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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여인의 중재
삼하 20:14-22
14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15 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16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17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18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20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
삼하 20:14-22 / [세바의 종말] 한편, 세바는 이스라엘의 온 지파를 찾아 헤매고 다녔으나 어느 성읍에서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있는 성읍 아벨벧마아가로 들어가 숨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그를 무시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곳은 훌레 호수의 북쪽에 있고, 단 성읍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직 그를 내세운 비그리 족속들만이 그를 따라서 마아가 성읍으로 들어갔다. 15) 요압은 군인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가서 당장 그 성읍을 포위해 버렸다. 그리고 우선 바깥 성벽보다 더 높은 장벽을 쌓고 내부의 성벽들을 부수어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16) 그런데 그 성읍 안에는 슬기로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이 성벽 밖으로 요압의 군인들에게 외쳤다. `여보세요!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제가 할 말이 있으니 요압 장군을 불러 주세요!' 17) 요압이 여인에게 다가오자 `당신이 요압 장군이세요?' 라고 물었다. 요압이 `그렇다.' 라고 대답하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님, 이 여종의 말을 들어 보세요!' 요압이 `어서 말하시오.' 하고 허락하자 18) 그 여인이 이야기하였다. `옛부터 사람들은 무슨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벨과 단에 가서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19) 그만큼 여기 있는 두 성읍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평화스럽고 진실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이스라엘의 어머니 같은 이 성읍을 파괴하려고 하십니다. 당신은 여호와의 소유인 이 성읍을 없앨 작정이십니까?' 20) 요압이 대답하였다. `성읍을 없애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오! 21) 다만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는 자가 다윗왕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이 성읍에 들어와 숨었소! 나는 그 사람을 잡아가려고 온 것뿐이오. 여러분이 지금 그 사람만 내준다면 내가 이 성읍에서 당장 떠나겠소.!' 22) 그 여인이 이렇게 약속하였다. `우리가 곧 그의 머리를 잘라서 성벽 너머로 던져 드리지요!' 그녀가 성 주민들에게 지혜로운 말로 잘 이야기하자 주민들은 세바의 머리를 잘라다가 성벽너머로 요압에게 던져 주었다. 그래서 요압은 나팔을 불어 군인들을 해산시켰다. 유다 군인들은 저마다 평화롭게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요압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윗왕을 찾아갔다. 요압은 이번 공적으로 다시 다윗의 신임을 받아 군대 총사령관의 직책을 되찾게 되었다.
아마사를 죽이고 군의 실권을 장악한 요압은 세바가 도피해 있는 아벨 성을 초토화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한 여인을 통해 성은 그대로 두고 세바만 죽여서 반란을 종결시킵니다.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14-19) 세바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여러지역을 다니면서 자신의 반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고, 무리들이 세바를 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4). 이에 요압과 병사들이 세바가 있는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성을 에워싸며 토성을 쌓아 아벨 성을 무너뜨리려는 찰나였습니다(15). 요압이 이끄는 군대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순간, 무명의 지혜로운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아벨 성 안에 많은 남자들이 있었을 텐데 무명의 여인이 성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것은 이 여인이 얼마나 용기 있는 여인인지를 보여줍니다. 그 여인은 요압 장군과 만나기를 청합니다(16). 그 여인은 요압에게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일을 끝내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옛날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벨 성에 있는 선생들에게 지혜를 빌려 인생의 해결책을 찾았고, 그만큼 아벨 성에 지혜자들이 많이 살고 있기에 이 성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요압 장군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18).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을 섬기는 충성된 사람이고 화평을 원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여인은 아벨 성을 대표해서 ‘우리 성은 다윗에게 충성하고 화평을 원한다. 그런데 왜 우리 성을 멸하려 하느냐?’라고 요압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20-22) 요압은 여인의 말을 듣고 강하게 부정하며 바로 응답합니다(20). 요압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어미 성과 같은 아벨 성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윗 왕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바를 처단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너희가 그만 내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라고 말합니다. 이에 여인은 요압에게 세바의 머리를 성벽에서 던지겠다고 약속합니다(21). 22절을 보시면 여인이서 성안에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혜를 가지고 성안에 백성들을 설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결국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여인의 용기와 지혜가 아벨 성의 참극을 막고 북이스라엘의 다윗에 대한 입장을 잘 표현하게 됩니다.
적 용 : 지혜로운 여인은 칼과 무력 앞에서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 사람입니까? 대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풀어가는 사람입니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속담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속담이지만 얼마나 화가 나서 흥분을 했으면 집을 태웠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압은 지혜로운 여인으로 인하여 자신의 진정한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배신자를 잡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결코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흥분은 진정한 목적을 망각하게 합니다. 차분한 마음과 눈을 가져 올바르게 보는 것이 참된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 설 교 >
여인의 지혜
삼하 20:14-22
압살롬의 반역이나 세바의 반란, 그리고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권력을 스스로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으로 자신을 위해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나 실상은 하나님에 대해 도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전에 아마사를 죽인 요압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요압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다윗의 정책에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왕으로서 정책을 펼쳤지만, 요압은 다윗의 긍휼과 사랑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긍휼과 사랑이 자신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군장으로 세운 아마사를 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의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요압은 자기 멋대로 군사를 이끌고 세바가 도망한 아벨 성으로 가서 세바를 잡기 위해 그 성을 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나와서 요압에게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18,19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은 아벨 성을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기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업이기에 누구도 손 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반란자인 세바를 잡기 위해 여호와의 기업인 아벨 성을 쳐서 허물어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압의 목적은 아벨 성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세바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바를 잡기 위해 아벨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결국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는 요압이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았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의 말을 듣고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20,21절)는 말을 하고, 여인은 성읍 사람들에게 요압의 말을 전하고 결국 세바의 목을 베어 요압에게 던짐으로서 요압이 물러가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대조되는 것은 연약한 여인의 지혜와 요압의 어리석음입니다. 요압의 어리석음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여호와가 보실 때 어떠한가에 대해 도외시 한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요압과 같은 어리석음에 치우쳐 살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압에게는 아벨 성이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것보다는 세바를 잡아 죽임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되찾고 군장이라는 위치를 다시 확보하는 것만이 관심이었습니다.
아마사로 인해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다윗에게도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세바를 잡는 것만이 목적이었기에 자신의 행위가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보여집니다.
여러분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입니까? 만약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라는 것이 우습게 여겨진다면,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존심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수시로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를 짓밟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원칙은 용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원칙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천국의 이 원칙에 순응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어떤 행위가 천국의 원칙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원칙에 도전하는 자는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압처럼, 아마사로 인해 무너진 자신의 위치와 위상을 되찾고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다윗의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가 용서와 긍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그 마음에 합류하여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굳게 세우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라는 관계 위에 우리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이나 위상 위치 등 모든 것은 지체라는 관계 속에서 무너져야 마땅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의 관계를 소중이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체라는 관계는 덮어 버리고 나의 자존심과 위상을 앞세우며 타인을 공격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마치 요압처럼 말입니다. 세바를 잡아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여호와의 기업인 아벨 성을 쳐서 허물고자 하는 것처럼 나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의 몸을 공격하고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혜로운 연약한 여인 하나를 세워서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라는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여인이 이 말을 했다면 요압처럼 부인할 것입니다.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치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도전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를 비난 한 것일 뿐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분명 요압의 의도도 아벨 성이 아니라 세바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도가 결국 아벨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의도가 어떠했는가는 상관없이 우리의 말이나 행동들이 예수님의 피로써 이루어진 몸의 관계를 치는 것이 되어 질 수 있음을 깊이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의의 사람으로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이 사실이 놀라운 기쁨으로 내 속에 자리한다면, 분명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는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내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가 굳게 세워지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그가 바로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천국은 나의 위상이나 자존심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고집하고 나를 세우려고 하는 길의 마지막은 멸망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은 무너진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못함으로써 결국 나를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는 내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러한 실상을 보지 못하고, ‘나는 꽤 괜찮은 신앙인이다’라는 자기 착각과 환상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을 보십시오. 천국의 원칙인 용서와 긍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옛 본성만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현실을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는 나의 현실, 나의 실상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대적이었음을 보게 될 때 자신에게 한없이 절망하면서 그러한 나를 악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예수님의 피의 귀함을 마음에 두게 될 것이고, 자연히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라는 관계 역시 내가 허물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용서와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지혜란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길로 나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혜롭게 처리한다는 것은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것이 되는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지혜가 여러분께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전도서 9:13-15절을 보면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인의 지혜가 성을 건졌는데 그 여인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지혜를 멸시하고 대신 힘을 높이는 것이 세상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높여 할 것은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자 힘쓰는 지혜 있는 신자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전도서 9:16-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지혜가 힘보다 낫습니다.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낫다는 이 말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나이 들고 힘있는 자가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지혜 있는 자가 어른입니다. 왜냐하면 힘이 아니라 지혜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곧 지혜자를 의미합니다.
공동체를 구하는 사람
이한규목사 / 삼하 20장 14-26절
< 자기를 힘써 단장하라 >
오래 전에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가 있었다. 성을 상품화하지 말고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는 취지의 대회였다. 그러나 당시 주최 측은 꾸미는 것 자체를 경시하는 대회는 아니라고 했다. 꾸미는 것을 조작된 미로 여기고 꾸미지 않는 것을 자연스러운 미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꾸미지 않는 것이 자존감이 높은 표시는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아름답게 보면서도 자신을 힘써 단장할 필요는 있다.
젊을 때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르신 부부는 주름진 얼굴로 서로에게 무슨 매력을 느낄까? 그저 오래 살았던 정으로 살 거야.”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보니까 그런 생각은 오해였다. 필자는 종종 나이 든 아내의 단장한 얼굴이 젊은이 얼굴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나이가 들어도 잘 단장하면 정성과 자존감이 느껴져 더 호감이 간다. 꾸미지 않고 옷도 지저분하고 머리도 부스스하면 젊은 사람에게도 호감이 덜 가게 된다.
지난 부활절에 93세의 신 장로님이 휠체어를 타고 오랜만에 교회에 오셨을 때 아주 곱게 보였다. 몇 십 년간 여성 장로로서 몸에 배인 온유함과 고상함도 매력적이었지만 늘 자신을 곱게 단장하는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자신을 고상하게 꾸미는 것은 자기 격려의 의미도 있지만 타인 배려의 의미도 있다. 자신을 잘 단장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시간을 아깝게 여기지 말라. 자기 단장에서도 부지런함과 정성을 나타내라.
자기 단장에 힘쓰라는 말은 사치를 부리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나의 외적인 단장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타인 감수성이 넘치는 모습도 일종의 배려다. 그런 배려에 믿음과 덕과 지혜까지 갖추면 그런 사람을 통해 가정과 교회가 살아나고 세상은 좀 더 밝아진다. 어디에 가든지 그 공동체를 살리고 빛나게 하는 존재가 되라.
< 공동체를 구하는 사람 >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다 소중하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고 공동체의 꿈을 멋지게 이루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사람은 대개 소수의 인물이다. 그처럼 공동체를 구하고 일으키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1. 지혜롭게 소통하는 사람
다윗 왕 때 압살롬의 반란 후에 세바가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니다가 팔레스타인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자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랐다(14절). 그때 요압 진압군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성벽을 쳐서 헐고자 했다(15절).
그때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말하며 요압과 대화 요청을 했다(16절). 요압이 성으로 가까이 가자 그녀가 정중하게 왜 이스라엘의 어머니 같은 아벨 성을 멸해서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느냐고 물었다(18-19절). 요압이 대답했다. “결단코 아벨을 삼키거나 멸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바가 왕 다윗을 대적했으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겠습니다.”
여인은 요압의 요구를 수용하고 돌아가 지혜로운 말로 반역자 세바의 머리를 베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결국 세바를 잡아 머리를 요압에게 던져서 요압이 나팔을 불어 군사들을 퇴각시켰다. 결국 지혜롭게 소통할 줄 아는 여인 하나가 아벨 성읍을 구했다. 그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앞세워 소통하면 얼마든지 놀라운 반전의 역사를 이뤄낼 수 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할 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했다(약 1:5). 그 하나님의 지혜를 앞세워 살면 누구나 어디서든지 공동체를 구하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
2.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
세바의 반란 진압 후 다윗 왕은 국가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때 요압은 이스라엘 전군 지휘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고 아도람은 감역관, 여호사밧은 사관, 스와는 서기관,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었다(23-26절).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은 왕의 근위대장을 뜻한다. 아도람이 맡은 감역관은 나라 운영에 필요한 조세와 노역 담당 관리다. 그는 후일에 나라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릴 때 백성들의 노역 저항 과정에서 살해되었다(왕상 12:18). 사관은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이고 서기관은 율법을 기록하는 관리이고 다윗의 대신은 다윗의 책사를 뜻한다. 여러 번의 반역을 겪고 조직 정비의 필요성을 느낀 다윗은 집권 후기에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주요 보직에 배치했다.
누가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가?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어디에 가든지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라. 때로 섭섭한 일을 당해도 변함없이 충성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복된 삶을 살려면 인내는 기본이다. 각 교회마다 리더를 세울 때는 섬기는 리더십도 보지만 오랫동안 교회에서 충성했는지를 더 본다. 교회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옮길 때는 이전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했던 시간도 하나님은 다 보신다.
맡은 일에 충성하고 좋은 편에 굳게 서라. 약삭빠른 마음을 가지면 성공할 것 같지만 실패하고 우직한 마음을 가지면 실패할 것 같지만 성공한다. 부족한 부분을 보면 약삭빠른 사람은 “어떻게 이 상황을 회피할까?”를 생각하지만 우직한 사람은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까?”를 생각한다. 약삭빠르게 행동하면 점차 변질의 주인공이 되어 공동체를 죽이지만 충성스럽게 행동하면 점차 변화의 주인공이 되어 공동체를 살릴 것이다.
3.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
성도 앞에 생기는 불행한 사건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한 삶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해 주어질 때가 많다. 지금 국제 관계가 대결 구도로 흐르면서 경제는 어려워지고 극심한 사회 갈등으로 창조적인 문화 발달 능력도 약해지고 있다.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너무 빨리 선진국이 된 것처럼 과시적인 마음을 가진 것 같다. 지금의 어려움을 삶의 내면 문제와 근본 문제를 더 살피는 계기로 삼고 왜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한국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좀 더 신실한 삶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요새 한국 교회의 영향력과 이미지가 크게 추락했다. 신학교 공부도 대충 하고 안수도 이상하게 받은 목사가 거친 정치적인 발언과 외설적인 발언으로 순수한 성도를 극단주의로 몰아가고 돈까지 탐하니까 많은 한국 교단들이 그를 이단이라고 규정해도 일반인들은 그런 깊은 내막을 거의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의 이미지가 더 망가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전도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 교회의 할 일은 더 많아지고 있는데 교회의 힘은 더 빠지는 추세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지금의 현실을 하나님 앞에 더 신실해지고 새로워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진짜 성도는 어려울 때 빛나는 성도다. 어려울 때 나의 진가와 나의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게 하라. 참된 예언자란 이상한 계시를 보고 미래를 정확하게 앞서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울 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앞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지금의 어려움은 우연한 불운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 징조다. 이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교회의 앞날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지 말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면 어려움은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 구약 시대에 회개할 때는 옷을 찢었지만 옷보다 마음을 찢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서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살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면 내 주위로부터 죽은 것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 보상에 집착하지 말라 >
신실한 삶에서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핵심 자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복과 보상을 바라지 않는 자세다. 교회에 꾸준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만으로는 신실하다고 말하기에 조금 부족하다. 교회에 꾸준히 봉사하고 헌신하면서도 교회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보상을 바라지 않는 자세까지 있어야 신실한 것이다. 좋은 일을 한 후에는 공로 의식과 보상 심리를 깨끗이 지우는 신실함을 갖추라. 러면 하나님이 더 복과 보상을 내리신다. 심은 대로 거둔다. 지금 심은 대로 덜 거둔 것 같으면 나중에 어디선가 거둔다. 때로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나 교우가 거둔다.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교회를 신실하게 섬겨도 교회 외적으로 커지지 않으면 억울하게 인생과 시간을 손해만 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씨를 뿌린 만큼 교회가 커지면 지금 보상받은 것이지만 씨를 뿌린 만큼 교회가 커지지 않으면 보상이 차곡차곡 저축되었다가 언젠가 나중에 신실한 교우와 후대가 복 받는 역사로 나타날 것이다. 그처럼 내가 선을 씨앗을 뿌리면 어디선가 반드시 복된 열매가 주어진다. 그 열매는 내가 원하는 열매나 보이는 열매일 수도 있지만 나의 상상을 초월한 열매일 수도 있다.
씨를 뿌린 만큼 현실적인 보상이 없다면 보상과 복이 어디선가 차곡차곡 저축되고 있다고 믿고 계속 선의 씨를 뿌리라. 씨를 뿌리는 일에 바쁘면 “많이 뿌렸는데 왜 보상이 없지.”라고 원망할 생각조차 없고 불평할 시간조차 없다. 그렇게 묵묵히 선의 씨를 뿌리면 심은 대로 거두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심은 것보다 더 거두는 역사까지 나타날 것이다. 어디서든지 신실함을 나타내라. 특히 하나님 앞에 신실하면 하나님은 나를 신실하게 품어 주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언젠가 뚜렷이 나타내실 것이다.
화평과 충성의 사람
삼하 20장 19~22절 / 이규왕목사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짐승과 달리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먼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할 때 자신이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일 그 사명을 망각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가 될 때 그것이 불신이요 타락이며 그 결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이 불행해지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지금 평화라는 말은 있으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국가나 교회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나 평화를 맛보기 어려운 불화와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평화를 원하면서 그처럼 원치 않는 불화와 갈등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부패한 인간의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그와 같은 이기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어떤 공동체이든지 그 모인 수가 많을수록 화합보다는 불화와 갈등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현상을 자주 목격합니다. 과연 그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과 해결책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갈등과 분열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와 너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 가지 공통점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 영토가 좁고 그 수가 많지 못한데 비해 지정학적으로 주변에는 강대한 세력들과 적대국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족이 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강대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민족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눈동자같이 지키시며 전쟁에 두려움없이 평화롭게 살게 하실 것을 성경 여러 곳에 약속하셨습니다.
(시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잠 1:33)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2) 또 하나는 내적으로 열두 지파가 분열하지 말고 하나가 되어 외세의 침임에 대항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고 협력함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변 나라들이 얏보지 못하도록 서로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시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기들을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이방 사람들을 본받아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죄악들을 자주 범하여 왔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약소 민족은 주변에 강대국들이 호시 탐탐 노리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더욱 단합하여 외세를 물리쳐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은 내부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므로 국력은 약화되고 없으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외세를 의존하다가 보니 결국은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분명히 다 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야 마땅하며 그것이 서로가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그렇게 멸망을 자취하고 말았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과의 갈등과 반목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쪽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지지하고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편이 유리하게 되기만 한다면 신앙이나 도덕성과 상관없이 비록 배은 망덕한 불효자식 압살롬이라도 지지하고 왕으로 기름을 붓는 불법한 일을 마다하지 않은 지역이기주의가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한시 바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왕권을 재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지체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이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우려 다윗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돌이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압살롬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역이기주의는 죽지 않았으며, 다윗을 지지하고 있는 유다 사람들 역시 그 기회를 통해서 자기들이 기선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으려는 이기주의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 화합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소수이지만 실세인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반목과 갈등을 일삼는 어리석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삼하 19:41)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문제는 그 같은 분열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화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보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불만을 터뜨리게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기회주의자들이 고개를 들고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다윗 당대만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정치 사회의 현주소이며, 심지어 사랑과 용서를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 교단이나 교회의 실상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등과 분열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사후처리보다는 사전에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남을 생각하며 화합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통해 미연에 방지하는 것만이 최선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반란과 내분
오늘 성경을 보면 무엇보다 화합이 절실하고 또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기회가 왔으며 다윗 왕이 나름대로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때에 비그리라는 사람의 아들 세바가 나타나 다윗을 감싸고 있는 소수의 유다 사람들 때문에 불이익과 소외를 당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하 20:1)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여기서 난류라는 단어의 뜻은 무익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파괴적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다른 성경에서는 비류나 불량자라고 번역되기도 한 말입니다.
(삼상 2: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삼상 10:27) 어떤 비류는 가로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세바가 들고 나온 것도 역시 지역 이기주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사울왕의 혈통인 베냐민 지파 사람인데 비해 다윗은 유다 지파로서 사울 왕가의 정통성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게하신 이도 폐하게 하신이도, 또한 목동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신이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가나안 족속들처럼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바는 그것을 인간의 이기심으로 해석하여 다윗에게 불만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의 이기심에 휘발유를 끼얹고 거기에 불을 던지는 일을 함으로 또 한번 이스라엘 공동체를 흔들어 놓으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세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겉으로는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혼란한 기회를 통해서 압살롬처럼 자기가 나라를 세워보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난데없이 나타난 세바가 어느 면으로 보나 도저히 다윗과 경쟁자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성경은 그를 가리켜 난류라고 한 것처럼 오늘날로 말하면 조직폭력배의 두목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바가 지역주의를 가지고 선동을 하자 곧 마음의 다윗을 떠나 세바에게로 향하였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심이라고 하는 민심의 현주소입니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그동안 다윗이 화합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 가버리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윗을 지지하는 유다 세력과 세바를 중심으로 아벨성에 모인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시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는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이를 묵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고 지금까지 그가 펼쳤던 온건책을 거두고 강경책으로 급선회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배반하고 압살롬의 오른 팔 노릇을 하였던 아마사를 요압 대신 총사령관으로 임명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총책임을 맡기고 삼일내에 군대를 동원하여 세바를 추격하도록 명령하고 요압의 동생 아비새도 세바를 쫓아 갈 것을 명하였습니다.
(삼하 20: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이제 다윗의 일행은 공동체의 승리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총 단합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윗 공동체 속에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다윗을 충성스럽게 받들던 요압이 일방적으로 아마사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 아마사가 세바를 쫓기 위해 다윗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을 기회로 아마사를 방심하게 한 후 무참히 살해 하였습니다.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새
요압이 아무리 아마사의 인사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힘을 합쳐서 세바를 무찔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이기심에 사로잡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아마사를 죽인 것은 공동체의 화합을 깨는 이적 행위였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반란을 주도한 세바도, 아마사를 죽인 요압도 물론 나름대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후일에 세바도 아마사도 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자아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3. 한 여인의 충성
아마사의 죽음을 다윗 군대의 지휘권은 자연이 요압에게 넘어갔습니다. 요압이 이끄는 다윗의 군대는 세바의 일행이 피신해있는 아벨 성을 에워싸고 세바가 항복하지 않자 성을 공격하기 위해 아벨성과 맛대응할 토성을 앞에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삼하 20:15)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이제 아벨성은 마치 피를 맛본 이리처럼 흥분하기 시작한 요압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죄 없는 수많은 양민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과 압살롬 부자지간에 불화와 반목,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선동하는 지도자들과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그에 동조하는 군중들의 편가르기와 사사로운 복수심이 이와 같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계속 극단으로 치달을 뿐이지 어느 누구도 이를 화합하려는 중재자로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남북 분단이나 동서간의 갈등이나 계층간의 대립과 폭로 전들이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알고 보면 어느 한 두 사람의 이기심에서 발로되어 선동되어지는 경우가 허다함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지혜로운 한 여인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피바다가 될 아벨성을 위기에서 건져낸 한 여인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하 20:16)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세바의 일행이 은신해 있는 아벨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성으로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벨성에 가서 물어 보면 그 문제가 해결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난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성이었습니다.
(삼하 20:18)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이제 요압에 의해 유서 깊은 아벨성은 일순간에 파괴되고 피바다를 이루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장군이나 남자가 아닌 나약한 한 여자가 아벨성을 구하겠다고 자리를 떨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의 개인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그 여인이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자기 몫을 챙기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인이었다면 그러한 일은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겉보기에는 나약한 한 여인에 불과하였으나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충성심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위기를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요압과 무력으로 맞설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수수방관하지 않고 그의 말 잘하는 은사를 가지고 요압을 설득하였습니다.
(삼하 20: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지혜로운 여인은 지금 요압이 아벨성을 멸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벨성 사람들에게 주신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려고 하는 불신앙적인 행위라고 당당하게 요압의 과오를 지적하였습니다.
요압은 비록 인정사정없는 무자비한 장군이었지만 여인의 지혜로운 말에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대화의 주도권이 지혜로운 여인에게 넘어갔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이 요구하는 것이 아벨성이 아니라 세바 한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알고 아벨성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요압에게 내어 줌으로 아벨성을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삼하 20:22) 이에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서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나아가니라
만일 지혜로운 여인의 그 같은 헌신은 아벨성 사람들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을 막는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장군도 남자도 아닌 한 평범한 여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이기심을 버리고 남다른 신앙심과 공동체를 위한 애국심과 충성심이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자랑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참으로 강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다윗이나 요압이 가지고 있던 부귀권세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밖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사랑과 충성인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여인이 보여 준 지혜로움의 바른 자세가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즉 지혜로운 자는 언제나 말과 혀로 만이 지혜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자기 희생을 사랑과 진실함을 따라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못한 자들의 사사로운 지혜는 오히려 버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참조, 잠 14:1).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라도 다하는 현대인에게 지혜로운 여인과 같은 자세는 참으로 필요하다. 목적이 선할 때는 그 수단도 아울러 선해야 함을 우리는 여기서 더 잘 알 수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갈등과 분열과 분쟁이 극심한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 공동체가 바라는 화합과 평화는 바로 오늘 성경에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충성을 바친 지혜로운 한 여인의 헌신을 오늘 우리도 본받아 민족과 교회의 화평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지혜와 충성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한 여인의 지혜
삼하 20:14-22 / 정연해목사
미국의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의 어린 시절에 이런 일화가 있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동네 가게에 갔다. 어머니가 물건을 살 동안 카네기는 수북이 쌓여 있는 앵두 상자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있었다. 이 모습을 본, 주인 할아버지는 “먹고 싶으면 한 줌 집어가라.”하였다. 그래도 어린 카네기는 앵두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주인 할아버지가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앵두를 한 줌 집어서 카네기에게 주었다. 카네기는 두 손으로 앵두를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가게 문을 나설 때 어머니가 카네기에게 물었다. “왜 처음에 안 집었니?”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 “할아버지 손이 내 손보다 크잖아요.”
카네기는 어릴 적부터 지혜가 남달랐다.
옛날 왕을 즐겁게 해 주는 광대가 있었다. 어느 날 큰 죄를 저질러서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서 이렇게 말했다. “너를 당장 처형해야 하지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이 모래 시계의 모래가 밑으로 다 떨어질 때까지 네가 어떻게 죽고 싶은지 생각해 보고, 죽을 방법을 말해라. 그러면 원하는 방법대로 죽여주겠다. 알겠느냐?”
한 참 후, 모래시계의 모래가 밑으로 다 떨어졌다. 광대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마, 이 미천한 종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인은 늙어서 죽는 방법을 택하겠나이다.”
늙어서 죽는 방법을 택하겠다? 왕은 기가 막혔지만 약속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광대는 처형당할 위기에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지혜가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가진 자가 대개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다. 지혜 있는 자가 사회에 공헌을 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여러분도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한다.
오늘 본문에는 한 지혜로운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란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두 번째 반란의 두목은 비그리의 아들 세바였다. 성경은 그를 불량배라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 10지파와 유다지파가 다투는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이번에도 다윗을 따르지 않고 세바를 지지했다.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를 불렀으나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아비새를 불러 세바를 추격하게 했다.
세바는 많은 무리를 이끌고 아벨 성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윗의 군대는 아벨 성읍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았다. 아벨 성읍 사람들이 세바의 반란에 동조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성안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아벨 성읍도 쳐서 헐고자 하였다.
그때 아벨 성읍의 한 여인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16절
여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름이 없는 것을 보아 유명한 여인이 아니다. 평범한 여인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 여인을 가리켜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하였다. 그 여인은 다윗 군사들에게 가서 할 말이 있으니, 요압장군을 불러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요압장군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여인은 요압과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보자.
17-21절
여인이 요압에게 말했다. “아벨 성읍 사람들은 옛날부터 화평하고 충성된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나이까? 당신들이 어찌하여 우리를 멸하려 하나이까?”
요압이 대답했다. “너희들을 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너희 성안에 다윗 왕을 대적하는 세바가 있기 때문이다. 세바만 넘겨주면 우리는 물러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인이 말하기를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 던지리이다.” 약속하였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22절
여인은 자기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성 밖으로 세바의 머리를 던지게 했다. 그러자 요압장군은 즉시 나팔을 불어서 작전종료를 알리고 물러갔다.
하마터면 천하무적 다윗 군대와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성읍도 무너질 뻔하였다. 그런데 여인의 지혜로 무사하였다. 그 여인은 이름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위대한 일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권력도 아니다. 명예도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잠언을 통해 이런 말씀을 주셨다.
*잠언 3:13-15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여인과 같은 지혜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아벨 성의 여인은 어떻게 해서 그런 지혜를 가졌을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다. 19절에 보면 여인이 요압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하였다. 여호와의 기업을 멸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절대 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참다운 지혜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 되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누구에게 지혜를 주시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되 어떤 경로를 통해 주시는가? 대체로 3가지 경로를 통해 주신다.
먼저,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 주신다.
하나님은 오늘 날도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그의 말씀은 오류가 없는 영원한 진리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자가 지혜를 받는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하였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시119:98).”하였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그 안은 예수 안을 의미한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지혜를 얻는다.
지혜를 얻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힘쓰라. 머리가 좋아야 지혜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큐가 천재라도 어리석은 사람이 많다.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또, 기도를 통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지혜를 주신다.
우리 인생에 필요한 지혜의 대부분은 성경을 통해서 받을 수 있지만, 성경을 통해서 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기도하라고 하셨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기도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풍성하게 받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 지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되 말씀을 통하여서, 기도를 통하여서 주시지만 때로는 믿음이 성숙한 성도와의 상담이나 대화를 통해 주실 때도 있다. 지난 번 부흥회 강사로 오신 이경숙 선교사님과 같은 은사자를 통해 주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주신다.
세계역사를 보면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들이 다 잘 살고 문명이 발전하였다. 왜 하나님 경외하는 나라들이 잘 살고 발전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하고,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그때그때마다 지혜를 주셔서 복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지혜를 많이 주시기를 원한다. 그래서 부자도 되고, 사회에 공헌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크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길 바란다.
어떻게 하면 아벨 성읍의 여인처럼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 첫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두 번째는 지혜를 받은 대로 실천해야 한다.
아벨 성의 지혜로운 여인은 지혜를 깨달은 대로 실천했다. 그 여인은 다른 여인들처럼 지혜를 깨닫고 발만 동동 구르거나 한숨만 푹푹 쉬고 있지 않았다. ‘여자인 내가 무얼 하겠나.’하고 체념하지도 않았다.
과감하게 일어나 행동했다. 성 밖으로 나가 다윗의 군사들에게 요압장군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요압장군이 가까이 오자 아벨 성읍을 치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그러자 요압장군이 아벨 성읍을 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반역자 세바를 잡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자, 그러면 세바의 머리를 베어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자기 성읍사람들을 설득하여 약속대로 실천했다. 그래서 아벨 성읍이 무사할 수 있었다.
만일 그 여인이 지혜를 깨닫기만 하고 즉시 실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윗 군대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고만 있었어도 기회를 잃고 망했을 것이다.
사실, 여인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세바나 그의 군사가 알면 즉시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여인은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일어나 실천하였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셨다. 요압을 움직이게 하고, 자기 성읍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셨다.
하나님이 지혜 주시면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즉시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대지(The Good Earth) 작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Pearl Buck)은 일찍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서 자랐다. 어느 날 펄벅 아버지가 멀리 출장을 간 사이, 중국 농민들이 작당을 해서 밤에 펄벅 가족을 죽여 버리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펄벅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
그날 밤, 펄벅 어머니는 거실에 맛있는 다과를 준비해 놓고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다. 한 밤 중에 성난 농민들이 낫과 곡갱이 같은 흉기를 들고 난입해 왔다. 그런데도 펄벅 어머니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자 농민들이 도리어 당황하며 주춤했다. 펄벅 어머니는 더 따뜻한 얼굴로 대하며 준비한 다과를 먹도록 권했다. 농민들은 펄벅 어머니의 어떤 힘에 감동을 받았다. 농민들은 다과를 다 먹고 조용히 떠났다. 그 후 서로 좋은 관계가 됐다.
위기 상황을 맞아 펄벅 어머니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자 과감히 실천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성난 폭도들의 마음을 녹여주시고 위기에서 아무 일 없이 넘어가도록 도와주셨다.
지난 번 부흥회 때 이경숙 선교사님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행하면 좋은지 지혜를 주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예배를 드려라. 어떤 사람에게는 잠언을 읽어라. 어떤 사람에게는 새벽기도에 나가라. 어떤 사람에게는 찬양을 많이 불러라. 등등, 각자 상황에 따라 지혜의 말씀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 주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박현용 형제가 다시 교회 나오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 중학교 때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대학교 2. 3학년 되기까지 열심히 잘 나왔는데 그 후 교회 출석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한 2년 전부터는 거의 안 나왔다. 전화해서 교회 나오라고 권하면 “아, 예예”하고는 안 나왔다. 청년부 담당이신 정 목사님도 박현용 형제를 위해 많이 기도하시고, 노력도 하신 줄 안다. 그러다가 몇 주 전 제가 기도하는 중에 박현용 형제를 만나라는 감동이 왔다. 전화번호를 물어서 전화했더니 반갑게 받았다.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만났을 때, 박현용 형제는 이런 말을 하였다.
‘교회 나가는 것이 힘들어서 그동안 교회를 떠나 살았다. 교회 안 나가니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실수로 3층에서 떨어졌다. 머리를 다쳤다면 죽었을 터인데 다행히 머리는 안 다치고 다리만 다쳤다. 병원에 입원하여 생각해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퇴원하면 다시 교회에 나가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대영교회 갈까, 다른 교회 갈까 고민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영교회는 가다 말다를 많이 반복해서 대영교회 식구들 보기에 부끄럽고 민망하기 때문이란다. 어느 교회로 가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때 만약 하나님께서 박현용을 만나라는 감동을 주셨을 때 전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교회로 갔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지혜를 주실 때 미루지 말고, 즉시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도우시고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다.
박현용 형제가 앞으로는 방황하지 않고 교회 열심히 잘 나오도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다 같이 격려의 박수를 하자.
아벨 성읍의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놀라운 일을 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게 될 위기에서 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어째서 이름 없는 평범한 여인이 그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 받은 지혜를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즉시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많이 받기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다가, 기도하다가, 믿음의 사람을 통해 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받은 지혜대로 즉시 실천하여 우리도 놀라운 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
삼하 20:1-2, 14-22 살전 4:1-12 막 15:1-20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1. 대제사장과 그 무리,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
사순절 셋째 주일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적대자와 배신자들을 주제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불의한 자들과는 함께 멍에도 매지 말고, 그들을 삼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헤롯당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종교 지도자들이거나 지역 유지(有志)인 장로들, 그리고 정치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여기에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 백성들, 그리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추가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팔거나, 부인하고 떠났죠? 어떻게 보면 당시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 의해 철저히 버림을 당합니다. 아마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도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그들은 사랑 대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과 분노에 휩쓸려 형제를 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씀에는 이러한 인물의 예로 세바를 소개합니다. 다윗 왕 때,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이렇게 인간 세상은 배신이 끝없고, 진리의 적대자들이 늘 존재하며 참 평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미하이 문카치 <이 사람을 보라>(198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막 15:1-5)
불의한 자들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산헤드린 공회에서 합의를 보고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줍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고발했다고 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대답 자체가 꼬투리를 잡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무튼 빌라도는 알았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을 시기하고 있는 것을!
따라서 예수님을 풀어줄 방법을 생각하여 대제사장 무리에게 조건을 제시합니다. 명절이면 총독이 유대인 범죄자에게 사면권을 행사하는데, 민란을 꾸민 바라바와 예수님 둘 중 한 사람을 너희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막 15:6-10)
대제사장은 무리를 충동합니다. 결국 우매한 민중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 15:11-14)
결국 빌라도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지시합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Praetorium, ‘장군의 천막’이라는 뜻으로 로마 총독의 관저)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15-20)
대제사장 무리의 계략과 우매한 군중들의 분노,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의 우매함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분노와 우매함은 결국 계략을 짜는 이들에게 이용당합니다. 만약 유대 백성들이 지혜로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대제사장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절제하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악랄한 대제사장 무리는 더한 방법을 강구(講究)하여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이 일은 성경을 이루려는 것(막 14:49)’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죄가 이처럼 추악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아무튼 분노한 무리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2.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
사실 우리 사회(특히 교회)는 분노에 관해 ‘절제’와 ‘순종’을 가르쳐 왔습니다. 로마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BC 4∼AD 65)의 말처럼 “화를 내며 보내기에 우리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인 것입니다. 세네카의 책 『화에 대하여』(사이, 2013)는 인간이 화를 내는 일의 부질없음을 지적한 고전입니다. 사실 세네카가 볼 때 분노는 악입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에 한 번 사로잡히면 자식이 부모를 죽일 수도 있고, 선왕을 폭군으로 만들기도 하며, 가장 선한 존재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로 변하게 할 수 있으므로 분노는 악이다. 그 뿌리까지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세네카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곧 평정심을 유지할 줄 아는 현자(賢者)가 세네카의 이상형입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인간’, 곧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를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도 자주 보지 않나요? 왜냐하면 분노는 우리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큰 존재론적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분노를 “정의를 향한 영혼의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분노의 시작이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분노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어리석은 무리처럼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분노인가?
고려대 철학과 손병석 교수의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 연구』(바다출판사, 2014)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분노를 잘 분석했습니다. 먼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인용합니다. 『일리아드』 첫 대목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아끼는 노예 소녀 브리세우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분노합니다. 물론 아가멤논도 자신의 소유물인 크뤼세우스를 트로이 장군인 크리세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아킬레우스의 브리세우스를 빼앗아옴으로써 보상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 고전문학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분노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죠? 잘 아시다시피, 『일리아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하라.”
손병석 교수는 호메로스의 영웅시대가 기본적으로 티메(τιμή), 즉 ‘명예’를 중시(사랑)하는 ‘필로 튀모스’ 사회였음에 주목합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은 노예 소녀를 잃은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빼앗겼다고 느꼈기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명예를 가장 중시한 사회에서 명예를 빼앗긴 후에 일어나는 분노는 당연하였습니다. 결국 호메로스의 작품에 잇따라 등장하는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욱’하고 올라오는 야만적인 감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정치적 의미의 분노입니다.
손병석 교수는 이 책에서 플라톤의 분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노를 핵심적으로 다룹니다. 스승과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분노의 긍정적인 면에 주목했습니다. 불의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오히려 마땅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먼저 플라톤부터 살펴볼까요? 플라톤의 『국가』에 ‘튀모스(thymos)’라는 덕목이 나옵니다. ‘기개’ 혹은 ‘기상(氣像)’으로 번역되는데, 불의에 대해 느끼는 공분(公憤), 곧 분노를 의미합니다. 앞서 언급한 티메와 같은 말입니다.
이러한 튀모스에 관해 손병석 교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부정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분개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능력이며 이기적이기보다 이타적이며, 사적이라기보다 공동선을 지향한다.” 결국 플라톤의 이상 국가, 곧 정의가 올바로 실현되는 국가의 성공은 튀모스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변영로의 시인은 이렇게 읊었죠?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
플라톤과 비슷하지만,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중용(中庸)과 연관시킵니다. 따라서 분노에 깃들어 있는 ‘과도한 폭력성’을 경계하면서도 분노가 중용에 따라 표출되면 괜찮은 감정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또한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은 중용을 지키지 않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손병석 교수의 결론입니다.
“분노는 한 사회의 건강함을 포착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적 바로미터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분노가 단순히 억제의 측면만이 아닌 ‘이성과의 조화’나 ‘적합한 표출’의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또 한 개인이 ‘거룩한 분노’를 제대로 드러내어야 우리 사회가, 또한 한 공동체가 건강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다윗 왕 시대 세바의 반란을 제압한 한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3.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삼하 20:1-2)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고 겨우 한숨 돌렸는데 이번에는 압살롬보다 더 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베냐민 지파 출신인 세바의 반란입니다. 이 일은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의전 문제로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열 지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진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삼하 19:40-43 참조). 유다 지파는 강경하게 다윗이 우리의 종친이기 때문에 유다 지파가 중심이 되어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열 지파는 유다 지파가 자기들을 멸시했다고 다윗에게 항의했습니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서 세바가 이스라엘 열 지파를 선동하여 다윗에게 등을 돌리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열 지파는 다윗을 버리고 세바를 좇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특별히 세바의 반란은 압살롬의 반란보다 더 광범위한 것으로 궁중 내부의 쿠데타가 아니라, 궁 밖의 쿠데타입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다윗의 심복 요압 장군에 의해 진압당합니다(물론 요압은 당시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다윗의 조카 아마사를 죽이고 자신이 그 진압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벌하기보다 오히려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 삼았던 것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요압을 불신하게 됩니다. 아무튼!). 세바는 이제 도망갑니다.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삼하 20:14-16)
세바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북방의 견고한 성인 ‘아벨’과 ‘벧 마아가’로 들어갔습니다. 이 두 마을은 납달리 지파의 최북단에 있는 요새지로 서로 인접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두 지명을 연결하여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자 요압이 군대를 이끌고 세바가 은신해 있는 아벨 성을 에워싸고 토성을 쌓았습니다. 이제 성벽을 헐고 성을 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읍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분노로 보고자 합니다. 자신의 성읍을 구하고자 불의한 세바에게 품은 분노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삼하 20:17-19)
여인은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옛날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벨 성에 있는 선생들에게 지혜를 빌려 인생의 해결책을 찾았다. 그만큼 아벨 성에 지혜자들이 많이 살고 있기에 이 성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요압은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아벨 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조건으로 반역자 세바를 양도하라고 요구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요압에게 세바의 머리를 넘겨주는 여인
요압에게 세바의 머리를 넘겨주는 여인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삼하 20:20-22)
이 여인의 지혜로 성을 구했습니다. 아니, 이 여인의 거룩한 분노가 성안 백성들에게 통했습니다. 결국 불의한 자, 세바를 처단한 것입니다. 결국 요압은 여인과의 약속대로 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움 속에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분노,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분노가 세상을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립니다. 오늘 이 땅에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바로 이러한 여인의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요구합니다. 분노를 넘어 거룩함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것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비단 데살로니가 교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4.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1-6)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은 형제를 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무리와 세바와 같이 불의의 길을 따르지 말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0-12)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분노’와 더불어 ‘형제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잘 조화하여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며 단정히 행하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인이 그 지혜로
삼하20:14~26 / 김종호목사
사무엘하 20:14~26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과 거하라
세바는 온 이스라엘 땅을 두루다니다가 벧마아가 아벨 성에 갖히게 되었다.
요압과 함께한 백성들이 성을 에워싸고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성벽을 헐고자 한다.
그 성에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만나기를 요청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에 하나인데
어찌하여 어미 같은 성을 멸하려하며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는냐 한다.
요압은 삼키거나 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세바라 하는 자가 다윗 왕을 대적하니 너희가 저만 주면 이 성에서 떠나겠다고 대답한다.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다.
요압은 성에서 물러나 예루살렘의 왕에게 나아간다.
말씀묵상:
세바의 반란이 있었다.
베냐민 사람 세바라고 하는 자가 다윗을 왕으로 섬길 이유가 없다고 선동을 해서
유다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 10지파는 유다 지파인 다윗을 버리고 세바를 따른다.
다윗은 압살롬의 군사령관이였던 아마사에게 세바를 치게한다.
그러나 아마사가 그 일을 지체하자 다윗은 아비새를 대신 세웠다.
그런데 요압이 아마사를 칼로 찔러 죽이고 세바를 뒤 쫓아 가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10지파를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킨 세바.
치밀한 작전과 계획도 없이 그저 감정에 이끌리는 대로 선동하고 반역을했다가
세바는 온 이스라엘 땅을 두루다니다가 벧마아가 아벨 성에 갖히게 되었다.(14)
요압과 함께한 백성들이 성을 에워싸고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성벽을 헐고자 한다.(15)
옛날의 전쟁은 참 무식하게도 한다.
성 옆에 흙무더기를 또 쌓게하여서 성 보다 높은 위치에서 공격하기 위함이다.
흙무더기를 쌓는데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잘만 쌓으면 매우 효과적일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 아벨성에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만나기를 요청한다.(16)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에 하나인데
어찌하여 어미 같은 성을 멸하려하며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는냐 한다.(19)
요압은 삼키거나 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20)
세바라 하는 자가 다윗 왕을 대적하니 너희가 저만 주면 이 성에서 떠나겠다고 대답한다.(21)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다.(22)
요압은 성에서 물러나 예루살렘의 왕에게 나아간다.(22)
성경에 정확한 이름도 기록하지 않은 무명의 한 여인의 지혜가 참 놀랍다.
만약 이 여인의 요압에게 나와서 정확한 정보를 듣지 않았다면 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보나 마다 성 내의 모든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의 지혜와 용기 덕분에 요압의 원하는 것은
성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고 세바를 잡는 것에 요압 군사 작전의 핵심이 있었다.
아벨 성의 모든 사람들을 다 처단하는 것이 아니고
반란군의 수괴 세바를 치는 것이 목적임을 확실히 알고는
자기 성의 모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세바를 잡아 죽이고 목을 성 밖으로 던져 준다.
이 여인의 지혜 덕분에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세바 한 사람 때문에 아벨 성 전체를 멸하려고 계획한 요압
그러나 지혜로운 한 여인을 통하여 성 내의 모든 목숨을 구 할 수 있었다.
말씀을 보면서 여리고 성에 살았던 기생 라합과 같은 지혜로운 여인 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호수아가 보내었던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주고 성이 함락 될 때 가족 모두를 구원한 여인
참 지혜로운 여인으로 기억이 된다.
또 한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다가 다윗의 아내가 되었던 아비가엘 처럼 지혜로운 여인이다.
사울에게 도망 다니던 다윗이 나발에게 원조를 요청했는데 나발이 거절한 사실을 알고
급히 다윗에게 나아와 무력 충돌을 막았던 지혜로운 여인이다.
한명의 지혜로운 가족을 살리고 가문을 살리고 성안의 모든 백성을 살린다.
지혜있는 한 사람의 소중함을 본다.
지혜있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아벨성의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하였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하신 말씀이
오늘 지혜로운 여인을 볼 때에 딱 들어 맞는 말씀인 것 같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약속하셨는데
지혜를 사모하며 지혜를 구하는 인생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한 지혜로운 여인의 용기와 지혜를 봅니다.
한사람 세바 때문에 요압은 아벨성을 명해 버릴려고 했지만
지혜로운 한 여인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아벨 성에 평화가 임하고
유다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평화가 임함을 봅니다.
지혜있는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습니다.
성령님 저에게도 이렇게 화평케하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솔로몬에게 주었던 지혜를 저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지혜의 근본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벨 성읍의 지혜로운 한 여인
삼하 20:14-26 / 더온누리교회
세바의 반란이 어떻게 진압이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다룬다. 세바 반란이 갖는 의의는 다시 복권된 다윗의 왕권이 어떻게 회복되어 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국 요압의 무소불위와 같은 리더십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한 역할도 한다. 또, 아벨 성읍의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무력으로 왕권을 지키거나, 탈취하기 위한 혼란스러움 가운데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성을 되돌아 보게 하는 기능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윗의 관료들을 소개하면서 회복된 왕권을 보여 준다.
1. 세바의 실패 이유세바는 왜 실패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불량배(벨리야알)”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바를 가리켜 “무가치하다, 무익하다, 파멸”이라는 뜻을 가진 벨리야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압살롬의 반란 이후 국론 분열이 심각했고 다윗은 공평한 중재자가 되지 못하였다.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간의 공평치 못한 중재는 세바의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 다윗 왕의 실정에 대한 반란이었음으로 이스라엘 지파 입장에서는 “정당한 권리 운동”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운동을 이끈 사람이 “불량배”여서 문제였다. 그는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다윗을 통한 하난미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불량배였다. 반란 초반 무서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지지를 잃어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다. 무엇보다 세바의 난은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운동이었다. 인간 다윗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 택한 왕임을 망각한 반 다윗 운동이었다. 다윗의 아쉬운 정치력이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선택을 취소할 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세바는 다윗의 실정을 나라의 국운이 달린 문제인양 과장하여 문제 삼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거품 속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다. 나와 같은 죄인들에 의해 이끌어지는 나라이다. 지금 우리도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무리 답답하고 부족한 지도자에 의해서라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로 “불량배”와 같은 이들은 설 곳이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결말은 늘 이렇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최후의 영광과 승리는 스스로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2. 요압의 재등극(23절)
요압의 군사들은 가나안 땅 북부 단 근처에 있는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까지 세바를 추격한다. 세바가 몰릴때 까지 몰린 것이다. 요압은 세바를 벧마아가 아벨 성에 몰아넣고 그 성읍을 향한 언덕 위에 토성을 쌓아 공성전을 준비한다. 토성이 완성되어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성을 공격하려 할 때 성읍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대화를 요청하고, 요압은 그 여인과 대화를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벨 성읍의 사람들은 이 여인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었다. 요압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게 되어 다시 다윗의 총사령관 자리로 재등극하게 되었다. 요압에게는 아벨 성읍으로 숨어든 세바를 처단하려고 성 전체를 멸하려고 했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요압의 눈에 세바는 반드시 죽여야 할 대적이었고, 아벨 성읍은 그를 보호하고 있는 반란세력의 무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옛날 속담에도 ‘물어 볼 것이 있으면, 아벨 지역에 가서 물어 보아라’ 하였고, 또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이든지 해결하였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평화롭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에서 어머니와 같은 성읍을 하나 멸망시키려고 애쓰십니다. 왜 주님께서 주신 유산을 삼키려고 하십니까?”(새번역_18-19절) 라는 여인의 항변에 아벨 성읍이 멸망 당할 성읍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 받아야 할 이스라엘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요압은 즉시 결전 의지를 돌이키고 다만 세바만 잡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지혜로운 이 여인은 성안의 백성들을 설득하여 세바를 죽여 그 머리를 성 밖으로 던진다. 요압의 반란은 그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의 지혜와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요압은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다시 총사령관으로 재등극하게 된 것이다.
3. 지혜로운 여인을 생각하며(16-22절)
이 여인은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결론적으로 이 여인은 요압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략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계략과 성과를 추구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게 하였다. 요압은 자신의 지략과 방법으로 세바를 길갈에서부터 단 근처의 벧마아가 아벨까지 그 흔적을 찾아 쫓아 왔다. 그런데 정작 그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하다가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을 황폐화 시킬 판이었다. 그것도 “지혜의 성, 지혜의 어머니”라고 여기는 역사적인 성을 허물어뜨리려고 한 것이다. 이 성읍에 사는 지혜로운 한 여인은 이 위기의 순간,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여 죽음의 공포에 떨기만 하고 있는 성읍에서 분연히 일어나 성벽에 섰다. 용기를 낸 것이다. 그리고는 요압 장군과의 대화를 요청하여 이 성읍이 이방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의 성읍임을 일깨워 준다. *여인의 지혜가 화평을 가져왔다. *솔로몬은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의 나라와 백성됨을 진실로 깨우치는 자는 그이 삶이 화평을 불러오는 삶을 산다. *주님께서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향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도구로 살아갈 것을 사명으로 주셨다. 이 화평케하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지혜”로 이루어가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드러내 보자. 나의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을 살아보자. 그런 삶을 사는 나의 동네와 마을마다 그리고 공동체에 “화평”이 스며든다. 화평이 넘친다.
4. 다윗의 왕권 구축(23-26절)
세바의 반란이 진압되고 다윗은 왕권을 정비한다. 다시 이스라엘에 안정이 깃들기 시작한다. 내각 구성도 완성한다. 요압은 군사령관으로, 브나야는 다윗의 친위부대인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으로, 아도람은 감역관, 여호사밧은 사관, 스와는 서기관,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었다. 다윗의 정부 구성을 설명하는 8:15-18를 비교하면 대신을 맡는 이들은 압살롬의 반란 이전에는 왕자들의 몫이었지만, 이번 개편부터는 그 자리를 ‘이라’가 맡은 것이다. 감역관(공사 감독)을 세웠다는 것은 정복 전쟁의 승리로 인해 국가 사업이 확장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다윗이 아들들을 대신으로 세우지 않은 것은 왕자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는 것이다. *다윗은 압살롬과 세바의 난을 거치며 통치 조직을 지혜롭게 정비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증거들이다. 나는?-세바의 불량함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저항하는 불량함이었다. 불량함은 필패한다. 평안을 가져오지 못한다.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동한 반란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다. -반면 지혜로운 여인의 용기있는 저항은 자기 뜻대로 행하려는 요압에게 큰 저항을 가져왔다. 하나님의 기업이며 예로부터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산실로 알려진 아벨의 존재를 일깨우는 저항이었다. -요압이 원수와 같이 바라보던 아벨이 여호와의 기업으로 바라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지혜로운 여인의 용기있는 저항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용기있는 저항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용기있는 저항있는 그곳에 하늘의 평화가 임한다.
+ 기도제목
* 주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순종하는 용기있는 저항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일깨우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주님, 나의 시각, 기준, 여건, 상황으로 얼마든지 원수로 볼 수 있는 이도,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바라보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원수를 형제로 대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여인
삼하 20장 14-19절 / 우리교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의미는 성경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을 둘러싼 검은 기운들을 계시로 인하여 인간쪽으로 집중되도록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극도로 민감한 반감을 갖게 됩니다.
‘복음에 대항하는 피조물’로 만들어내므로서 그 실존 배후에 주목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악은 곧 ‘여자의 후손’과 최후의 전쟁을 책임지는 숨어있는 책임자로서 그동안 숨어서 활약해 왔음을 역사 전면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 위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은 진정한 선과 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계속 오해받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여인이 쳐다보는 것과 요압이 쳐다보다는 것이 상호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결과에 있어서는 마치 원하는 바가 같은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전쟁’에 있어 일치되지 않는 의도들이 현실에서는 같은 승리로 인식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아벨성에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을 살리기 위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 앞에 던집니다.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이 여인에게 주신 기업은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과 관련된 일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는 전쟁이 있음도 아울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원칙은 흔히들 ‘산다’라는 말에도 해당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산다’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겁니까?
이 하늘 높은 가을날에 진정 ‘산다’는 것이 어떤 경우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성묘하고 벌초하고 등산가고 주말에 산과 들에서 가을의 정취를 맛보고, 농부들은 가을 추수에 분주하고, 수험생들은 시험에 대비해서 그동안 익혔던 내용들을 다시금 집중해서 총정리하는 급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 ‘산다’에 해당되는 경우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세속적인 삶도 역시 ‘전쟁’이라는 양상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지 않는 자들도 있음을 발췌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름모를 여인에게 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로 주셨다는 그 사실을 지워버리는 그 어떤 것들과의 밀릴 수 없다는 긴장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목숨 지키는 긴장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지켜야 하는 긴장감 말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늘 ‘하나님께서 그저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납니다. 세상을 상식선에서 보자는 겁니다. 별나게 살면 피곤하다는 겁니다. 즉 너의 삶에 훼방되고 방해되고 있는 것을 내놓고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말하는 ‘삶’은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을, 은혜가 아니라 본인들의 행함으로 얻은 보상이라는 차원에서 주입된 것을 방출하는 것이 진정한 ‘삶’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든지, 율법을 지킨다든지 하는 것은 그 본래적 가치를 사수해서 잊지 않고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남기신 약속의 가치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정 ‘성도의 삶’입니다. 촌에서 사과 과수 농사를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삶’이란 바로 과수농사가 잘되고 못되고 와는 상관없이 오늘밤도 내 영혼 데려가면 모든 것이 결국 나의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런 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행함에 대해서 요압이 그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망치 세바를 잡아들이는 것이 요압의 명성을 쌓고 그것으로 인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요압 장군의 삶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유하므로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세바가 요압쪽과 그리고 이 여인이 거할 성쪽,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소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압 장군쪽에서는, 요압 본인이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권력을 넘어뜨릴 위험을 세바가 갖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그저 주심’을 인간적 소유의 대상으로 변질되게 만드는 위험을 세바가 역시 보여 줄 수가 있습니다.
요압과 여인 사이에는 세바라는 공통의 적은, 각각 양쪽에게 다 수용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세바의 죽음을 여인 쪽에서 이해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진 결과요, 요압쪽에서 이해하는 요압보다 못한 존재라는 죽어야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대외적 천명한 셈이 됩니다. 즉 요압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마치 그만큼 이 땅에서 더 오래 살 자격자가 되는 양 오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성도 자체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에 의하면 기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자신이 곧 하나님께서 거저 구원해내신 기업인 것을 나타내면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요압 꼴이 됩니다. 오로지 자신의 노고와 노력으로 자신이 이 땅에서 살 가치가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모두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투입된 것들입니다. 그 중에 제일 위험한 나쁜 요소는, ‘내 힘으로 얻었다’고 여기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세바를 치면서 요압을 동원시키신 겁니다. 이 여인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 10:17-21에 보면,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무슨 전쟁을 벌리고 있는 가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29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우리는 거기에 붙어있는 이끼같은 존재입니다. 여인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유산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유산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승리라고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혜로운 여인 (사무엘하 20장 14-19절)
2010. 9. 29. 17:07 in 우리교회/2010오후설교
본문 : 사무엘하 20장14-19절
제목 : 지혜로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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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강-삼하20장14-19지혜로운여인-2sa100926
지혜로운 여인
2010년 9월 26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0:14-19
(삼하 20:14, 개역)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삼하 20:15, 개역)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삼하 20:16, 개역)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삼하 20:17, 개역)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삼하 20:18, 개역)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삼하 20:19, 개역)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의미는 성경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을 둘러싼 검은 기운들을 계시로 인하여 인간쪽으로 집중되도록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극도로 민감한 반감을 갖게 됩니다.
‘복음에 대항하는 피조물’로 만들어내므로서 그 실존 배후에 주목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악은 곧 ‘여자의 후손’과 최후의 전쟁을 책임지는 숨어있는 책임자로서 그동안 숨어서 활약해 왔음을 역사 전면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 위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은 진정한 선과 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계속 오해받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여인이 쳐다보는 것과 요압이 쳐다보다는 것이 상호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결과에 있어서는 마치 원하는 바가 같은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전쟁’에 있어 일치되지 않는 의도들이 현실에서는 같은 승리로 인식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아벨성에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을 살리기 위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 앞에 던집니다.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이 여인에게 주신 기업은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과 관련된 일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는 전쟁이 있음도 아울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원칙은 흔히들 ‘산다’라는 말에도 해당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산다’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겁니까?
이 하늘 높은 가을날에 진정 ‘산다’는 것이 어떤 경우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성묘하고 벌초하고 등산가고 주말에 산과 들에서 가을의 정취를 맛보고, 농부들은 가을 추수에 분주하고, 수험생들은 시험에 대비해서 그동안 익혔던 내용들을 다시금 집중해서 총정리하는 급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 ‘산다’에 해당되는 경우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세속적인 삶도 역시 ‘전쟁’이라는 양상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지 않는 자들도 있음을 발췌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름모를 여인에게 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로 주셨다는 그 사실을 지워버리는 그 어떤 것들과의 밀릴 수 없다는 긴장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목숨 지키는 긴장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지켜야 하는 긴장감 말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늘 ‘하나님께서 그저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납니다. 세상을 상식선에서 보자는 겁니다. 별나게 살면 피곤하다는 겁니다. 즉 너의 삶에 훼방되고 방해되고 있는 것을 내놓고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말하는 ‘삶’은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을, 은혜가 아니라 본인들의 행함으로 얻은 보상이라는 차원에서 주입된 것을 방출하는 것이 진정한 ‘삶’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든지, 율법을 지킨다든지 하는 것은 그 본래적 가치를 사수해서 잊지 않고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남기신 약속의 가치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정 ‘성도의 삶’입니다. 촌에서 사과 과수 농사를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삶’이란 바로 과수농사가 잘되고 못되고 와는 상관없이 오늘밤도 내 영혼 데려가면 모든 것이 결국 나의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런 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행함에 대해서 요압이 그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망치 세바를 잡아들이는 것이 요압의 명성을 쌓고 그것으로 인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요압 장군의 삶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유하므로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세바가 요압쪽과 그리고 이 여인이 거할 성쪽,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소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압 장군쪽에서는, 요압 본인이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권력을 넘어뜨릴 위험을 세바가 갖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그저 주심’을 인간적 소유의 대상으로 변질되게 만드는 위험을 세바가 역시 보여 줄 수가 있습니다.
요압과 여인 사이에는 세바라는 공통의 적은, 각각 양쪽에게 다 수용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세바의 죽음을 여인 쪽에서 이해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진 결과요, 요압쪽에서 이해하는 요압보다 못한 존재라는 죽어야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대외적 천명한 셈이 됩니다. 즉 요압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마치 그만큼 이 땅에서 더 오래 살 자격자가 되는 양 오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성도 자체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에 의하면 기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자신이 곧 하나님께서 거저 구원해내신 기업인 것을 나타내면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요압 꼴이 됩니다. 오로지 자신의 노고와 노력으로 자신이 이 땅에서 살 가치가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모두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투입된 것들입니다. 그 중에 제일 위험한 나쁜 요소는, ‘내 힘으로 얻었다’고 여기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세바를 치면서 요압을 동원시키신 겁니다. 이 여인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 10:17-21에 보면,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무슨 전쟁을 벌리고 있는 가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29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우리는 거기에 붙어있는 이끼같은 존재입니다. 여인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유산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유산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승리라고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혜로운여인
삼하 20:14-19 / 이근호목사
바란 사람이 다윗에 대항해서 반역을 일으켜서 도망치다가 도망치다가 어느 성에 갔느냐하면, 유서 깊은 아벨이란 성 속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지금 한창 전쟁 중입니다. 누가 전쟁 중이냐 하면, 세바란 사람이 다윗 쪽을 공격했기 때문에 자연히 다윗 쪽에서 군대가 나와서 세바란 사람을 잡아야 되겠죠? 반란이니까. 반란 주동자를 잡아야, 처단해야 나라가 안정을 찾으니까, 그래서 따라왔는데, 따라온 군대 이름이 요압의 군대입니다. 요압이 지도해서 따라오는, 요압이 살아온 데서 따라온 요압의 군대가 세바를 쫒고자 따라오다 보니까 이 아벨 성까지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회자라는 게 뭐냐 하면, 성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작은 시냇가인데, 그것이 있으면 공격을 잘 못하죠. 근데 그 회자에다가 둔덕(흙)을 쌓아 가지고 높이를 같이 해서 평지대 성과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높이의 육지 대 육지 대 싸움으로 바꾸어서 치는 것이 그 당시에 성을 치는 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을 성을 쌓고 토둔을 쌓고 군사들이 막 쳐들어 올 즈음에, 그 아벨 성에 있는 어떤 여인( 아줌마) 하나가 나서서, “이 유서 깊은 이 성을 왜 당신은 치려합니까? 이 성이 우리 사람의 손으로 일구어 온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주신 거룩한 하나님의 유업인데,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그런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인데, 당신은 왜 이렇게 성을, 흙을 부서 버리려고 합니까? 총 부장이 누구에요? 총대장 나와서 나하고 얘기 좀 해 보자” 해서 요압이란 장군이 나와서 “그래 얘기 해봐라. 내가 총 대장이다. 뭣 땜에 그러냐? 그래 이렇게 해서 왜 이 성을 멸하려 합니까? 하고 하니까, 요압이란 장군이 하는 말이 ”내가 이성에 감정이 있어서 이 성 자체를 부수려는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성에 우리가 쫓고 있는 세바란 사람이 잠입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목적이기 때문에 성을 멸하려 한다.“ 이렇게 하니까, 여인의 하는 말 ”그러면 그 세바란 사람의 목을 내 놓으면 조용히 물러가겠습니까? 그럼 물러가죠. 그래서 그 여인이 세바란 사람의 목을 따서 주니까 조용히 헤어졌다 하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야기 전개가 약간 복잡해요. 전쟁이란 것은 적들과의 싸움입니다. 적들과의 싸움인데, 여기에 중간에 세바란 사람하고 요압(다윗)의 싸움이 있었는데, 전쟁이란 것은 적이 하나가 있을 때는 아주 편리해요. 적이 누군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에 제 3자가 끼어들면, 저 사람이 내가 치고자 하는 적의 편인지, 아니면 나를 도와줄 동지가 되는지, 이것부터 정리 하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약간 까다롭게 되는 겁니다.
세바란 사람은 다윗에게 대들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나쁜 사람 맞아요. 하나님의 주신 그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했기 때문에 나쁜 사람 맞는데, 그 나쁜 사람 쫓는 쪽이 처음에는 요압이란 한쪽이었는데, 이제는 여인이란 또 다른 쪽이 나타나서 공동적인 적인 세바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요압과 이 여인이 과연 한 편이냐 하는 문제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적이 같다고 해서 과연 한 편이냐 하는 겁니다. 적은 하나지만 적을 바라보는, 저 사람이 우리의 원수다. 적이다. 라는 관점이 얼마든지 두 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툭 떨쳐놓고 그것이 왜 적이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이 나올 수가 있고, 그 두 개의 관점끼리 진짜 제대로 된 적수가 된다는 겁니다. 복잡하죠? 제 설명이 복잡합니까? 복잡하죠.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복잡한 일을 꺼냈냐하면, 인간이 전쟁을 하면서 명분을 자꾸 하나님께 명분을 둡니다. 옛날 유럽의 전쟁을 할 때 꼭 각 쪽 서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들고 나옵니다. 다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들고 나와요. 여호와 하나님 믿는 사람끼리 싸움을 벌이고 난리가 납니다. 하나님 때문에 전쟁을 한다고, 그런 명분을 가지고 나오는데, 고렇게 명분을 가지고 나오는 놈들끼리 적이 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일관된 확정된 하나의 개념으로 사람들은 붙잡아 둘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십자가 마을에서 논쟁이 있다는데, 다 같은 개념을 살면서 서로 다른 관점이 나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들이 아닙니다. 인간들 배후에 진짜 하나님과 붙어야 될 적이 인간 배후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입니다. 악마를 끄집어내는 방법이 그 수밖에 없어요. 배후에 숨어있는 악마를 현실세계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인간은 전쟁을 하게끔 해서 그 전쟁을 보는 관점이 같은 전쟁을 하고 같은 적을 다루면서도, “어, 니하고 내하고 전쟁의 목적과 의미가 다르네.” 하고 서로 다른 사뭇 다른 두 가지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한국 교회 썩었다. 그럼 다 정통입니까? 한국교회 이단이라 하면 전부 다 하나님의 성도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한국교회 썩었다고 할 때, 일종의 전쟁인데 그 전쟁을 하는 그 전쟁을 해서 얻고자 하는 승리의 내막이 뭐냐? 승리를 한번 톡 깨보면, 승리란 열매의 내막을 깨면 뭐가 들어 있느냐? 하나님의 승리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나의 승리냐? 이 말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은 세바란 공통된 적을 토끼처럼 숲속에 던져놓고, 거기에다가 두 쪽이 그걸 쫓아가게 만들어요. 만드는데 두 쪽 쫓아가는 양쪽 다 세바란 반란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양쪽 다 승리를 얻었어요. 그런데 그 승리가 일치된 내용의 승리가 아닙니다. 한 쪽의 요압 쪽의 승리는 뭐냐 하면 이겁니다. “나보다 못한 놈은 죽어도 싸다.” 나보다 못한 놈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죽었다.
정화조 청소하러 갔다가 두 사람이 내려갔다가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났다 하죠. 근데 살아났을 때 같이 옆에 죽은 사람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나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어 살아남았고, 저 사람은 정화조에 빠져 죽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을 살아 있는 쪽에서 할 수 있다 이거죠. 그게 일종의 생존 자체를 승리로 보는 거예요. 요거 잘못이에요. 요거 악마의 생각입니다. 악마가 퍼트리고 있는 승리라는 개념을 이 지상에 이렇게 퍼트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어요. 살아있는 게 자랑거리가 아니라고요. 살아있는 게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실패가 아니에요. 순교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순교는 예수님의 순교로 그걸로 족합니다. 우리는 그 순교 뜯어먹고 구원받은 거예요. 내 순교 담보로, 내 목숨 바쳐서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무슨 사고방식이냐 하면, 베드로가 자기 죄를 아직 모를 때 나왔던 자기 근원적인 죄를 모를 때, 베드로는 “내 목숨 담보로 해서 천국 갈랍니다.” 이런 쓰잘 데 없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한 거예요. 근데 베드로가 오기를 부린 것은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이 벌이고자 하는 악마의 세계에서 전혀 보탬이 안돼요. 전혀 보탬이 안 됩니다.
첩보 영화나 스릴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이 제일 답답한 게 그거예요. 뭐냐하면, 007혼자 잘할 수 있는데, 꼭 007 좋아하는 애인이 나서가지고 꼭 인질로 잡혀가지고, “내 집에 있으라 했거든, 가만히 있거라. 내 혼자 한다니까... ” 꼭 나서서 따라와 가지고, “당신 없인 못살아요.” 하면서 따라와 가지고, 떡 갇혀가지고, “ 총을 버려라 007 아니면 이 여자 죽는다.” “에이, 분하다‘” 총 버리고.....ㅎ 따라올 때부터 관객들 알아요. “저 분명히 사고 친다. 사고 칠 줄 알았어.”
이건 일상 부부가 가게 동업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서로 싸워요. 싸우지 않을 경우는 손님 올 때뿐이고, 손님 가고 난 뒤에 또 싸웁니다. 인사 했니 안했니 인상 쭈그러져서 다음에 안 온다 올기다. 하고 싸웁니다.
항상 전쟁을 할 때에 배후를 끄집어내는 하나님의 방법이 ‘둘 같이 승리할 걸’ 해놓고, ‘그 승리 가운데서 주의하라’ 너는 평소에 어느 쪽의 승리를 원했었던가를 우리 보고 선택을 강요해요. 하나님께서.
자, 평소에 니는 꽁꽁 숨겨 있는데 그거 다 나한테 들킨다. 자 이쪽은 예수님하고 오래 살았다. “기분 좋지? 하지만 아니거든?”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하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걸 그 베드로의 오기와 심령을 받아줘 버리면, 그담부터는 이거는 정말 구원받을 사람 많습니다. 예~~ 살기 싫으면 그냥 “주의 이름으로......이런 인간들... 자살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아침에 얘기 했지만, 죽음 뒤의 상황을 자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채로 상상하면 전부 다 엉터립니다. 그거는 착각이고 잘못된 시나리오입니다. 찬란한 순교하는 것은 우리한테는 버거운 거예요. 우리한테는 격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찬란한 순교하지 말고 추잡한 순교, 추잡한 순교하든, 더러운 순교하든 천당 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생존 말고 다른 순교가 어디 있느냐?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이 다 살기 위함이고, 살았다 하는 것은 복 받았다는 증거로 간주하는 이 세상에서, 그거 말고 또 다른 의미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단 말인가? 라고 할 때 오늘 본문에 ‘이름 없는 여인’ 하나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 하는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 합니다. 19절 끝에 보면,
“어미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기업이라고 해서 사업체처럼 생각하는데, 기업이라는 말은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이 갖고 있던 그 토대, 재산이라든지, 땅이라든지, 부동산 이라든지, 이게 있을 때, 우리 지배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 그걸 기업이라 합니다. 상속이죠. 상속. 상속을 받게 되면 항상 상속을 받을 때는 내 노동으로 일구었다 하지 말고, 우리 아버지한테 받은 것,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한테 받은 것, 항상 자기 노동이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전쟁, 이 여인의 전쟁, 이 여인이 벌인 전쟁은 뭐냐 하면, 자기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고 내가 지켜야 될 것은 내가 아니라 따로 있음을 보여주는 전쟁을 한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왜 나와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은 전쟁이라 하는 건 자기 전쟁이기 때문에, 내 생존에 위협이 된다 이 말 이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생존의 힘에 위협이 된다면, 가차 없이 공격하게 돼 있어요.
근데 이 여인에게 있어서의 주 관심사는 자기의 생존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을 파괴해 버리면, 하나님보다 더 센 게 등장해 버려요. 그러면 믿음의 대상이 뭐냐 하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보다 더 센 걸 믿어야 돼요. 하나님 보다 더 센 게 누굽니까? 바로 자기 자신 밖에 더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배후에 있는 악마의 생각과 같아지죠.
하나님께서는 이번 세바의 전쟁을 통해서 인간들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끄집어 낼 수 없는 뒤쪽에 숨어있는 진실과 진리를 우리에게 펼치고자 하는 겁니다. 한 가지 어렵게 얘기 했지만, 쉽게 해 봅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장에 보면, ‘어떤 부자가 창고를 크게 지어놓고 거기(곳간)에다가 곡식을 가득 채워놓고 하는 말이, 자기 영혼을 자기에게 두둔하는 거예요. “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이제는 여러 개 창고를 쌓아 두었으니까, 편히 먹고 마시자. 즐거워 할 일만 남아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제가 저 독일 퀼른 시에 갔을 때 아침 9시도 안됐는데, 노인네들이 차를 쭉 거리에 놨어요.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어떤 직장에 있든, 퇴직을 하든, 70%를 나라에서 거저 줍니다. 그 대신 세금 40%를 저축하지만, 나이가 많으면, 어떤 직장이든 자기 직장의 70% 주기 때문에 이제는 쓸 일만 남아 있죠. 집도 소유를 안 해요. 그냥 지내면 되어 있고. 그러니까 그 노인네들이 차려 입고 그냥 돈 쓰는 즐거움으로 사는 거예요. 누구보고 시비나 하고 시장을 현실로 보는 거 같아요. 느긋~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몇 시인지 모르겠어요. 새벽 2신지 모르겠어요) 네 영혼 도로 찾으리라.” 그러면 새벽 지나고 아침 되면 누가 없어요? 어제 곳간 지은 내가 없다니까요. 내가. 내가 없는 상황에서 너는 평소에 무엇을 위해 살 것이냐를 왜 우리에게 묻지를 않았느냐 이거예요. 내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없던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승리케 하시는, 나를 이때까지 없게 하는 인간도 그동안 살려주면서도 뭔가 찾고자 하는 그 승리, 그거는 나만의 승리만이 아니고, 바로 숨어있는 나의 나를 지배했던 나의 악마와의 승리를, 내가 없는 가운데 있는 가운데 상관없이 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인생의 본래 목적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거를 평소에 놓쳐 버리면, 어리석은 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죠.
이 어리석은 부자는 일단 자기는 생존했기 때문에 자기는 승리로 보는 겁니다. 요압이 세바란 인간을 쫒는 것은 딴 게 아니에요. 다윗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함 이예요. 나중에 나와요. 자기를 위함 이예요. 내가 이놈을 잡아버리면, 나는 일등공신이 되고, 그동안 모아둔 권력에다가 더 집중적으로 권력이 모으면, 그러면 저 사람 없이는 나라가 안 된다. 는 이 대세가, 백성들의 대세가 자기에게 쏠릴 게 분명하다 말이죠. 다윗은 껍데기죠.
사울 시대에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그럴 때 백성들의 민심이 대번 바뀌었어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사울이 1이라면, 다윗은 열이라. 얼마나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겠습니까? 사울이 화 낼만 하죠. 악신 들릴만합니다. 그런 소리 하니까 숨어있던 악신이 드러나요. 숨어있던 악신이, 악마가 드러나잖아요. 우리는 무심코 나의 생존에 보탬이 안 된다고 하나님께 욕을 하면, 누가 격려하고 부추기느냐 하면, 멀리 도망갔던 일곱 귀신이 들어와 가지고, “잘 한다. 잘한다.” 하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래 니가 하나님 믿고 얻어 챙긴 거 뭐 있노? 아이고, 니는 결국 하나님 믿어도 실패자 됐잖아. 그렇게 실패할 것 같으면 하나님 믿지 말고 집어 쳐라. 하나님 욕하고 뒤 돌아 서라”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어떤 악마의 세력이라고 버틸 수 있다는 하나님의 기업의 온전함과 완성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허접스런 우리를 하나 거기다가 붙여 준 겁니다. 그 붙여 준 것을 ‘이끼’라고 합니다. 돌에 붙어있는 얇은 이끼, 누가 와도 관심두지 않는,“ 뭐 저런 시커먼 게 저런 게 붙어 있나” 짓밟아도 할 말 없는 그런 이끼 같은 것, 그래서 우리는 이끼가 중요하지, 거기 붙어 있는 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하나하나 셈을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열 명이 있다. 하나라 말이죠. 천명이 있다 해도 하나. 그런 인식을 가져야 된다. 일치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말이죠. 교회는.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유업을 영원토록 이어가십니다. 근데, 우리는 태생이 내 몸 뚱아리 밖에 모르는 내 몸 뚱아리 유지되면, 좋은 나라고, 내 몸 뚱아리 어려우면, 그건 나쁜 나라가 되는 거예요. 친구라 해도, 내 잘 도와주면, 나의 훌륭한 동지가 되죠.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들었습니다만, 토그에 가서 도박하다 3억 날릴 때, 그 여자 친구가 3천만원 빌려줬을 때, 얼마나 고맙습니까? 예? 매스컴에서 인터넷에서 ‘신 정환 끝났다.’ 전부 다 씹어대고 신 정환이 끝났다 할 때 그 여자 친구는 3천만 원 주면서, “도박해라,(ㅎ,... )해라, 도박.” 목사가 복음이 안 나오면 “나가시오” 하는 것이 그게 돕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 안 전해도 한 번 목사 영원한 목사입니다. 도와주면 그거는 도박하는 것보다 더 나쁜 여자 친구고 나쁜 사람 되는 겁니다.
제가 광주서 들었는데, 광주 중앙교회 이야기예요. 교인이 3천명인데,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 목사가 돈 줘도 안 나가요. 그래서 목사는 뭘 원하느냐 하면 명예회복이라는 겁니다. 다 나가도 내 피켓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 싫어하는 사람은 다 나가고 1300명은 교육관에서 예배드리고, 300명은 본당에서 예배드리는데, 본당에다가 1300명 못 오도록 용접을 했다는 겁니다. 용접은 사우디 가서 하는 거 아닙니까?ㅎ..... 왜 거기 가서 합니까?
그래서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이 걱정돼서 할 때 제가 한 가지 지혜를 알려줬어요. “그 누구보고 아무소리 하지 말고 돈만 내지 마라. 분명히 양쪽에서 다 이야기 할 거다. 이렇게 3천명 되는 교인이 천삼백 명밖에 안됐으니까 이래서 힘을 내서 돈을 내야 됩니다.“ 라는 소리 할 거다. 분명히. 분명히 맞다 이 말이에요. 찡찡 짜는 소리 할 거고, 이럴수록 우리가 돈이 있어야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양쪽을 어떻게 하든 간에 당신 자유지만, 돈 한 푼도 내지 마라. 돈의 문제 때문에 생긴 거예요.
돈 때문에 그 싸움 한 거예요. 돈이 있어야 자기 자존심 사니까, 그걸 저는 승리로 본 거예요. 승리로 본 거예요. 예수님 그 교회 빠져 나가도 관심 없어요. 예수님 보고 그 교회 나가라 해요. 이 부동산이 보통 부동산이겠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결국은 이 ‘유업’이란 이 구약의 개념이 신약에 와서 바뀌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진짜 단단하고 주께서 벌리는 싸움은 그동안 너희가 악마 때문에 몰랐었던 그 귀한 것을, 이제는 성령이 찾아 온 사람에게는 진짜 소중한 것이 나한테 일어났던 것이 아니고, 주께서 유업으로, 거저 유산으로 그냥 물려준 것이 제대로 된 덩어리가 온 거예요. 이것은 바로 하늘나라가 연결 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밤 죽어도 여러분 천당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밤 내 영혼 데려가도, 우리는 주님 주신 그 하늘나라의 유업 때문에 기분 좋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그 기쁨을 유지하는 전쟁을, 그 전쟁을 우리가 피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름 없이 생명을 살리는 지혜로운 여인
삼하 20:14-26 / 조용호목사
◈ 주 해
1.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유다지파와 북지파 이스라엘이 분쟁하였다.
1) 다윗은 아무런 중재를 하지 못함으로 유다지파에게 북지파 사람들이 밀렸다.
2) 이때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인 세바가 다윗에게 받을 분깃이 없다며 나섰다.
3) 서운했던 북지파는 세바를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다윗의 왕권을 위협하였다.
2. 다윗은 아비새를 군사령관으로 세워 세바의 무리를 추격하게 하였다.
1) 그 과정에서 요압은 아마사를 살해하였고 실세가 되어 세바를 추격하였다.
2) 공의와 정의를 행하던 다윗의 왕국은 분쟁하였고, 다윗은 공의로운 판결을 하지 못하였다.
3. 세바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다가 벧마아가의 아벨로 들어갔다(14절).
1) 이 때 베림 사람들도 와서 세바의 반역 세력에 합세한다.
2) 세바가 들어간 아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에 위치하는 곳으로 세바는 궁지에 몰렸다.
4. 요압은 아벨 성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아 그 성읍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15절).
1) 이 때 그 성읍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나와 요압과 담판을 한다(16-17절).
2) 여인은 요압이 함락하려는 아벨 성은 이스라엘에서 높은 명성을 가졌다고 말한다(18절).
- 사람들이 도움을 구할 일이 있으면 아벨에 와서 물었고, 그러면 문제가 곧 해결되었다(19).
3) 지금도 요압이 도움을 구하려고 아벨에 와서 물으면 되는데, 요압이 성을 무너뜨리고자 한다는 말을 빗댄 것이다.
5. 이 지혜로운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충성되고 화평을 원하는 사람이다(20절).
1) 여인은 아벨성이 이스라엘의 어머니 같은 성읍 즉 아벨성이 지혜와 충성을 겸비한 이들의 성읍이라고 한다.
2) 이 성읍을 멸하는 것은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것이요, 결국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다(20절).
6. 요압은 결코 성읍을 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윗을 대적한 세바만을 원한다고 말한다(21절).
1) 그러자 여인은 세바의 머리를 성벽에서 내던지겠다고 약속한다(21절).
2) 여인은 성읍의 모든 백성에게 매우 지혜롭게 말하였고 세바의 목을 베고 그 목을 성문밖에 있는 요압에게 던졌다(22절).
3) 이에 요압은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고 군사들은 집으로,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 앞에 나아갔다.
7. 압살롬의 반역부터 지금까지 온통 이기적인 사람들, 분쟁하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1) 그 결과 북지파 사람들은 불량자 세바를 따라서 반역을 일으켰다.
- 압살롬을 따라 반역한 것도 어리석지만 불량자를 따라 반역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어졌는지를 보여준다.
2) 베냐민의 불량자 세바는 베냐민 사람으로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보다 어리석은 자다.
3) 시므이는 다윗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엎드렸지만 오히려 세바는 반역군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향하여 반기를 든다. 자신이 이길 수 없음도 모르고, 자신이 죽게 될 것도 알지 못하고 근거도 없이 다윗에게 반기를 드는 자다.
- 세바는 불량자가 맞다. 이유도 근거도 없이 반대하고 싸우고 분리하는 불량자였다.
4) 불량자 세바는 지혜로운 여인에 의하여 제대로 반역을 시도하지도 못하고 죽임당한다.
8. 다윗조차 지혜와 분별력, 공의로운 판결을 잃어버리고 있을 때 한 지혜로운 여인이 나타나 다윗을 돕고 아벨 성을 구한다.
1) 이로써 북지파는 다시 다윗의 수하에 들어오고 다윗의 왕권은 회복된다.
2) 하나님께서 콩가루가 된 다윗 집안, 콩가루가 된 다윗 왕국을 지켜주시고 세워주신다.
- 다윗의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셔서 압살롬의 반란, 세바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다시 유지되고 갱신된다.
3) 지혜로운 여인의 등장으로 세바의 반역이 손쉽게 진압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 다윗과 요압은 압살롬의 반역군을 진압하듯이 전쟁을 통하여 세바를 진압할 줄 알았다.
4) 그러나 지혜로운 여인의 등장으로 억울한 죽음이 한 사람도 없이 반역은 진압된다.
9. 자기 이름을 내고자 했던 압살롬의 반역, 자기들의 유익만을 구하며 분쟁하고 속이던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은 지혜로운 여인,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여인을 등장시키신다.
1)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여인이 있다고 하신다.
2) 이 여인은 지혜롭고 반역을 진압했으나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는다.
3) 압살롬의 반역시에 다윗을 도왔던 바르실래를 다윗은 공궤하려고 하였고 그 아들에게 상을 주었다.
4) 그러나 똑같이 공을 세운 지혜로운 여인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았지만 섭섭해 하지 않는다. 자기를 드러내지도 않고, 자기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5) 그저 아벨성이 화평하게 된 것으로 만족해 한다.
10.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이다.
1) 찬송가 가사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3절이다.
-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2) 아골 골짝 빈들에까지 가서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드린 후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3) 예수 생명으로 섬긴 자만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고 드러낸다.
11. 지혜로운 여인은 하늘에서 난 지혜로 이스라엘에 화평을 가져온다.
1) 다윗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자도 귀하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지혜로운 여인과 같은 자들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2) 지혜로운 여인은 자신의 지혜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아벨 성을 구했으면서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 이 여인은 이 땅에서 상을 받지 않고, 하늘에서 상을 받는 지혜까지 있다.
3) 화평하고 충성된 여인,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임한다.
4) 다윗조차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한 여인을 통해 공동체에 화평을 주신다.
5) 불량배 세바는 자기 이름을 내고자 반역하였고, 지혜로운 여인은 화평을 가져왔으나 자기의 이름을 내지 않는다.
12. 압살롬과 세바의 반역이 진압된 후에 다윗 왕국이 화평하고 강하게 된 것은 조직 개편을 통해서 알 수 잇다.
1) 요압은 군사령관,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 아도니람은 감역관, 여호사밧은 사관, 스와는 서기관,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 이라는 대신이 되었다.
2) 8:16-18절과 다른 것은 부역을 관장할 감역관이 새로 세워진다.
- 감역관은 정복전쟁의 성공으로 국가사업이 확장되었음을 뜻한다.
3) 즉 다윗 왕국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번성하게 되고 안정된다.
- 다윗이 잘해서, 지혜롭게 해서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의 집은 세워진다.
4) 다윗은 아들들을 대신으로 세우지 않음으로 그 권한을 축소시킨다.
◈ 나의 묵상
말씀앞에 드러난 비참한 존재
세바와 지혜로운 여인이 대비된다. 세바는 불량배인 자신의 수준을 알지 못한채 지도자가 되어 왕국을 훔쳐셔 자기의 이름을 내고 보란듯하게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인은 리더쉽이 있었지만 결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지 않게 하였다. 성경이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이기 위함이다. 이 여인은 이 땅에서 상을 받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서 상을 받고자 하는 자인가? 나는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고자 하였다. 몸과 마음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바처럼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기를 원했다. 개척을 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기를 원했다. 목회를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나를 지지하고, 나의 편에 있어주기를 원했다. 세바처럼 나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기에 하나님은 나를 낮추셨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떠나가고 있고, 이름을 낼 곳이 없다. 보란듯한 목회는 사라졌다. 부흥과 성장이라는 것도 사라졌다. 사역 이야기를 하면 조용히 있게 된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2. 복음을 통하여 생명이 조명되다.
믿음으로 높아진 다윗이 철저히 낮아지는 모습이 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사단은 다윗을 조롱하지만 하나님은 낮아진 다윗을 좋아하신다. 나는 오랜세월 낮아지기 싫어서 나를 주장하였고, 사역의 번성을 꿈꾸었고, 헛된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이제 광야에서 나를 낮추시는 그 손길이 사랑의 손길이며, 긍휼의 손길로 받고자 한다. 지혜로운 여인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영혼을 품는 목자가 되길 원한다. 세바와 같이 나를 자랑하고 높이려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죄 많고, 흠 많은 모습 그대로 십자가로 나아간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신 그 사랑안에 거한다. 미련하고 약한 나를 주님은 지혜자로 부르셨다. 지혜로운 여인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겸손이다. 창세전의 지혜, 하늘의 지혜는 겸손이며 화평이다.
보란듯한 삶을 원했던 헛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 주 사랑안에 있음이 나의 안식이며 나의 행복이다.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인자와 신실함을 본다. 잠잠히 그 사랑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찬양한다. 나의 집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기 때문이다.
◈ 묵상 기도
주님, 세바처럼 보란듯하고 인정받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헛되고 헛된 삶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주시어 지혜로운 여인처럼 많은 사람을 살리고도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높아졌던 마음을 회개합니다. 나를 낮추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있으라고 하신 그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주님의 허락은 최선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황폐하여진 것도 주님의 허락입니다. 공동체 안에 지혜로운 여인과 같은 생명의 사람들을 세워 주십시오. 주일입니다. 주일예배와 복생선교회 예배가 있습니다. 성령님 저희에게 생명을 주십시오. 생명의 교제가 풍성한 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