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입구 사거리.
'사교육 일번지' 강남에서도 사교육 핵심 도시다. 인근에만 입시학원 500여 곳이 밀집해 있다.
방학 중인 지난 16일 점심시간, 중심가에 나란히 늘어선 롯데리아, 크라제 버거, 버거킹의 내부 모습은 특이했다.
이 중 한 가게의 내부로 들어갔다. 손님의 절대다수가 어린 학생과 학부모였다.
허겁지겁 햄버거를 먹고 있는 A학생(14, 개포동)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A학생은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영어, 수학, 과학, 바이올린 학원에 다닌다.
방학 중이지만 이 일정을 모두 소화하려면 아침잠을 잘 수 없다. 수업 일정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30분까지 빡빡하게 짜여 있다. 학원이 끝나도 쉴 수 없다. 밀린 과제가 많다. 학원에서 배우지 않는 중국어는 학습지로 공부하고, 역사 등의 과목은 자습한다.
예술고를 진학하기 위해서도 내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오히려 방학이 더 바빠요. 새벽 3시쯤에 잠들어서 아침 8시에 일어나요. 이렇게 해도 숙제가 워낙 많아서 다 못 해요."
'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아니"란다. 다른 학생들도 전부 그렇게 하는데, 자기 혼자 뒤처질 순 없지 않느냐고 그 학생은, 수줍게 웃으며 되물었다. "어제도 아빠가 '학생의 본분'에 대해 얘기하셨어요." A학생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더니 "다음 학원에 가야 한다"며 총총히 자리를 떴다.
전쟁을 치르는 아이들
매장 안을 돌아보았다. 한편에선 아이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이 바삐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패딩 점퍼를 입은 남자아이 셋이 막 햄버거를 들고 와 앉았다.
그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라는 아이들은 하루 절반 이상을 학원에 매여 있었다.
B학생은 국어와 수학,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수학이란다.
아직 고등학교 고복을 입지도 않은 학생이 고교 2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었다. 역시 '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가끔은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 순간이었다.
맞은편에서 기다리던 아이의 어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아이에게 물었다. "숙제는 다 했니?" 더 이상 취재는 불가능했다.
아이는 "점심시간이 30분이라 빨리 올라가야 한다"고 속삭였다.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빠른 속도로 햄버거를 먹었다.
일대가 학원가라고 하지만 대낮에 돌아다녀서는 학생들을 찾기 힘들다. 하루 종일 학원 안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마치 죄수처럼 짧은 시간을, 오직 밥을 먹기 위해 나왔다. 혼자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개중엔 초등학생도 상당수였다.
"제 꿈은 하버드대 편입이래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에 진학할 C 어린이. 곧바로 학원에 가야 하는 탓에 짧게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답했다.
얘기 도중에도 그 아이는 연신 시계를 들여다봤다. 덩달아 기자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C 어린이는 영어와 수학, 피아노, 그리고 종합학원까지 네 군데의 학원을 다닌다. 그마저도 일곱 군데에서 많이 줄인 편이다.
수학학원에서 내주는 숙제를 따라가기도 벅차서란다. 이렇게 해서 하루 총 10시간씩 수업을 듣는다.
특강이 있을 때는 시간이 더 늘어난다. 물론 특강료도 전부 과외비에 포함된다. 현재 영어는 중학교 과정, 수학은 수학경시대회 대비 과정을 배운다.
집으로 돌아오면 숙제를 해야 한다. 일찍 잠들면 밤 12시고, 보통 일주일에 사나흘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든다.
C 어린이의 꿈은 의사다.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한 후 하버드 대학에 편입할 계획이란다. 엄마가 한국의 대학에 다니다가 중간에 편입할 수 있다고 알려줬단다.
"엄마가 스케줄을 짜줘요. 첫 학원에 엄마가 데려다주고, 그 다음엔 제가 옮겨 다녀요. 엄마가 학원에 도시락을 싸 올 때도 있어요."
C 어린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강남으로 이사 왔다.
학원비가 버겁다고 가끔 엄마가 한숨을 쉰단다. 그래도 공부한 보람이 있어서 수학경시대회, 시의회 글짓기상 등에서 꾸준히 상을 탔다. '잠도 못자는데, 공부하기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힘들긴 한데요, 나중에 커서 재수하는 사람은 안 되고 싶어요. 친구들도 다 학원 다녀요. 영어, 수학학원은 안 다니는 애가 없어요. 국제중학교나 특수목적고등학교에 가고 싶은데 경쟁률이 높아서 잘 될지 모르겠어요."
아이는 해맑게 웃다 시계를 바라보더니 일어났다. 이제 다른 학원에 가야 한단다.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기
C 어린이의 사례는 이른바 '강남 학원족'의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다.
대치동 일대 거주민은 대부분이 인근 아파트에서 전세로 사는 외부 입주민이다. 입주 목적은 오직 교육이다.
사교육시장에서 오래 몸담았던 이범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은 대치동이 '뜨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풀었다.
"대치동 주민 대부분이 자녀가 초등학교 때 입주한다. 당연히 이들은 '강남식 교육관'에 동의한다.
부모 대부분이 고학력에 중산층 이상이다.
재벌처럼 자녀에게 물려줄 자산이 많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이 성공한 방식 그대로, 자녀도 오직 '공부'로 성공하길 바란다. 그 열망이 아이들을 옥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실 우리나라 학부모 대부분이 이 '강남형 교육', 즉 사교육에 의존하는 고강도 수험경쟁 체제에 합류한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어머니가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온종일 감시 가능한지 여부, 아이가 수강하는 학원 수가 달라질 뿐이다.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될 여력이 있는 가정의 자녀는 '학원에 간다'고 말하곤 PC방으로 빠질 가능성이 줄어들고,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할 의무는 크다.
돈만 있다면, 대다수 부모가 이 방식의 자녀교육을 선택할 것이다.
이범 보좌관은 그러나 "사교육 효과는 크게 부풀려져 있다.
성공사례만 알려지지, 상당수 실패사례는 알려지지 않는다.
(사교육에 다걸기하는 게) 결코 효율적인 공부 방법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중학생의 경우 하루 두 시간을 넘는 사교육은 성적 향상 효과가 미미하다는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 결과도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에 대한 과도한 채찍질이 중단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약간의 성적이라도 더 오를 수 있다면, 학부모들은 얼마든지 더 많은 사교육을 시킬 준비가 돼 있다.
자녀교육에 효율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번 대치동 고교생 자살사건에서처럼, 아이들이 상처입고 병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경쟁은 멈출 수 없다.
대기업 연구원인 남편과 맞벌이를 하다, 자녀교육을 위해 전업주부가 된 박모 씨(39)는 "'내 자녀는 저렇게 키우지 말아야지'하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내 아이를 학원으로 내몰고 있더라"며 "주부들의 모임에서 갖가지 정보가 오간다. 그 그룹에 끼면 '내 아이만 뒤처진다'는 불안감 때문에 학원에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무조건 밀려난다"고 언급했다.
전형적인 마이너스섬 게임이다. 사교육 경쟁이 과열될수록, 아이는 힘들어지고 가계 재정은 나빠진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작은 이익이라도 난다는 믿음이 학부모들의 사회를 지배하는 이상, 멈출 수 없다.
이범 보좌관은 "강남 일대에는 유난히 어머니들의 커피 모임이 많다.
그 그룹에 한번 들어가면, 불안함 때문에 학부모들의 경쟁심리가 증폭된다"며 "결국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라도 자녀를 내몰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마당에서 어떤 대책이 이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이범 보좌관은 "대학서열화로 인해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강남으로 이주했다,
막내까지 입시를 끝내면 빠져나가는' 선순환 구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비강남권도 그 정도가 다르지 방식은 비슷하다"며 "어떤 교육정책을 쓰든, 대학 서열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교육 열풍은 해결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