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희곡을 남긴 극작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4대 비극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를 비롯하여 모두 36편의 희곡을 남긴 인물이다. 반면에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7편의 장막극을 남겼지만, 세계 연극계가 주목하는 장막극은 <갈매기>, <바냐 외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 4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연 빈도에서 체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1585년부터 1625년까지 지속된 엘리자베스 시대를 대표하는 소네트 시인이자 극작가 셰익스피어에게 밀리지 않는 유일한 극작가 체호프. 유럽에서 가장 낙후했던 러시아의 19세기 끄트머리를 장식한 소설가이자 극작가 체호프. 복잡다단한 심리의 햄릿,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 오셀로, 믿음의 허망한 나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리어왕, 바닥 모를 권력을 추구했던 맥베스 같은 인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인생의 비의(秘義)를 예리하게 포착한 체호프.
28세 올가, 21세 마샤, 20세 이리나. 이들이 <세 자매>에서 체호프가 그려내는 19세기 최후의 러시아 귀족 여성들의 총합이다. 여단장이자 장군인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지 1년 세월이 흐른 5월 5일 봄날의 환희가 가득한 날, 그들은 모스크바로 가려고 채비한다. 11년 전에 아버지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고향 모스크바를 떠나온 세 자매. 그들은 한시바삐 모스크바로 돌아가 예전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삶을 되찾고 싶어 한다. 과연 그들의 꿈은 이뤄질 것인가?!
인구 10만이 넘는 대처(大處)임에도 정거장까지 20Km나 떨어져 있는 그들의 도시. 마샤의 놀라운 피아노 연주를 이해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비문화의 도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읽고 쓰는 세 자매가 자신들을 육손이라고 여겨야 하는 무지몽매와 야만이 횡행(橫行)하는 도시. 모범이 될만한 단 한 사람도 태어나지 않은 곳. 그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아이만 줄줄이 낳아 기르는 속물들의 거대 집합소. 거기서 세 자매는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질식된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모스크바는 구원과 이상의 유일한 실현 장소이자 의지처다. <세 자매>는 ‘짧게 써진 장편소설’이라는 별칭(別稱)을 가질 정도로 오랜 시간 유장하게 진행된다. 4년 반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체호프는 어떻게 그들 하나하나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피폐해지는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만일 그들이 절망의 나락에서 마침내 모스크바로 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의 출구이자 구원이 될 수 있을 터. 과연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푸른 교사 제복 차림의 단아한 맏언니 올가의 꿈은 시집가는 것이다. 4년의 무의미한 김나지움 교사 생활로 폭삭 늙었다고 생각하는 올가. 여학교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결혼한 매력적인 둘째 마샤. 그녀는 인생의 종언을 검은색 상복으로 여실하게 드러낸다. 막내 이리나는 ‘시(詩)가 있는 노동’을 꿈꾸며 모스크바에서 기막힌 사랑을 꿈꾸는 맑고 하얀 미인이다. 이들의 오빠 안드레이는 미래의 대학교수로 그들의 희망과 열망의 구현자가 되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오랜 세월 세 자매가 공들인 안드레이는 19세기 유럽의 비천한 부르주아의 러시아판 나타샤에게 확고하게 몰락한다. 초록색 허리띠에 장미색 원피스 차림으로 생일잔치에 나타나 세 자매를 경악시키는 천박한 나타샤. 기실 세 자매의 활동공간은 나타샤로 인해 조금씩 좁혀져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완벽하게 밀려난다.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나타샤의 정부(情夫) 프로토포포프. 그자 밑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안드레이. 아, 세상에 이런 일이?!
하지만 마샤와 이리나에게 희망이 생겨난다. <세 자매>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포병 중대장 베르쉬닌이 마샤와 정신적으로 결합하고, 순정한 인간 투젠바흐가 이리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객석에는 아연 활기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어가 끊어진 ‘언어도단’의 자리를 대신하여 소리로 서로의 마음을 읽고 교감하던 마샤와 베르쉬닌은 기약 없는 작별과 만나고, 투젠바흐는 한갓 말다툼 때문에 생겨난 결투로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되어 지상에서 사라진다.
가눌 길 없는 슬픔에 무너져내리는 마샤를 보며 하염없는 행복감에 젖어 드는 속물 남편 쿨르이긴은 ‘생활의 방편’에 능통한 얼간이다. 귀머거리 하인 페라폰트와 술주정뱅이 군의관 체부트이킨에게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안드레이 역시 아내 나타샤를 도둑맞지만, 그는 아내를 떠나지 못한다. <세 자매>에서 안드레이가 제기하는 ‘난청(難聽)’의 주제는 당대 인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타자의 우울하고 구슬픈 내면 풍경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누군가가 우리 시대에 아직 존재하고 있는가?!
이런 점에서 베르쉬닌이 꿈꾸는 200년 혹은 300년 뒤에 올 사람들은 정말로 아름답고 의미로 충만한 삶을 맞이할 것인지, 그것 또한 자못 궁금하다. 미래에 찾아올 사람들의 화사한 장미색 미래를 위해 오늘의 우리는 행복도 꿈도 미래기획도 자발적으로 생매장한 채 오로지 일하고 또 일해야 한다는 베르쉬닌의 말에 우리는 정녕 설득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당대의 우리 시대의 희열과 충만과 힘과 만족과 행복을 소유하면 안 된단 말인가?! 실제로 <세 자매> 가운데 누구도 그들의 간직한 단 하나의 진정한 꿈인 모스크바로 끝끝내 가지 못한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하나다. 누가 그들을 모스크바에 가지 못하도록 했는가?! 그들의 열망과 유일한 꿈은 어째서 시간과 더불어 부러지고 꺾였는가?! 4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아리따운 주인공들은 조금씩 물러서고, 조금씩 무너지며, 조금씩 포기하다가 마침내는 자멸의 길에 들어선다. 그것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속물적인 사회적 환경과 그들 자신에게 고유한 무기력에서 발원한다. 그들은 시간과 더불어 스스로 무너지고 파괴된다. 하되 그 방식과 양상이 너무도 아름답고 처연하여 우리의 폐부에 깊고 너른 상처를 남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세 자매>를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았던 극작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는 일주일 내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난 연후에 그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래서일까. 훗날 체호프는 자신의 극작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 어쩌면 그의 말은 21세기 오늘의 우리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을 울리려고 희곡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말하고자 했다. 당신들의 삶을 돌아보라. 당신들이 얼마나 따분하게 잘못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 만일 그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들은 더 나은 삶을 건설하게 될 것이다.”
2021년 10월 29일 (금) <영남일보>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