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캐릭터에 빠져 읽다보면 그 모습은 저럴 것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의 조르바는 나에겐 1964년에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속 캐릭터인 안소니 퀸으로 못박혀 있다. 조르바의 여인 오르탕스의 영화 속 배역은 릴라 케드로바(Lila Kedroba; 1909-2000)다. 그런데 케드로바는 안소니 퀸보다 그 이미지가 약하다. 이 영화 속 오르탕스 역으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케르다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자꾸 케드로바 보다 비르나 리지(Virna Lisi; 1936-2014)를 떠 올린다.
안소니 퀸과 합을 이룬 영화 '25시'의 이미지가 강렬해서일까. '산타 비또리아의 비밀'에서도 봄볼리니 안소니 퀸의 마누라인 로사의 안나 마냐니(Anna Magnani; 1908-1973) 보다 봄볼리니의 속을 태우게 하는 까테리나의 비르나 리지가 봄볼리니 안소니 퀸의 여자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희꿋희끗한 황갈색 머리카락에 키가 작고 몸집이 실팍한 여자가 안짱다리 걸음으로 아장거리며 포플러 밑을 걸어 나왔다. 턱에는 털까지 돋아난 점이 있었다. 쪼그라진 뺨에는 자줏빛 분 자국이 드러나 보였다. 조그만 머리타래가 이마에서 찰랑거리는 폼이 노년에 '레글롱'에 나오던 사라 베른하르트 같았다..."
카잔차키스의 오르탕스에 대한 묘사(이윤기 譯)는 이탈리아 미녀 비르나 리지에겐 맞지 않는다. 근데 왜 자꾸 나는 오르탕스가 비르나 리지에 맞춰지는지 모르겠다. 미녀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싶은 얄궂은 심리일까. 그건 그렇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볼적마다 착각내지는 착시를 안긴다. 오르탕스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저 표현도 예전 느낌과 달리 사뭇 새롭게 다가온다.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