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잡아야 한다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
라틴어는
오래전 죽은 언어다.
라틴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거나 모국어로 삼은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하지만
라틴어는 소멸한 언어가 아니다.
게르만 어족인
영어의 70%를 차지하는 외래어 계열 대부분 단어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까탈루냐어어 등
로망스 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은 라틴어가 직접 조상이다.
라틴어는
로마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탈리아 중부의 라틴족
언어로 대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다.
지금은
가톨릭 미사에서 많이 쓰이고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필요한 언어다.
영어권이
아닌 우리와는 당연히 인연이 멀어도
한참 먼 언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비교적 친숙한 라틴어
문장이 세 개 있다.
많이 들어봤거나
의미는 알아도 그게 라틴어라는 사실은
몰랐을 수도 있겠다.
동사+목적어
로 이뤄진 짤막한 경구(警句) 같은 이 세 문장은 영화나
드라마나 노래의 제목으로 쓰였거나,
영화의
유명한 대사로 등장하면서 알려진 측면이 크다.
바로 이 세 문장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아모르 파티(Amor fati)’.
이중 세 번째는
아마도 요즘 우리에게 가장 친해진 라틴어가
아닐까 싶다.
어느 젊은이가
인터넷에서 “내 인생은 이 노래를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찬사를 헌정한, 가수 김연자가 부른 동명의 노래 덕분이다.
노래방에서,
가요교실에서, 지자체·대학 축제에서, 전국노래자랑에서,
결혼식장에서 “아모르♬ 파티♬”는 인기 상종가다.
6년 전에
나온 곡이지만 2년여 전부터 역주행을 했다.
‘갓모르 파티’,
‘갓연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노래의
인기몰이는 윤일상이 작곡한 신나고 중독성 있는 EDM(전자댄스음악)
리듬 때문이기도 있지만,
바로
그 ‘평범하면서도 심오한’ 가사 덕분이다.
노랫말의 핵심은 이 거다.
“인생은 지금이야…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슬픔이여 안녕.”
작사가
이건우가 귀에 쏙 들어오게 잘 썼다.
니체의
고매한 철학을 기막히게 쉽게 풀어줬다.
‘아모르 파티’는
독일 철학자 니체(1844~1900)의 책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파티(fati)는
‘운명’이란 뜻이니 ‘운명을 사랑하라(운명애)’로
통상 번역된다.
니체는
인간이 다시 산다 해도 생애의 고통과 기쁨, 모든 좋고 나쁜
것들이 동일한 순서로 되풀이될 것이니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게 아모르파티라고 했다.
그러면 삶은
그 순간부터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의 바다로
열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니체는
인간이 운명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보았다.
두 번째,
‘카르페 디엠’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이 영화
덕분에 많이 알게 됐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1989년, 피터 위어 감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열연한 존 키팅 선생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명문 사립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한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있지.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 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인 거야. 오늘을 잡아야 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으로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네 길을 가라.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카르페 디엠’은
흔히들 “현재를 즐겨라”라고 옮긴다.
그런데
그건 자칫 세속적 즐거움을 연상시키는 오류를 줄 수 있다.
의미를 정확히 하면 “이 순간에 충실해라”가 더 맞다.
‘카르페 디엠’의
영어 버전은 ‘Seize the day’다.
우리말로
하면 ‘오늘을 잡아라’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그 영화에서 처음 쓴 게 아니다.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상자인
미국 작가 솔 벨로(1915~2005)가 1965년에 쓴 짧은 소설의 제목이다.
그 소설에는
“과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시즈 더 데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 3년 전에 나왔다.
로빈 윌리엄스는
이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었다.
두 편의 카르페 디엠
영화에 출연한 윌리엄스가 2014년 우울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안타까우면서도 아이러니다.
이 말의
저작권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에게 있다.
카이사르를
이은 로마제국의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가할 때,
그간 고통을 겪은
로마 시민들이 이제는 마음 편히 오늘을 즐기며 살아가라는
의미로 시집에 이 말을 썼다.
세 번째,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메멘토 모리’는 ‘카르페 디엠’보다는
좀 뒤늦게 알려진 말이다.
2018년에
개봉한 이철민 감독의 독립 영화 제목이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유명한 스릴러 영화 ‘메멘토’(2001년)가 귀에
익숙하다.
얼마 전 KBS
‘도전 골든벨’의 마지막 50번 문제로 출제돼
그날 바로 실검에 올랐다.
최근에는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교 동기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페이스북으로 축하를 하면서,
이 말을
기억하면서 정치를 하라고 당부해
화제가 됐다.
고 스티브 잡스는
그 유명한 스탠포드대 졸업식 연설(2005년)에서
‘메멘토 모리’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내가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많은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말했다.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남의 인생을 사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라고 했다.
‘욜로
’(You only live once)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는 ‘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Hodie mihi, cras tibi)’
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이다.
오늘은
내가 관이 돼 들어왔지만, 내일은 네가 들어올 것이라는 말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삶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다.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화려한 시가행진을 한다.
이때 비천한
신분인 노예 한 명을 장군 옆에 태워 끊임없이
이 말을 외치게 했다.
왜 그랬을까.
오늘은 당신이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 당신도 죽는다,
그러니 오만하고 우쭐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메멘토 모리’는
‘카르페 디엠’과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는 죽음을,
하나는 현재를 말하지만 그 메시지는 결국 같다.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잊지 말라’는 건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강렬한 경구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라는
‘아모르 파티’도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에게
익숙한 이 라틴어 세 문장 모두는, 삶의 태도에 대한
진지한 라틴어 격언이자 잠언이다.
라틴어는 서양 사상의 뿌리다.
서양 학교에서는 죽은 언어인 라틴어를 필수나 교양으로 가르치는데,
우리가 한문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단지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언어에 담긴 정신을
읽자는 것이다.
누구는
라틴어를 ‘흐르는 맑은 샘물’이라고
표현했다.
프랑스 학자
뱅상 퀴에프는 인생을 풍부하게 해주는 15개 라틴어 격언을
해설한 ‘라틴어 편지’(2017년 국내 발간)라는 책에서
위에
열거한 세 라틴어 문장을 제1장에 넣었다.
비슷한 책으로
가톨릭 사제인 한동일 교수가 서강대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라틴어 수업’(2017년)이
한때 베스트셀러가 됐다.
처음에는
소수의 학생들만 강의를 듣다가 소문이 나면서 수백 명이
수강한 서강대 최고 명강의 중 하나가 됐다고 한다.
그의 라틴어 강의는
결국 언어를 통한 종합 인문교양
수업이었다.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준,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값진 가르침이었다는
제자들의 편지가 책 말미에 실려 있다.
의외로
라틴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인문학 열풍의 덕이기도 하다.
라틴어를 배우는 한 포털의 카페 ‘바벨 도서관’은
회원 수가 3만 명을 넘는다.
일부 대학도
최근 교양 강좌로 개설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술자리 건배사로 위 세 개 라틴어
문장을 가끔 쓰곤 했다.
발음상으로
두 단어라서 호응이 어울린다.
“아모르”라는
선창에 “파티”라고 떼창하면 술자리가 화기애애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라틴어 문장이 하나 더 있다.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Hoc quoque transibit)!’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보너스] 우리 주변의 라틴어 단어들.
보너스(Bonus, 좋은), 유비쿼터스(Ubiquitous, 언제 어디에나 있는), 디바(Diva, 여신), 페르소나(Persona, 배역), 아모르(Amor, 사랑), 유벤투스(Jubentus, 젊음),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가 있는 사람), 스콜라(Schola, 학교), 옴니아(Omnia, 만물), 아쿠아(Aqua, 물), 코로나(Corona, 왕관), 무시카(Musica, 오락), 에쿠스(Equus, 말), 옵티머스(Optimus, 최고의), 스텔라(Stella, 별), 비타(Vita, 생명), 제니우스(Genius, 재능), 메아 쿨파(Mea Culpa, 나의 죄), 클레멘스(Clemens, 관대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고귀한 종이, 대헌장),
베리타스 룩스 메아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이 대학 나오신
분들은 평생 잊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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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
[출처] 오늘을 잡아야 한다 - 영상메세지|작성자 화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