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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 동부그룹의 창업스토리
“어릴 때부터 나라를 위해 뜻있게 살고 싶어 기업을 일으켜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에 제철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다. 이제 그 꿈을 이루게 됐다.”
김준기 회장은 1944년 12월 4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김 회장은 부친이 유명한 정치인 김진만 선생으로 어릴 때부터 국가, 민족, 국익 같은 말을 무수히 들으며 자랐다. 때문에 김 회장은 정치인 집안의 영향을 받아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이 시대의 젊은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하고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 따라서 이런 가풍에서 자란 김 회장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정치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다른 길을 걸었고 기업을 택했다. 김 회장이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1968년 군을 제대하고 고려대학 경제학과에 재학 중일 때 미국을 방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김 회장은 당시 ‘전자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전자업계 미국 우수인재 유치단 일원으로 뽑혔다. 그는 하버드, 콜롬비아, MIT, 버클리 등의 대학과 전자업계를 돌아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국력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는 그때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발전시킨 에너지는 바로 ‘기업’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당시 즐겨 읽던 유명 기업인, 경제학, 경영학자의 책은 창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했다.
그는 “20세 초반에 100만 달러를 번 사람은 기업인으로서 일생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선박왕 오나시스 자서전의 구절을 읽고 큰 사업을 수행하는 훌륭한 기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또 카네기의 묘비명에 쓰인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을 부리다 간 사람 여기 누웠노라”는 글을 본 뒤 큰 기업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그러던 중 어머니 김숙자 여사의 갑작스러운 별세는 김 회장의 결심을 재촉했다. 어려서부터 사랑과 격려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던 어머니를 여윈 그는 앞으로 독립적으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정치활동에 전념하느라 집안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장남으로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압박했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안주하던 데서 벗어나 자신이 나아가야 할 진로를 하루 빨리 확정해야겠다는 생각도 더 이상 창업을 미룰 수 없게 했다. 결국 그때까지 준비해온 유학계획을 접고 ‘창업을 해야겠다’며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창업 구상 당시 김 회장의 최대 관심사는 ‘관광’이었다. 미국 여행 당시 여러 대학과 전자업체를 방문하는 일정 틈틈이 둘러본 라스베이거스, 디즈니랜드는 김 회장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한국과 같이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관광업은 외화 가득률이 높으니 평소 눈 구경을 하기 어려운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와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최고의 복합 리조트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유치하고 스키장, 경마장, 호텔, 카지노, 요트경기장 등 대규모 종합관광 레저단지를 개발하자. 또 서울을 중심으로 소양강-설악산-동해안-소금강을 연결하는 일일 관광 코스를 만들자. 특히 동해안에는 속초, 동해, 주문진 항구와 양양, 동해, 강릉 비행장이 있고, 스키장, 눈구경, 사냥터, 낚시터 등의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런 사업구상에 따라 종합광광단지를 개발하려면 우선 건설회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려면 관광회사와 운송회사를 세워야 하고 사람들이 여행경비를 쉽게 마련할 수 있도록 상호부금회사도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됐다.
하지만 당장 창업에 필요한 사업자금을 확보하는 문제에서 벽에 부딪혔다. 부친은 대학에 재학 중인 젊은 아들이 사업하는 것 보다 유학을 갔다 와서 계속 공부하기를 바랐다. 결국 김 회장의 자금 지원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미 기업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이 선 상태였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시작하는 사업이었기에 김 회장은 백방으로 뛰어 다니면서 친지들에게 자신의 사업구상과 계획을 밝히고 집요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결국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약 2500만 원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어려움 끝에 1969년 1월 자본금 2500만 원과 직원 2명으로 오늘의 동부그룹을 있게 한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을 설립하게 됐다.
이 같은 창업과정은 김 회장과 동부그룹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 건설사 창업은 주위 사람들이 반대하고 회의적으로 보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김 회장 특유의 집념으로 첫 번째 작품을 성공적으로 일궈낼 수 있었다.
“기업의 설립은 인류에 기여하는 것으로, 기업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꽃이며 에너지원이다. 기업가는 기업 활동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나는 한국 기업인들의 귀감이 되는 기업 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
미륭건설 설립 후 김 회장에게 닥친 과제는 건설 관련 면허를 취득하는 일이었다. 건설업체로서 종합토목공사를 시공하기 위해서는 특정 분야의 시공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면허를 확보해야 했다.
김 회장은 우선 토목 면허와 건축 면허 그리고 도로포장 면허를 취득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건설업 면허 중 토목과 건축 면허는 취득하기가 비교적 쉬웠지만 도로포장 면허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 도로포장 면허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국내의 대형 건설회사 10여 개에 불과했다. 도로포장 면허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당시로서는 전국에 몇 대밖에 없거나 또는 아예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포장 장비를 확보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
건설부 관계자들은 최근 3~4년 동안 도로포장 면허를 받은 업체가 한 군데도 없고, 면허 신청 기일도 촉박하니 이번에는 토목과 건축 면허만 신청하고 도로포장 면허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구청, 서울시청, 건설부 등 관련 부서들로부터 도장만 70여 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여기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왕 시작하는 사업이니 처음부터 가능한 체계와 면허를 갖추고 출발하고 싶었다. 급히 수소문을 하고 전국을 뒤져 1~2대씩밖에 없거나 아예 없다고 하던 장비들을 찾아내 소유권 이전 수속을 마쳤다.
직원들을 대기시켜 담당 공무원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도록 미리 붙잡고 영업용 택시 6대를 빌렸다. 릴레이식으로 움직인 끝에 자격요건 충족에 필요한 서류와 절차를 최단시간 내에 갖춰 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마련한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건설부에 찾아갔고 건설부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 많은 장비들을 그 짧은 시간에 구했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이 일로 당시 건설부 관계자들 사이에는 ‘건설업계에 큰 물건이 하나 나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면허를 받은 김 회장은 일감 확보를 위해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창업 초기에 구상했던 관광레저사업은 정치적인 문제가 얽히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도급 순위가 최하위인 600위 수준에 머물고 있는 동부건설로서는 정부에 발주하는 대형 공사에는 참여조차 할 수 없었다. 예산회계법상 도급한도가 낮은 업체는 큰 공사 입찰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도급 순위에 상관없이 입찰할 수 있는 민간 부문 발주공사나 주한 외국인 발주공사에 눈을 돌렸다. 공사 하나를 따내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달려들었다.
김 회장은 이때 미 육군공병단의 극동지역 사령부 공사를 극적으로 따냈다. 어려운 상황에서 따는 공사라 당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의를 다했다. 또한 김 회장은 대규모 민간 부문 발주 공사에 집중하기로 전략을 세우고 정보 수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 중의 하나가 연세대학교 이공대 공사였다. 이는 독일정부가 연세대학에 100만 달러(당시 돈으로 약 4억5000만 원)를 기부함으로써 성사된 공사로, 국내 건축공사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그러나 설립된 지 불과 2년여에 지나지 않고 건축 분야에 실적이 많지 않은 동부건설이 연세대학 이공대 공사에 참여를 시도한 것은 애초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건설업체들의 수주 경쟁 또한 치열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 공사를 어떤 일이 있어도 성사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향후 기업의 진로를 가늠하는 중대한 고비이며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력을 기울여 공사 수주를 준비해나갔다. 관련 분야의 인력을 대폭 보강, 종합 적인 시공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인적 체제를 정비하고, 공사 진행을 위한 복안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김 회장은 70여 차례나 연세대학 공사 관계자들을 찾아 가서 실적은 별로 없지만 최고의 시공능력과 경험을 가진 건축기술자와 설비기술자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회사들과 달리 하청을 주지 않고 직접 시공할 것임을 강력하게 설득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던 연세대학 관계자들도 동부건설의 시공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됐다. 무엇보다 젊은 회장의 의욕과 자신감을 상당히 신뢰했다.
이로써 동부건설은 국내 10대 건설사들과 당당한 경쟁 입찰을 통해 마침내 시공사로 선정됐다. 김 회장의 집념이 아니었다면 일궈내기 힘든 성취였다. 이 일로 인해 입찰 경쟁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현대건설의 수주 담당 임원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당시 건설업계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이 공사를 계기로 동부건설은 외형 성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으며 도급 순위 또한 일약 30위 이내로 도약하게 됐다.
연세대학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김 회장은 눈을 해외로 돌렸다. 1973년 해외 건설 전담조직인 해외사업부를 신설하고 사우디 현지에 파견하는 등 중동 건설시장 진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막상 진출은 쉽지 않았다. 국내에서 갓 자리를 잡아가는 업체에서 세계적인 건설회사들이 각축을 벌이는 중동 건설시장의 문턱은 높았다. 김 회장은 공사 수주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중동시장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부건설 해외사업부에 한 장의 텔렉스가 날아들었다. 미 육군공병단 지중해 사령부로부터 사우디의 주베일 해군기지(Mobilization Camp) 공사 입찰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장이었다. 이 텔렉스 한 장으로 동부의 중동 진출은 급물살을 타게 됐고 이후 김 회장과 동부그룹의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된다.
당시 세계 각국의 유명 건설업체에 발송된 초청장에 무명의 동부건설이 1차 대상이 된 것은 업계는 물론 동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김 회장은 왜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온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국내에서 수행한 미 육군공병단 극동지역 사령부 공사가 떠올랐다. 당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의를 다하던 동부건설을 눈여겨 보아둔 미군 감독관이 지중해 사령부로 전근간 후 그때의 동부건설을 다시 기억하고 보낸 것이었다. 동부건설이 앞서 뿌린 씨앗이 몇 년 후 사우디건설시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대공사를 수주하는 인연으로 작용한 것이다.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낯선 열사의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김 회장의 나이는 28세. 그는 “여기에서 내 사업인생의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열사의 황무지뿐이었지만 그곳에 외화를 벌어들일 기회가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내는 오일쇼크 여파로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장관들이 외국에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중동시장에 진출해 외화를 획득하는 것은 단순히 기업인이 돈을 버는 차원을 넘어 국가경제를 살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의 1차 입찰은 1975년 4월 미 육군공병단 지중해 사령부가 있는 로마에서 가까운 ‘리보르노’라는 도시에서 실시됐다. 김 회장을 필두로 한 입찰팀은 사생결단의 승부로 생각하고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입찰결과, 금액에서 1위를 했으나 내정가에는 400만 달러나 미달했다.
중동 공사에 뛰어든 것이 오히려 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 공사 예정 추정 금액을 잘못 판단하고 반드시 수주하겠다는 일념에서 빚어진 불행한 사태였다. 이대로 계약이 체결된다면 사우디 공사가 막대한 손실을 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순간이었다.
김 회장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해외건설 경험이 전혀 없었던 터라 가격산정이 정교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었다. 내정가보다 낮은 금액에 낙찰 받은 상황에서 그대로 공사를 진행했다면 1000만 달러 이상의 손해가 불가피했다.
“그때 나는 죽고 싶었다. 아니 죽으려 했다. 그런데 공사를 포기하면 이행보증금 360만 달러(당시 외환은행의 자본금 6250만 달러)를 떼임으로써 국가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더할 수 없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중동 진출과 성공의 꿈은 사라지고 좌절의 늪에 빠졌다는 생각에 피사의 사탑 앞에서 양주를 한 병 마시고 탑에 올라가 뛰어내리려고 작정했다. 이왕 죽기로 마음먹었더니 다시 한 번 부딪쳐 보자는 각오가 생겼다.”
일생일대의 기로에서 새로운 각오를 다신 김 회장은 발주처를 다시 찾아갔다. “가난한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 없다”면서 재입찰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기적적으로 재입찰을 성사시켰다. 당초보다 약 2000만 달러나 높은 금액으로 낙찰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총공사비 4800만 달러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거액이었다. 지급보증을 선 외환은행 자본금의 70%에 해당하는 국내 수주 사장 최대 규모의 단일공사였다. 이 공사에서 100% 감가상각을 하고도 1600만 달러의 이익을 남겨 전액을 한국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또한 공사 성격 면에서 이 공사는 비행장, 건물, 주택, 상하수도, 파워플랜트, 수처리 시설 등 토목공사와 건축공사가 혼합된 국내 건설업체 최초의 대형 복합 공사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건설업체들의 해외 공사 수주는 수백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으며 공사의 성격 또한 대부분 단순 도로 공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동부건설의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 수주를 계기로 한국 건설업체들에게도 비로소 수천만 달러, 1억 달러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 수주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중동 건설 경기가 퇴조하고 국내업체 간의 과당경쟁에 따른 덤핑 수주와 부실시공 등이 문제가 되면서 수많은 한국 건설회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사태가 잇따랐지만 동부건설만은 미수금 한 푼 없이 중동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외화를 고스란히 한국에 들여오는 대성공을 거뒀다.
김 회장의 ‘현지화 경영’이 중동 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우선 총괄본부를 한국이 아니라 중동 현지에 두기로 했다. 직접 현지에 상주하면서 전 세계의 거점을 직접 지휘하고, 현지의 각 현장을 건설현장 개념이 아닌 하나의 단위 회사 규모로 운용한 점을 들 수 있다.
서울 본사는 중동총괄본부의 지휘를 받아 현지의 각 단위 현장에 인력 및 자재를 지원하는 하나의 지원부서 기능을 담당토록 했다. 중동 현지의 각 현장소장 밑에는 국내 조직에서는 없는 기획부서와 기술행정부서를 둬 건설현장의 경영 관리도 크게 강화했다. 이는 동부건설이 업계 최초로 도입한 획기적인 제도로 다른 건설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현지화경영, 역발상경영으로 동부건설은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를 시작으로 1980년 이후 2~4억 달러에 달하는 대형 공사를 연달아 수주, 1980년 중동에서 철수하기까지 5년간 총 20억 달러의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 회장은 1977년 12월 수출의 날에 대통령으로부터 해외 건설 부문 은탑산업훈장을 받은 데 이어 1981년 제1회 건설의 날에는 금탄산업훈장을 수상했다.
특히 정부가 국가 경제 발전에 공로가 큰 건설인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건설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제정한 첫 번째 건설의 날 행사에서 김 회장의 최고의 영예를 수상했다는 사실은 중동 건설시장에서 쌓은 김 회장의 업적과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중동 건설시장에서의 성공신화에 힘입어 동부건설의 랭킹은 창업 첫 해 600위에서 순식간에 6위로 뛰어올랐다. 김 회장 개인의 소득 순위도 국내 1~2위를 다투게 됐다. 당시에는 외환차익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런 일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다른 회사들처럼 번듯한 사옥을 짓지도 않았다. 김 회장은 이 돈을 전액 재투자해 금속, 화학, 건설·물류, 금융 등 4대 국가 기간산업 중심의 사업복합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중동에서 거둔 성공을 기반으로 사업복합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김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 같은 재계의 거목들과 경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김 회장은 새로운 산업 분야에 진출하는 방안과 기존 사업 분야에서 부실회사를 인수하는 방안, 이 2가지 방안이 타개책이라고 판단하고 4대 분야를 중심으로 투자를 집중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무분별한 기업 확장을 지양하고 국가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전략적·계획적인 사업복합화에 주력함으로써 동부를 그룹화했다.
1983년에는 미국 몬산토사와 국내 최초로 반도체용 실리콘웨이퍼 제조회사인 실트론을 합작 설립했다. 때마침 정부가 30년 동안 문을 걸어 놓았던 금융시장을 개방하자 신규 허가를 받아 동부투자금융(현 동부증권)을 세우고 손해보험업(현 동부화재)에 진출했다. 또한 미국 보험사 애트나와 합작으로 동부생명을 설립했다.
또 여객운송업만을 하던 동부고속에 물류·하역·창고 업종 회사들을 합병시켜 육상운송전문 종합운송회사인 동부익스프레스로 키웠다.
합금철·선재사업의 동부메탈, 냉연강판의 동부제강(현 동부제철), 비료농약의 동부한농(현 동부하이텍 농업 부문)등 중화학공업에 투자를 집중하고 동부전자(현 동부하이텍)를 설립해 고부가가치 선진기술산업인 비메모리 반도체사업에도 진출했다. 이러한 전략적·계획적 사업복합화를 통해 동부는 1990년에 20대 그룹으로 진입했다.
1980년대가 사우디 성공을 바탕으로 국가 기간산업 중심의 그룹화를 전략적·계획적으로 추진한 시기라면 1990년대는 합리화 투자와 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그룹의 내실을 키우고 경쟁력을 강화해 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동부는 1997년 말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 속에서도 퇴출기업 하나 없이 오히려 반도체·철강 분야의 대규모 투자에 나서는 저력을 발휘했다. 1969년 창업 첫해 9200만 원에 불과 했던 매출액은 2005년 10조 원으로 늘어났다. 창업 당시 김 회장이 “75세가 되기 전에 반드시 100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겠다”고 자신과 맺은 약속을 15년 앞당긴 결실이었다.
<출처=경영의 神에게 배우는 1등 기업의 비밀│매일경제신문사>
[출처]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 동부그룹의 창업스토리|작성자 대장
출처 :서울대동문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최택만(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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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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