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 같이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는 것은 그 모임의 정체성과 방향을 보여주는 행동 강령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고,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는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에 기초해서 제자들도 기도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이어지는 말씀과 같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확신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께 모든 것을 주시는 것과 같이, 아들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신실한 아버지로서 성령, 곧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고 약속합니다(1-13). 구할 때 얻고, 찾을 때 찾아내고, 두드릴 때 열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찾고 구하고 두드렸기 때문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말 못하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만약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면 어떤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와 집이 설 수 없듯이 예수님은 귀신을 힘입어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또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증거로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다가 나와서 니느웨에 복음을 전했듯이, 예수님도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표적을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때에 스바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솔로몬보다 훨씬 지혜 있으신 분(지혜 자체 이신 분, 고전 1:30)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날에 니느웨 사람들도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인데,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요나보다 탁월한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눈은 진리를 깨닫는 바른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바르게 믿고 깨닫는 자는 등불과 같이 자기와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서 바른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14-36).
한편, 한 바리새인이 와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는지 말씀합니다. 그들이 내적인 정결한 삶을 통해서 이웃을 섬기면 그 겉과 속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함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외적 행위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 모두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어서 율법교사들의 잘못도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킬 수 없는 규칙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로서 참 선지자를 죽이는 자들이었습니다. ‘사가랴’는 역대하 24:20-21에 나오는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행위로 구원을 말하는 서기관들은 지식의 열쇠(구약 말씀)을 가지고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행하지 않음으로 자기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음을 책망합니다. 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에 책잡고자 노리고 있습니다(37-54).
오늘 말씀은 기도가 어떤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행위에만 초점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의 변화 모두가 중요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 육과 영혼, 내면과 외면, 믿음과 행위 모두를, 전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모두 변화를 받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넨...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