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는 치매로 인해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성이 나온다. [사진 쇼박스]
‘우리 군에서 잇따라 여자 셋이 죽었다고 했다. 나로서는 이렇게 자문하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 나였을까?’
이것은 살인자의 직감이다. 아니다. 과거 살인범이었다가 이제는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의 혼란스러운 자아 성찰이다.
최근 영화화된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2013년)은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인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70대 남성의 이야기다. 노인은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딸을 보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치매로 인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했는지를 자꾸 잊어버린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소설은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치매 환자는 2013년 57만 명에서 올해 72만 명으로 급증했다. 2024년 100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치매 인구가 늘면서 이들이 저지른 살인 범죄도 매년 한두 건씩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공주치료감호소에는 15명의 치매 환자가 수용돼 있다. 2013년 2명에서 4년 만에 7배 늘어난 수치다.
전체 범죄 건수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지만 치매 범죄는 특성상 수사·재판 과정에서 복잡한 양상을 띤다. 현실 속 ‘살인자의 기억법’에 우리 형사 사법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흐려진 피고인들의 기억과 싸우며 최대한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차승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치매가 중증으로 갈수록 현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압도적인 환경을 맞닥뜨리면 가까운 사람에게 감정 폭발을 하게 된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치매의 파국적 반응’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이런 경우 전부는 아니지만 범죄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정신질환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치매가 온 A씨(사건 당시 48세)는 2015년 9월 식칼을 들고 나가 “너를 토막 토막 내겠다”며 길에서 마주친 20대 여성의 목 부위를 찔렀다. 피해자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이웃의 만류로 A씨의 범행은 살인미수에 그쳤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도 섬망과 언어장애로 제대로 진술하지 못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사가 공주치료감호소에 정신감정을 의뢰한 결과 A씨가 헌팅턴 병에 의한 중증 치매 환자인 것이 밝혀졌다. A씨는 치료감호 처분을 받게 됐다. 당시 수사 검사는 “당사자가 정확하게 진술을 못해 전문가의 감정, 목격자·피해자의 진술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법정에서 쟁점이 되는 건 범행 시점에서의 심신장애 여부다. 현행법상 심신장애가 인정될 경우 아예 처벌할 수 없거나 감경 사유가 된다. 검사는 “치매 환자라도 사건 당시 심신장애 상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변호인은 그 반대를 주장하면 법정 공방이 벌어지게 된다.
대법원은 심신장애를 판단할 때 사물변별능력과 의사결정능력을 핵심으로 보고 있다. 실제 2015년 수원지법 평택지원은 경기도의 한 요양원에서 동료 환자를 목졸라 살해한 B씨(80·치매 4급)에 대해 “사물변별력이 없는 심신상실의 상태”였다고 보고 1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공주치료감호소의 감정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B씨는 검경의 조사에서 “그 당시 버러지(벌레)가 돌아다녔다” “내 조카를 죽였다” “피해자가 짐승으로 보였다” 등 오락가락 진술했다.
검찰은 “범행 수법이 교묘하고 지능적이었고, 검찰 조사에서 대화를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며 항소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 역시 B씨의 심신상실 상태를 인정했다. 대신 재범 위험성을 고려해 치료감호 처분을 내렸다.
올해 1월 인천에서 치매에 걸린 부인을 돌보다 둔기로 살해한 치매 환자 C씨(84)의 경우도 심신미약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C씨는 범행 이후에도 아내가 사망한 사실을 모르고 아내에게 먹일 죽을 준비하기도 했다.
치매 사건은 조현병 같은 정신질환 범죄와 유사하다.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특별한 치료제가 없어 수감 기간에도 계속 악화된다는 점이 다르다.
치매 사건을 담당했던 한 재판장은 “치매 증세를 과장하는 경우도 있어 심문을 하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본다”며 “만약 질병으로 인해 도덕적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지었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게 법 정신이다. 고령인 치매 환자는 형량이 높으면 사실상 종신형이 되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 초 청주에서 집을 찾아온 동료를 11차례 찔러 살해한 D씨(69)는 법정 공방이 아직 진행 중이다. D씨는 재판 중 알츠하이머·혈관성 치매인 동시에 사건 당시 만취 상태가 인정돼 심신미약 감경을 받았다. 다만 사건 이후 증거 인멸을 한 정황을 고려해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D씨는 “사건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하지만 검사는 “D씨가 기소 전까지 치매 환자라는 점을 부각시키지도 않았고 범행을 부인하는 취지로 진술했다. 재판 전략상 치매 환자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D씨 사건은 피고인이 항소해 대전고법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고령의 부부가 서로를 돌보다 벌어지는 ‘간병 살인’은 정황을 고려해 선처하는 추세다. 앞선 C씨 사례에서 인천지법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며 참작 요소를 이례적으로 자세히 설시했다. C씨는 평소 치매에 걸린 아내를 극진히 돌봐왔고 자녀들도 C씨 부부를 수시로 돌봤다. 하지만 요양보호사나 자녀가 없는 시간에는 자신도 치매에 걸린 상태에서 중증인 아내의 수발을 들어야 했다.
재판부는 “치매는 ‘나를 잃어버리는 병’으로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한 오랜 친구이자 동반자인 배우자가 낯선 사람으로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참담할지 겪어보지 않고선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사태가 개인에 내재하는 악성(惡性)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2014년 서울남부지법, 2015년 대구고법에서도 간병 살인을 저지른 70대 치매 환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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