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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한결같은 믿음으로 살면 선을 쌓아 올리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업적,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과 선 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현세의 불확실함에서 벗어나는 길이 인내라고 설명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좋은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성전으로 이끕니다. 그곳에서 예수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이 “아름다운 돌로 꾸며진”(루카 21,5 참조) 그 웅장한 성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6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역사에서 거의 모든 것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설명하시면서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반란과 전쟁, 지진과 기근, 전염병과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9-17절 참조).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현실을 너무 많이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지나가고 마는 것,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지혜로운 말씀입니다만, 우리에게 다소 억울함을 줄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많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왜 주님까지 그렇게 부정적인 말씀을 하시는가? 사실 그분의 의도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주려 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탈출구는 무엇일까요? 지나가고 사라져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이 지상 현실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 탈출구는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 말씀은 어쩌면 우리를 놀라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 하고 이르시며 그 방법을 드러내십니다. 곧, ‘인내’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매우 엄격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엄격하다는 말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경직되고 융통성이 없다는 말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있는 중요한 것에 대해 “엄격하고”, 충실하고, 항구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대부분 우리 관심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종 성전에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업적, 우리의 성취, 우리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전통, 우리의 신성하고 사회적인 상징을 우선시합니다. 이런 행동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이런 것들을 우선시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결국 지나가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남는 것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성전처럼 나중에 무너지고 말 것을 짓는 일에 목숨을 바치지 말고,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것을 짓는 일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말씀 위에, 사랑 위에, 선 위에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내하면서, 엄격하고 단호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 위에 지어야 합니다.
인내란 ‘나날이 선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인내한다는 것, 항구하다는 것은 특히 우리 주변의 현실이 다르게 행하라고 압박할 때에도 한결같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일이 많아서 미루게 됩니다. “안 됩니다, 지금 바빠서 못해요. 나중에 할게요.” 혹은 많은 꾀 많은 사람들이 상황을 이용하고 규칙을 이리저리 “드리블”하며 피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나름 정의와 합법성을 견지하며 규칙 준수하기를 중단하고 맙니다. “이 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게 해야지.” 이런 태도를 조심하십시오! 더 나아가 우리는 교회와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즐기는 단편적인 모습만 보면서, 그러한 봉사를 제쳐두고 그들이 여가시간에 즐기는 일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과를 보지 못하거나, 지루하거나,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내한다는 것, 항구하다는 것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의 인내, 나의 항구함은 어떠한가? 나는 한결같은가, 아니면 일시적으로만 신앙, 정의, 사랑을 실천하는가? 나는 상황이 좋으면 기도하고, 상황이 맞을 때만 공정하고, 그럴 때에만 기꺼이 나서고 잘 도와주는가? 혹시 만족스럽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그만두고 마는가? 요컨대, 나의 기도와 봉사는 상황에 달려 있는가, 아니면 주님께 대한 확고한 마음에 달려 있는가? 우리가 인내하고 항구하다면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를 상기시켜 주십니다 – 우리는 인생의 슬프고 추악한 사건에서도, 심지어 우리 주변에 보이는 악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 안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도스옙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를 지은 사람도 사랑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느님 사랑의 반영이며 지상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제2부, 제6권, 3. 사. 기도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그리고 저 세상과의 접촉에 관하여 참조).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반영되는 게 인내, 곧 항구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신실하고 인내하며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기도에 전념하셨던(사도 1,14 참조) 주님의 종이신 성모님께서 우리의 항구함을 굳건히 해 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