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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도 꼼짝 못했을 대전형무소 이중감옥 | |||
⑤ 대전형무소 설립 배경·거쳐간 인사 | |||
한국의 근대 감옥 관제는 1908년 4월 일본에 의해 경성을 비롯한 평양과 대구, 공주 등 전국의 8곳에 근대식 감옥이 설치, 운영되면서 시작됐다. 같은 해 11월 전국 감옥소의 수는 16개로 늘어나는데 의병에 대한 검거활동이 강화돼 체포자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대전 감옥소 역시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수감 대상이 폭증해 그 해 5월 8일 공포된 총독부령 제86호에 따라 신설됐다.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이성우 연구원은 "대전은 일본인들이 만든 근대도시이기 때문에 당시 거주하는 일본인 수가 전국 최다 수준이었다"며 "대전에 형무소를 지은 것은 철도의 개통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죄인 수송이 편리한 점도 있지만 대전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치안 유지를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23년 5월 5일 총독부령 제72호에 의거 대전감옥소는 다시 대전형무소로 개편돼 해방 이후까지 운영된다. 당시 대전형무소의 위치는 충남 대전면 중촌리로 오늘날 중구 중촌동 16-11번지 일대였다. 규모는 부지면적 11만2396㎡, 건물 연면적 4만6280㎡ 정도로 1918년 장형기감으로 설계돼 1924년까지 공사가 진행됐다. 대전형무소는 독립운동가, 사상범 수용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치밀한 구금시설을 갖췄다. 감옥 안에 또 하나의 작은 감옥을 만들었고, 그 안에 다시 이중벽을 쌓아서 내부로부터 탈출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전감옥 및 대전형무소와 관련된 건축설계 도면은 감방, 정문, 중앙간수소, 청사 등 감옥 내의 여러 건물에 대한 도면이 비교적 자세히 그려져 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 중 대표적인 이는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을 꼽을 수 있다. 도산은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해 독립 애국청년을 양성하는 등 수많은 단체와 학교를 설립해 항일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독립운동계의 계파 갈등이 점점 심해지자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을 유화시키고 상대의 사상과 노선을 상호 포용하는 대동단결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커우공원에 폭탄을 투척해 7명의 일본군과 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렸던 날이었다. 도산은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민단장으로 오인받아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경성으로 압송됐다. 그 해 12월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4년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로 이송된 그는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했다. 같은 시기, 몽양 여운형(1885-1947) 선생도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시절을 보냈다. 몽양은 상해를 주무대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다가 1929년 7월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2년 7월 27일 대전형무소에서 출옥될 때까지 1100여일 동안 독방에서 감옥생활을 했다. 몽양의 대전형무소에서의 생활은 당시 잡지인 신동아 1932년 9월호 '여운형 옥중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는 옥중 생활동안 다섯 가지 병을 얻었다고 실토했다. 맨 처음 상해 야구장에서 잡힐 때는 형사에게 귀를 맞아 한쪽 고막이 파열돼 평생 한쪽 귀로만 들어야 하는 불운을 치렀다. 그 후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 돌을 깨물어 이 한 개가 부러지고 잇몸 전체가 상해 염증으로 고생해야 했다. 또한 소화불량 때문에 얼굴이 수척해지고 체중이 부쩍 줄어들었으며 감옥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신경통으로 인해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세어버렸다. 마지막으로는 치질에 걸려 네 번이나 수술을 받을 정도로 고생이 막심했다고 한다. 당시 치질은 차가운 바닥에서 장시간 앉아있어야 하는 형무소에서 만연했던 질병이었다. 몽양은 옥중기를 통해 "옥살이 3년에 나는 병쟁이가 되고 늙은이가 되어버렸다"고 자탄의 심정을 밝히고 있다. 몽양은 옥중에서도 집필을 하고자 붓과 종이를 청구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한시를 몇 수 지었으나 기록하지 못하고, 기억해 두려고 몇 번씩 읊었다고 전해진다. '가을 바람은 소슬하고 / 구슬픈 비는 주룩주룩 뿌린다 / 그 빗물 감옥 마당에 흘러가고 / 그 빗소리 이내 가슴에 스며드네' 정통 유학자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심산은 1926년 12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돼 임시정부의 재건에 혼신의 노력을 하던 중 상해에서 일경에게 체포됐다. 그는 재판 당시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물으면 "없다"고 대답하고, 왜 없냐고 물으면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 등 재판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1928년 12월 징역 14년을 받고 공소도 거부한 채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심산은 옥 중 생활 동안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됐고, 병이 위중한 나머지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했다. 해방 후 전쟁을 겪고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는 등 한국이 현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을 겪는 과정 속에서도 대전형무소는 감옥의 역할을 이어갔다. 고암 이응노 화백, '야생초편지'의 저자 황대권 생태운동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등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민아 기자 mina@daejonilbo.com 참고문헌=대전근대사연구초1(2012년 대전시 발행), 중촌마을역사탐험대 그루터기 발간 자료집 '평화마을 만들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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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지막 사진... 안창호와 여운형...안창호선생의 전신이 찍힌사진 저는 처음 보네요 고마워요
늘 신문 검색해 올려주시는 정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