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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이었음에도 소중한 시간 내어 글 읽어주신 분들, 응원과 격려의 댓글 달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원래는 글을 더 쓰려고 했는데, '거침없이 왁자지껄'이 전체공개 게시판인 걸 이제야 알았어요.
전에는 회원만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제가 착각했었나 봐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지라 회원님들하고만 나누고 싶었는데 '글쓰기' 메뉴 아래 공지사항을 미처 읽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 파란만장한 그대의 삶으로부터 배우다.
졸업 후 3개월만에 Short Order cook으로 작은 Diner에 취직을 하고,
그 후로 약 8개월만에 비토와 캐서린 아줌마댁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밝아지고 있는 제가 보였어요.
손님들의 대부분은 주변에서 농장을 하시는 분들이거나 성수기 관광객들이었는데, 단골손님이 많은 곳이어서 몇 개월 후에는 손님들의
커피나 식사 취향을 자연스레 외우게 돼, 창문 밖으로 손님이 보이면 드시는 커피나 식사메뉴를 만들어 테이블로 가져가곤 했죠.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일하시는 아줌마를 대신해서 찬장도 정리하고, 부엌 청소도 하고, 뒷마당에 나가 앉아 아저씨가
따라주시는 와인도 한 잔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요.
아줌마와 아저씨의 친구들, 친척들이 놀러오면 항상 저를 소개시켜 주시고, 가족들의 자리에도 저를 초대해 주셨어요.
너는 이제 우리 가족이라면서요. 타향에서 듣는 그 말이 참 따뜻했어요. 제가 뭐라고...마음 깊이 감사했습니다.
아줌마 아저씨 댁으로 이사할 당시, 학교 레스토랑에서 사귄 친구들 중 한 명과 만나는 중이었어요.
이 친구는 학교에서 Sous Chef로 일했었고, 저는 당시 Server였죠. 이 친구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어요.
학교 식당에서 Co-op으로 일을 시작할 때 만난 친구인데,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어느 날, 곰돌이 푸같이 생긴 애가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이름이 뭐야? 남자친구 있어?"
'-_-;; 이건 뭐야. 어린노무시키가 어따 장난질이야, 확그냥 막그냥 콱그냥.'
"내 이름은 뭐야. 남자친구 없어. 남편이 있거든."
차가운 저의 반응에 흠칫 놀라서는 한 발짝 물러서더라구요.
그리곤 몇 시간 뒤, 그럼 그냥 친구나 하자며 페이스북 친구를 하고 싶다더라구요. 그러던지.
졸업 후, 저는 저대로 삶의 회초리에 정신줄을 놓고 있었고, 이 친구는 학교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토론토로 이사를 갔어요.
학교에서도 그리 잘 어울리질 않았는데, 졸업 후엔 거의 소식이 끊기다시피 1년에 한 두 번 안부를 묻는 정도로 지냈어요.
이 친구는 토론토에서 Sous chef을 하면서 주 5일을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고, 쉬는 날 이틀은 거의 잠으로 채우며 살다시피 했다죠.
그렇게 살면서도 땡스기빙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저에게 꼭 전화를 해 잘 보내라며 인사를 전하곤 했죠.
그러다 제 목소리가 예전같지 않은 걸 느끼고, 분명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는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아무일 없다고만 하니까, 혹시 잘못될까봐 틈날때마다 전화해서 상황 파악을 했었다라고 나중에 이야기 하더라구요.
Anyway, 각설하고.
비토 아저씨는 저를 실제의 저보다 너무 좋게 보셔서, 몇 번씩이나 자기 며느리를 삼고 싶다고 하시곤 했어요.
그래서 사귀기 시작한 지 3개월여밖에 되지 않은 남자친구를 밝힐 수 밖에 없었죠. '사실 나 만나는 사람 있는데...'
남자친구를 만나봐야 겠다며 집으로 초대하라는 말씀에 아줌마와 아저씨, 저와 남자친구, 이렇게 넷이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요.
아줌마가 요리와 베이킹에 관심이 너무나 많은 분이셨어요. 저녁 초대를 받은 게 감사해서 남자친구에게 부탁했죠.
아저씨 아줌마에게 맛있는 저녁을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그 날 이후로, 종종 넷이서 혹은 아저씨 아줌마의 가족들, 친구분들과 자주 어울리게 됐어요.
12살에 영어 한 마디를 못하셨던 엄마아빠를 따라 이민와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과 왕따를 당하며 지냈던 지난 시절을
들려주시는 아저씨. '지금도 가끔 얘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 발음이 엉망이거든' 이라고 진담인 듯 농담을 건내시는 아줌마.
제가 단어를 찾아내지 못할 때, 발음이 구릴 때 '그건 이거야'라든지 '그건 이렇게 말하는거야, 따라해봐'하시며 도와주신 분들.
자기 억양도 강하면서 저보고 영어도 못하면서 왜 여기서 일하냐고 소리소리를 지르다 못해, '너한테는 주문 안 할거야'라고
상처주는 손님한테 한 마디 못하고 꾹꾹 참던 설움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으앙~~'하고 터뜨릴 때,
'안다 안다. 니 마음 안다' 하며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시던 분들.
그리고. 항상 말없이 '다 잘 될거야'라고만 하던 남자친구의 지난 13년여의 이민 생활을 듣게 됐죠.
월급이 밀려 렌트를 내지 못해 쫓겨나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잠을 자야했던 날들, 밀린 월급을 달라고 했다가 해고당한 일,
겨울날 자전거를 타고 왕복 두 시간 거리를 출퇴근한 일, 그렇게 출퇴근을 하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거즈로 꽁꽁 싸매고도 일을 해야 했던 날들, 무작정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 학비가 없으니 5천불의 학비를 빌려주면
3년 동안 일을 해주겠다고 해서 학비를 냈던 일, 엄마 친구가 영주권을 도와준다고 해서 수속료 2천불을 빌려 수속했는데
거절 당하고, 수속료 중 1센트도 돌려받지 못한 일, 친구와 하우스렌트를 하기로 했는데 돈만 뜯긴 일,
소세지가 좋아 나이아가라에서 토론토로 출퇴근하며 무급으로 4개월여를 일하며 소세지 만드는 법을 배우다 취직이 된 일 등등.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눈물이 앞을 가렸죠.
저는 그냥 '앵앵이'에 불과했어요. 힘들다고 보채고, 땡깡부리고, 왜 나한테만 이러냐고 불평불만하는 아이였을 뿐.
그런 저에 비해 이 친구는 아직도 밝았고, 아직도 웃고 있었고, 아직도 자기가 하는 일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어요.
# 무심하게, 또, 바람이 분다.
2013년 9월. 지난 1년 동안 내놓았던 집이 팔려 아줌마 아저씨 댁에서 또 다시 이사를 했어요.
나중에 해주시는 말씀이, 제가 아줌마 아저씨 댁으로 이사들어가던 바로 그 날, 원하던 오퍼를 받고 집을 파셨다고 해요.
'너는 우리한테 행운아야!'라고 말씀하시며, 본인들이 이사할 집을 찾으면 같이 가자고 해주셨죠.
하지만 아줌마 아저씨의 새 집은 제가 일하던 곳과는 너무 먼 곳이었어요.
남자친구는 생각도 없이 토론토로 와서 함께 살자 했죠. 그말에 저는 화가 났구요.
그 못돼먹은 사장부부 밑에서 영주권 신청 하나만 보고 견딘 세월이 얼만데,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데
내가 왜 토론토를 가느냐며.
'너는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도 몰라' 하며 화를 화를 냈죠. '정 걱정이 되면 니가 여기로 와!'라고 했는데
남자친구가 토론토 직장을 그만두고, 나이아가라에 직장을 잡아, 정말 왔어요.
이렇게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2013년 10월. 드디어 CEC 영주권 서류를 접수할 만큼의 Hours가 채워져 가고 있었죠.
조금씩 서류를 준비하고, '나 이제 그만 둘거야!'라고 할 날만 고대하던 중,
Cook application이 차고 넘쳐 더이상 Cook으로 신청하는 영주권 서류를 접수받지 않겠다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듣게 됩니다.
캐나다가 분명 나를 원하지 않는 거야! 영주권 따겠다고 보낸 지난 세월은 어떡하며, 쏟아 부은 돈은 어떡하며, 어떻게 돌아가지...?
인생은 타이밍이라던데 내 타이밍은 왜 항상 어긋나는거야 하며 원망에 원망을 더했죠.
마침내, 여기까지인가보다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다졌을 때, 남자친구가 한 마디 하더군요.
'나는? 니 인생에 나는 없니?'
'너도 같이 갈래? 넌 요리사니까 한국에 가면 호텔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거야.'
'그 말이 아니잖아. 넌 내가 직장까지 그만두고 여기 와서 너랑 같이 있는데 왜 나를 이용할 생각을 안 해?'
'무슨 말이야?'
'배우자나 동거인으로 영주권 신청해도 되잖아. 자존심 상해?'
'...'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해주는 남자친구가 고마웠지만, 얼마나 힘들게 얻은 영주권인지를 익히 들어 알았기에 무임승차하고 싶지 않았었요.
'그게 아니야! 눈물로 잠들고, 눈물로 눈뜨며 얻은 영주권인데 어떻게 거기다 내 숟갈을 얹어?'
'니가 원하는 게 캐나다에서 사는 거잖아. 난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서 좋은데 왜 그건 생각도 안 해?'
2014년 4월. 저와 남자친구의 지인들 총 13명을 시청으로 초대해 결혼식을 올렸어요.
제 2의 인생, 캐나다에서의 삶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우리의 사람들, 13명.
결혼식 후, 그 분들을 집으로 초대해 남자친구와 제가 몇 주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음식들로 대접을 했어요. 뿌듯했죠.
한국에 계신 부모님, 뉴질랜드에 계신 시부모님께는 Skype으로 소식을 대신하고,
그 동안 말로만 묘사해 드렸던 지인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보내드렸어요.
뉴질랜드의 시부모님은 신랑신부로 꾸민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많이 우셨어요.
타국에서 혼자 오래 지낸 신랑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였겠죠.
* Speed doesn't matter, Forward is forward.
결혼하고 2개월 후, 한국으로 함께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배우자 영주권을 신청하게 돼요.
영어를 못하는 부모님, 한국말을 못하는 신랑.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로 통하는 그들.
손짓 발짓으로 신랑과 대화하려는 부모님들, 그런 모습을 인내와 미소로 대하는 신랑. 모두가 사랑스러웠습니다.
배우자 영주권 신청서를 작성하는 데는 꼬박 3개월의 시간이 걸렸어요.
유학원이나 대행사를 통해 신청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아, 조금씩 매일매일 신청서 가이드라인을 읽으면서 작성했죠.
때때로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는, CIC에 전화를 걸어 10분이고, 30분이고 기다려 물어보고 작성했어요.
2014년 9월, 미시사가로 신청서 제출.
2014년 11월, 신청서 중 구양식 신청서가 포함돼 신청서 전체 반송.
2014년 12월, 신청서 다시 제출.
2015년 4월, 파일넘버 및 오픈워크퍼밋 발급 받음.
2015년 12월, MPP (A member of provincial parliament)에 영주권 신청 관련 문의 레터 작성 후 우편 발송.
2016년 1월, MPP의 수행원으로부터 CIC 홈페이지에 있는 수속기간과 같은 영주권 처리 기간 안내 받고 좌절.
2016년 2월, 스판서쉽과 영주권 신청서 처리 완료 이메일 수신.
배우자 영주권을 신청하기 전, 신랑의 시민권 신청서를 접수했어요.
영주권 신청서 작성을 위해 CIC를 뒤적거리다, 신랑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훌쩍 넘었다는 걸 알게 됐죠.
'왜 시민권 신청 안 해? 시민권은 신청 안 하고 싶은 거야?'
'아니, 신청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영주권도 힘들게 신청했고, 시민권은 또 누구한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신청해봐도 돼? 보니까 시민권 신청은 생각보다 서류가 간단해.'
그럼 한 번 해보라는 말에, 제 영주권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신랑의 시민권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2014년 11월 28일, 신랑의 시민권자 선서식을 하게 됐죠.
자기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너무나 기뻐하던 신랑.
CIC에서 제공하는 시민권 시험문제를 풀고 또 풀고, Oh Canada를 외우고 외워 선서식에 참가한 신랑.
신랑의 두 눈에 지난 13년여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도움을 받기만 해서 미안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저도 너무나 행복했답니다.
* 뿌리를 내릴 시간
영주권을 신청하고 나니, 영주권 때문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가 주어졌죠.
하지만 차 2대를 굴릴 상황은 되지 않아, 마침 지인의 소개로 집 앞 스시 Kiosk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생각지도 않은 스시를 배우게 됩니다.
2015년 2월.
매년, 회사에서 열리는 스시 챔피언쉽 대회에 참가하라는 수퍼바이저의 권유를 듣고 지역 예선에 참가했어요.
지역 예선 통과 후 전국 대회에 출전할 티켓을 받게 되었죠.
2014년 우승자가 저희 매장 Team Leader였기에 현장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바짝 긴장하게 됐죠.
상금 $5,000이 걸린 대회였기에 더욱더.
지역 예선 통과 후, 매일같이 프레젠테이션이며 ingredients의 양을 조절하면서 맛을 봤어요.
마침 친정부모님이 와 계셔서 함께 평가해 주시면서 의견을 나눠주셨죠.
하지만 결국 캐내디언의 입맛에 맞춰야 하기에 매일처럼 집주인 부부, 친구들, 이웃에 스시를 만들어 배달하고 평가를 받았어요.
{코스트코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스모크 살몬을 사다 날라 연습했던 흔적들}
그리고 결선의 날.
공산당과 감기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만병통치약 Advil 두 알을 처방하고 결전의 장소, George Brown College로 향했어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죠.
'You don't have to win but just enjoy it!' 이라고 말해주는 신랑과
지역 예선 통과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시는 부모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한 시간여의 결승에 임했어요. 정말 재미있고 가치있는 경험이었죠.
그리고 전국 우승이라는 결과를 안게 되었어요.
어안이 벙벙해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등을 떠미는 누군가의 손에 떠밀려 시상대 앞으로 나가서도,
'Is this real?' 하는 표정으로 상금을 받았어요.
그렇게 우승을 한 우승작은 2015년 9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캐나다 전국과 미국 뉴욕 회사 지점에서 Limited Product로 판매됐어요.
{신랑이 좋아하는 Tetley, Good Night 차를 사러 들렸다가 만난 LTO 싸인}
김밥 마는 것 말고는 스시의 '스'자도 모르는 저를 인내로 가르쳐 준 팀리더와 동료분 덕분에 안게 된 선물이었어요.
물론 요리를 하는 신랑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되었죠. 제가 게으름을 피울 때면, 제 손을 이끌어 연습을 하게 했던 신랑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 번의 Turning Point.
우연히 Fallsview Casino에서 Sushi Cook을 채용하는 것을 보고 지원하게 됐어요.
HR Cordinator와의 전화면접 후, HR Manager와 Executive Sous Chef와의 면접을 하게 돼죠.
15분간의 면접을 잘 진행하다가, 각종 생선을 다 손질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건 배운 적이 없다고 해서
해당 포지션에 채용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아, 카지노는 이렇게 면접을 하는구나' 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HR Manager가 마침 VIP 라운지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한데, 너의 서버 경력으로 충분할 것 같으니
혹시 그 자리에서 해당 부서 매니저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지 묻더라구요.
어떤 것에든 오픈이 되어 있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해당 부서 매니저를 불러주어 인터뷰를 진행하고
메디컬 체크와 운동능력 평가 후 VIP 라운지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카지노에서의 일은 _ 쉽지 않아요.
Seniority가 최하위라 미드나잇 쉬프트가 다반사이거든요. 밤에 깨어 있는 일이 쉬운 분들에게는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처럼 저녁 9시부터 졸음이 쏟아지는 초저녁 잠이 많은 사람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일인 건 분명해요.
여기저기서 보내는 몸의 신호에 적응하느라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이제 또 어디서 어떻게 어디로 인생의 바람이 불어올 지 알 수 없지만,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는 것.
그 문을 향해 걸어나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철저히 나의 몫이라는 것.
지금도 많은 분들이 삶의 여유와 자기 발전, 가족과의 시간 등등, 많은 이유로 캐나다 이민을 꿈꾸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험으로부터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영어가 부족하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한정 지을 수 없다는 것과
영주권에 맞춘 학과 보다는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공부에 맞춰 학교나 학과를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한 조언이기에 '무조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삶이 늘, 우리가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엿같은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신랑이 해 주었던 조언을 떠올리며 힘을 냅니다.
'살아있는 한, 엿같은 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야.
엿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그걸 깔고 앉아서 마냥 울건지,
그걸 어떻게 요리할 건지 터득하는 건 순전히 너한테 달린거야.
엿같은 일을 잘 다룰 수 있을 때, 모든 게 달라져.'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멋진 지구게임 하시길 바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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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소설같은 인생역전 드라마인것 같네요..
^^;; 아마도 모두의 인생을 펼쳐보면 이런 우여곡절과 역전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캐스모 회원님들의 이민수기를 모아놓기만 해도 훌륭한 단편소설집 될 것 같아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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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의 말씀, 감사합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걸 다 쓸 수가 없어 줄이고 줄여 쓴다고 한 게 이렇게 길어졌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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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요. 주변분들 중에 이민 오셔서 정착하시기 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든 이야기 하나하나가 대단하더라구요. 그 모든 걸 견뎌내고 살아내서 내가 그 삶을 듣고 힘을 낼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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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스케줄이 엉망진창이라 ^^;; 주는대로 쉬어야 하기 때문에 일정치가 않아요. 모닝스타 부부님의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시면, 맞는 시간 찾아서 쪽지 보내드릴께요. 모닝스타님은 폭포에 사시고, 저는 센케에 살고 있으니 중간쯤인 나이아가라 온더레이크 아울렛에 있는 스타벅스 괜찮으세요?
@모건스턴 ^^ 스케줄 나오면 쪽지로 날짜 알려드릴게요~
좋은 이야기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값진 인생을 살고계신 것 같아요! 감명받고 갑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이 타국에서 삶을 일구시려 고군분투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__^
글쓴이님 힘든 여정 이야기에 염치없게 엄지손가락 좀 얹어놓고 갈께요. :) 👍🏼👍🏼👍🏼
헤헤. 감사해요. 쎈스있게 숟갈 대신 엄지손가락 얹어주셨네요. 히히
뿌듯하고 훈훈한 기운 받아갑니다~! d^^b
좋은 기운을 받으셨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D
동문 후배로서 졸업반인데 제 상황과 행동방식을 뒤돌아 보게 하는 글이네요.
새로운 곳에서 생각했던것과 다른 생활환경, 직업환경에 실망아닌 실망에 지치고 마지막 학기에 영주권 따려고 LMIA 조건만 찾아보고 있는 중인데... 정작 하고싶었던 일은 뒷전에 두고...
뭐 일단은 열심히 살고 후회없는 결정을 하고싶네요
벌써 졸업반이시네요! 힘내시고 이제까지 노력하시고 찾으시려고 했던 출구, 곧 찾으실 거라 생각해요~ :)
네바엔딩스토리님!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입에 미소가 머물기도 하면서 님의 소중한 인생의 한 장을 읽었어요. 그 인생을 가감없이 털어놓아주셔서 힘을 또는 다시 마음을 다잡을 추스림을 얻고 간 분들이 저를 포함해서 많을거예요. 게다가 얼굴도 아주 예쁘시고^^! 앞으로 행복한 일, 웃을 일 더 많이 생기길 기원해요...
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모두의 인생을 열어보면 다 이렇게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업 앤 다운의 연속이 아닐까 싶어요. 혹시 지금 눈물 지으시는 분들에겐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언젠간 그 세월이 지나가 웃을 날이 올 거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또 넘어지고, 아프고 힘든 날이 오겠지만 한 번 지내왔으니 이전보다는 수월하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높은 바람언덕님도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한 추억들 쌓아가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진심성이 드러나는 글 참 좋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비판의 도마에 올라서 토막토막 날까봐 처음엔 좀 겁이 났는데,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실 분들 또한 있으리라 믿고 적어 보았습니다. ^^
제 자신에게도 많은 자극이 됩니다.고맙습니다..그리고~멋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시간을 들여 쓴 보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Celine님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멋진 하루 보내세요! :)
첫번째 글보다 더한 감동입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들어 맞네요^^ 항상 행복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그런데 이게 마지막 글이라니..필력이 아까우십니다..ㅠㅠ 훗날 육아글 기대 하겠습니다ㅎㅎㅎ
즐겁게 읽어주시고 행복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이라는'님도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래요. 육아글ㅎㅎㅎ 저도 육아일기 쓸 날이 정말 왔으면 좋겠어요~ :D
스토리 잘 봤습니다.
혹시 커 교수 아세요?
한국학생 누굴 설명하나 했더니, 님인거 같은데.. 시간되시면 차한잔하고싶어요!
저도 거기살고 동문이에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3.03 01:19
비댓 안되는거 지금 알았어요.
그래서 댓글 수정했어요! ㅎ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3.03 01:45
오늘 오프에요. 잘됐네요. ㅎㅎ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3.03 02:31
진짜 멋지네요. 살아온 것도. 글도 전부 멋집니다. 많이 배우게되네요. 항상 화이팅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캐스모에서 많은 분들의 글 읽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왔음에도 이 곳이 내 나라처럼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래 사신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여유가, 다 그런 시간과 경험의 덕이겠죠. 메시다님도 항상 화이팅하시고 행복한 순간들 만들어나가시길 바랍니다! :)
이제 막 유학을 시작한 저에게 이글은... 또다른 다짐을 갖게 해주네요.. 무작정 영어를 배우고 싶어 왔는데 하고싶은게 무언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네바엔딩스토리님 말처럼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리니까요... 잘 찾아보고 이겨내어 살아가려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아요 :)
답글이 너무 늦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지금 쯤이면 졸업하시고, 졸업 후 취업비자를 신청하셔서 취업준비를 하시거나 이미 취업을 하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캐나다 이민 8년차를 넘어서는 지금, 영주권자를 지나 시민권자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막막함이 있어요. 여행이 설레일 때는, 막상 그 곳에 있을 때가 아니라 그곳을 그리며 루트를 짜고 무엇을 할까 상상하는 그 순간이 아닌가 합니다. 좋은 오늘로 좋은 내일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내년에 캐나다 유학을 꿈꾸며 이민에 포커스를 맞춰 학과를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했는데... 제게 따끔한 충고와 용기가 되는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Yvonne님. 님처럼 이 곳의 글을 매일 몇 시간씩 읽고 또 읽으며 전전긍긍하고 마음을 졸이고, 또 꿈에 부풀었던 순간들이 떠오르네요. 전전긍긍하며 세우셨던 그 목표와 꿈에 조금 더 가까워져 있는 오늘을 살고 계시길 바래요.
지금 봤는데도 너무나 동기부여되는 멋진 글이십니다. 지금은 또 어떻게 멋지게 도전하시고 있으실까요.
마지막 남편분의 말씀이 너무도 공감되네요. 크리스마스에 그리고 연말 연초에 보면서 힘이되는 감사한 글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 인사 감사합니다! 지난 세월을 잠시 요약하자면, 카지노에서의 일은 밤샘 근무때문에 그만두고, 호텔 서버로 일하다가 수퍼바이저로 승진을 했었는데요, 6개월여 후 수퍼바이저직도 사직하고, 지금은 다시 서버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영주권 취득 후, 올해 초에 시민권도 받았구요. 지금은 한국에서의 경력을 살려 한국 교사자격증을 온타리오 교사자격증으로 교환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보다는 한국의 교직 문화나 학부모님들의 갑질에 못 이겨 사직을 하고, 다시는 학교는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했는데, 캐나다의 교직 문화는 다르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다시 시작해 보려구요! :)
늦게
봤지만 너무 대단하셔서 댓글달아요! 지금도 나이아가라에 살고계신가요?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