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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결사반대+평화협정체결 국민총궐기대회> | |
작성자 : 바닥사람 | 2013-04-04 12:37:44 조회: 44 |
<전쟁결사반대+평화협정체결 국민총궐기대회> 벌써 몇 십 년 전이다. 문익환 목사님이 광주 YMCA 강당에서 강연을 하면서 북한과 남한이 서로 아끼고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고 통일을 하겠느냐고 했다. 남한은 반드시 친북을 해야 하고 북한은 반드시 친남을 해야만 평화와 통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사자후를 토하셨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친북을 하려고 노력하여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이끌어냈다. 잃어버렸다는 그 10년 세월에는 우리가 전쟁이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승만은 미국이 시키는 대로 나라와 동포 허리를 잘라놓고 반북을 하다가 6.25전쟁을 맞아 수백만 동포들이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등속 역시 반북을 빙자하고 국가보안법을 휘둘러 숱한 사람을 죽이고 독재를 펼쳤다. 이명박 반민족반역도당이 남북관계를 망쳐놓고 문재인이 아닌 박근혜가 대통령 자리에 앉은 지금 우리는 또다시 전쟁 일보직전에 서 있는 신세가 되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국과 맞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이 시점, 문재인 같았으면 국민총궐기대회를 열어 미국으로 하여금 당장 전쟁연습과 폭격훈련을 중단하도록 강제하고 평화협정을 주선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문재인+안철수+이정희+야당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전쟁결사반대+평화협정체결 국민총궐기대회를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북, '핵타격 작전 비준' 백악관에 통고>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026 <북미 전쟁 발발시 관련 주변국 정황>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20739§ion=section80§ion2= <이승만, 땡큐...>-Chris Kim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저 가락 시절 운상원과 함께 아자방으로 유명 짜하던 그 삼한 옛 절, 칠불암은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불타버린 채로 하꼬방 같은 생철 움막 한 채만 남았다. 지리큰뫼가 우는 것처럼 맑고 서러운 종소리가 열흘간이나 들려왔다고 하였다. 토벌대가 지른 불에 종각이 타면서 범종이 우는 것이었고, 아자방이 있는 선방인 벽안당과 설선당, 그리고 법당과 산령각이며 요사채에 불길이 휩싸이면서 내는 소리였다. 그 때에 죽은 지리산 사람들이 칠백명이 넘는다 한다. 잣눈이 쏟아지던 1948년 12월 초순이었다. 칠불암만이 아니었다. 대원사가 타고 법계사가 타고 연곡사가 탔다. 영원사가 타고 벽송사가 타고 금대가 탔다. 영각사 타고 용추사가 탔다. 사방 천 리 지리큰뫼 안에 있던 쉰이 넘는 크고 작은 절들이 죄 잿더미가 되었다. 절만 탄 것이 아니라 절안의 문화재들이 죄 타버렸다. 가락국 유래를 적은 왕산사지와 마적도사 철인을 간직하고 있던 법화사가 탔다. 솔거가 그린 용추사 유마상과 숱한 경판들이 탔다. 일곱 짐 통나무를 세 아궁이에 갈라 넣고 불을 한 번 지펴놓으면 백일간 식지 않는 가락국 때 온돌로 천 년 이상 내려오던 아자방과 또한 천 년 이상 내려오며 난세마다 이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던 칠불암 범종과 석조여래좌상이 불탔다. 왕건 어머니인 성모석상과 그 시녀로 보이는 돌조각상을 모시고 있던 천왕봉 성모사가 탔다. 미군정청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이 천년 고찰들을 불지르고 온 경찰토벌대장의 자랑스러운 보고에 따귀를 올려붙이며 "공비를 잡으라고 했지 누가 문화재를 태우래?"라고 했단다.... 불에 태워죽여도 시원치 않을 두 잡색휘들!! 지리산 품의 숱한 여염집들이 불탔고 그속의 숫진 사람들이 죽었다. 칠불암 범종이 열흘간이나 울었다는 것은 지리산니 노하고 있는 증좌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도 칠불암이 불타면서 지리산 테안이 피바다가 되었는데 4백년만에 다시 동족 손에 피바다가 되었다. 당시 3연대 2대대 정보참모 김모대위는 죄장 유무를 캐지 않고 사람들을 죽인 탓에 염라대왕이라 불렸다. 지리산 중턱 이천여 호가 그 당시 소실당하여 폐허가 되었다. 소설가 김성동 글 발췌 첨삭 <이 자식들은 전쟁 못해 환장했는가봐>-박영우 北 "존엄성 훼손 땐 가차없이 개성공단 폐쇄"경기신문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개성공단 관련 신문들의 논조입니다.. 개성공단 폐쇄를 이렇게 많은 언론들이 부추기고 있는지는 몰랐네요. 북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폐쇄 한다고 경고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많은 언론들이 개성공단 폐쇄를 약올리는 듯 하네요... 北, 군 핫라인은 끊고 개성공단 달러만 챙기나 동아일보 北, '달러박스' 개성공단 출입에는 '노터치' 연합뉴스 북한, 달러박스 개성공단은 노터치 서울경제 北, 개성공단도 南위협 수단… ‘달러박스’ 포기 어려워 국민일보 김정은 평양선… 核 불바다 위협하면서 '개성 달러'는 챙긴다 조선일보 北, 전형적 살라미식 심리전 서울신문 “정은이 삐졌니?” 北 개성공단 폐쇄 '자해공갈' 뉴데일리 北 달러 궁했나..개성공단 ` 고무줄 휴일' 논란달러 급했나… 北 개성공단 `휴일` 늘려 매일경제 개성공단 입출경 정상… 북한 위협은 결국 내부 결속용? 한국일보 한반도 최고 부자 김정은, 불장난은 언제? 뉴데일리 北, 연일 위협 하면서도 '달러 박스' 는 결코 포기 못해? 한국경제 북, 달러 확보 위해 개성공단 쥐어짜기? 데일리안 <지슬 앞에 대구가, 지슬 뒤에 여수/순천이 있다>-Jay H. Sean 대구는 해방 직후까지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좌익들의 온상이었다. 사회주의자들과 미군정이 한판 제대로? 맞장을 화끈하게 뜬 사건이 46년 10월 "대구 폭동"이었다. "패배주의적 무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남, 호남, 충청 등 삼남지방은 물론, 경기 지역 일부로까지 확대되는 듯하다가 수그러든다. 제주 4.3사건은 그로부터 18개월 후인 48년 4월 발생했다. 인구 6만명 가운데 2만7천8백명이 사망했다. "여수 순천 반란사건"은 그 6개월 뒤에 일어났다. 4.3 토벌 작전 출동을 군이 거부한 사건이다.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힘을 과소 평가하고, 자신의 역량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개인의 경우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대한 조직이나 국가의 역사적 사건이 되면... 수많은 이의 생명을 빼앗고, 민심의 이반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교훈을 이미 백골마저 진토되어 사라진 대구 폭동의 주역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그 반대쪽 사람들. 위 세가지 사건들을 "대구 폭동" 제주 폭동" "여순 반란"이라고 이름 붙이려 노력하는 사람들. 또 다시 휴전선 이북의 빨갱이 사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여기는 대구입니다>-Chris Kim 아래사진 공유하면서 글이 공유되지 않아서 김형민 님 글 다시 올립니다... -------------- 여기는 대굽니다. 좀처럼 정이 가지 않는 나의 본적지. 연고라고는 우리 동생의 시댁이 이곳에 있다는 정도밖에 없는 대구가 내 본적지가 된 것은 피난 나온 아버지가 호적을 처음 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나는 두만강을 헤엄치며 자라났을 터이고 요즘은 44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축구단의 활약에 환호하고 있을 겁니다. 며칠 전 일 때문에 전쟁이 가져다 준 나의 본적지 대구에 왔습니다. 동네 편의점 세 군데를 뒤졌는데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없네요. 식당에 가도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꼭꼭 구비되어 있는데 다른 신문 찾기란 대한민국 검사들 소갈딱지 찾기보다 어렵습니다. 명색이 조중동인데 동아일보가 왜 안보일까 잠깐 갸웃했는데 동아일보가 전라도에 뿌리를 둔 신문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이 들어요.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례자 아주머니의 증언으로 비추어도 그래요. "나는 원래 전북이거든요. 근데 충청도에서 왔다캐요. 전라도에서 왔다 카면 아이고 난리가 나요. 대구 사람들 꼭 물어 봐예. 어디서 왔냐고." 어휘는 경상도 사투리를 골라 쓰려고 노력하지만, 억양은 어쩔 수 없는 타지 사람임을 드러내는 아주머니는 그렇게 내 본적지 대구에 곁뿌리를 박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 괜히 화딱지가 나 있었는데 마침 밥 먹으러 갔을 때 현직 대통령이 TV에 나오시는 걸 보고 식당 사장님이 서울 손님더러 "그래도 잘 하고 계시지요?"라고 용감하게(?) 물으시는 겁니다. 즉각 말투를 바꿔서 걸쭉하고 확연한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을 드렸지요. "서울 가서 그래 함 말해 보소. 전신만신에 후두리 맞고 밟히 죽을끼구마는." 어쨌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밥 먹을 때마다 봅니다. 별나게 6.25 얘기가 많이 나오네요. 참전국 노병들의 이야기부터 미공개 사진들이 줄을 잇고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는 자체가 놀라운 백선엽 씨의 근황이나 인천 송도고등학교 학생들이 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의 비석을 세운 이야기까지 가히 '상기하자 6.25' 구호를 빗자루 같은 붓으로 휘갈기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대해 생각을 더듬는 차에 언젠가 대구에서 마주친 바 있던 전쟁의 공포 한 자락이 몸을 칭칭 감아오더군요. 언젠가 얘기했던 흉가 체험 촬영 때였지요. 영남대 뒷산에 폐가가 된 안경공장에 귀신들이 단골로 출현한다고 해서 흉가체험을 즐기는 대학생들을 데리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 올라갔는데 이미 번듯한 병원이 섰고 흉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더군요. 이런 낭패가 있나 싶어서 하릴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검은색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피해자 위령제"라고 쓰여 있었지요. 위령.... 하니 일단 흉가랑 맞아 떨어지잖아요. 뭔가 사연이 있을 것도 같고...... 동굴 입구는 철창으로 막혀 있었지만 사람 하나가 들어갈 틈이 있더군요. 뭐 제가 들어갔으니 둘도 들어갈 틈이라고 해도 무방하긴 합니다. 끓어오르는 호기심으로 캄캄한 동굴 속을 플래쉬 하나씩 들고 질척거리는 동굴 속을 걸어 보니 가히 무슨 지하 세계 탐험대같이 흥분이 됐지요. 장화도 준비 안 되었는데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를 진창 속을 움퍽움퍽 들어갔어요. 그런데 여학생 하나가 비명을 질렀지요. 꺄아아아아악 얼어붙어 버린 우리 눈 앞에 나타난 건 해골들의 무더기였어요.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취재한 이후 몇 구는 수습을 해서 전시(?)도 해 놓긴 했는데 거기에 끼지 못한 백골들이 흡사 마의 산처럼 우리 앞에 버티고 섰던 겁니다. 그들은 49년 전의 오늘 터진 전쟁이 대구 코 앞에까지 밀려 왔을 때, 국군과 미군과 인민군이 운명을 걸고 벌이던 대공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이 골짜기까지 끌려 왔던 "좌익으로 판정된" 민간인들이었어요. 동네 사람들 인터뷰를 해 봤더니 그런 말을 합디다. "우리 아버지 말씀이 트럭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카대요. 사람을 가득 싣고. 그런데 나갈 때는 빈 차였답니더." 백골 중에는 채 여물지 않은 아이의 것도 있었어요. 그리고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총이 아니라 뭔가 다른 둔기에 의해 부서진 백골들도 있었고요. 당시 내무부 장관 조병옥은 수도가 부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대구에 남았다고 합니다. 대구 시민들은 조병옥 장관이 아직 대구에 있으니 피난 안가도 된다고 하면서 그의 용기를 찬양했다고 해요. 대통령부터가 수도 사수 녹음해 놓고 줄행랑을 친 자랑찬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내무 장관의 뚝심은 평가 받을만하지만 그 뚝심 찬 내무장관 휘하에서 3500명의 민간인들의 목숨이 이 동굴의 어둠에 묻히고 말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병 하나가 아쉬웠고 총 안 들기로 유명한 정훈 장교들까지 총격전에 나서야 했을 때였으니 그 학살을 지휘한 건 타지의 군 병력이 아니라 대구의 토착 경찰과 우익들이었을 겁니다. 아마 죽고 죽이면서 누군가는 아무개 아버지 나 좀 살려 주세요 라는 부르짖음을 들었을 것이고, 자기 친구 아들을 발견하고는 "쟤는 살려 주자"고 사정하다가 명령이라는 말에 몽둥이로 그 머리를 내려쳐야 했던 경찰관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한 달 전까지 함께 술잔 나누던 사람이 방아쇠를 당기는 풍경을 이승의 마지막 모습으로 간직한 채 수십 년 동안 동굴에 처박혀야 했던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 광산에서만... 3천5백 명이 죽고 묻혔습니다. '동방의 모스크바' 대구의 좌익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멸종되어 갔습니다. 어영부영 피난 나오느라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던 좌익들이 인민재판이다 뭐다 설치는 꼴을 보았던 이쪽 정부와 우익들로서는 "생사를 결하는" 싸움을 앞두고 '내부의 적'을 깡그리 소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음직합니다. 미군정에 대항한 대구 봉기 때 좌익들에 의해 눈알이 빠지고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상관을 똑똑히 보았던 경찰관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감행했던 우익들로서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이를 악물고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공포는 광기를 부르고 광기는 학살을 낳았고 학살은 생각의 다름으로 규정된 한 집단을 멸종시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의 세월에서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로당 군 총책 출신의 파시스트는 배교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자신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물론 비스무리해 보이는 이들조차 극도로 경계했고, 근절의 기회를 엿보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대구의 진보적 인물들을 진멸시킨 인혁당 사건은 그 절정이었지요. 전쟁의 폭풍우를 피해 간 지역, 태어날 때부터 저 집안이 어떤 집안이고, 무슨 생각을 갖고 살고, 아랫집 막둥이가 면서기를 했는지 인민위원회 연락원 노릇을 했는지 뻔히 알고 살아가던 지역 공동체가 온존해 왔기에 그 멸종은 더욱 치밀했고 잔인했겠지요. 대구 식당에 널려 있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뻔히 이명박 씹고 있는 손님들에게 "그래도 잘하고 계시지요?"라고 넌지시 견제구를 던지는 식당 아주머니,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거 풍토와 정치적 성향을 보이는 내 본적지 대구 사람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다가도 안쓰럽게 바라보이는 것은 결국 이 역시 생판 연고 없는 도시 대구를 나의 본적으로 만들었던 전쟁의 기나긴 그림자가 남긴 거뭇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바퀴벌레 하나 죽이기도 껄끄러워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나 자신 전쟁이라는 괴물이 벌인 판위의 졸이 되고 병이 된다면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를 정당화하는 방법을 또한 익히게 되겠지요. 또는 나를 죽이는 작업에 이미 합리화를 끝낸 누군가가 내 머리를 겨냥해 몽둥이를 휘두르게 될 수도 있겠지요. 만약에 나의 편(?)이 전쟁에서 지거나 오금을 못 펼 처지라면 십년이고 백년이고 동굴 속 아니면 바다 속 또는 골짜기 어드매선가 숨도 못 쉬고 썩어가야 하겠지요. 그래서... 핵 하나 가지면 도깨비 방망이같이 강성대국이 되고 자기네 존엄을 해친다면 씨를 말리니 어쩌니 하고 자빠진 나라나 "선제공격을 못하게 해서 연평해전에서 깨졌다"고 한심해 뵈는 울분을 토하는 쪽 모두에게 공포와 혐오가 욕지기같이, 가래침같이 튀어나갑니다. 대구에서 맞는 6월 25일은 그래서 착잡합니다. 또 다른 6월 25일은 우리 생전에, 우리 아이들의 생전에 없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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