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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논어》를 붙든 지 15년, 강의한 지는 6년을 넘기고 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필자가 찾아낸 《논어》 읽는 법이 하나 있다.
형이상, 형이중, 형이하가 그것이다.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는
원래 공자가 한 《주역》 풀이에서 했던 말이다.
형이상은 형(形)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도리를 말하고,
형이하는 형보다 아래에 있는 것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말한다.
이를 현대적으로 풀어 말하면
형이상은 개념, 형이중은 정의(定義)나 풀이, 형이하는 케이스가 된다.
예를 들어 《논어》 첫 문장, “(문(文)을)
배우고 그것을 시간 나는 대로 익히면 정말로 기쁘지 않겠습니까!”는
상·중·하 중에 어디에 속할까?
형이중이다.
그러면 이것을 압축한 형이상은 무엇일까?
호학(好學) 혹은 호문(好問)이다.
배우고 묻기를 정말로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금이나 신하 모두 그래야겠지만 어느 쪽이 더 절실한가?
임금 쪽이다. 임금이 호학·호문해야 비로소 곁에
스승 역할을 할 수 있는 신하[師臣]가 나아올 수 있다.
그러면 이제 형이상 ‘호학’에 해당하는 케이스를 찾기만 하면 된다.
조선 임금 중에 호학했던 군주를 찾는다면 누가 대표적일까?
흔히 세종이나 정조를 꼽는다.
그러나 그것은 학(學)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나온 것이다.
지금 풀이한 것처럼
정말 호학(好學)해서 묻기를 좋아하는 임금은 자기를 낮춘다.
태종은 조준이나 하륜, 권근을 스승처럼 여겼다.
세종은 황희를 그처럼 여겼다.
책이나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신하 앞에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것이 호학(好學)·호문(好問)할 줄 아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라고 지칭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내가 군사의 지위에 있어”
혹은 “군사의 자리에 앉아있는 내가”로 시작했다.
신하들은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낼 때마다
“우리 전하께서 군사의 자리에 계시니”를 붙여야 했다.
그러니 정조 때 비위를 잘 맞춘 재상은 있어도
조준, 하륜, 권근처럼 왕을 잘 이끌어
선정(善政)을 펼친 정승은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형이상·중·하를 알았으니
《논어》 중에서 한꺼번에 형이상·중·하가 다 나오는 사례를 보자.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먼저 어짊[仁]을 묻자 공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했고
앎[知]이 무엇이냐고 묻자 “사람을 아는 것[知人]”이라고 했다.
그런데 번지가 뒷부분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는 “곧은 사람을 들어 쓰고 나머지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번지는 물러나와 자하를 찾아가 물었다.
“내가 스승님께 앎[知]이 무엇인지 묻자
‘곧은 사람을 들어 쓰고 나머지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무슨 뜻인가?”
자하(子夏)가 말했다.
“풍부하도다! 그 말씀이여!
순(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고요(皐陶)를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고,
탕(湯)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이윤(伊尹)을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다.”
지(知)는 형이상, 지인(知人)과 공자의 풀이는 형이중,
그리고 자하가 든 케이스는 형이하다.
뛰어난 리더는 상·중·하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줄 알고,
훌륭한 신하는 상을 보면 중·하로 연결해 낸다.
윤석열 대통령은 중과 하에 머물러 상으로 오를 줄 모르고,
대통령실은 자하보다는 번지 같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으니
국민들 지지가 올라가랴! 내려가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