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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 세계의 문화유산
불국사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써 신라시대 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미를 보여준다.
불국사의 불국이란 말은 '극락정토'를 일컫는 말인데 모든 것이 완전하게 갖추어 부족한 것이 없어 괴로워하고 번뇌함이 없는 안락하고 깨끗한 나라가 되고자 하는 바램이 담긴 뜻이다.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15년(528년)에 창건되었으며 화엄불국사, 혹은 법류사라 불리어 오다가 경덕왕 10년에 재상 김대성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혜공왕 10년에 이르러 목조건물 80 여채가 들어선 대가람으로 완성되어 이후부터 불국사라 불리었다.
그 후 선조 26년(1593년)에 임진왜란으로 대웅전과 극락전 자하문을 제외한 2천여 칸의 목조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선조 37년(1604년)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에 걸친 불국사 중창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에는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등이 국보로 지정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돌을 이용한 예술품의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첨성대] - 동양 최고의 천문기상대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국보 제31호이다.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1350년이 지나고도 옛날의 그 모습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의 과학 유산이다.
첨성대의 건립은 신라의 천문학 발전을 상징한다.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는 않지만 신라의 천문학을 관장하는 국가 천문기관의 중심적 시설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360여 개의 돌을 정성들여 쌓아 만든 첨성대는 높이가 9미터 정도로 병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갈수록 가늘어지는 원통형 또는 병 모양을 하고 있는 첨성대는 잘 살펴보면 위에 4각형의 돌이 놓여 있고 아래 부분도 4각형의 돌 단이 있다.
또 그 한가운데에 남쪽을 향한 창이 하나 있는데 그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기 1미터쯤이다. 창 아래와 위를 모두 12단씩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창은 3단에 걸쳐 있으니까, 첨성대는 모두 276단의 돌을 쌓아 만든 셈이다.
첨성대는 옛날 별의 운행을 비롯하여 일식, 월식 등 천문을 관찰한 외에도 길흉을 점쳤다고 하는데 농사일에도 도움을 준 흔적이 보인다고 하였다.
[천마총] - 우리나라 최고의 천마도
천마총은 사적 제40호로 대릉원 안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경주 155호분이라고 불려왔다.
이 무덤의 내부구조는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에 다시 냇돌을 깔아서 냇돌층 위에 다시 목곽을 설치하여 목곽 내부에 부품을 넣은 궤와 시체를 넣고 목곽을 수직되게 안치하였다.
목곽 위를 다시 냇돌로써 쌓아 덮었으며 그 냇돌층을 다시 진흙으로 발라 다졌다. 마지막으로 이 위에 흙을 쌓아 봉분으로 하였다. 목곽안에서 천마를 그린 장니(말다래)가 나와 천마총이라 하였다.
장니란 말 안장에서 말의 배를 덮어내려 말이 달릴 때 튀어오르는 흙을 막아주는 말다래를 말한다.
여기에 그려진 천마도는 한국 최고의 회화로서 천마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나르는 모습이며 천마의 힘찬 모습은 신라인의 강한 기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고분 내부를 복원하여 천수백년전의 신비를 관람할 수 있게 하였다.
[분황사석탑]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분황사석탑은 국보 제 30호 로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모두 벽돌모양의 돌로 쌓았는데, 현재 3층만 남아있다. 본래는 9층 탑으로 임진왜란때 파손되고 그 후 어떤 스님이 새로 지으려다가 다시 파손하여 3층만 남아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이 탑을 수리할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만든 함(그릇)이 발견 되었는데, 그 속에서 여러가진 모양의 구슬이 나와, 신라 선덕여왕때 건립하였다고 추측한다.
탑의 4귀퉁이에는 사자상을 세워 웅장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돌을 사용하여 벽돌모양의 탑을 세운 것은 신라의 창조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룡사터] - 신라시대 가장 번성하였던 옛터
황룡사는 신라 553년(진흥왕 14)부터 짓기 시작하여645년(선덕여왕 14) 9층목탑을 마지막으로 공사가 완료되었다.
황룡사는 4대 왕 93년간의 긴 세월과 정성이 들어간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흥왕이 이 곳에 새 궁궐을 지으려고 하는데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을 바꾸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 절에는 진흥왕 때 솔거가 그렸다는 벽화가 유명하다. 이 벽화의 소나무를 새들이 실제 나무로 알고 날아와 부딪쳤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황룡사의 중요한 건축물로는 9층 목탑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돌로 만든 석탑이 아니고 나무로 만든 목탑인데 9층짜리 거대한 한식 건물을 보고 있는 듯 한 아름다운 탑이지만 1238년에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신라의 역대 왕들은 이곳의 불사에 친히 참석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들러 불상에 예배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황룡사는 신라의 가장 중요시되는 사찰로서 국왕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가며 크게 번성하였던 절이었다.
[석굴암] - 세계의 문화유산
석굴암은 국보 제24호이다.
신라의 토함산 마루에 위치한 석굴암은 재상 김대성이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창건하기 시작한 절로 774년 김대성이 죽자 국가가 끝을 맺어 완성한 석굴 사원이다.
석굴암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인공석굴로 전실로부터 비도를 지나서 부처의 세계인 굴실의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구조는 방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 평면과 구면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천장은 네모난 돌들을 한치의 틈도 없이 쌓아 올렸고 중앙에는 화려한 연화문개석을 덮어 둥근 형이다.
큰 절에 있는 여러 상들은 좁은 굴 속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중 본존불은 원굴 중앙에 봉안된 여래좌상이며 걸작으로 꼽힌다.
불신은 비례를 갖추고 근업가 자비를 겸비하고 있으며 손끝 발끝에까지 세심한 손길이 미친 석공의 기술은 아름다운 예술과 심오한 종교의 경지가 하나로 되어 신라 조각의 최고봉이며 한국 불교 조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감은사지삼층석탑] - 통일신라인의 미감을 보여준 석탑
국보 제112호이다.
감포 남쪽 20여 리쯤 바다와 가까운 감은사 옛터에 동서로 나란히 두 개의 석탑이 서 있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살아 계실 때 경주로 통하는 동해 어귀에 절을 짓고 싶어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그의 아들 신문왕이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했다.
본래의 이름은 진국사였지만 부왕의 호국충정과 함께 나라를 사랑하는 참뜻에 감사하여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당시 건립된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쌍탑을 이루고 있고, 동·서 석탑은 동일한 구조와 규모를 가지고 있어 통일 신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이후로 한국 석탑의 규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당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각부의 모습, 전체적으로 균형잡인 안정감에서 통일 신라인의 뛰어난 미감을 보여준다.
[기림사] - 천년의 역사와 함께한 사찰
기림사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다.
일제시대까지는 불국사를 포함한 여러 사찰을 거느린 대사찰이었으나 광복 이후 불국사의 대대적인 보수와 개발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대한 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기림사는 643년 선덕여왕 12년 인도의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라고 불렀으나 그 후 원효 스님이 머물면서 중창하고 기림사로 사찰 이름을 바꿨다. 기림사는 기타림 숲 속의 절이라는 뜻으로 바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20년이 넘게 머물렀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을 다녀오면서 기림사의 서쪽 계곡에서 쉬어 갔다는 기록이 있다. 경내에는 소조비로자나삼존불(보물 제959호)을 모신 대적광전(보물 제833호)을 중심으로 약사전, 응진전, 명부전, 산신각 등이 널찍한 터에 들어서 있다.
산신각 뒷산에는 이 절에 머물렀다는 김시습을 기리는 매월당 사당이 있다. 또, 최근에 개관한 박물관에는 기림사가 자랑하는 보물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을 비롯해 탱화, 문적, 사리등이 전시되고 있다.
[나정] -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를 가진 유적
나정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 간직한 곳이며 사적 제245호로써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나정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가 건국되기 전 경주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6부 촌장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이곳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말이 있던 곳에 가보니 빛이 나는 큰 알이 하나가 있었는데 이 알을 깨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으므로 하늘이 보낸 천자라 여기고 잘 길렀다.
이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에 6부 촌장이 모인 자리에서 왕으로 추대되니, 이가 곧 신라 제1대 임금이다. 왕이 박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성을 박(朴)이라 하였고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라 하게 되었다.
나정은 바로 박혁거세를 씻었던 우물터를 일컫는다.
[다보탑] - 여성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석탑
다보탑은 국보 제20호 이다.
신라 경덕왕 10년에 축조되었는데 불법의 공력과 무궁무진한 정신력, 자비심을 상징한다.
다보탑은 경쾌하면서도 장려하고 복잡한 듯 하면서도 통일감을 잃지 않았으며 형식과 구조가 변화 무쌍하다.
이것은 신라인의 높은 예술적 창의력 및 조각 기술을 엿볼 수 있게해준다.
[대릉원] - 사적 제40호 대릉원
1973년 천마총 발굴 이후, 주변 지역을 공원화 하여 대릉원으로 불리어지게 되었고 황남동 일대에 있다고 하여 황남동 고분군이라고도 부른다.
사적 제40호이다.
이곳은 큰 나무가 없이 잔디가 잘 입혀져 마치 동산을 연상시킨다. 고분군으로서는 경주에서 가장 크며 천마총을 비롯하여 미추왕릉, 검총 등 여러 개의 고분이 모여 있다.
대릉원의 고분들은 적석 목곽분이 대부분이나 제151호 분과 같은 석곽분도 있다. 이곳에는 현재 20여 기의 고분이 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고분 이외에도 지하에 봉분이 파괴되었거나 원래 봉분이 없었던 고분, 그리고 소형 고분 등이 무수히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릉] -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릉
이 능은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654∼661년)의 무덤이다.
본명이 김춘추인 태종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서, 왕비는 김유신의 동생인 문명 부인이며,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의 완성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 때 이루어졌다.
능 앞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난 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신은 없어지고 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이수만 남아 있다.
태종무열왕릉은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무대왕릉] -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수중릉
사적 제158호이다. 문무대왕릉은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158호이다.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후에 중국 당나라 세력까지 물리치고 삼국의 통일을 이룬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인물의 유골이 바다 가운데 솟아 있는 자연 암석 사이에 묻힌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인데, 이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 한다.
문무왕은 불교 법식에 따라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아 백성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수중에 만들어진 이 능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신라오릉] -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신라오릉은 사적 제172호이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오릉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왕,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의 네 박씨 임금의 능과 박혁거세왕의 왕후인 알영 왕비의 능으로 추정된다.
오릉이란 이름은 박혁거세왕이 세상을 떠난 지 7일만에 왕비가 서거하자 왕의 분묘에 함께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여 다른 묘에 매장함으로써 이곳에 다섯 구의 분묘가 조성되었다는 데서 기인한다.
[신문왕릉] - 신라 제31대 신문왕릉
신문왕릉은 사적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 시대부터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지던 낭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신문왕은 삼국 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의 장남으로 그의 뒤를 이어 신라의 31대왕으로 즉위하였다. 신문왕은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귀족을 숙청하였고 수도를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로 천도하려고 하였다.
통일로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9주로 나누었으며, 국학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였고 설총, 강수와 같은 학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신문왕은 죽은 후 낭산의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포석정] - 신라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궁
포석정은 사적 제1호이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포석정은 신라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이궁(왕이 행차했을 때 머무는 별궁)터이면서 한편으로는 신라의 멸망에 얽힌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다.
포석정은 물 위에 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는 '유상 곡수'라는 시회를 벌이던 곳이다. 『삼국 유사』에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이곳에 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55대 경애왕이 이곳에서 놀다가 불시에 쳐들어온 후백제 견훤에게 죽음을 당하고 천년 신라의 막이 내려졌다고 한다.
[계림] - 신라 김씨 왕의 시조가 태어난 숲
계림은 사적 제19호로써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계림은 신라 김씨 왕의 시조가 태어난 숲이라 하여 지금까지 신성스런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김알지)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신라 4대 탈해왕 시대에 이 곳 숲에서 한밤중에 닭 울음 소리가 나서 기이하게 여긴 탈해왕은 신하를 보내어 그 원인을 알아보게 하였다. 숲에 도착한 신하는 금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탈해왕에게 고하였다.
이를 듣고 왕이 친히 행차하여 금궤 뚜껑을 열어보니 그 속에 사내아이가 있었다. 사내아이의 용모가 준수하고 범상하지 않아, 왕은 하늘이 내린 아이로 여기고 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김알지이다.
그러나 태자인 그는 왕위를 사양하여 김알지의 6대 손에 이르러서야 김씨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왕이 바로 신라 제13대 미추왕(서기 262∼283년)이다.
[선덕여왕릉] -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릉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묻힌 곳으로써 사적 제182호이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장녀로 태어나서 632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 후 647년까지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건의로, 645년에 황룡사 9층탑을 세웠고 분황사와 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일대 위업을 쌓았다.
또한 뛰어난 재기와 지혜를 갖춘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휘하에 거느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마련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어릴 때 중국 사신이 가져온 모란 그림에 벌이 없는 것을 보고 모란의 향기가 없음을 알아 맞춘 것과, 여근곡에 백제 군사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낸 일화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은 후, 사천왕 위에 있는 부처 세계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말했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여왕은 낭산 기슭이 바로 도리천이라고 일러주었고, 신하들은 그에 따랐다.
여왕이 죽은 지 32년 후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지어짐으로써 결국 여왕은 유언대로 도리천에 묻힌 셈이다.
이러한 신령한 성품을 가진 왕의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외부 장식이 다소 빈약하지만, 신라 최초 여왕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석가탑] - 힘이 넘치는 남성미를 보여주는 석탑
석가탑은 무영탑으로도 불리며 국보 제20호이다.
이 탑은 여성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다보탑과는 달리 간결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남성미를 엿보게 한다.
석가탑의 높이는 다보탑보다 약간 낮고 2층으로 이루어진 기단의 웅장함과 탑신의 조화로운 비례와 경쾌한 외관이 어우러져 신라 불교문화이 특색을 잘 갖춘 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인의 조각기술과 예술감각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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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라하면 대표적인 곳.....경주가 생각나요.. ^^우리문화재 구경도 하고,경주근교산행도 함 추진부탁드려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