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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50년 외길인생 - 추곡 임치정 선생
춘곡(春谷) 임치정(林蚩正) 생애와 독립운동
변함없는 의리, 춘풍 같은 우정
임치정(林蚩正, 林致淀)과 40여년간 우정을 쌓아온 한 지기(知己)는 1932년 1월 임치정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다음과 같이 그를 추모하였다.
“춘곡(春谷)은 의리와 우정과 불평의 사람이었소. 그가 한 번 허락한 동지에 대한 의리는 일즉 변해보는 일이 없었소. 또 춘곡은 친구에 대하여는 항상 춘풍과 같은 우정을 가졌고 빈궁한 동지의 가족은 자기 가족과 같이 여겨서 의식을 같이하였소. 항상 불평이 있어 술로 잊으려 하였소”
임치정은 그리 길지 않은 50여년 간을 “의리와 우정과 불평”으로 한 시대를 활동하며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매일신보사 재직시 사진 한 장 촬영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사진박히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나서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남을 돕는 성품이었다. 이러한 그의 인품 탓에 아직도 춘곡의 인생과 독립운동은 물론, 그를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하와이 신민회 창립 주역
춘곡 임치정은 188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산남면(山南面) 홍문동(弘文洞)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당시 그의 가족은 8명이었고, 그의 재산은 약 300원 정도였다. 평남 용강은 훗날 미주 공립협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이강(李剛)․임준기(林俊基)․양주삼(梁柱三) 등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스무 살되던 1900년까지 약 7~8년간 한문을 수학한 그는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자원하여 아내를 고국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도미길에 올랐다. 하와이 오아후(Oahu) 호놀룰루에 도착한 임치정은 사탕농장에 배속되어 노동자로서 미주생활을 시작하였다. 1903년 8월 7일 그는 홍승하(洪承夏)․윤병구(尹炳求)․안정수(安正洙)․이교담(李交倓)․박윤섭(朴允燮)․문홍석(文鴻錫)․임형주(林炯住)․김정국 등 주로 기독교 감리교 출신 인사와 유학생들과 함께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다. 신민회 창립후 임치정 등은 동족단결(同族團結)․민지계발(民智啓發)․국정쇄신(國政刷新)을 강령으로 설정하고 홍승하를 회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같은 해 12월 2일에는 하와이 카우아이(Kauai)․카파아(Kapaa)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와이 성공회 계열의 김익성(金翊成)․최윤백 등이 회(會)의 명칭이 ‘신민(新民)’이라는 점과 강령에 ‘국정쇄신’을 내건 점을 거론하면서 이는 대한제국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행위라고 비난하고 이를 한국정부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한인간의 정치의식 차이와 종교적 분파 외에도 전대금(前貸金) 수봉사건(收捧事件)으로 인한 분열 등으로 1904년 4월 20일 신민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북미 공립협회 창립회원
신민회 해체를 즈음한 1904년 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이 무렵 이강 또한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이주한 것으로 보아 서로 논의 끝에 안창호가 활동하고 있는 북미지역으로 거점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도미후 1년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소학교에 다니던 그는 1903년 안창호(安昌浩) 등이 결성한 친목회에 가입하였다. 친목회 시절, 임치정은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이강․임준기는 리버사이드에서 노동주선소와 야학을 설치하여 하와이에서 건너오는 한인들의 취업 알선 및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과 한인커뮤니티 구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임치정이 안창호․이강․임준기 등과 친목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1905년 1월, 일제는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 사이토[齋藤幹]를 대한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하여 재미한인들을 통치하려 하는 한편, 동년 4월에는 한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임치정은 안창호 등과 함께 일제의 재미한인 지배의도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 설립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 4월 5일 그를 비롯한 안창호․송석준(宋錫峻)․임준기․이강․방화중(邦化重) 등 49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 창립과 더불어 임치정은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서기와 학회 제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회 규칙 31조를 기초하여 학생들의 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 섰다.
1905년 7월 러일강화회담이 미국 군항(軍港)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와이 에와친목회는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윤병구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공립협회 역시 대표 파견을 제기하는 여론이 일었으며, 그 중심인물은 임치정 등이었다. 임치정 등은 대표 파견 주장과 함께 파견에 필요한 경비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회장 안창호가 참석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니 헛되이 경비를 쓰지 말 것을 당부하자, 공립협회는 모금한 경비만 하와이 에와친목회로 송금하였다.
그후 1905년 11월 고종의 특사 헐버트가 공립협회를 방문하여 을사조약 강제체결 움직임을 전하자, 임치정 등 공립협회 임원진은 본격적인 민족운동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안창호 등과 더불어 대한제국의 영사관을 대신할 자치기관 설립과 국권회복방략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공립협회 총본부인 공립관(共立館)을 설치하고,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샌프란시스코․리버사이드․레드랜드․로스엔젤레스 등 미국 서해안 일대에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공립신보 창간시부터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신문 간행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한편, 공립신보사 회계로 근무하면서 열악한 재정을 충당하였다.
1906년 들어 임치정은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산하 학생회 특별찬성원으로 선임되어 학생들의 민족정신을 앙양시키는 한편,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부회장 겸 임시사법, 공립협회 본부인 공립관 사무는 물론 공립신보사 사무까지 맡는 등 1인 다역의 활동을 하면서 사실상 공립협회가 독립운동단체로 굳건히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06년 6월 이른바 상항대진재(桑港大震災) 당시 일본영사를 통한 고종의 구휼금 분급문제를 둘러싸고 임치정 등 공립협회 임원진은 일본영사의 간섭행위에 대해 통고문을 발표하여 일본영사로부터 한인사회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사건으로 공립협회는 미국의 묵인 하에 미국내 한인자치기관과 대표적 외교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신민회 창립, 주도의 1인
1907년 1월 공립협회는 ‘통일연합론’에 입각한 ‘통일연합기관’ 설치를 방략으로 결정하였다. 통일연합론이란 당시 한인단체가 국내를 비롯하여 미국․러시아․만주 등지로 산재된 점을 고려하여 공립협회가 중심되어 국내외 각 지역에 공립협회 지회에 해당하는 ‘연합기관’을 설치한 후 이를 통일하여 국권 회복과 ‘자유문명국’ 즉 ‘공화정체의 독립국’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다만, 독립전쟁을 수행할 거점이 한국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국내와 상호 연계를 맺어 독립전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중심이었다.
1907년 1월 초순, 안창호․이강․임준기․신달윤(申達允)․박영순(朴永淳)․이재수(李在洙) 등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발기하였다. 이때 구성된 대한신민회 역원을 보면, 가주(加州)감독장 안창호, 한국감독장 양기탁(梁起鐸), 그리고 임치정․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등이 임원으로 선정되어 있었다. 이는 안창호 등이 미국에서 ‘대한신민회’를 조직할 당시, 임치정을 국내에서 활동할 핵심인사로 거론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국내에 신민회 창립을 결의한 임치정은 1907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부회장이자 대리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결원이 있을 때는 서기․사법․총무 등 각종 역할을 담당하며 공립협회의 중심지 샌프란시스코지방회를 이끄는 한편, 공립협회 총본부인 공립관 사무원, 공립신보사 사원으로도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에 힘입어 공립신보는 계몽운동기 해외 3대 항일민족언론지로서 위상을 차지하였다.
한편, 1907년 1월 국내에 신민회를 결성하기 위해 파견된 안창호의 활동이 지연되던 중, 동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계기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이어 정미조약 강제 체결, 구한국군 강제 해산 등으로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의병전쟁 직후 임치정 등 공립협회 임원진은 정미의병전쟁을 ‘독립전쟁’의 최적기로 파악하고 공립협회 중견인물들을 잇따라 파견하여 신민회 결성과 매국적 처단을 적극 후원하였다.
1907년 8월 27일 이강이 국내로 파견된 것을 기점으로 이재명(李在明, 10.9)․오대영(吳大泳, 10.16)이 파견되었고, 10월 24일에는 이재명의 매국적 처단 협조와 국내와의 통신연락을 위해 임치정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그는 1907년 겨울 국내로 들어와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 회계부에 입사, 부총무 겸 회계주임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임치정이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하게 된 것은 첫째, 양기탁과 친분을 쌓은 뒤 신민회 조직결성을 종용하기 위한 것과 신민회 결성 후의 활동지원, 둘째, 각종 정보수집에 유리한 대한매일신보사를 거점으로 공립협회와의 연락을 취하기 위한 것, 셋째, 1906년 이후 고종으로부터의 정기적인 자금지원이 고종퇴위로 말미암아 중단되자, 대한매일신보사의 재정지원을 위해 회계부에 입사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귀국후 임치정은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하면서 이강과 함께 안창호를 도와 양기탁에게 신민회 가입을 권유하는 등 활약을 펼친 결과, 전덕기․이동녕․조성환․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건하였다.
신민회가 창립되자, 임치정은 1908년 1월 서우학회에 가입하였고, 동년 3월에는 서북학회에 가입하였다.
매국적 처단과 105인사건
1908년 이후 의병전쟁이 점차 쇠퇴하자, 현실적인 힘의 열세를 직감한 공립협회는 전면적인 독립전쟁론에서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방략을 전화하였다. 이에 따라, 1908년 1월 공립협회는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해 이교담(李交倓)․김성무(金成武)를 원동특파원으로 파견하는 한편, 10월에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신민회 활동에 주력하던 임치정은 안창호․이교담․김성무 및 신민회원들과 접촉하면서 독립군기지 모색을 위한 논의를 거듭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2월 미주에서 국민회(國民會)가 창립되자, 공립협회에서 추진하던 독립군기지 개척사업은 국민회로 이관되었고, 국민회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해소하고 태동실업주식회사(泰東實業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임치정 등은 독립군기지 물색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이재명 등의 매국적 처단을 적극 후원하였다.
한편, 1909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고 있던 안중근과 안정근의 서신연락을 중개하는 한편, 7월에는 안창호․양기탁․이갑․유동열 등 신민회 회원들과 관서지역에 기독교청년회 문학회를 설립하기 위해 협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1909년 여름부터 안창호․이승훈․안태국 등과 더불어 이재명의 매국적 처단을 적극 후원․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0월 26일 안중근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처단 의거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동년 11월 동아찬영회(東亞讚英會)․대한상무조합(大韓商務組合) 등에서 이등공추모회 및 송덕비 건립문제를 제기하자, 임치정은 양기탁과 함께 이를 맹렬히 비난하는 한편, 미국 공립협회 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던 이재명 등 권장회(勸獎會) 회원들과 함께 이완용 등 매국적 처단에 필요한 거사를 준비하였다. 1909년 12월 23일, 이재명 등 권장회 회원들은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동 불란서천주교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이재명은 사형에 처해졌으나, 임치정은 이교담․안태국․송종원 등 신민회원 13명과 함께 불기소되었다.
한편, 1909년 미주 국민회는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를 기리기 위하여 양의사합전(兩義士合傳」)을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전재하여 배일사상 고취에 노력하는 한편, 장인환 의사의 옥바라지를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이 양의사합전이 비밀리 국내에 유포되자, 임치정은 양기탁․이갑 등과 함께 의연금 모집을 위해 발기인이 되어 한국에서 총 1,316여원의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1909년 5월 1일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베델(한국명 裵說)이 사망하자, 임치정은 5월 5일 강윤희(姜玧熙, 서북학회 평의원), 김윤오(金允五, 서북학회 총무), 정영택(鄭永澤, 기호학회 평의원) 등과 함께 동대문 밖 영도사(永道寺)에서 베델추도회를 개최하였다. 이 추도회에는 양기탁․안창호를 비롯하여 약 400여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임치정은 윤치호․양기탁․이승훈․안태국․옥관빈(대한매일신보사 번역원) 등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해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독립군기지 창설을 위한 서간도 이주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신민회 간부회의는 총 4차에 걸쳐 개최되었으며, 임치정은 네 차례 모두 전국 간부로서 회의에 참가하였고, 그 중 세 차례는 임치정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임치정 등의 만주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개척 움직임을 포착한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는 세칭 만주무관학교사건으로 임치정을 비롯해 양기탁 등을 체포하였다. 이에 따라 1911년 7월 22일 보안법위반으로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2년 9월 27일 대사령(大赦令)으로 출감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평안도 일대의 독립운동가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1910년 11월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총독[寺內總督]의 암살 모의 혐의를 조작하여 1911년 9월 소위 ‘데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 일명 105인사건)’을 일으켰을 때, 재기소된 그는 출감 하룻 만인 1912년 9월 28일 재수감되었다.
다시 재판에 회부된 그는 동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양기탁․안태국․이승훈․유동열 등 6명과 함께 보안법위반과 총독모살미수죄로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그를 비롯한 신민회원들이 이에 불복하여 항소함에 따라 1912년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제1회 공판이 개정된 이래 1913년 2월 5일까지 총 51회에 걸쳐 공판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일제는 1913년 3월 20일 99명에 대해 무죄를 언도하여 사건이 허위날조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임치정 등 신민회 최고간부 6명에게는 징역 6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한 임치정․윤치호․이승훈․안태국․양기탁․옥관빈 등 6명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5월 24일 임치정 등 6인에 대한 상고 최종공판에서 경성고등법원은 유죄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하였다. 이에 다시 대구복심법원으로 호송된 임치정 등 6인은 동년 7월 15일 다시 징역 6년이 언도되자, 재차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다시 상고하는 등 법정투쟁을 벌였으나 1913년 10월 9일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5년 2월 일본 소헌황태후(昭憲皇太后) 대상(大喪)으로 4년여의 옥고 끝에 출감하였다.
광무․융희 연간의 거두, 사회운동에 투신
출감한 뒤 “실업에 종사하여 세상에 숨어 망명 동지의 가족을 구제하기로 일삼”는 것을 결심한 춘곡.
신민회 간부였던 김지간(金志侃)과 진남포 시내에 거주하던 그는 광무소(鑛務所)를 경영하면서 후진 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신민회 동지였던 평양의 이승훈과 잦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중순경 이승훈이 진남포를 방문하자, 그는 다시 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섰다. 그는 시내 중국집 덕원루(德原樓)에 삼숭학교(三崇學校) 교장 홍기황․김정민(金正民)․노윤길(盧允吉) 등 감리교회 간부급 청년들을 비밀리 소집하여 이승훈과 만남을 주선하였다. 임치정 등은 이승훈의 지시에 따라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임치정의 계획에 따라 노윤길 등은 평양의 이승훈과 접촉하면서 거사준비를 진행하였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점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진남포의 3·1운동은 3월 28일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수백 명의 피검․투옥될 정도의 대규모적인 조직적 거사였다. 비록 시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진남포의 3·1운동은 신민회의 활동을 바탕으로 한 임치정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3·1운동의 결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재차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7월 10일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를 실시할 것을 공포하였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와 국내간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와 통신, 군자금모집을 위해 조직된 제도였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30일 서울에 임시총판부 설치를 시작으로 평안도․황해도․함경도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임치정은 1920년 1월 12일 평남 독판 이덕환(李德煥) 산하에 진남포 참사로 임명되어 진남포 부장 김지간과 함께 활동하였으나, 1920년 5월 평북 독판 안병찬이 일제에 피체된 것을 비롯하여 7월 의주군 통신원 양승업(梁承業) 등 22명이 체포되어 평안도 전조직이 붕괴되자,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1922년 11월 이상재․현상윤․이승훈․송진우․장덕수․이갑성 등 동아일보 계열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였다. 나아가 1923년 3월 29일 YMCA 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민립대학기성회를 발족하고, 민족대학설립안을 통과시켰다. 민립대학기성회는 민립대학 설립기금 1천만원을 모집하기 위해 중앙에 중앙집행위원회, 지방에 지방부 설치를 의결하였다. 1923년 4월 2일 민립대학기성회는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위원장에 이상재, 상무위원에 한용운․유성준․이승훈 등 9명을 선출하고 지방선전위원 13명을 선정․파견하였다. 그 결과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에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임치정 역시 동년 3월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위원이자 7인의 감찰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어 선전과 모금운동에 착수하는 한편, 지방순회를 통해 민립대학 설립취지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강연회를 금지하는 등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좌절되자, 임치정 역시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1923년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시대일보(時代日報)가 창간되었으나, 재정난 등으로 몇 차례에 걸쳐 조직이 교체되는 등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4월 이범세(李範世) 등 10여 명이 재단을 구성하여 사장에 홍명희(洪命憙), 부사장에 이관용(李灌鎔), 편집국장에 한기악(韓基岳)을 임명하고, 합자회사 형태로 체제를 혁신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이때 미주시절부터 신문사에 몸담았던 임치정은 시대일보 진남포지국을 설치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시대일보사가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자주 정간되는 등 경영난에 처하며 1926년 8월 중순부터 신문 발행을 중단하자, 임치정 역시 언론계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20년 이후 임치정은 사회운동에 투신하며 민족운동에 주력하였으나, 사회적 여건과 맞물려 번번히 그의 노력이 좌절되자, 몹시 괴로워하였다. 더구나 자신의 항시 낮추고 남을 도왔던 그였기에 이러한 힘든 상황을 술로 대신하고 하였다. 그러던 중, 1932년 1월 9일 오후 6시 그는 서대문 자택에서 뇌일혈로 별세하였다. 그의 뇌일혈은 이 시대의 한을 대신 터트린 결과였으리라.
사망 당시 유족은 미망인을 비롯하여 병두(炳斗)․병기(炳企)․병수(炳秀) 등 3남 2녀였으며, 장지는 그의 성품대로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동아일보는 그를 “광무․융희 연간의 민중운동 거두”로 칭송하며 죽음을 애도하였다.(김 도 훈: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조사3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