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기 94년 4월 4일 토요정례법회 ○
청년 단법회
정산종사법어 '법훈편'으로 각 단별 단법회가 있었습니다.
김제원 교무님 설법
4월이 왔다.
4월은 대각개교의 달이다. 대종사님께서 26세에 대각을 하셔서 원불교가 열렸다.
그 때로부터 금년이 94년째가 되었다.
오늘은 법훈편을 공부하는 날이다.
법훈편 다 읽어오셔서 공부하시지 않으시겠는가.
법훈편은 짧아서 참 좋다. 법문이 간단하지만 참으로 의미있다.
소시에 대각하고, 중년에 제도사업하고, 말년에 해탈하면 원만한 일생이라고 하셨다.
여러분은 지금 원만한 일생을 걸어가고 계신가?
여러분들은 소시에 무엇하고 계신가?
어떻게 하면 먹고 살까, 돈을 벌어볼까, 시집장가를 잘 가볼까 하는 것이 관심이신가.
오늘 백도원 결혼하는데 나도 여기서 하고 싶다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소시에 대각이 더 중요하다.
나는 26세 이하다 하는 사람들 손들어보시기 바란다. 생각보다 상당히 많다.
26세 4월 28일에 여러분 한번 뵙도록 하겠다.
정산종사님 법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역대 사회 국가 세계에서 큰 분들은 다 소시에 대각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소시에 대각하지 못할까.
이야기해 보시기 바란다.
대종경에 나오죠.
누구는 어릴 때에 소리를 하고 다니더니 숨은 명창을 하더라 하였다.
대종사님은 도에 취미를 가져서 일찌감치 수양하다가 대각하여 세계 일을 하게 되셨다고 했다.
대각이 남의 일이다 생각하는 분은 대각의 선물이 안 올 것이다.
대각하신 분들만 따라다녀서 내 생활에 조금 써먹겠다 생각하는 분은 초입자들의 생각이다.
진짜 까닭있는 사람은 내가 깨달아야 한다.
깨닫는 것은 간단하다.
정말이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다. 그러나 쉽다고 한번 해보겠다고 조금만 마음먹으면 가능하다.
여러분은 가능하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분은 열배 백배 천배의 공력을 더 들여야 한다.
여러분들은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고, 이 법의 가치를 잘 모르고,
원력이 작아서 소원이 겨우 잘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현모양처가 되는 것으로는 대각이 되지 않는다.
대각이 되려면 대종사님처럼 일찌감치 스승을 찾고, 이 뭐꼬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하여야 한다.
정산종사님처럼 스승을 찾아야 한다.
석가모니는 3천년 전에 다 버렸다.
왕위 궁궐 예쁜 마누라도 다 던져버리셨다.
석가모니가 3천년 전에 버린 것을 우리는 따라가려고 지금 하고 있다.
부처님은 내가 던져버린 것을 왜 따라가려고 하는가 한다. 그러지 말고 내가 간 길을 따라오라 하신다.
그러면 '교무님~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다 던져버리고 살 수 없어요!'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집 다 팔고 보따리 싸서 나오라는 말이 아니다.
허허실실이라 한다. 가치 웃고, 공부하고 직장생활 하지만
그 내면에는 깨달아야겠다는 원력이 있고, 의심 의문거리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것을 풀어보려는 마음, 아침에 자성자리를 찾아가려는 그 수양.
그리고 그것을 향해서 의문을 가지고 책을 보고 자연을 보고 꽃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아름답다, 향기가 좋다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저 꽃은 어디서 왔는가, 저 꽃은 무엇인가, 저 꽃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저 꽃이 일년 사는 모습과 내 사는 모습은 무엇인가 하고 이치적으로 들어가 주어야 한다.
까닭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중년에는 제도사업을 해야 한다
소시에는 놀고, 중년에는 돈과 명예를 향해 쫓아가고, 말년에는 아프다고 병 치레를 하다 죽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원만한 일생은 소시에 대각하여 중년에 제도사업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년에는 해탈을 하여 내생 준비를 하여야 한다
아픈 것은 아픈대로, 나 그래도 살만큼 살았다,
그리고 내생 길은 이렇게 하고 싶다 어떻게 살고 싶다 나는 죽을 때 이렇게 죽겠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내 생에 내가 가지고 갈 것을 챙겨야 한다. 그런 준비를 해야 한다.
천도품에 보면, 한생은 눈을 떴다 감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것과 같다.
그것이 한 생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교무님, 교무님 한다.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을 해야 한다.
김연아는 하루에 8시간~9시간씩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습을 했다고 한다.
최경주는 하루에 8~9시간씩 골프 연습을 했다.
강수진은 나이가 30이 넘어가도 발레 연습을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전 법규 연습을 해야 한다.
법훈편 마지막 73장을 봅시다.
여러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것이 미래의 일 같은가?
나는 죽음을 매일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시간을 알뜰하게 쓰지 못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가 시간을 알뜰히 쓸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해야 삶을 가치있게 살 수 있다.
시간을 죽이기 때우기 하여서는 안된다.
내가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 게임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내가 중학교 때이다. 무척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후로 오락실에 안 가보았다.
내가 오락 이야기를 왜 하는가.
그 때 당시에는 재미있는게 좋다. 그런데 해보니 세상에 할일 없는 사람이 오락하더라.
자기가 어떤 목표를 세워서 하려고 보면 정말로 할 시간이 없다.
제대로 하려는 것도 못하는 것이 많다.
여러분 읽고 싶은 책도 못 본다. 그런데 거기에 게임을 하고 에너지를 쓰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큰 일을 할 수 없다.
가능성으로 놓고 볼 때는 죽어라고 해도 어려운 일인데, 거기에 에너지 쓰는 사람이 큰 일 할 수 있겠는가.
미래에 대한 큰 꿈이 있는 사람이 게임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자식 낳았다고 생각해 보라.
학교 다녀와서 밤새도록 게임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에너지를 미래를 위해, 인문학 볼 책도 얼마나 많은지.
정당하게 해야 할 것도 밀려서 할 일이 많은데 게임에 에너지를 쓰고 있다.
"게임회사 들어가도 되는데요" 그런 소리 할 것인가?
950쪽, 73장 함께 봉독해 보자.
73. 말씀하시기를 "평상심 공부 잘한 이가 참 도인이니, 빈부 귀천 고락간에 도심이 일관하여야 큰 도인이니라."
내가 출가하고 나서 내 책상 위에 평상심(平常心)이라는 말을 써 놓았다.
평이란, 평평하다, 고와 귀천이 없다는 말이다.
상이란,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시간의 개념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변화 속의 변화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유상으로 보면, 무상으로 보면 하고 나온다.
상은 항상 상 자이다. 세상은 늘 변화한다.
여러분의 마음도 조변석개 아닌가.
훈련 나고 나서는 바로 아침좌선 나오다가도
며칠 지나면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못 나온다고 한다.
그 이유만 모아서 책 한권 내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상이다.
권도편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온다.
평상심을 네가지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1. "신의" 에 나타난 평상심
어떠한 순경, 난경, 역경이 오더라도 그것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신의다.
내가 원불교에 큰 도를 깨치려는 목적으로 왔다, 내가 성불제중 하겠다, 영생에 행복자가 되겠다,
반드시 견성을 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왔으면 그 약속을 놓지 말아야 한다.
교무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는 신의를 놓지 않는 것이다
쉽지 않다.
평상심은 항마 이상이 되어야 한다
항마 이하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믿지 못한다.
그러나 깨치지 못하고 평상심 못간 사람은 평상심 못 가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묘하게 이것이 너무 좋더라.
"평상심 중도행 원만행"
나는 이 세가지를 간사 때에 써 놓았다. 그 때가 20대 중반이었다.
내가 평상심 지킨 것을 얘기해 줄까.
4학년 끝날 무렵에 어떤 동기가 나에게 이것을 묻더라.
자네는 밥먹으러 출가했는가.
내가 원불교 학과 4년간 한끼도 굶어본 적이 없다. 다 먹었다.
평상을 지킨 것이다.
이것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분, 아침밥 안 굶고 드시는가.
아파서, 늦게 자서, 배 아파서, 어디 갔다와서, 날씨가 궂으니까, 방학 했으니까 여러가지 이유로 굶는다.
밥만큼은 4년간 평상심을 잘 지켰다.
좌선도 내가 안 빠져보았다. 한번도 안 빠져보았다.
이것이 평상심이다.
내가 모신 스승님, 끝까지 모신다.
신의에 나타난 평상심이다.
어떤 난관, 생사의 관건에 놓여도 내 본래의 참 마음을 놓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이 신의에 있어서 참 마음이다.
2. 교제에 나타난 평상심
나에게 이끝이 되는가 안되는가.
사람이 집단에서 신의가 있고 교제의 도가 있어야 한다. 평상심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이익이 좀 있으면 요리 붙고, 그러다 변하면 저리 붙고.
나는 내가 선택했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나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저 사람이 설사 나를 배은하였다 할지라도 끝까지 감싸주는 것이
바로 교제에서 평상심이다.
대종사님은 황이천 선진님이 당신을 방해하러 온 사람도 절대 평상심으로 대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이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고 당신 딸을 전무출신 시키게 하였다.
일본 순사 가장 앞잡이로 온 사람을 평상심으로 대해 주신 것이다.
여러분 평상심으로 대해 보았는가.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네 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평상심을 놓지 않으셨다.
일본 앞잡이이든 아니든 평상심으로 처처불상으로 대했더니 그 사람이 제자가 되고,
당신 딸을 전무출신 시켜서 지금 교무하고 계시다.
대종사님 작은 아들이 광령이다. 돌아가셨다.
광령이 돌아가시자 마음에 흔들림 없이 일처리 하셨다.
여러분이 결혼해서 여러분 자식이 죽었다 해봐라.
"내가 원불교를 믿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할 것이다.
여러분 교당에 잘 다니시다가 모르겠다.
이 중에 10년 후에 몇명이 안암교당 또는 원불교에 남아 계실지.
죽어서 없으실 수도 있겠고 아니면 평상심이 무너져, 자존심을 세워서 경계 속에 떨어져 나가는 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3. 빈부에 나타난 평상심
교무님
제가 부장이 됐어요
제가 드디어 아파트를 장만했습니다.
거꾸로 말해볼까요
제 자식이 사고 나서 살지 죽을 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식 살려만 주시면 다 하겠습니다 하기도 한다.
교무님이 회사에서 나가라네요 하기도 한다.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다.
사업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영동교당 박우경 님은 잘 살으셨다. 대호법까지 이르신 분이 망하셨다.
그래도 전혀 흔들림 없이 활동 하신다.
돈 있는 사람이 내기가 더 힘들다.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 분은 빈부에 평상심을 유지하신다.
여러분들은 온갖 소리를 하며 피할 것이다.
시간이 가도 변함이 없는 여여한 것에 평상심을 가진다.
교만하지도 않고, 너무 자학하지도 않는다.
조금 잘 살면 어떻게 못 살면 어떤가. 마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경제가 명예가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 부처님 당대에 어떤 사람이 소를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소 잃어 버리고 정신 없는 사람에게 네 마음소는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찾지도 모르는구나 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 한마디에 그 사람이 탁 느낀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이 출가하여 아라한을 얻었다고 한다.
4. 안위에 나타난 평상심
어떤 스님이 강이 너무 물살이 세어서 불안했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건넜다.
다 건넜더니 나무아미타불이고 뭐고 소용없구만 하면서 갔다.
그러다 딱 쳐다보니 보따리를 저 쪽에다 놓고 온 것이다.
그러니 다시 불안하거든.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다시 가다가 떨어져 죽어버렸다.
내가 위급함이 없어지니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위기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평상심을 유지해야한다.
여러분 여기에서 단원이 있다고 해 보자.
우리 남궁 부가 단원이니 적당히 하다가 자신이 단장, 중앙이 되어서 단원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너도 단원일 때 어영부영 하더니만, 나도 안 도와줘" 한다.
단장 중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원이 중앙되고 단장되는 것이다.
여러분 회사도 마찬가지다.
아랫사람 윗 사람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랫사람이 언제가는 윗 사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상심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를 너무 작게 생각하거나 또는 교만한 것이다.
공자님이 갇힌 이야기 아는가.
공자님이 성에 있었는데 식량이 바닥났다. 그래서 적군이 저 사람 끝났다 했다.
그런데 7일간을 밥을 못 먹고 있었는데도 마치 밥을 먹고 있는 것처럼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랬더니 적군이 떨어졌을 것 같은데 안 떨어졌나 싶었다.
여러분 밤에 귀신이 나타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타날 까봐 두려워서 죽는 사람 보지 않았는가.
아파서 죽는 사람보다 두려워서 죽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평상심이 없으면 그렇다.
자성자리가 평이요, 상이다.
그 자성자리를 깨치고 알지 못하면 놀아나는 것이다.
생사에 놀아나고 귀천 빈부 고락 경계에 놀아난다.
그러나 경계 이전의 자리, 한 생각 이전의 자리는 바로 자성 자리이다.
우리가 그 자리를 지키고 깨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자성자리를 알고 믿음과 서원이 있는 사람은 가운데 시소의 가운데에 앉은 사람과 같고,
그것을 모른 사람은 온갖 경계에 좋았다 싫었다, 기뻤다 슬펐다 하고 놀아난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내가 좀 안좋구나, 풀리는구나 하고 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아 이렇구나 하고 지켜본다.
여러분 여기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평상심이 결국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조금 돈이 벌려도 안 벌려도, 내가 좀 이쁘다 해도 안 이쁘다 해도 마찬가지다.
적당이 살면 평상심인가 그렇지 않다. 그 안에서 철저하게 준비할 뿐이다.
준비없는 사람이 평상심이 될 수는 없다.
준비없는 사람은 창황전도, 웃고 울고 하는 것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철저하게 중앙에서 준비하고 철저하게 일 없을 때에는 준비해야 한다.
평상심을 도로 아는 사람은 연예인을 봐도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다.
나는 만나면 지난 번에 박정씨를 만났을 때
"참 반갑습니다. 제가 전에 노래 잘 들었습니다. 우리 나무아미타불도 하고 고맙소" 하고 갔다.
평상심을 아는 사람은 꽃남이나 야구 축구스타를 보아도,
"참 감사합니다, 대중에게 기쁨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하게 된다.
그러나 소리지르고 카메라 들이대는 것은 평상심이 아니다. 자성자리 잃어버린 것이다.
그 일 그 일에 일심을 놓친 것이다.
여러분 우리 교당에서 내일 성지순례를 간다.
일반교도들은 다 아니까 말을 안해도 되지만 여러분은 말씀 드리겠다.
여러분 월불교의 현재 최고 지도자가 좌산상사님과 경산종법사님이시다.
아무나 되시는 것이 아니다. 많은 분들의 기운을 받고 있고 아무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런 분을 내일 뵙기로 했다.
종법사님 바쁘시다.
영산에서, 서울로, 대전으로 다니신다.
그런 분들 가서 뵙기만 해도 내가 업장이 녹을 것이고, 인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업하는 사람도 꼬였던 일이 풀릴 것이다.
그 속에서 법문도 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 늦게 오니 안가고, 무엇이 어쩌네 해서 안 가는 것은 안된다.
정말 아직 초입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것 아니다.
나는 그것을 하려고 다 준비해 놓고, 버스도 예약하여 준비해 놓았다.
얼마나 준비하였는지 모른다.
강 건너 불 구경 하는 사람은 같이 복받을 기회에 못 받는다.
같이 천도 받을 때 못 받는다.
대산종사님께서 대정진 대적공 하시면서 끝에 대합력을 내어놓으셨다.
합력은 대인의 심법이다.
그리고 바자회 관련으로 많은 분들이 합력해 주시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장송교당 교무님 전화 주셔서 매실 인터넷으로 판매하시는 보내주시겠다 한다.
완도 교무님도 미역 한 박스에 어느 분은 생필품도 다 보내주신다.
학사에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니 감사하다.
많은 사람들이 합력해 주신다.
대중이 합력할 때, 마음으로 기운으로라도 합력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때 같이 기운타는 것이다.
파리가 어떻게 자기 힘으로 천리를 날아가는가.
천리마 엉덩이에 붙어서 갈 수 있다.
합력할 때 내 형편에 맞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 천도가 되고 큰 은혜가 되는 것이다.
오늘 단회 잘 하시고 내일을 위해 단회 9시에 끝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성지순례갔다가 또 바쁜 일 많을 텐데도 고마워요 은전교우^^
진짜 글도 잘 쓰시고 수고가 많네요~~~
기억이 새록새록. 감사해요 은전교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