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어느 기업체의 회장님 말씀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국의 청년들에게 가업(家業)이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일 것 같다.
급속한 변화의 시대에 새로움을 따라가기도 벅찬데,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가면 더 화려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고 많은 일 중에서 하필 가업이라니.
과연 부모의 삶에 제 발로 걸어갈 이유가 있을까?
세상이란
꼭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야 하는 게 아니다.
평생 가까이에서 보아온 큰 스승,
가장 든든한 부모의 삶 안에서 만나고,
발견하게 될 꿈이 때론 더 크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만나는 청년들은 그러했다.
그들에게 가업은 돈과 명예,
그리고
그들이 훗날 다른 삶을 살면 얻게 될
그 무엇과 바꾸어도 아쉽지 않을 빛나는 가치를 가진,
특별한 선택이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녹록하지 않고,
육체적으로 고된 일상이 함께하더라도
청년들의 눈에 비친 부모의 삶은
그들의 미래를 걸만큼 그렇게 단단했고,
함께하고 싶은 삶이었다.
그것이 더 넓은 세상이 아닌,
부모의 뒤를 따르게 한 이유였다.
대장장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은 서울 청년,
시계수리를 가업으로 잇는 대구 청년,
전남 구례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딸과 아들,
충주 시골 장터에서
일하는 부모를 도와 장돌림을 나선 충주 삼 형제,
대학 대신 떡 기능인을 선택한 두 딸,
조선 시대부터 5대째 가업을 잇는
통영 두석장 가족 등의 이야기가
이 책에 소개된다.
![기사의 0번째 이미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mk.co.kr%2Fmeet%2Fneds%2F2013%2F12%2Fimage_readtop_2013_1345719_13880339641155830.jpg)
서울 천호, 대장장이 아버지 강영기, 아들 강단호
서울 한강 아래 강동구와 강남구를 통틀어
유일하게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동명대장간의 대장장이 부자로 3대에 걸쳐
76년 동안 가업을 이어왔고,
100년을 꿈꾸고 있다.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공 굴리고,
태권도 기합 넣기를 가장 좋아했던 소년 단호는
청년이 되어 건축 관련 학과로 대학에 진학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던 그는
최고의 대장장이 밑에서 제대로 배우면서
아버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8년차 대장장이로 살고 있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 로데오 거리. 큰 상가 맞은편,
멀리서도 단번에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가게가 있다.
세월의 잔향이 곱게 배어 있는 간판의 흐릿한 글씨,
동명대장간.
동쪽을 밝힌다는 말처럼,
가게 안에는 작지만 강렬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시뻘건 화덕 속에서 쇳덩이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대장간 일이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지만 무엇보다 이토록 힘들고 고달픈 일을
수십 년 넘게 해 오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그를 하루하루 버티게 했다고 그는 강조한다.
비좁은 공간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몸을 부딪치며 일하지만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엄격한 스승인 아버지 곁에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마디마디를 바라보고,
한여름이면 50도까지 올라가는 좁은 작업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대장간 밖 세상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닫고,
삶으로 만들어갔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aladin.co.kr%2FCommunity%2Fpaper%2F2013%2F1226%2Fpimg_726971195944553.jpg)
대구 용산,
시계수리공 아버지 이희영, 아들 이윤호 이인호
대한민국에 여섯 명뿐인 시계 명장 중 한 명인 아버지.
그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은 물론
딸과 며느리, 조카까지 모두 시계 관련 일에 종사하는
명실상부한 시계 집안이다.
아들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작업대 아래서 시계를 장난감 삼아 놀았다.
첫째 윤호는
군대를 제대하고 바로 시계 장인의 길로 들어섰고,
둘째 인호는
전기 기능직으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가업에 뛰어들었다.
대구 홈플러스 성서점 안에 위치한
명품 시계 전문점 스위스는 아침 10시에 문을 연다.
매장에 상품 진열과 작업대 정리를 채 마치기도 전에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작금의 디지털 시대에
아나로그적인 시계 수리 기술이 곧 사라질
사양산업이란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명장님 안 계세요?"
아버지 이희영 명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매장을 지키는 장남 윤호 씨가
자신에게 상담하라고 말하자
그 손님은 다시 오겠다며 나가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계 명장 여섯 분 중
다섯은 모두 서울에서 일을 하다보니
다른 지역에서도 일부러 아버지를 찾아온다.
이에 머쓱한 윤호 씨는
하루 빨리 거목인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상세한 매뉴얼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과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게 놔두었다.
끙끙대며 시계 수리를 마치고 나면
마치 대국을 마친 바둑기사들이 복기를 해나가듯
아버지와 아들은 수리 과정을 맞추어본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일을 했지만
과제를 해결했을 때도 있고,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방식으로 수리를 마치는 때도 있었다.
아들만 일방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배우는 건 아니어서
이런 과정을 통해
아버지도 새로운 발견의 계기를 갖게 되곤 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spoon.co.kr%2Fwys2%2Ffile_attach%2F2013%2F06%2F25%2F1372147515-56.jpg)
충청북도 충주, 장돌림 어머니 임경옥,
아버지 소창수, 아들 소성현
오일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족발을 만들어 팔던 어머니 임경옥 씨,
그 곁에서 일을 돕던 큰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두 동생을 데리고 장터에 나서
어머니의 장사와 봉사를 이어간다.
직접 개발한 족발 조리법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갈 즈음
뇌출혈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사업을 물려받아 6년째 운영하고 있다.
맛과 서비스도 업그레이드해서
족발 프랜차이즈로 사업을 키웠다.
충북 충주시에 사업장이 있는
'엄정 임경옥 족발'의 대표 소성현 사장은
매일 아침 출근하는 장소가 다르다.
1일에는 경기도 평택 안중,
2일에는 강원도 원주,
3일은 다시 평택,
4일은 쉬고,
5일은 충주,
6일엔 안중으로 돌아가
원주, 평택, 충주를 날짜대로 다닌다.
이처러
그의 삶의 현장은 시골 소도시 장터이다.
마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과 동이 같은
이들의 맥을 잇는 현대판 장돌림이다.
어머니는 늘 장터를 좋아하셨다.
사는 일에 지쳐 힘이 들고 어려울 때 마음을 비우고
다른 이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새 희망이 생겨나는 곳이 장터라고 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온 가족이 애환을 나누는,
정이 살아있고 생동감이 넘치는 장터에서
하루를 지내고 삶을 배우면
그것이 바로 진짜 인생이라고 했다.
힘든 하루 일을 마감하고
저녁이면 집에 들어와 소주 한 병을 비워야
비로소 잠이 드는 어머니의 고된 일상은
아들들에겐 한없는 애틋함이면서
또한 자랑스러움이었다.
성현 씨가 어머니를 따라
자신도 장터에서 젊은 인생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족발은
그의 마음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장터에서의 반응이 좋아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결사반대였다.
장돌림이 되려면 부자의 인연을 끊자고 했다.
자식에게 가난과 멸시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http://i2.media.daumcdn.net/svc/image/U03/news/201011/29/newsis/20101129173212086.jpg)
전라남도 구례,
농부 아버지 홍순영, 딸 홍진주, 아들 홍기표
오메가3가 나오는 쌀을 길러내는
대한민국 대표 농부와 그 뒤를 이어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짓는 20대 남매.
고향에서
부모님을 따라 조금씩 농사의 재미를 알아가는 중이다.
구례에서 나고 자라 대학 시절을 제하곤
이곳 구례 땅을 떠난 적이 없는 이들은
어려서부터
농사짓는 부모를 따라 논밭을 놀이터 삼아 누비고 다녔다.
집안의 넷째 달인 진주 씨는
대학에서 산림조경학을,
막내 아들 기표 씨는
한국농수산대학교에서 과수학을 공부한 후
집으로 돌아와 무농약으로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우며
농부의 꿈을 키우고 있다.
구례의 순영농장 주인장인 홍순영 씨는
농사에 희망이 잇고 미래가 있다고 믿는 농부다.
수십 년간 농사를 지어왔지만
지금도 땅과 작물에 더 이로운 방법을 찾고자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그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 걷겠다는
딸과 아들은 대견스럽다.
구례에 드나들며
그를 만날 때마다 느낀 것은
농부 홍순영은
그 누구보다 농사일을 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바쁘게 오고가는 중에도
잠깐씩 멈춰 서서 인터뷰하는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이것 좀 보라며 흙, 밀알, 쌀 등을 보여주고 설명했다.
비밀이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자신의 농사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기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농사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그의 딸과 아들의 입에서도 똑같이 들을 수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lubimg.auction.co.kr%2Fclubimg%2Fcafe%2Fwizwig%2F2008%2F08%2F24%2F20080824154157677199175275.jpg)
서울 송파, 떡장수 아버지 김순배,
어머니 전성례, 딸 김진희 김지연
부모는
딸들의 미래까지 생각하며 떡집을 창업하고,
큰딸 진희 씨는
새벽부터 고생하는 부모를 위해 고등학생 때부터
새벽일을 돕다가 그 속에서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대학 대신 일터를 선택했다.
함께 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떡집 시루가의 떡 디자이너로 재능을 발휘하며
젊은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둘째 지연 씨도 자연스레 직원으로 합류했다.
아직 20대 초반인 두 자매는
한국의 전통 떡 맛을 이어가는
전문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시루가'는
부모와 두 자매가 구성원인 인터넷 떡집이다.
오프라인 매장이 없는 신개념 떡집이다.
모든 주문은
인터넷이나 전화로 받아 제작된 떡을
오토바이 배송으로 고객에게 전달한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주문 가능한 떡 종류와 가격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고객들은 대부분 직장인이다.
의사인 부모를 따라 의사가 되고,
판검사인 부모를 뒤이어 판검사가 되는
가업 잇기가 결코 존경받지 못하는 시대.
의사도, 판검사도
지금은 본인의 노력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부와 계급의 세습으로서 가업 잇기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 나란히 함께가는
'동행'으로서의 가업 잇기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묵직하기만 하다.
경상남도 통영,
무형문화재 두석장 아버지 김극천, 아들 김진환
조선 시대 통영 12공방 장인의 후손으로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무형문화재 아버지와 그 밑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아들은
사람들이 전통 예술의 가치를 다시 알아보는
그날을 꿈꾸고 있다.
대학에서 문화재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지만 주문량이 많지 않아
작업 기회가 부족한 게 안타깝다.
갓, 자개, 옻칠, 목가구, 발, 금은제품 등
각양각색의 물건을 만드는 통영 12공방 곳곳에
전국 팔도의 지체 높은가문의 부인네들이
줄을 잇는 진풍경을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사실
여인네들의 가슴을 더 애태우게 만드는 것은
은은하고 기품 있는 광택에 나비, 박쥐, 태극, 물고기 등
2천여 가지의 장석이었다.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을 투자해야 완성되는 명품이다.
김진환(오른쪽) 씨가
4대 두석장인인 아버지 김극천 씨와 일하고 있다. |
"사람들이 가업을 잇게 된 동기를 많이 물어 봅니다.
근데 대단한 무엇이 있었던 게 아니라서
뭐라고 답을 드려야 할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들었던 망치 소리가 좋았고,
늘 사람들이 북적이고,
손님들이 오가는 분주한 일터가 좋았습니다.
그러다
대전 엑스포가 열려서 친구들하고 놀러갔는데
거기서
아버지가 시연을 하고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친구들이
대단한 아버지를 두었다고 다들 부러워하더군요.
초등학교 때는
할아버지 사진이 학교에 걸려 있었죠
그런 경험들을 통해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시고,
그분들이 하는 일은
이렇게 부러움돠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분들의 삶을 따르고 싶어졌고요.
그러다 장석 수요가 예전 같지 않고,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일꾼들이 하나둘 공방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 김진환
부모는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존재다.
때론 싸우고 넘어서야 할 존재이기도 하다.
'가업을 잇는 청년들'에는 두 가지 모습이 모두 공존한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올해 처음 시행한 '우수출판기획안' 공모에서
524곳, 1046편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상을 받은 화제의 책이다.
선조와 부모의 가업을 잇는 젊은이를 통해
우린 새로운 희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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