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회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논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매우 미흡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해주 최씨 승지공파의 17세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기록 된 족보와 최경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논개의 구전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최경회의 설명은 4편 참고)
주논개(朱論介) 義岩婦人. 신안주씨 전주파 중파손
1574년 – 1593년
논개는 주씨성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훈장을 하던 주달문이며 논개가 14세 때 돌아가신다. 논개의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생계를 시동생인 주달무에게 의탁하나 도박에 가산을 탕진한 주달무는 어린 논개를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팔아넘기고 달아난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가고 김풍헌은 관아에 고발하게 된다. 김풍헌의 고발로 당시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에게 심문을 받는다. 논개 모녀의 심문 결과 최경회현감은 무죄방면하며 갈 곳이 없는 논개 모녀를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현감의 부인을 시중들게 한다. 논개의 시중을 받던 최씨부인은 논개의 재색이 뛰어남에 감탄하여 지병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부실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이후 최경회공과 함께하며 의병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를 돕게 된다. 1593년 6월 9일간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최경회장군과 함께하던 장군들이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게 된다. 성의 함락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왜군들의 잔치가 1593년 7월7일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고 참석한다. 주연에서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장마철이라 물이 많이 불어있는 남강의 바위에 올라 그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다. 논개는 10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끼고 깍지를 끼었을 때 손이 빠지지 않게 한 상태였다. 논개와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죽게 되고 이후 진주성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강 하류에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서 장사를 지내주려 운구하다가 왜군의 감시로 인해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는데 1976년 발견되어 현재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소가 마련되었다.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이라하며 172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은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한다.
1739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진행되었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주논개는 몰락 양반집안의 여식으로 장수현령 최경회의 후처다.
전남 화순출신 최경회 장군은 경산우도 병마사였다.
주논개는 황진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한다.
안성의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잡힌다.
황진이 논개를 구출하고 황진과 주논개가 함께 들어온다.
논개라는 이름 자체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실제 논개의 생애 및 업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잘못 알려져 있으며 역사적 오류를 많이 범하고 있다.
예를들면 논개가 진주성 촉석루에서 투신을 했기 때문에 진주가 고향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고
논개의 신분은 천한 기생으로 잘못 알고 있다.
논개가 기생으로 역사적 오류가 생긴 이유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논개를 진주성의 관기로 기록하였고 그후 1739년에 사당을 세웠는데 사당의 이름이 의기사(義妓司)여서
많은 사람들이 논개를 기생으로 잘못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1574년 주촌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주문달의 딸로 태어났다.
논개와 관련하여 더욱 심각한 역사적오류와 문제는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논개가 왜군의 연인이었던 기생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는 점이며 논개가 의암에서 죽인 왜장 게야무라의 집안에서 논개사당을 지어놓고 게야무라의 처, 처제와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고 논개에게 빌면 아이를 잘낳는다 거나, 집안을 화목하게 한다고 믿고 치성을 드린다.
일본인 중에 상당수는 논개를 조선인이 아닌 왜인으로 게야무라의 애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논개는 조선조 선조 7년인 1574년 9월 3일, 이곳 장수군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주촌마을은 논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논개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는데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난 '사갑술'의 사주를 갖고 있다.
주촌마을은 고사리가 많아서 원래는 궐촌이라 불렸지만 논개가 출생하여 성장하면서 부친 주달문에게서 글을 배웠기 때문에 논개의 성을 따서 주씨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주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즉, 논개의 성은 주씨로써 주논개이며 향후 역사책이나 위인전에서 논개가 아닌 주논개로 호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아버지 주문달의 사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 주문달의 동생이 조카 논개를 김풍헌 집안에 민며느리로 팔아 넘긴 것을 어머니 밀양 박씨가 데리고 도망을 쳐서 고발을 당해 투옥되어 있었는데 당시 장수현감이던 최경회장군이 딱한 사정을 알고 무죄 방면을 해줬고 후에 논개는 최경회장군의 첩이 되었다.
하지만 일부 사학자는 논개는 첩이 아니라 정실부인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근거로 함양군 서상면에 있는 논개묘에 최경회장군과 함께 모시고 최씨 가문에서 제사도 지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실부인이 아니면 후손들이 함께 모셨을리가 없고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다.
결과적으로 논개는 최경회장군과 인연을 맺고 부부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발발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 장군이 1593년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절하자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기생으로 가장하고 진주 촉석루 연회장에 참석 술과 흥에 빠진 일본군 왜장인 게야무라 로꾸스께를 남강 쪽으로 유인하여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양손으로 껴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의 사기는 떨어져 진주성을 함락했으나 전라도 침략이 좌절되었다.
1986년 대곡저수지(오동제)를 만들면서 논개가 태어난 원래의 생가지가 수몰되자 저수지 근처에 생가만 복원해 두었다가 현재의 주촌마을 생가지는 충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66116m²(20,000여평)의 부지에 1996년부터 2000년에 걸쳐 의암 주논개 생가지로써 새로 조성하였다.
현재 의암 주논개 생가지에는 생가뿐 아니라 논개기념관·단아정(丹娥亭)·의랑루(義娘樓) 등의 건물과 주논개비·최경회비·주논개부모묘 등이 있고 주논개의 동상, 민속놀이마당,인공폭포,판매점도 조성되어 있다.
KBS 2TV 수목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의암 주논개 생가지는 도깨비 전시관과 주촌민속마을과 이어져 있어 충분한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으며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에는 논개의 영정을 모신 논개사당(전라북도기념물 제46호)이 있기 때문에 생가지와 더불어 방문해야 할 장소이기도 하며 진주에도 주논개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그림이나 이미지가 되는 점묘화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 이방식의 강점은 매우 선명한 색의 느낌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년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년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前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