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기개를 길러줘야 해
함석헌
웰즈를 좋아하는 코스모폴리탄
3년만이다. 그러나 3년 전 원효로 집에서 만난 함석헌옹과 지금 쌍문동 집에서 만나는 그의 외모에는 별반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허연 머리와 허연 수염이 그렇고, 올이 가는 삼베 바지저고리가 받쳐 주고 있는 고담스런 풍모가 그런 인상을 지탱해 주고 있다.
최일남 3년 전에 한번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
함석헌 미안합니다. 기억력이 나빠서요. 이 집에 내 손녀가 하나 있는데 그애 이름도 잊어먹을 때가 있어요.
내가 운을 떼고 동행한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대자, 함 옹은 일단 머리를 쓸어 올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함석헌 머리가 이래 가지고…… 옛날 상투 트는 사람들은 남 앞에서는 꼭 망건을 쓰고 염발(斂髮)을 바짝 올렸지. 선비란 그래야지.
노령인데도 무척 바쁘다. 엊그저께도 강화도에서 열린 연수회와 청양에서 열린 감리교 청년들의 집회에 다녀왔으며, 「일이 제 대로 되면」닷새 후(8월 25일)에는 일본에 간다고 했다. 일본에 있는 한국기독교단체로부터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60주년 행사에 따르는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함 옹은 일본에 있을 때 바로 그 재난을 겪었다.
그 일이 끝나면 바로 역시 일본에서 열리는 FOR(友和會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집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우화회란 평화운동을 위한 모임이다. 그렇게 바쁜 몸이므로 우리들의 만남은 무척 힘이 들었으며, 나보다 한발 앞서 들어선「新東亞」편집부의 기자에게, 대뜸『당신네들(新東亞)이나 하니까 시간을 냈다』는 말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 말 뒤에는 여기 저기서 만나자는 기자들이 그만큼 귀찮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었다.
최일남 제가 알기에 선생님은 올해 여든둘(1901년생)이신데 아직도 정정하시군요.
함석헌 그만한 힘이야 있지요. 지난번에도 한국의 비폭력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해서 일본에 다녀 왔습니다.
함 옹은 최근에는 또 한길사에서 전집을 내고 있다. 그의 많은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새 시대의 전망』『인간혁명』『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생활철학』『역사와 민족』『수평선 너머』 등을 묶은 것이다. 그것들은 잘 팔리는가.
함석헌 안 팔리는 것보다는 나가는 편이라고 해요. 지금까지 4권이 나왔는데 다 나오면 열 댓권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전집이라는 것은 내가 죽은 다음에 나가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싶어요. 살아 있는 동안에 나왔다가 그 사이 내 생각이 바뀌면 어떻게 합니까. 안병무 박사가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해서 그리 되었습니다만. 그런데 그 안 박사나 김동길 박사가 잡지에는 자주 글을 씁디다. 신문에는 못쓰고……
최일남 지금 세상은 명성사건으로 떠들썩합니다만.
함석헌 이무슨 사건을 보면 국민이 알아듣지 못하는 사이 어떻게 어떻게 되고 말던데, 이번 일도 그렇게 되지나 않을지(함 옹을 만난 것은 검찰의 수사발표가 있기 전이었다)
최일남 선생님은 특히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던데요. 『뜻으로 본 한국역사』도 쓰셨고.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처음「성서조선」동인끼리 얘기한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성서조선」은 1927년에 시작해서 42년까지 나온 계간지로 김교신이 맡아 했습니다. 독자가 한 백명쯤 되었을까. 내가 쓴 그 글도 처음엔 김교신 집에서 우리끼리 한 애기를 모은 겁니다. 요새 말로 바꾸면 세미나가 되겠지요. 물론 일정 때니까 사전검열을 받았지요.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들이 종교만 믿으면 누가 뭐레, 독립 운동했으니까 그렇지, 하면서 검찰에 넘기기도 했습니다. 불기소로 나왔지만 그 이후는 일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사상계」에 있던 안병욱 씨가 인생 노트든 뭐든 아무거나 쓰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해방 후 최초로 쓴 것이 평생 동안 생각하고 있던「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였습니다. 56년 1월호였으니까 내 나이 쉰 다섯때였습니다. 그일로 윤형중신부와 논쟁도 하고 해서 종이값 좀 올렸지요. 그건 그렇고 내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H.G.웰즈」의『Outline of History』(세계문화사대계)를 읽은 다음이었습니다.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나갔다는 책 아닙니까. 물론「웰즈」는 소설가지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 사 람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왕이나 영웅 중심이었던 것을 완전히 뒤집어 민중의 편에서 역사를 보고, 그런 각도에서 세계사를 간략하게 정리했는데,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함 옹이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아직 스물이 안된 때였다. 그 전에는「웰즈」를 몰랐고, 물론 그들이 관여했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도 몰랐다. 그런 자유사상가를 한 사람씩 만나다가 나중에야 그들이 같은 그룹임을 알았다.「줄리언 헉슬리」를 안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함 옹은 70년대 다시 그의 아우인「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The Brave New World)를 읽고 많은 감홍을 받았다.「헉슬리」는 자기와 연령 차이도 그다지 많지 않은데, 내가 그 나이 때(헉슬리가 책을 썼을 나이) 그 책 을 보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함석헌「웰즈」의 영향으로 나는 코스모폴리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평화사상과도 관련이 있고, 근본적으로는 우리 역사도 그런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처음 미국이나 영국에 갔을 때도 그런 눈으로 그 나라를 보려고 했는데, 이미 형편없이 되어 있었습니다. 냉전태세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최일남 한국 역사도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함석헌 그렇지요. 시작은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내가 기독교를 믿지만 과학적 사고나 서구사상을 믿지 않았다면 다른 목사들 양 진부한 보수주의에 빠졌을 것입니다.
신동아 1983. 10
저작집30 ; 25-15
전집20 ; 17-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