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와부읍 묘적 계곡 위에 자리한 묘적사를 소개하기로 한다. 은행잎이 거의다 지고만 11월달 14일 새벽에 도착을 하였기 때문에 거의 사진 찍기는 어려운 시간대였기에 천천히 올라가 입구에 주차를 하고 등산로를 따라 임도를 한 바퀴 돌아 내려와 보니 조금 희미하게 동이트는 것이 보인다. 시간을 보니 이제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다. 백봉산 자락의 묘적사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다. 묘적산의 남쪽 골짜기 정말 아늑한 곳 연못을 지나면 별천지에 들어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묘적사에 대한 기록은 뚜렷한 것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서 사찰의 존재는 살필 수 있으나, 사적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된 바가 없으며, 단지 절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팔각칠층석탑만이 오래된 세월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런데 절에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묘적사는 승병(僧兵)양성 도량이었다고 한다.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묘적사는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으로 왕실산하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절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유로 임진왜란 때 집중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 한편 이 말을 증명하듯 절에서 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활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탄한 대지가 있고, 이곳에서는 간혹 화살촉이 발견되곤 한다고 코리아템플에서 전해준다.
[묘적사 입구 작은 연못...]
[묘적사 입구 작은 연못...]
[묘적사 연못에는...]
[연못에 비친 묘적사 요사채...]
[연못 주위엔 멋진 돌들의 자연 작품들...]
[묘적사 연혁...]
[묘적서 다경실의 돌과 흙의 작품...]
묘적사 입구를 지나 자그마한 연못을 지나 들어서면 첫 번째 눈에 띄는 건물이 돌로쌓아 축조한 다경실이다. 다경실은 현 지주님이 거쳐하시는 곳인데, 다경실 앞으로는 대웅전과 탑이 보이고 또 좌우로 요사채와 마하선실이라는 요사가 멋진 편액을 걸고 있다.
[묘적사 연혁과 주의사항...]
[묘적사 해우소...]
[채소밭 가운데 이름모를 부도탑이...]
[다경실 뒤로 멋진 산책로가...]
[중수비 주변에는 멋진 단풍이...]
[대공덕주영세기송비...]
[가득 쌓인 낙엽이 가을을 보내려는듯...]
[묘적사 다경실...]
[다경실앞 오래된 은행나무가 멋지게...]
[별채 뒤엔 월동준비를...]
[요사채 옆 멋진 돌담...]
[묘적사 8각 7층석탑과 마하선실...]
[묘적사 마하선실...]
[묘적사 굴법당 오름길...]
[묘적사 굴법당 오름길에 선 석봉...]
[굴법당입구 쪽문...]
[묘적사 굴법당 나한전 입구...]
[묘적사 굴법당 내부에는...]
자연 동굴에 인공을 가하여 만든 굴법당(窟法堂)인 나한전은 1979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중심에 봉안되어 있는데,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을 본떠 조성하였으며, 불상의 광배 또한 석굴암의 것과 같은 형태로 후불벽에 광배를 표현하였다. 또한 후불벽에는 반원의 형태로 16개의 감실을 만들어 그 속에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 나한상 역시 석조로 되어 있다.
[묘적사 굴법당옆 산령각...]
나한전 옆 옆 벼랑위에 자리한 산령각은 1984년에 건립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장방형 건물로 사모지붕을 올렸지만 다소 특이한 형태이며, 정면과 측면의 중앙에 각각의 문이 마련되어 있지만 측면이 벼랑이어서 측면의 문은 출입을 위한 문이 아닌 것 같다. 내부에는 독성과 산신 2점의 불화만 봉안되어 있으며, 불화의 조성시기는 건물이 건립된 연대와 같은 1984년이다. 한편 '묘적산산신각창건기(妙寂山山神閣創建記)'에 의하면 1895년에 규오법사가 산신각을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의 산신각은 1969년의 화재로 대웅전과 함께 전소되었다고 한다.
[쪽문위 아름다운 와당...]
[굴법당 입구 멋진 쪽문...]
[묘적사 요사채의 아름다움은 기둥과 돌담...]
묘적사의 요사채는 모두 4동이 있다. 대웅전 앞의 팔각칠층석탑을 중심으로 좌우와 전면에 각각 1동씩 3동의 건물이 있으며, 연못가에 별채가 있다. 팔각칠층석탑 앞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우측에 있는 요사는 마하선실(摩訶禪室)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좌측의 요사는 마하선실과 같이 정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측면은 3칸이다. 또 석탑 전면의 요사는 다경실(茶經室)로 주지스님이 머무르는 공간인데, 벽돌 건물로 기둥만 목재를 사용했다. 한편 이 3동의 건물들은 모두 기둥이 특이한 형태로, 목재를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의 상태 그대로 세워놓았다.
[묘적사 경내...]
[묘적사 요사채의 기둥...]
[묘적사 대웅전과 8각 7층석탑...]
묘적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제법 당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외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원래 묘적사의 대웅전은 현 위치에서 동쪽을 약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는데, 1969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1971년에 중건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고, 1976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당 내부에는 근래에 금동으로 조성한 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신중탱, 칠성탱 등 3점의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3점의 불화는 모두 1980년에 조성되었다. 이밖에 법당에는 범종이 1구 있으며, 이는 1974년에 조성된 것이다.
[묘적사 대웅전 안에는...]
[묘적사 마하선실...]
[대웅전 앞 뜰의 탑과 은행나무...]
대웅전 앞에 있는 8각7층석탑은 향토유적 제1호로 석탑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탑의 높이는 대략 430cm 정도이다. 이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팔각구층석탑과 양식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흔치않은 팔각다층석탑이다. 또한 이 탑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수종사(水鍾寺)의 팔각오층석탑(건립하한연대-1493년)과 규모만 다를 뿐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기단부는 팔각의 지대석 위에 하나의 돌로 조성된 팔각의 2층 기단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2구씩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으며, 기단석의 위와 아래에는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의 연화문이 배치되어 있다.
팔각의 탑신에는 각 면마다 기둥이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에는 3단으로 된 옥개받침과 목조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두(柱頭)까지 표현되어 있다. 추녀는 각 모서리가 위로 반전되어 있고 끝에는 풍탁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보인다. 상륜부는 반구형(半球形)으로 그 둘레에 삼각형 모양이 연속되도록 조각하였으며, 꼭대기에는 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한편, 이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3층과 4층 사이의 체감률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래 탑의 높이는 7층보다 높은 9층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체감률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11층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되어 진다.
[돌집인 다경실...]
[대웅전앞 석등...]
[묘적사 마하선실...]
[대웅전옆 벌집?...]
[묘적사 요사채...]
[다경실앞 커다란 은행나무 받침...]
[묘적사 국궁터...]
[묘적사 다경실 뒤 굴뚝...]
[국궁터(채소밭)에 오래된 석등 밑받침...]
[묘적사 내림길엔 늦은 단풍이 발목을...]
[묘적계곡엔 폭포가 몇 개가 있어 시원함을...]
[묘적사 계곡 맑은 물줄기가...]
[묘적사에서 나와 양수리 가는 길목에...]
[묘적사에서 나와 양수리 가는 길목에...]
묘적사를 돌아보고 내려오며 맑은 계곡도 좋지만 비록 좁지만 이곳에서 뛰며 훈련을 했을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 국왕이 구성한 비밀요원들을 사찰에서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다른 사찰의 용병이나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병사와는 달리 그시대에 그런 비밀요원이 필요했다는 것이 놀랄 정도이다. 뭐 일본의 역사를 보면 비밀요원의 필요성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