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분열경향을 정치적 분야까지 확대시킨 게 회니시비 사건이었다. 윤증의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 수비의 총책임자였던 윤선거였다. 그가 1669년에 사망하자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에 쓸 묘갈명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윤증이 아버지가 남긴 편지들을 송시열에게 주면서 문제가 터졌다.
윤선거가 아직 생존중이던 시절에 윤휴를 가지고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다가, 송시열이 격분하자 윤선거가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지 않겠다고 해서 일단락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로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남긴 편지글을 보니 윤휴를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알게되자 묘갈명을 성의없이 써서 내줬다. 어떻게 썼는가 하면 "박세채가 이미 잘 써줬는데 내가 또 써줄거나 있냐? 복퉅."(...) 농담이 아니라 '그의 말을 인용할 뿐 딱히 더 써주진 않음'이라고 했다.
윤증이 묘갈명을 받아보고는 '스승님이 무언가 잘못 알고 쓰신 것이다.'고 생각해 다시 부탁했으나 소득이 없었고 송시열의 측근들이 강화도에서 죽겠다고 할때는 언제고 비겁하게 살아돌아왔다고 윤선거를 욕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윤증은 격분하여 송시열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681년에 윤증은 신유의서 (辛酉擬書)를 통해 '송시열은 주자를 높이 받들고 평생 따랐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송시열의 학문을 통렬하게 까버리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송시열은 즉각 자신의 과거의 수제자인 윤증을 크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증도 지지않고 편지를 보내 반박하니 극도로 예절을 차리면서도 상대를 비난하는 문장으로 가득찬 편지 공방이 이어졌고 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머지 "너님과는 절교!"라는 편지를 서로에게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