. 마릴린 맨슨 이나 메탈리카 같은 락그룹의 포스터들이
가득했다. 방 역시 깨끗한 편이 아니라, 책상 위엔 온통 앨범과 두꺼운 서적들, 그리고 과자봉지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침대 위 역시 라디오와 일렉트릭 기타가 아무데나 널브러져있었다. 전체적으로 무슨색이라 짐작하기어려운 방이었지만
꽤나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벽을 가득 채우고있는 책꽃이에는, 정작 책은 한 칸에만 매꾸어져 있었고
다른 칸에는 모두 앨범들과 만화책, 그리고 DVD들로 매꾸어져있었다. 홀린듯 멍하니 바라보자, 영화나 음악 보고싶
으면 언제든지 들어와. 라고 말하며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 노래 같은건, 크게 안 들을테니까 걱정하지 마. "
" 신경 안써. "
그가 날 잠시 힐끗 바라보더니 방을 다시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섹스팟이라고 쓰여져있는 군데군데가 찢긴
스트라이프 셔츠를 망막에 새기고는 앞으로 내가 몇달간 머물게 될 방을 찾았다. 그의 방과 나의 방은 고작
다섯 걸음 차이었다. 잘 끌리지 않는 트렁크를 억지로 끌며 그가 문을 열었다. 새 냄새가 났다. 전체적으로 고동색
이 깔려있는 나의 방은 꽤나 서재 같은 느낌을 풍겼다. 구김 하나 없이 말끔한 침대 이불과 아무런 무늬 없는 민무늬
의 배게, 그리고 깔끔하게 하나 걸려있는 베이지색의 액자. 큼직한 책상 위에 있는 책꽂이,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몇개의 학용품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 서재 같아. " 라고 말하자 그가 머쓱한 듯 콧잔등을 긁으며 말했다.
" 길이 공주님 방으로 꾸며준다고 하길래, 그냥 모던하게 꾸미자고 했거든. 마음에 안 들어? "
" 아니 멋져. "
프릴달린 레이스 침대를 고집하는 그와 메모리배게를 고집하는 그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만난지 하루조차 조금
안 된 사람들이었지만 꽤나 푸근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멋지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의 귓볼이 붉어졌다.
" 배고프면, 토스트에 잼 발라줄게. "
" 아니, 괜찮아. "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말을 내뱉는 내가 웃기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내뱉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다가 다시 무언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 개학은 일주일 뒤야. 로즈베리 스쿨. 교복도 있는데, 아주 엿같아. "
웃음을 터뜨리자 그도 잠시 웃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 너랑 나랑은 같은 학교야. 반하고 학년은…당연히 틀리겠지. 그럼 내일 보자. "
Bye bye, 라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그가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고민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 Good night. "
서둘러 달려 나가는 그를 바라보니 웃음이 터져나왔다. 왠지 모르게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미흡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꾸준히 써보고 싶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
첫댓글 와 문학작품같아요! 다음편 기대된다는ㅋ재밌어요~
문학작품…감사드립니다. 닉네임은 노다메칸타빌레에 나오는 마스미짱인가요? 여하튼 읽어주셔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