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진시황제 지하대군단(세계의 제8기적)
목차 6p
[머리말] 7p
01 중국의 첫 황제 10p
02 곡괭이에 의한 국보의 재현 13p
03 비할 바 없이 방대한 능묘 15p
[조직과 편대가 정연한 군진대열] 23p
04 무장을 갖추고 출발을 기다리는 3군 서열 24p
05 입체적 형상의 고대병서 33p
[외양과 정신을 겸비한 조각조형] 67p
06 생동한 조각예술 68p
07 생동하고 개성적인 용모와 자태 92p
08 국부와 세부의 정교한 조각 107p
09 예리한 병기는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114p
[더 없이 정교한 청동거마] 119p
10 제왕난가의 풍채, 청동예술의 진품 120p
(*상세 내용은 맨 아랫쪽에 있음)
● 2007.09.10-09.13 (04日間) 中國 西安 (해설사답사) <대한항공(KE891,2) 西安공항(咸陽國際機場)-阿房宮遊樂園-華淸池-秦始皇陵-秦始皇兵馬俑博物館-華山遊客中心-西安明代城郭-大雁塔-碑林博物館-興慶宮공원-大唐芙蓉園-鼓樓-回族거리-高氏古家-西安市政府(市廳)-鐘樓-開元商城(西安카이위안쇼핑몰)
https://m.cafe.daum.net/kaburonohome/ChPU/26?svc=cafeapp
● 2011.05.07-05.10(04일간) 가족여행<중국 西安(華淸池, 秦始王陵과 兵馬俑), 洛陽(龍門石窟, 白馬寺, 少林寺), 鄭州(雲臺山 紅石峽, 潭瀑峽)> 釜山-西安(KE9804)
https://m.cafe.daum.net/kaburonohome/ChPU/31?svc=cafeapp >
[머리말] 7p
이는 인류의 오랜 역사가 남겨놓은 하나의 신화이다. 인류사회가 발전하여 컴퓨터가 지구촌의 전역을 휩쓰는 하이테크시대에 들어선 오늘 지평선밑에 깊숙히 묻혀있던 갑옷차림의 고대 제국 정예부대가 불현듯 위풍스러운 그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들은 마치 하늘밖에서 내 려온 손님인양 신비로우나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살아움직일 듯 생동한 실물인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2,200여 년 동안의 어둠과 적막에 더는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온 것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스며진 눈부신 광채를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진나라 시황제가 후세 사람들에게 황권의 지고무상함을 절감게 하기 위해 기발하게 구상해낸 것인 지도 모른다.
하여 사람들은 중국이야말로 영원히 읽어 낼 수 없는 책이라고 감탄한다. 언제면 만리장성 이쪽의 수많은 수수께끼를 다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 도의적으로 거절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혼연히 붓을 들어 독자들에게 먼 옛날의 생동하고 진실한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이다.
● 01 <중국의 첫 황제> 10p
불교의 시조인 석가모니가 고인도에서 탄생한지 약 300년이 된 후 중국 북방의 한단(邯鄲) 이라고 하는 오랜 소도시에서 한 사내애가 태어났다. 이 신생아의 울음소리는 비록 다른 수많은 갓난애의 울음소리와 다를 바 없었지만 수십년 이후 그는 드디어 위세 당당한 역사적 인물로, 중국역사에서 대통일을 이룩한 봉건제국의 창시자로, 중국의 첫 황제로 되었다. 그가 바로 세상에서 이름난 진시황제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중국에서 진시황이라고 하면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사람으로서 진시황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을 모른다거나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모른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정치가와 군사가들은 진시황의 정치적 득실, 원대한 지략, 뛰어난 재능에 관심이 있다면 일반 대중은 그의 파란 많은 경력에 보다 더 흥미를 가진다. 그런데 진시황의 일생을 살펴보면 두 개면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전기적 색채를 띠고 있다.
진시황은 성이 영(贏), 이름이 정(政) 이며 BC 259년에 태어나 BC 210년에 별세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바로 중국역사에서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조(趙) 위(魏) 진(秦) 7개 제후국이 분열할거하며 패권을 다투고 전쟁이 끊임없던 전국시대 말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자초(子楚), 진소왕(秦昭王)의 손자이며 진안국군(秦安國君) 아들이었다.
당시 변화무상한 할거전쟁의 와중에서 각 제후국간에는 상호 제약과 외교적 전략의 필요로부터 흔히 자기의 아들 또는 손자를 다른 나라에 인질로 보내어 상대방의 신임을 꾀하곤 하였다. 안국군에게는 자녀가 매우 많았다. 그중 자초는 적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었으므로 진나라 궁중에서 별로 중요시 되지 못했다. 때문에 진나라와 조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자초는 조나라에 인질로 파견되었다.
이때로부터 그는 이역 땅에서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하루를 일년맞잡이로 살았다. 그 무렵 조나라 한단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대상인 여부위(呂不韋)는 정치적 두뇌와 전략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초의 특수한 가정배경과 처지를 간파한 그는 "진귀한 물건은 쟁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초를 한차례의 정치적 투기에 이용하려고 했다.
여부위는 또한 자기의 애첩중에서 용모가 이쁘고 노래와 춤도 잘하는 한단의 조회(趙姬)를 자초에게 아내로 주었다. 얼마후 조회는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영정(贏政) 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조회는 자초의 아내가 되기전에 이미 여부위와 동거하여 태기가 있었으므로 영정의 생부가 누구인가는 천고의 수수께끼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진시황을 여부위의 사생아라고하면서 영정을 "여정(呂政)" 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는데 모두 이에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사생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가 후에 이룩한 위대한 역사적 기여와 결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더 깊이 따질 필요가 없다
자초는 귀국한 후 진나라의 왕위를 계승하여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영정을 태자로 삼았다. BC 246년 장양왕이 병으로 별세하자 나어린 영정은 진나라 왕의 옥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 영정의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연합과 분열의 변화가 무상했던 정치정세하에서 나어린 그로서는 정사를 담당하기 어려웠으므로 국가대사는 태후와 대신들에게 위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 상방(相邦)인 여부위와 태후의 총신인 노독이 한때 국정을 담당했다.
BC 238년 영정이 22살이 되자 기년궁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그때부터 손수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혈기왕성하고 포부가 컸던 영정이 어찌 대권의 상실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는 마침내 노독을 극살하고 태후를 연금하였으며 또 여부위의 상방직무를 파면했다. 그리고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충고를 채납하면서 일부 문신과 무장들을 기용했다. 그중 문신으로는 이사(李斯) 왕관(王綰)이 있었고 무장으 로는 왕전(王剪) 이료(尉繚) 몽괄(蒙括) 등이 있었다. 그는 또 선왕의 변법혁신을 시행하고 경전(耕戰)을 권장하는 진보적인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진나라의 국력을 강화하여 각국의 수위를 차지하였으며 중국의 통일에 필요한 여건을 마련했다.
BC 230년부터 BC 221 년에 이르기까지 진나라는 원교근정(遠交近政) 분심이간(分心離間) 각개격파(各個擊破)의 책략으로 10여년간의 가열처절한 전쟁을 거쳐 한•조•연•위•초•제 6개 제후국을 연이어 소멸하고 중국을 통 일함으로써 춘추전국시대이래 수백년동안의 분열할거 전란불휴의 국면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사상 처음으로 다민족 중앙집권의 봉건제국을 창건했다.
통일을 이룩 한 후 영정은 대신들에게 제호(帝號), 즉 국가 최고통치자의 칭호에 대해 의논하도록 명령했다. 대신들은 의논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영정은 자기의 덕성이 삼황(三皇) 보다 높고 공로가 오제(五帝) 보다 크므로 삼황 과 오제를 겸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국가 최고통 치자를 "황제(皇帝)"라 부르기로 하고 자기를 "시황제(始皇帝)"라고 자칭했다.
이로부터 "황제"라는 이 칭호는 역대 봉건제왕들에 의해 2,000 년동안이나 계속사용되어 왔다. 진시황제는 정권을 공고히 하고저 상(商)·주(周) 이래의 분봉제(分를封制) 를 폐지하고 군현제(君縣制)를 시행했다.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산하에 현, 현산하에 향(鄕) 정(亭) 리(里)를 설치했다. 중앙에는 3공 9경을 설치하여 직접 황제의 명령을 따르도록 했다.
중앙과 지방의 주요 군•정 관리는 모두 황제가 임명, 파면하고 군·정 대권을 자기 한몸에 집중시켰다. 그는 법률을 정하고 법제를 중요시하여 "모든 일을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면서 법률을 국가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되게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시행한 3대 통일이다. 즉 중앙이 도(度) 량(量) 형(衡) 기준기를 하달하여 전국의 도량형을 통일하고 승상(承相) 이사와 중차부령(中車府合) 조고 등에게 영을 내려 문자를 정리하여 진나라 소전으로 전국의 문자를 통일하도록 했으며 전 6개국의 낡은 화폐를 폐지하고 진나라의 반량전(半兩錢)을 가장 기본적인 유통화폐로 삼아 전국의 화폐를 통일했다.
이 세 가지의 위대한 조처는 당시의 경제발전과 문화교류를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혜택 이 천추에 길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밖에 그는 또 영을 내려 치도(馳道)와 직도(直道)를 정비하고 전국시대에 각국이 축조했던 장성을 한데 이어놓아 서쪽의 임조(臨洮)에서 동쪽의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리장성을 이루어 놓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진시황제를 "천고의 제1황제" 라고 하는 것도 결코무리가 아니다. 실로 그의 일생은 부단한 "기적"올 창출한 일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BC210년 진시황은 순행도중 사구평대(오늘의 하북성 광종현 경내)에서 병으로 별세, 향년 50세였다. 그 가 죽은 후 아들 호해교소(胡亥矯詔)가 형 부소(扶蘇)를 모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가 바로 진2세이다. 그러나 이때는 진왕조가 이미 전성기를 지나 막다른 골목에 처한 때였다. 얼마후 진왕조는 전국을 휩쓴 진승(陳勝)·오광(吳廣) 농민봉기에 의해 물먹은 담처럼 일조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왕조는 창건되어 멸망에 이르기까지 겨우 15년에 불과한 중국 사상 수명이 제일 짧은 왕조였다.
그러면 어째서 제위(帝位)가 이처럼 짧았던 것인가? 그 원인은 첫째, 가혹한 형벌과 법률, 혹 형의 남용이었다. 사형과 육형만도 수십종에 달하고 대부분 참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리고 법망이 치밀하여 고관 귀족에서 평민 백성에 이르기까지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법에 걸려들기 마련이었다. 한(漢)나라 육교(陸賈)가 『신어(新語)』에서 말한바와 같이 "폭민을 조처하는데 지나친 극형을 썼다." 둘째는 대규모적인 토목공사와 가렴주구 및 착취였다.
통계에 의하면 진시황은 통일 후 10년간에 오령(五嶺) 수비에 50만, 장성 축조에 50만, 북방 홍노 방어에 30만, 아방궁과 능묘 건조에 70만, 이밖에 기타 잡역까지 합하면 당시 전국인구의 거의 10%를 차지하는 200여만의 인부를 징발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청장년 노동력이었다. 이는 사회생산력 발전을 크게 파괴하였으며 국민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과 재난을 초래했다. 이밖에 진2세 호해의 우매와 무능도 진왕조의 단명을 재촉한 주요인의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 라는 전고에서도 진2세의 아둔함을 엿볼 수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후세의 정치가와 사학가들은 모두 진왕조의 흥망성쇠 경험과 교훈을 꾸준히 총화, 검토해왔다. 반세기밖에 안되는 진시황의 생애는 후세 사람들에게 천년불휴의 논쟁을 남겨놓았다. 진시황에 대한 평가도 자고로 줄곧 비난과 칭찬이 반반으로 엇갈려 일치한 결론이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듯 싶다. 한 봉건제왕의 공과시비 (功過是非)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되는 것만으로도 중국사에서 진시황이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그는 확실히 위대하고 걸출한 역사인물이다.
● 02 <곡괭이에 의한 국보의 재현> 13p
세계의 고고사를 보면 많은 중대하고 빛나는 페이지는 모두 우연한 일치에 의해 펼쳐지는데 이러한 사례는 상당히 많다. 진릉 병마용갱의 발견도 바로 그러하다. 이번에 역사는 이 보기 드문 영광을 몇몇 중국의 순박한 농민에게 안겨주었다.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동현 안채향 서양촌의양신만(楊新滿)·양배언(楊培彦)·양지발(楊志發)·양전의(楊全義) 등 농민은 마을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자기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 남쪽 감나무숲 가운데에 관개용 우물을 파기시작했다. 그런데 닷새째 되는날 뜻밖에도 몹시 굳은 소토층(燒土層)이 나타나 곡괭이질을 할 때마다 그 반동에 팔이 아프고 손아귀가 저려나 당혹감과 아울러 실망을 금치 못했다.
3-4m 가량 깊이 파들어 가니 이번에는 곡팽이에 부딪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모양이 기괴한 도기조각과 항아리 비슷한 물건이 나왔다. 그러자 농민들은 조심하기 시작했다. 만약 완전한 항아리나 단지일 경우 적어도 달걀을 담는 그릇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굴된 것은 결코 항아리가 아니라 갑옷을 입은 "토인" 의 흉강이었다. 다시 더 파들어 가자 토인의 머리 팔·다리가 나오고 이어 푸른 녹이 얼룩진 구리쇠 뇌와 활촉 및 바닥에 까는 벽돌이 나왔다.
이러한 출토품 앞에서 농민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몰랐다. 어떤 사람은 이곳을 벽돌 가마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토지묘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지하의 18 나한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이것이 도대체 복이 될는지 화가 될는지 아무도 말하기 어려웠다. 나많은 몇몇 노인들은 신상(神像)을 파내어 신령을 노엽혔으니 천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고 근심했다. 그래서 남몰래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 자그마한 서양촌은 삽시에 죽가마 끓듯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날 방씨라는 물관리원이 마을의 우물파는 진도를 조사하러 왔다. 진시황릉 부근의 각 마을을 늘 순시하던 이 기충간부는 현장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눈앞의 출토품을 몇리 밖의 진시황릉과 연결시켜 보며 물었다. "여러분, 이 벽돌이 진시황릉 부근에서 출토된 진나라 벽돌과 아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의 이런 말에 사람들은 삽시에 영문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파낸 것은 문화 유물이었다. 더는 우물을 팔 것이 아니라 시급히 이 사실을 현에 보고해야 했다. 서양촌에서 우물을 파다가 문물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신속히 임동현과 서안과 북경에 전했다.
1974년 7 월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섬서성 고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고고학업무진은 현장에 이르러 정리와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따라서 금세기에 가장 훌륭한 고고발굴공사가 막을 올렸다. 2년 이상의 보링조사와 시험발굴을 거쳐 1976년에 이곳은 중국 최초의 봉건황제 진시황릉 원중의 대형 병마용 부장갱으로서 3개의 용갱이 있고 총 면적 2만여 ㎡로 도제 병마용 약 8,000점 목제 전차 100여대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초보적으로 증명되었 다. 이렇게 하여 제국의 정예부대가 기적적으로 부활되었다. 중국의 순박한 농민들이 곡괭이로 세계를 탄복케 하는 고대 군사박물관의 대문을 손쉽게 연 것이다.
그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 한 기자가 농민들을 방 문했더니 그들은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당년에 그들이 우물을 파다가 발굴해낸 부서진 도용을 수레에 싣고 현문물관리부처에 가져다 바쳤더니 관련부 처에서는 공사지연에 대한 보상과 장려금으로 그들에게 30원을 주었으므로 그들은 매우 기뻐했었다는 것이다. 지금 보면 그 돈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그때에 받은 돈이 적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발견이 사회의 중시를 환기시킨 것으로 하여 커다란 긍지감을 느끼었다.
한편 연로한 농민들의 회억에 의하면 그들의 어린시절 마을 부형들은 우물을 파거나 장례를 치르면서 도용을 파낸 적이 있는데 모두들 불길한 물건으로 여겨 끈으로 매어 달아놓고 채찍으로 때리거나 아니면 뙤약볕에 쪼이거나 부수어서 땅밑에 깊이 묻어버리는 것으로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문물이고 굉장히 귀중한 국보일 줄을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니 이야말로 "인연이 있으면 천년 후 에라도 서로 만나지만 인연이 없으면 지척에서도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리라.
진용갱의 발견은 중국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74년 발견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무수한 중외 관광객들이 쇄도하여 남먼저 보기를 원했는데 관객이 무려 수천만에 달했다. 싱가포르 이광요(李光耀) 총리는 진용을 보고나서 "세계의 기적, 민족의 자랑" 이라고 칭찬했다. 진용갱을 세 차례나 참관한 미국 전 국무장관 키신저박사는 외교활동가 특유의 예지와 탁견으로 "세계적으로 유일한 진나라 병마용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렇게 위대한 역사문화를 창조할 수 있은 민족은 반드시 보다 휘황한 미래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라고 자기의 소감을 토로했다.
1978년 프랑스 시라크 전 총리는 병용을 참관하고나서 "세계적으로 전에는 7대 기적이 있었는데 진용갱의 발견은 제8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보지 않으면 이집트에 왔었다고 할 수 없듯이 진용을 보지 않으면 중국에 왔었다고 할 수 없다." 고 전언부에 써놓았다. 그후 이 말은 널리 전해져 "세계 제8대 기적"은 어느새 진용갱의 대명사로 되었다.
물론 경탄과 아울러 사람들은 흔히 병마용갱은 누가 건설했고 언제 기공했는가?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며 진시황릉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또 그것은 누구의 손에 소조된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에 해답을 주고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며 병마용갱의 내 력을 똑똑히 알기 위해 다시 2,000 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시황의 능묘로부터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 03 <비할 바 없이 방대한 능묘> 15p
섬서성 임동현 현도에서 동쪽으로 약 7.5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진시황릉은 남쪽으로 여산(驪山)을, 북쪽 으로 위하(渭河)를 끼고 우뚝 솟아 있다. 당년에 진시 황이 이곳에 묘지를 선택한 것도 바로 이곳의 경치가 유달리 아름답고 산과 물을 끼고 있는데다 지세가 좋고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여산은 음지에 금이 많고 양지에 옥이 많아 진시황은 그 미명을 탐해 이곳에 묻히려 했던 것이다." 현재 진시황릉은 전국 중요 문화재 보호대상이며 또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명부에 수록된 중국 유일의 고대 제왕능묘이다.
중국역사에서 봉건제왕들은 거의 모두가 지고무상한 통치지위를 유지하고 인간세상의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기 위해 한평생 두가지 일에 지극히 열중했다. 하나는 장생불로술을 추구하여 만수무강을 기도했고 다른 하나는 능묘를 크게 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법칙 에 배치되는 어리석은 생각을 실현할 수 없게 되면 능묘 건조가 그들 개인생활중 유일하게 큰 정신적 의지로 되기 마련이다.
진시황이 바로 그러했다. 사서에 의하면 진시황은 생전에 여러 차례 서복(徐福)을 파견하여 수 천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거느리고 동해의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 등 3개 신산 에 들어가 장생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한 바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자아는 또 이러한 추구의 필연적 결과는 허무한 것임을 꾸준히 그에게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진시황은 당시의 예법에 따라 즉위한 후 곧 여산기슭에다 자기의 능묘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진시황릉의 건조기간과 능묘내부 구조에 관해서는 역사상 많은 문헌과 전적에 모두 기록이 있다. 그러면 한(漢)나라 사학가 사마천의 서술을 보기로 하자. 그의 서술을 근거로 드는 이유는 이 위대한 사학가는 예로부터 기사의 진실성으로 인해 "사성(史聖)" 이라는 미명을 지니고 있는데다 그의 생활연대가 진시황이 죽어 여산에 묻힌지 수십년밖에 안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는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시황은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곧 능묘 건조에 착수했고 전국을 통일한 후에는 또 70여만의 죄수들을 그곳에 보내어 노역에 종사케 했다. 묘혈은 3층 샘물 이하로 깊이 파서 구리로 주조한 후 관을 안치했다. 그리고 현실(玄室) 내에 별궁을 건설하고 묘혈내에는 진귀한 보물을 가득 수장했다. 또 장인들을 시켜 불의에 화살이 발사 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누구든지 도굴하러 왔다가 그 장치에 부딪치면 자동적으로 발사될 수 있게 했다.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기계로 주입했다. 현실내의 천장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장식하고 바닥에는 구주(九州) 오악(五岳)을 배치했다. 인어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매우 오랜 기간 불이 켜져 있도록 했다.
2세 황제는 시황제의 후궁과 비빈 중에서 생육한 적이 없고 궁중에 남겨두기 마땅치 않은 자는 일률로 순장 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죽은 자가 많았다. 매장을 끝내자 어떤자가, 발사장치를 만들어 놓고 보물을 수장한 장인들이 현실내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므로 기밀을 누설하기 쉽다고 말했다. 따라서 장례를 마친 후 먼저 현실안의 연도(羨道)를 봉쇄하고 이어 현실밖의 연도도 완전히 봉쇄하여 장인들이 한 사람도 살아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무덤 위에 초목을 가득 심어 산처럼 보이게 했다...."
사마천의 이 기록으로부터 진시황제릉은 시황이 갓 즉위한, 즉 BC 246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그가 죽은 후에 완공되기까지 약 38년이 걸렸으며 능묘건설에 동원된 역부와 죄수는 최다로 70여만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숫자이며 그 방대한 규모와 거액의 소비는 이집트 쿠프왕의 피라미드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진시황의 사치가 극도에 달했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면 고대 사학가의 기록은 그 믿음성이 어떠 한가? 진시황릉의 무한한 신비성을 밝히기 위해 금세기 60년대 초부터 고고학자들은 능원에 대한 보링탐사와 조사를 시작했다. 그 조사 결과 진릉 봉토의 기존 높이는 115m, 기초는 마치 말을 엎어 놓은 것처럼 네모나게 생겼는데 달구질을 하여 쌓은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2,000 여년간의 비바람의 부식과 인위적 파괴로 현재는 높이가 76m로 낮아졌다. 기초는 동서가 345m, 남북 길이가 350m 이며 능의 형상은 금자탑같다. 봉토 무지를 둘러싸고 지상에 축조되었던 두 겹의 성벽은 남북향의 장방형이다. 내성은 남북 길이 1,335m, 동서너 비 580m, 둘레가 3,870m 이고, 외성은 남북 길이 2.165m, 동서 너비 940m, 둘레가 6,210m 이다. 성벽은 대부분 퇴락하여 기초만 남아 있는데 너비가 8m이다. 내성과 외성은 4면에 모두 성문이 있다.
외성은 4면에 문이 각각 1개씩이며 내성은 동·서·남 3면은 문이 1개씩이고 북면은 2개이다. 문 위에는 모두 문궐건축이 있고 내-외성 모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내성과 이성 내에서는 또 대형 궁전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건물은 제사를 지내거나 능지기들의 물건저장 및 숙박으로 쓰이던 방이었다. 현재 과학기술에 의한 탐측에 의하면 능묘 중심부에 비교적 강한 수은 이상반응이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면적이 무려 1만 2,000여 m²나 되었다. 따라서 지궁속에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 사서의 기록이 100% 가능한 것임을 추단할 수 있다.
무덤을 제외한 지상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어 없어졌으므로 당년의 원상을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능원의 풍부한 지하매장은 진시황릉의 설계사상과 전반 배치를 이해파악하는데 믿을만한 증거를 제공했다. 고고학적 보링탐 사에 의하면 진시황릉 주위에는 형상과 구조 및 내용이 각이한 대량의 부장갱과 고분이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 되었다. 현재 확인된 것만도 400여개로 범위가 56.25Km² 에 달한다.
과거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이곳에서 출토된 진귀한 문물은 무려 5만여점이나 되며 그중 많은 문물은 더 없이 귀중한 희세 진품이었다. 이들 분장갱 중에는 진시황이 타고 다니던 수레를 모방한 동거갱(銅車坑)이 있는가 하면 당년에 황제가 사냥을 하며 노닐었 던 수렵장을 상징한 금수갱(禽獸坑)이 있으며 또 황실 궁정의 마구간을 모방한 마구갱(馬廠坑)도 있다. 이는 실로 인간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지하에 그대로 비치했다고 할 수 있다.
사서중의 진릉 지궁 내부설치에 대한 기록을 결부해 보면 진시황릉원은 당년 진왕조 지상 왕국의 축소판이며 재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진시황릉원의 주요 구성부분인 병마용갱(兵馬俑坑)도 하나의 모방과 상징으로서, 진왕조의 서울 요지를 수위하던 숙위군(宿衛軍)을 대표한 것임이 틀림없다. 지하 왕국에서도 진시황은 의연히 지존 지영의 최고 통치지위를 유지하고 있어 극히 사치한 생활을 계속 누릴 수 있었으며 또한 3군을 호령하여 그의 안전과 만고에 길이 전해질 제업을 보위하게 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진용갱의 건조기간은 전반 진시황릉원의 건축기간과 일치한 것으로 고증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용갱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때부터 진시황이 별세할 때까지의 기간, 즉 BC 221년부터 BC210년까지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진용갱의 소각 원인과 시간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견해가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 원인을 지하 메탄가스에 의한 자연적 연소의 소치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진용갱이 건설된 후 어떤 장례의식의 필요로 건설자들 자신이 불태워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릉과 진용갱 고고발굴에 직접 참여한 대다수 전문가들은 진용갱이 소각된 원인이 BC 206년 항우가 봉기군을 이끌고 입관한 후의 인위적인 파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견해는 사서의 일부 기록과 상합되거니와 또한 용갱 고고현장의 각종 흔적에 의한 증거도 있으므로 대다수 사람들에게 접수되고 있다. 다만 한때는 그처럼 기세등등하던 진시황의 지하군단이 이렇듯 허무하게 "초(楚)나라 사람들이 지른 불에" 지리멸렬되여 상처자국만 남아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 으랴!
[조직과 편대가 정연한 군진대열]
● 4. 무장을 갖추고 출발을 기다리는 3군 서열
진시황제 진시황릉·동거마 및 병마용갱의 발견 경과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으니 이제는 병마용갱에 가서 2,200 년 이전의 제국 군대를 직접 사열해 보기로 한다.
병마용갱은 진시황릉묘에서 동쪽으로 약 1.5 km 상거, 도합 3개 갱이 “品” 자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발견된 순서에 따르면 사람들은 습관상 1호갱 2호갱 3호갱으로 부르고 있다. 3개 갱의 건축형식은 모두 지하갱 도식의 토목구조로 그 구축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약 5m 깊이의 흙구덩이를 파고 밑바닥으로부터 충층이 흙을 펴며 기초를 다진 후 그 위에 약 3m 높이의 격리토담 을 쌓고 담사이의 공간에 토용·토마 전차를 놓았으며 지면은 검은 벽돌을 깔았다. 갱의 네벽 및 흙으로 다진 격리토담 양측에 지복을 깔고 그 위에 등거리로 나무기둥을 세우고 기둥상단에 각재목을 건너질렀다. 각재목 및 격리토담위에 천장목을 깔고 천장목 위에 또 삿자리 홍목·황토를 차례로 덮었다.
이밖에 병마용갱마다 수요에 따라 부동한 수량의 통로를 냈다. 토용·토마를 통로로 해서 갱내에 들여놓은 후 즉시 통로를 막아버려 폐쇄식 지하군영을 형성했다. 이 3개 병마용갱은 서로 통하지 않아 피차 독립되어 있다. 그렇지만 내포로 보아 3개 갱사이는 또 유기적으로 밀접한 연계가 있고 상호 의존하고 혼연일체를 이루어 공동으로 배치가 엄밀한 군사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1호갱 군진: 동서향의 장방형으로 이 갱은 길이 230m, 너비 62m, 총면적 1만 4,260m²로 3개 병마용갱중 제일 큰 갱이다. 갱내에 6,000 여점의 토용·토마와 40 여짐의 목조 전차를 안치, 전차와 보병을 혼합편성한 장방형 군진이다. 이 군진은 선봉 주체 익측 후위 등 4 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갱의 최전단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3열 경장비 보병용으로 매열 68점, 도합 204 점이 있다.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고 속발을 하고 다리에 행전을 매고 손에 궁노를 든 이들 토용은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선봉부대이다.
1호갱의 군진을 보면 선봉부대는 마치 보검의 예리한 끝과 같아 그와 대적할 자가 없을 것같 다. 선봉부대 뒤에는 격리토담에 의해 1호갱이 11개 동서향의 통로로 나뉘어졌는데 38 종대의 전차 보병이 서로 엇갈아 배열되어 있다. 이들 토용은 대부분이 갑옷을 입고 정강이에 대발을 치고 손에 창·과·긴창·극 등 병장기 및 소량의 궁노를 들고 있는데 중장비한 갑사에 속한다. 이들은 전차와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체로서 기세가 반석같고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갱내의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무사용이 각각 남북을 향해 1열로 서있는데 군진의 좌우익측으로 그들의 임무는 적군의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다. 군진의 최후단에는 대군과 등을 지고 서쪽을 향해 서 있는 무사횡대로서 군진의 후위이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적들의 배후기습을 방어함으로써 대부대 진군 시 뒷근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대 군사가들은 이들을 보검의 자루와 같이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는 주력 부대의 믿음직한 후위보장으로 그 지위도 매우 중요하다고 간주하였다.
2호갱 군진: 2호갱 군진은 1호갱의 동단 북측에 위치, 1호갱과 약 20m 떨어져 있다. 갱의 평면은 곡척형(曲尺形)으로 동서 길이 124m, 남북 너비 98m, 면적 약 6,000m²이다. 시추 및 시굴자료의 추산에 의하면 이 갱내에는 전차를 끄는 토마 350 여필, 기병용 안마 116 필, 각종 무사용 900여점, 도합 1,400여점의 토용•토마와 89대의 목제 전차가 있는데 보병 기병 전차 3개 병종을 혼합 편성한 곡진을 이루고 있다. 포진방법은 4 개의 작은 진을 "口" 자형으로 잇달아 구성했다.
첫번 째 작은 진은 노병진으로 곡형진의 최전단에 위치, 도합 330 여명의 궁노수로 구성되었다. 그중 약 160명은 갑옷 중장비를 한 궤사(跪射) 토용으로 8개 종대로 나누어 진중에 자리해 있다. 그 둘레에는 약 170여점의 전포 경장비를 한 입사(立射) 토용이 진을 에워싸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적이 쳐들어올 때 서기도 하고 꿇기도 하면서 엇갈아 사격할 수 있어 "백발불가지(百發不暇止)”로 화살이 빗발 치듯한 정세를 조성하여 적들이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수 있다.
두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우측에 위치, 64 대의 전차로 구성, 전차마다 3명의 전사가 타고 있는데 1명은 어수(御手), 2명은 감사(甲士) 이다. 전차의 앞뒤로 수행하는 예속 보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집중된 순 전차편대임이 분명하다. 세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중부에 위치. 전차·보병·기병으로 구성된 종진이다. 이 진은 19대의 전차를 위주로 하고 260 여명의 보병을 보조로 하며 동시에 8명의 기병을 후미로 하였는데 군진의 편성이 매우 원활하다.
마지막 작은 진은 곡형진의 좌측에 위치한 기병진으로 108명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를 보조로 하였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머리에는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으며 몸에는 흉부와 복부를 보호하는 짧은 갑옷을 입고 한손에는 활, 다른 한손에는 고삐를 쥐었는데 날림하고 소쇄해 보인다.
전마는 피둥피둥 살이 찌고 안장과 다래가 비치되어 있다. 이런 기병들은 전쟁판에 뛰어들기만하면 행동이 번개처럼 빠르고 동작이 선풍처럼 날쌔며 불의에 출격하여 적을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하고 용감하게 돌진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을 넘나들며 적의 양초(糧草)를 차단해버리는 신기한 위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3호갱군막: 3호 갱은 1호갱 서단 북측에 위치, 1호 갱과 25m, 동쪽의 2호갱과 120m 떨어져 있다. 평면은 "凹" 자형, 총면적은 500m²도 안되는데 3개 갱중 면적에 비해 병용이 제일 적다. 토용 66점, 전차를 끄는 토마 4필, 목제 전차 1승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작다고 경시할 갱이 아니다. 그의 위치는 심지어 1호 2호보다 더욱 중요하다.
갱내의 무사용은 전투대형에 따라 편성된 것이 아니라 남·북2개 결채에 분포되어 있는데 손에 의장병 병기인 동수(銅殳)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채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지휘관을 보위하는 경위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이 갱에서는 또 제사·기원을 위한 살생후의 사슴뿔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3호갱이 보통 군진이 아니라 옛사람들이 일컫는 "군막(幕)", 즉 현대인이 말 하는 사령부의 소재지임을 말해준다.
중국 고대 노예사회에서는 군대를 좌·중·우 또는 상 중·하 3군으로 편성하는데 진나라 때에도 역시 이러 하였다. 진나라 병마용갱의 배치를 총괄해 보면 3호갱은 지휘부, 1호갱은 오른쪽에 있는 우군, 2호갱은 왼 쪽에 있는 좌군이다. 그러면 중군은 어디에 있는가? 고고탐사에 의하면 원래 1호갱 중부 북측과 2호갱 서측사이에 또 용갱이 하나 있었다.
이 갱은 형상이 규격에 맞고 깊이도 다른 3개 용갱과 같다. 다만 갱내에 토용 토마와 기타 유물이 없고 침적토에 의해 메워져 있어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이 빈갱이 바로 건설을 계획하였던 중군이었는데 진 나라 말기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진왕조가 신속히 붕괴됨에 따라 미처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견해다. 이 것은 역사가 빚은 보완할 수 없는 결함이다.
진나라 병마용갱은 진군의 축소판으로 이른바 "병사 100여만, 전차 1,000여승, 전마 1만여필에 달한다." 는 3군이 집결하여 명령을 기다리는 당년 진군의 위풍 당당한 정경을 생동하게 반영하였다. 이곳에는 힘차게 달리는 전차, 울부짖는 전마,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로 적을 쓰러뜨리는 정병이 있는가 하면 경계가 삼엄하고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지휘중추도 있다.
병마용갱은 2,200 년전 고대 제국의 군대모습을 생동하게 당대 사람들 앞에 펼쳐놓았다. 아마 이 지하군단을 보다 핍진하게 보여주기 위해 제조자들은 용갱 중의 모든 도질 장병 들에게 당년 실전용의 청동병기를 배비한 것이리라, 현재까지 발굴된 진나라 병마용갱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이미 검·창·극·긴창·쇠뇌·수(殳)·화살촉·금구(金鉤) 등 10여종의 병기가 출토되었고 총수량이 무려 3만여점에 달한다.
종류가 많기로 당년 진군이 장비 사용하였던 각종 무기를 거의 다 망라하고 있으며 수량이 많기로는 더욱 보기 드물다. 이들 병기는 제조기술이 정교하고 외관이 정규하고 칼날이 예리할 뿐만 아니라 병기의 합금 성분 비례도 과학적이고 적정하다. 비록 2,000 여년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흙을 닦으면 여전히 원래 것처럼 빛이 나고 예리하다.
전자 존데, 레이저현미스펙트르 등 과학기술 수단의 측정에 의하면 검·긴창·과·창·화살촉 등 많은 병기의 표면에 치밀한 크롬 화합물산화층이 있어 훌륭한 방수 내식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제이크롬염 산화처리의 방수기술을 구미 국가들에서는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0 여년 전에 벌써 중국의 근로자들이 이 기술을 병기 제조에 능숙하게 적용한 것은 실로 야금사상의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05. 입체적 형상의 고대병서
진나라 병마용갱은 진왕조의 강대한 군사력을 진실하게 재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편대 조합 또한 생동하고 직관적인 군진도감으로서 우리가 중국 고대의 병종 설치, 병기 배비 및 전략 전술 사상을 요해하고 연구하 는데 믿음직한 실물자료를 제공하였다.
중국 춘추전국 시기는 제후들의 할거와 사회 동란으로 하여 대소 전쟁이 해마다 끊임 없었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병법가들의 흥기와 병법의 연구에 토양과 현실적 필요성을 제공하였다. 이 시기에 나온 손자병법(孫子兵法) 손빈병법(孫臏兵法) 오자병법(吳子兵法) 등 많은 유명 군사저작들은 광범위하게 유전되어 각 제후국 군사가들에게 법도로 받들리고 전쟁을 지도하는 교과서로 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 병서는 대부분 문장이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워 군진을 어떻게 편성하고 병종을 어떻게 조합하는가 하는 등 구체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흔히 허황하고 종잡을 수 없는 감을 주어 현대인이 고대 군사 사상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을 조성하였다. 진나라 병마용갱은 우리 앞에 입체 병서를 펼쳐주어 원래 종잡을 수 없었던 많은 문제들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러면 이제 군진의 편성에 대해 말해 보기로 하자. 이른바 군진이란 일정한 작전 원칙과 전술 사상에 의해 편성된 전투 대열임을 알수 있다. 군진 편성의 타당 여부는 전장에서의 승패에 직접 관계되며 또한 부대 전투력의 강약을 판단하는 중요한 표징으로 된다. 때문에 예로부터 역대 병법가들에 의해 중요시되었다. 고대 군사가들은 군진을 편성할 때 "선봉부대가 반드시 정예해야하고" "주력부대가 반드시 강대해야 한다" 고주장 하였다.
이렇게 해야만이 “상배부동(相倍不動), 적인필주(敵人必走)”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과 싸울 때 일정한 작전 대형을 유지해야 하는바 "용감한 자는 단독으로 전진하지 말고 비겁한 자는 단독으로 후퇴 하지 말며" "추격하거나 후퇴할 때 대열을 벗어나지 말아야만이 위험에 직면해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불패의 지반에 설 수 있다" (이상 손자병법에서) 진나 라 병마용갱의 실상을 보면 고대 병법의 요구와 부합된다. 경장비의 정예한 선봉부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된, 금성철벽처럼 견고한 주력부대가 그 뒤를 바싹 따르고 있다.
그 조직의 엄밀함이야말로 바늘이 들어갈 틈도, 물이 샐 틈도 없다. 보기만 해도 행방에 질서가 있고 진퇴에 의거가 있는 군진편성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기 부동한 병종은 부동한 전투와 지리적 환경중 각자의 이로움과 폐단을 갖고 있으므로 군진 편성중 교묘하고 합리한 조합이 매우 중요하다.
고대 병법은 전차는 위력이 강하여 "견고한 적진을 함락하고 강적을 공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저지하는데" 사용되고 기병은 행동이 신속하고 기동능력이 강하여 대부분 "패적을 추격하고 양도를 차단하고 외구를 격파 하는데" 사용되며 오직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피하여 각자가 승전장을 차지하고 상호 협동하도록 하여야만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다 격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육도균병'에서)
진나라 병마용갱 군진의 병종조합은 이 용병원칙의 생동한 구현이며 재창조이다. 2호갱은 전차·기병·보병·노병(弩兵)의 혼연일체로 곡형군진을 이루고 있다. 그중 보병은 경장비 보병과 중장비 보병으로 나뉜다. 전차는 또 지휘차· 좌차· 3인승 일반전차· 4인승 사두마차 등으로 세분하였는데 각기 부동한 특징과 중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로부터 양군이 교전할 때 "용이하면 전차를, 위험하면 기병을, 험악하면 궁수를 많이 사용하며"(손자병법에서) 전장의 형세가 변화무궁하여도 여러 병종으로 구성된 이런 군진은 적을 여유있게 응대하고 전장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고증에 의하면 BC 260년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편(長平) 전역에서 진나라 군대는 40여만명의 적군을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전차병 기병 보병 등 여러 병종을 이용하여 협동작전을 실시한 성공적인 전투사례이다.
이 밖에 진나라 병마용갱에서의 기병과 전차의 대량 출토는 진나라 때 기병이 이미 상대적으로 독립된 병종으로 전쟁무대에서 활약하였으며 전차도 역시 전쟁에서 주력 부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또한 지난 날 전국시대부터 전차가 이미 중요치 않은 지위로 도태 되었다는 편면적인 견해를 시정해 주기도 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전국시기 진나라는 이른바 100 만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BC 223년 진나라 대장 왕전(王翦)은 어명을 받고 초나라를 토벌하면서 60여만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진나라의 강대한 군사력은 다른 6개 제후국들을 겁에 질리게 하였다. 진용 군진은 거대한 장면과 방대한 구도를 통해 진나라 군대의 진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줄줄이 정연하게 서있는 금극철마(金戟鐵馬)는 사람들에게 당년 진시황이 천하를 호령하고 사해를 주름잡으며 중국을 통일했던 업적을 상기시키고 "진황이 육국을 휩쓸어 정복할 제 호시탐탐 그 눈길 얼마나 장하였던가? 검을 휘둘러 뜬 구름 헤가르니 서역의 제후들 다투어 모여드네" 라고 한 당대(唐代)의 시인 이백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대형 예술조각군으로서의 진용 군진은 총체적 구도면에서 동(動)과 정(靜)의 관계에 주의를 돌림으로써 동과 정이 결합되고 온축(蘊蓄) 이 무궁해졌다. 총체적으로 보면 진용갱의 소조는 방대한 진군서열이다. 이러한 군사소개는 엄숙하게 서있는 정지상태의 군대를 표현하는 것이어서 흔히 형체가 따분하고 생기없는 병폐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진용갱은 정장을 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호전적인 3군의 순간적인 자태를 선택함으 로써 정(靜) 속에 동(動)이 있고 동속에 정이 있도록 하여 그 함축된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직관적인 만족 뿐만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남겨준다. 말하자면 일단 명령만 내리면 전군은 번개같이 내달릴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개별적 형상 면에서 보면 전마가 고개를 쳐들고 노호하는 듯한 자태이며 바람에 날리는 듯한 장수들의 옷자락과 낭자 등은 강열한 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동적 자세는 진지를 확고히 정비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작품의 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조화를 이룸으로써 전반 용갱에 남겨 있는 예측하기 어려운 폭발력과 생명력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활을 당겨 쏠 준비를 하고 있는 무사들을 보면 시위에 먹인 화살이 당장이라도 "윙" 소리를 내며 남아 올 것 같아 볼수록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외양과 정신을 겸비한 조각조형] 67p
● 06 생동한 조각예술 68p
진나라 병마용갱은 내용이 박대정심한 군사보고일 뿐만 아니라 휘황찬란한 예술보고이기도 하다. 진나라 병마용갱은 그 독특한 풍채와 웅자, 평범하지 않은 예술 성과로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 조각예술에서의 그 지위를 구축하여 사람들에게 동방 조각사상 눈부신 한페이지를 펼쳐보였다.
진나라 병마용의 조각예술 성과는 다방면적이다. 형세가 높고 크며 수량이 많고 장면이 웅대하며 기세가 드높은 것이 그 첫 번째 특징이다. 제1·2·3호 갱에는 약 8,000 점의 토용·토마가 보전되어 있는데 줄지어 늘어선 장교·병사·거마들로 구성된 위풍당당한 대군은 마치 명령만 내리면 곧 돌격해 들어올 것 같아 사람들에게 일체를 압도하고 "산하를 삼킬 듯한" 기세를 보여준다.
토용은 일반적으로 키가 1.8m, 최고 2m로 모두 우람한 체격들이다. 토마는 일반적으로 길이 2m, 높이 1.7m로 진짜 말과 비슷하다. 수량이 이처럼 많고 형체가 이처럼 크고 높기로는 중국에서 발굴된 역대 토 용중 매우 드문 것이다.
형상이 핍진하고 사실성이 강하여 살아 움직이듯 생동하며 부르면 살아날 것 같은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것이 두 번째 예술적 특징이다. 이미 출토된 1,000 여점의 토용·토마로부터 진나라의 병마용 조각·소조의 기본 풍격은 사실적인 것으로 뚜렷한 초상성과 사생성의 특징 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시기의 군대를 대상으로 창작한 병마용은 형상이 핍진하고 생동하며 비례가 균형잡히고 정확하여 토용·토마마다 모두 제작시의 모델 원형이 있는 듯 싶다.
토마들을 보면 머리가 바르고 코와 입이 크고 둔부와 허리가 살찌고 근육이 풍만하고 두 눈이 매달아 놓은 방울같고 두 귀가 깎아놓은 대 나무같고 앞다리가 기둥같고 뒷다리가 활같아 한시도 기다리지 못해 “채찍을 휘두르기도 전에 스스로 네굽을 안고 달리 듯한" 표정들이다. 토용은 부동한 신분에 따라 장군용·장교용·무사용 등 몇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그 복식과 모자, 허리띠 표정 자태가 각기 다르다.
장군용은 모두 키가 크고 우람하며 긴 저고리를 두벌 겹처입고 그 위에 채색어린 갑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할관을 쓰고 발에는 목이 네모나고 코가 들린 신을 신었는데 자태가 의젓하고 늠름하며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다. 어떤 사람들은 농담으로 "오성급 상장" 이라 부른다.
장교용은 일반적으로 긴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갑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장관(長冠)을 쓰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있는데 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겪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위품과 기개를 표현하고 있다.
무사용은 구체적 분담과 임무가 부동합에 따라 입사노병(立射弩兵) 궤사노병(机射弩兵) •보병•기병 등으로 나누는데 궤사노병은 왼쪽 다리를 구부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손은 활을 드는 자세를 취하였다.
입사노병은 왼 발을 앞으로 반보 내디더 두발이 "丁" 자형음 이루게 하고 원다리는 앞으로 구부리고 오른다리는 뒤로 뻗치며 왼팔은 앞으로 뻗치고 오른팔은 가슴앞까지 구부려 시위를 잡아당겨 쏘려는 듯한 형상을 취하였다. 가장 훌륭하고 생동한 것은 인물의 얼굴형상으로서 매개 토용 하나하나의 개성화된 예술 정품이라 할 수 있다.
1,000 여점의 토용 중 우리는 심지어 한쌍의 "쌍둥이" 형제도 찾아볼 수 없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우뚝 선 콧마루예 팔자수염을 한 성격이 활담해 보이는 토용이 있는가 하면 긴 얼굴에 짙은 콧수염, 모습이 수척하여 업숙하고 경건해 보이는 토용도 있다.
사나운 표정으로 눈초리를 곤두세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는 듯한 토용이 있는가 하면 둥근 얼굴에 가는 눈썹, 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래를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에 잡긴 듯한 토용도 있으며 빼어난 용모예 미소를 머금고 온 몸에 천진난만한 생기가 넘처흐르는 토용도 있다.
매 하나의 부동한 열굴표정은 한 페이지의 상세한 이력서로서 그의 민족•연령•본적, 심지어는 성격까지 읽을 수 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토용들 중 관중에서 온 농부, 사천에서 온 젊은이, 북방 초원에서 온 목축민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들과 마주하게 되면 당신은 그들이 살아 있고 그들이 수시로 입을 열고 당신과 한담이라도 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진나라 병마용 예술의 세 번째 성과는 그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색채에서 표헌된다. 진나라 병마용은 원래 모두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있으나 역사상 큰 불에 타고 또 2,000 여년간 지하에 매장되어 있다보니 수토에 침식되어 원래의 아름다운 색채가 거의 탈색된 것이다.
일부 트용 토마에 보전된 흔적으로 보면 홍•녹 •백•흑•황 등 여러 가지 색깔로 모두 광물질 안료이다. 그중 홍색 녹색 남색 홍갈색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색조가 명쾌하고 대비가 강열하다. 병마용갱은 물론 현재 볼 수 있는 것보다 건설 초기의 것이 장관일 것이다.
추산에 의하면 병마용갱에 도합 8,000 여점의 토용이 있는데 매점의 도용·토마를 평균 2m평방의 채색면적으로 계산한다면 전반 채색화 공사는 너비 1m, 길이 15km의 대형 두루마리 그림을 그린 것과 같다. 이 한 점만 보더라도 실로 대단한 예술장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다음 진나라 병마용 예술 성과는 또 숙련된 제작 배소공학 면에서 표현된다.
상기한 바와 같이 진나라 병마용은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토용·토마가 높고 크며 토우를 만들고 가마에 넣어 굽기까지의 과정은 의심 할 바 없이 어렵고도 방대한 예술 창작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조각 소조 예술가가 아닌 상황에서 어떻게 이처럼 방대한 공사를 완공하고 또한 매우 높은 예술 표준에 도달시켰을 것인가?
병마용갱내의 부서진 토용에 대한 고찰 분석에 의하면 원래 진나라 병마용의 창작은 소조·모형을 결합하여 소조를 위주로 하고 다지고 빛고 붙이고 새기고 그리는 등 다양한 재래식 기법을 보조로 한 일련의 숙달되고 합리적인 공예방법을 채용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토용의 다리와 발은 퇴소방법으로 조방토우를 빛은 다음 그 표면을 깎아 만든다.
동체는 가래흙을 둘둘 감아 올리는 퇴소법으로 조형을 만든 다음 다시 붙이고 빚고 새기는 등 방법으로 두루마기와 갑옷의 부동한 속성을 표현하였다. 머리 소조법은 비교적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우선 모형으로 조방토용머리를 만들고 퇴소법으로 뒤통수를 빚고 귀를 만들어 붙이고 빚거나 모형으로 만든 상투를 머리 한쪽에 붙인 다음 눈·입·눈썹·수염 등 세부를 세밀하게 부조하여 부동한 인물의 부동한 형상과 성격 특징을 표현한다.
토마의 제작과정은 토용과 대동소이하다. 머리·목·동체·사지·꼬리·귀 등은 따로따로 빛은 다음 조합해서 조방토마를 만들고 다시 세부를 조각한다. 요컨대 다양 한 기법, 특히 모형·소조결합·소조 위주의 방법을 종합적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에 작업효율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모형만 사용하여 천인일면(千人一面) 상호뇌동(相互雷同)을 초래할 수 있는 폐단을 피하였다.
소조를 끝낸 후 가마에 넣어 굽는 과정은 예술품 성패의 관건적 절차로서 토용쪼각에 대한 검사·측정 및 분석에 의하면 토용·토마의 배소 온도는 대개 950°C~1,050°C 사이이며 절대 다수가 색상이 순수하고 밀도가 높고 경도가 높아 배소기술이 최고봉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이 진행하는 모의 배소 시험이라도 이와 같은 수준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인 바 옛날 사람들의 깊은 조예와 뛰어난 도기 예술기교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진나라 병마용 예술은 중국 고대 근로자들이 인류문명보고에 바친 하나의 눈부신 명주이다. 진나라의 병마용예술은 자체의 출중하고 기세 당당한 내용으로 양양·분발의 정신을 영원히 명시함으로써 영원불멸의 예술적 매력을 갖추었다.
● 7. 생동하고 개성적인 용모와 자태 92p
사람들이 진용갱의 거시적 장면과 총제적 효과의 박대함에 깊이 감동된 마음을 점차 진정하고 눈길을 다시 매 하나의 구체적 형상에 돌려 유심히 관상할 경우 진용갱의 감동적인 내용은 결코 튼튼하고 거쿨지고 하나같이 꼭 같은 체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각이하고 생 동하고 개성적인 용모에 있으며 그것은 또한 진용갱 예술의 정화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적 풍격과 개성화의 미로서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각이한 등급에 따라 할관 장관 연책을 쓰기도 하고 맨머리에 낭자를 틀어올리기도 했는데 그 섬세함은 머리카락마저 보이는 듯하다. 오관의 소조도 매우 제격이어서 면부근육의 변화가 아주 미묘하다. "마음의 창문"인 눈은 정기가 돌고 각이한 눈빛을 통해 각이한 경력에 의한 구체적 인물의 복잡한 심리와 감정 색채를 표출함으로써 인물마다 모두 개성적이다.
그것은 영웅적이고 비장한 미이며 진왕조의 짧고도 비장한 노래로서 이러한 시대적 정신은 진용의 조각상에서 충분히 나타나 있다.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보면 이 다채로운 개성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하나의 공통된 특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거센 파도처럼 흘러넘치는 영웅적 기개이다.
진용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한 수의 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시는 배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완약이나 옛길의 서풍과 같은 쓸쓸함이 아니다. 그것은 굴원의 <국상> 유방의 <대풍가> 마냥 비장하고 호매함에 넘치는 정감이다.
진용의 미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진용의 미는 깊이 있고 숭고하다. 그것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는 하나 이내 소침해지게 하는 그런 예술이 아니다. 진요의 미는 영원한 매력을 지닌 불멸의 예술이다.
중국 소조예술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다. 역사를 거술러 올라가면 조기의 소조예술 유산중에는 용상작품이 거의 "반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용의 지위는 더욱 중요하다.
진용이 조형예술면에서 이룩한 성과는 조기의 소조작품과 비교하건 후에 대량으로 발굴된 석굴조상, 사원조상 능묘석가 등 지면소조 중의 정품 결작과 비교하건 모두 손색이 없으며 중국 소조발전사상 옛것을 이어 받아 미래의 것을 창조해 나가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8 국부와 세부의 정교한 조각 107p
전용예술을 감상하면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 걸출한 예술작품의 창조자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묻게된다. 진용갱의 창조자에 대해서는 사서에도 일언반구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 문제는 줄곧 쉽게 해답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고대 예술가들의 이렇듯 뛰어난 업적을 매몰시키고 싶지 않은 고고학자들은 일부 출토된 토용·토마에서 사람들이 별로 주의하지 않는, 은폐된 곳에 새겨지고 찍혀 있는 문자를 통해 거듭 연구하고 고증한 결과 마침내 초보적인 답안을 얻어냈다.
원래 진용의 실제 제작자들은 진왕조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일부 도공들이었다. 그 중 어떤 사람은 궁전의 도기작업장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민간 도기작업장에서 왔는데 모두 풍부한 경험을 지닌 우수한 도공이었다. 현재까지 확실한 이름을 밝힐수 있는 사람은 약 80명정도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이 기적의 진정한 창조자들로 2,200년 전의 걸출한 예술대가들이다.
고대의 도기예술가들은 사면팔방에서 모여왔다. 그 들은 부동한 생활 경력과 체험, 특히 봉건사회 수공업 작업장의 전통적인 보수와 밀폐 의식으로 인해 기예의 전과는 사제지간이나 부자지간에서만 이루어졌다. 따라서 부동한 작업장의 기능공들은 소조의 기법상 일정 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용갱의 토용·토마의 소조에서도 똑똑히 보아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앙관서의 도기작업장에서 온 도공들은 도읍 군사들의 위풍 당당한 형상을 늘 보아왔던 관계로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 머리가 둥글고 얼굴이 넓으며 몸통이 크고 건강하고 늠늠한 장사의 자태를 보일 뿐만 아니라 풍격도 엄밀하고 통일적이다. 그러나 지방과 민간작업장에서 온 도공들은 진나라 하충사회를 더 잘 알고 광범위한 근로대중의 제형과 표정, 성격과 취미에 익숙하였으므로 토용의 창작에서도 자체의 색다른 풍격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위엄한 자태보다도 수려한 용모에 뛰어나다. 이들이 만든 토용은 얼굴 모양이 다종다양하다. 네모난 얼굴·길쭉한 얼굴·둥근얼굴·오리알형 얼굴 등 복잡하고 다양한 풍격을 보여준다. 비록 소조 수준에서는 다소 높고 낮은 차이를 보였지만 이들은 모두 기예가 뛰어 난 도공들이었다.
진나라 통치자들은 도공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제품에 도공의 이름을 새 겨 그의 성심여부를 고찰하는" 제도를 실시했던 까닭에 이 고대 예술가들의 이름이 유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진용과 더불어 중국과 세계예술사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 9. 예리한 병기는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114p
진용갱에서 출토된 청동병기의 가공공예는 매우 선진적이다. 구리를 불에 달구어 모양을 낸 다음 다시 같고 다듬고 구멍을 뚫고 윤을 내는 등 정밀가공은 병기의 외형이 표준적이고 날이 날카롭게 한다. 청동검을 예로 들면 검신은 자루목에서 예봉까지 기본적으로 넓은 데서 점차 가늘어진 형태를 취하였고 그 두께도 반대 방향으로의 변화를 취했다.
검의 양쪽 날과 등의 곡선 변화는 완전히 대칭으로 되어 역학원리에 부합되었다. 병기의 날 부분에 새겨진 무늬는 평행과 수직을 이루고 세밀하고도 질서정연하다. 현대적 선반기계가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이같은 공예수준에 도달하기란 실로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가공공예가 뛰어난 외에 진용갱의 병기는 합금성분의 비례면에서도 매우 과학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청동기는 금속의 배합비례가 기물의 경도·강인성·기타의 기계성능을 결정한다. 이에 대해 중국 고대의 과학저서인 <고공기(考工記)>에는 6종 청동기물의 동•주석의 최적 함유량 수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육제(六齊)"라고 한다.
진용갱에서 출토된 각종 청동병기의 합금성분에 대해 조사해본 결과 그중 검과 창의 동•주석의 비례는 모두 고공기(考工記)에 기록 된 비례 요구에 부합되었다. 그런데 구리화살만은 일부러 주석의 함유량을 낮추고 아연의 함유량을 크게 늘리었다. 그것은 아연에 독성이 들어있어 화살의 살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진나라가 병기제조 면에서 무기의 성능을 제고하고 개선하기 위해 실천속에서 계속 모색함으로써 이미 일련의 과학적인 금속 예비기준을 총화해냈음을 말해준다.
[더 없이 정교한 청동차마] 119p
●10. 제왕난가의 풍채, 청동예술의 진품 120p
진나라 병마용갱이 발견된 후 진시황릉 채색 동거마(銅車馬)의 출토는 진시황릉 고고사업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중대한 성과로 된다. 이 한조의 동거마는 모두 두대로 원래 진시황릉 서쪽 20km 거리의 한 부장갱에 매장되어 있었다. 출토시 이 두 대의 동거마는 길이 약 7m. 너비 약 2.3m의 대형 나무관속에 앞뒤로 서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동거마의 크기는 진짜 말과 수레의 1/2에 상당하다. 비록 부장물이기는 하지만 망령의 여행용 진상물로서 실용물은 아니다. 그러나 수레의 구조 및 메우는 방법은 완전히 실물을 모방하여 진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므로 황실대가의 축소판이며 재현인 것이다. 현재 동거마는 진용박물관 특별전시홀에 진열되어 있어 관광객들은 시황제 난가의 풍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진시황릉 동거마는 출토시의 전후 순으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1호수레 2호수레로 불려지고 있다. 두 대의 동거마는 모두 쌍문 단채로 네필의 구리말을 메웠지만 형상과 구조는 서로 다르다. 한(漢)나라 사람 채옹(蔡邕)의 '독단(獨斷)'에 의하면 이 두 동거마는 모두 제왕법가중의 "오시부거(五時副車)"에 속하는 것으로, 즉 난가대오중 제왕승여의 수행차량이다.
1호 수레는 고거(高車) 또는 입거(立車) 라고 하는데 당시 진시황 순행차대의 선도수레였다. 수레의 차체는 가로된 장방형으로 너비 126cm, 길이 70cm 이며 수레 위에는 122cm의 원형 구리산이 세워져 있고 그 밑에는 장검을 찬 동제 어관용이 서있다. 수레 위에는 또 청동 방패와 궁노 전통이 하나씩 놓여있고 전통안에는 66개의 청동화살촉이 담겨져 있다.
4마리의 말중 2마리는 참마, 2마리는 복마이고 동체는 흰색을 칠하였고 키는 모두 90cm, 길이는 약 110cm이다. 머리에는 은재갈에 금은장식끈이 드리워 있고 면부에는 금방울이 장식되어 있으며 목밑에는 장식용 술이 드리워져 있다.
두 참마의 목에는 금은고뼈가 매어져 있는데 그중 오른쪽 참마의 이마에는 이 수레가 황실전용임을 표시하는 깃발이 꽂혀 있다. 중간의 두 복마는 멍에를 쓰고 끌채를 메였다. 4마리의 말은 다 갈기를 자르고 꼬리를 묶어놓았다. 머리를 쳐들고 우뚝 서서 기민하고 날랜 표정으로 멀리 앞을 내다보고 있는 품이 곧 네 굽을 안고 달려나가려는 듯 싶다.
2호 수레는 안거(安車), 속칭 온량거라고 한 다. 동거마의 총길이는 3.17m, 높이는 1.06m, 중량은 1,241kg 이다. 수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고 평면은 "凸"자형을 이루었다. 앞부분은 어관의 자리이고 뒷부분은 주인의 좌석이며 둘레에 간막이를 대고 앞에 횡목, 뒤에 문을 내었으며 좌우 양측과 앞에 창문을 각각 하나 씩 내었다. 창문짝에는 투조한 작은 구멍들이 밀포되어 있어 햇빛을 가리우고 바람과 먼지를 막아주면서도 탑승자가 창문으로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했다.
창문의 구조는 홈을 판 미닫이로서 여닫기에 매우 편리하다. 수레 전체가 타원형의 뚜껑밑에 놓여 있는데 수레는 네모지고 뚜껑은 둥글어 이른바 "여(興)는 땅과 같아 네모지고 뚜껑은 하늘과 같이 둥글다"고 한 사서의 기록과 상합되며 중국 고대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소박한 자연관을 구현했다.
수레 앞 부분의 구리 어관용은 몸에 단검을 차고 꿇어앉은 자세를 취하였는데 높이 51cm로 몸에 긴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할관을 쓰고 정신을 가다듬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모양이 매우 생동하고 핍진하다. 고귀한 신분으로 하여 득의양양해 하면서도 또 늘 황제를 수반함에 호랑이와 동행하는 듯한 공포심을 품게 되는 황실 고급 노복의 정신면모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중국 고대 청동문화가 흥성했던 시대는 상(商)·주(周) 시기였다. 때문에 상•주는 중국의 청동기시대로 칭송되고 있다. 그후 철기의 출현 및 증가에 따라 청동 문화는 점차 쇠퇴되었는데 진(秦)•한(漢) 시대에 와서는 청동중기 (靑銅重器)의 주조가 더욱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진시황릉 동거마의 출토로 하여 사람들은 진나라 때의 청동문화 수준에 대해 괄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중국 청동문화 말기의 새로운 창출로서 고대 청동기예(靑銅技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진시황릉 동거마의 뛰어난 예술적 가치는 첫째로 그의 정미한 채색화 기예에서 표현된다. 두수레의 차체와 뚜껑에는 색채가 아름답고 다양한 새털구름·용·봉황 등 무늬가 그려져 있으며 많은 부위와 부품에는 또한 금•은을 상감한 능형, 정방형, 삼각형 등 기하도안이 그려져 있다. 혹은 구름, 안개가 피어오르고 혹은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 정교하고 화려하고 우아하고 옛스럽고 장중하고 경건하여 사람들은 손뼉을 쳐가며 절찬을 아끼지 않는다.
둘째로 진시황릉 동거마가 청동 제조공예에서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1호 수레는 3,064개 부품, 2호 수레는 3,462개 부품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금은제품이 모두 1,000 여점 이상에 달한다. 전반 제작과정은 주조·용접·부조·조각·상감·광택 등 다양한 공예수단을 적용하였다. 그중 일부 공예는 진나라 장인들이 창조한 것이다.
이를테면 수레바퀴 테와 살의 연접은 슈링크 피드법을 적용하였는데 이는 공예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동거마의 만구(挽具) 및 많은 장식품 위에는 구리실로 고리를 만들어 연결해 놓은 체인이 걸쳐져 있는데 구리실의 가장 가는 부위는 직경이 0.5mm 밖에 안된다. 확대경으로 관찰해도 굵기가 같고 표면에 두드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바 이는 인발방법으로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가는 구리실의 양끝을 용접하여 고리를 만든 용접기술이야말로 절묘하기 그지없어 오늘까지도 불가사의하다.
이밖에 수레 위의 많은 부품의 조합 구조 방식도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예를 들면 1호 수레 산좌 위의 산기둥을 고정하는 부품은 열쇠를 가볍게 잡아당기기만 해도 자물쇠고리가 열린다. 자물쇠를 잠그면 열쇠는 자체의 무게에 의해 자동적으로 원상태로 돌아와 기둥을 자물쇠구멍에 든든히 고정시킨다. 폐합이 엄밀하고 흠잡을 데가 없이 기묘하여 고대 장인들의 정교한 구상을 그대로 표출했다.
진시황릉 동거마는 현재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동거마 중 차형이 제일 크고 장식이 가장 화려하고 모방이 매우 핍진하고 또 완전하게 보전된 동거마이다. 그 구조의 복잡함과 기예의 정심함은 이왕에 출토된 그 어떤 구리기구도 비교할 바가 못된다. 실로 중국 "청동의 으뜸"으 로 칭송됨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동거마의 발견은 고대 수레제조, 특히 천자의 여복제도를 요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실물자료를 제공했다. 동거마를 통해 우리는 당시 진시황의 난가가 얼마나 화려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당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황제로 되기전에 진시황의 순례차대를 보고 부러운 나머지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러할지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