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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송
계절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동안에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 또 한해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얗게 눈 덮인 호반의 도시 춘천을 지나고 화천 그리고 김화를 돌아서 철원으로 가고 있다. 저 아래 강이 보이고 산 밑에 작은집이 보인다. 「우리도 저런 곳에서 집 짓고 살래?」 그녀는 말이 없다. 낯 설은 고갯길에는 눈이 쌓여있고 해가 지는 골짜기 군부대 초소에는 철모를 쓴 표정 없는 병사가 총을 들고 서있다.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외롭겠니. 우리는 이렇게 슬픈 여행을 하고 있는데 너는 거기서 지금 세상의 모두를 짊어지고 따스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이 저녁의 시린 바람보다도 더 아픈 나의 가슴은 보지 못한 채 너는 지금 나를 동경하고 있겠지. 눈 덮인 산길을 한참 지나서 마을에 들어섰다. 삼거리. 차가운 겨울바람 앞에 불빛도 초라하게 깜박거리는 찻집을 찾았다. 따스한 난로 가에 마주앉아 차를 마신다. 「동송에 가서 자자.」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밖에 나오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우리는 길을 물어 동송으로 가고 있다. 낯선 길의 여행은 늘 설레지만 눈 덮인 산골길은 얼어붙어 미끄럽다. 거리는 캄캄하고 이정표도 보이지가 안는다. 한참만에야 민가를 찾아 길을 물어서 또다시 얼마를 지나갔을까. 어둠 속에 불빛이 모여 있는 저 만치가 반갑게 보여 온다. 동송. 지방의 작은 읍내였다. 건물을 밝혀주는 간판을 따라 한바퀴를 돌았다. 두 곳의 숙소를 들렸지만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다른 곳으로 가자.」 나는 이렇게 말을 하며 다시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빨강색의 네온이 출렁거리는 도로 옆 세 번째 건물 주차장으로 자동차가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이 겨울밤 낯선 곳에서 또 하루의 못 잊을 추억을 남긴다. 언젠가 내게 그리움으로 다가올 오늘이 낯선 이곳의 어둠 속에 새겨지고 있다. 아침이 밝았다. 여기가 어딜까. 커튼을 걷고 3층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려있다. 앞에는 관광지고 뒤에는 벌판이다. 여기가 신 철원. 산듯해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 아침 겸 점심밥을 먹었다. 한국의 나이가라 폭포라고 했던 가.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곳을 잠시 들렸다가 전방으로 차를 돌렸다. 제2땅굴. 백마고지. 월정리역전망대. 이정표가 보인다. 전쟁 때 포탄과 총탄의 상처로 얼룩진 뼈만 앙상한 건물 앞에 차를 주차했다. 「들어가 보고 가자.」 우리는 눈을 밟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노동당사. 2002년 5월31일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옛 조선노동당의 철원군 당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6.25전쟁으로 남쪽에 빼앗길 때까지 주로 납북인사와 반공인사를 임시 수용하였으며 후퇴할 때 무자비하게 학살을 하였다고한다. 철근이 없이 지어진 이 콘크리트 건물은 2층과 3층이 내려앉아 골조만 남아 있었다. 「철원평야. 말로만 들었었는데 꽤 넓네.」『그렇지?』 철새도래지. 이정표를 따라 좁은 길을 지나가니 작은 산에 나무가 여기저기 부러져있다. 『저 나무가 왜 부러졌는지 알아?』 그녀가 나에게 묻는다. 「글쎄.」 『눈의 무게에 눌려 부러진 거야. 부러질 땐 소리가 굉장하데. 절에 갔을 때 스님이 말했어.』 어느새 우리는 더 갈 수 없는 마지막 마을까지 왔다. 백마고지. 395고지라고도 한다. 전쟁 때 심한 포격으로 온통 파괴되어 공중에서 보니 마치 백마(白馬)가 누워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52년 10월. 정예군으로 알려진 중공군 제38군이 국군 제9사단이 지키고 있는 395고지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고지의 주인이 24회나 바뀔 정도로 혈전을 벌린 곳이다. 중공군은 이 전투에 1개 군단의 병력을 투입하여 1개 사단의 병력을 잃었다. 아군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끝까지 사수한고지다. 이 백마고지전투 기념관에 병사들은 쌓인 눈을 쓸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손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한 낮이 지나가는 겨울의 오후는 햇살이 눈부시다. 철원과 동송을 이렇게 멀리 뒤로하고 이제 연천과 포천을 향해 우리는 가고 있다. 어제와 달리 넓은 도로를 한낮에 질주하며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오늘은 또 어디에서 머물까. 이 겨울 두 사람의 여행길은 늘 머물 곳이 마땅치가않다. 오늘도 해가 질 무렵에야 포천에 도착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이것도 고민이다. 토속음식점에 들어갔다. 따스한 방에 마주앉아 따끈한 물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낯선 곳에서의 밤은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가 차를 마시는 우리는 말이 없다. 밖으로 나와 길을 걷는다. 보디가드. 밝은 빛의 간판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하나 사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도 이렇게 여기서 이 겨울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 밤이 가고 새벽이 가고 또 다시 아침이 밝아오면 우리는 어딘가로 다시 길을 떠나겠지. 외로움과 쓸쓸함만이 가득하게 기다리는 우리의 겨울로.
우리 이별을 할 때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계절에 만난 우리 서럽도록 눈물이 나는 슬픈 계절에 헤어지는 그런 인연은 되지 말자. 살아가다 언젠가 우리 이별을 할 때에는 꽃이 피는 날 나비처럼 아지랑이 따라 하늘대며 그렇게 떠나가자. 남겨진 가슴에 아픔을 주지 말고 너무 슬퍼서 울어야하는 눈물도 주지 말고 하늘 보며 웃고 있는 해바라기가 되자. 살아가다 언젠가 우리 이별을 할 때에는 먼 날 또다시 만날 거라고 우리 이 세상에 언약하며 그렇게 떠나가자.
겨울 여행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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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카페지기님!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오늘 이렇게 여행기를 쓸 줄은 몰랐습니다. 몇 년 이 지난 지금 그날을 기억에 의존하려니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