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9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골로새 1:21-23
복음의 소망
지난 8월 14일 토요일에 아이티에 7.2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2000명가량 사망자가 나왔고, 만 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실종자도 수백 명이나 됩니다. 아이티는 아메리카대륙에 속한 섬나라의 절반인데, 국경을 맞댄 도미니카 공화국에 비교하면 숲이 거의 사라진 나라입니다. 연간 2000불도 안 되는 일인당 소득을 올리는 가난한 나라인데, 자주 지진이 일어납니다. 1804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이고, 커피, 목화, 설탕이 주산물이라고 하니 이번 지진을 복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줄 압니다.
아이티보다도 더 가난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탈환하고 탈레반정권을 세웠습니다. 극우 이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여성인권이 몹시 염려가 되는 상황인데, 2001년 9.11 테러의 주동자인 알카에다도 이 나라에서 활동합니다. 미국은 이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은 이번에 철수하게 되었고, 탈레반을 피해서 국외로 망명하려는 난민들의 행령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국이 중심이 되어서 우방국가에 난민수용을 요청하고 있는 현실이고, 한국도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했던 관계로,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던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수백 명 받아들였습니다. 갑작스런 난민들로 유럽 국가들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를 지나 발칸 반도를 거치면 서유럽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교적 잘사는 서유럽 국가들은 난민을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 국가들이니까 난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탈레반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동족끼리 너무 쉽게 살상을 하고 있지만, 기독교 정신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정신이 되면 좋겠습니다. 물론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마찬가지의 무자비한 살상행위가 도처에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것을 크게 반성하면서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가 다른 종교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종교 안에서 표층종교와 내면종교의 싸움이 더 큽니다. 제대로 된 믿음은 그 믿음 창시자의 본정신을 잘 붙잡고 있습니다. 이슬람도 “평화”를 비는 종교로 창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도 “평화를 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총을 들이대는 것은 이슬람 종교의 본정신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여전히 코로나 19와 투쟁중입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백신 패스를 만들었고, 백신접종의무화를 선포하자, 이것을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고 여기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식당에서도 백신접종여부를 검사하라고 하니까, 식당주인이 말합니다. 우리는 손님에게 즐거움을 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지, 백신접종여부를 검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코로나에 걸릴 자유”와 심지어, “전염병에 걸려서 죽을 자유”도 자유의 범주 안에 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럽인이 똑같이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를 지키는 일”에 매우 예민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세 가지 소개드렸습니다. 모두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제가 다시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의 백성이든지,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삽니다.
아이티에서는 재난을 복구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카불공항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이 제공하는 비행기를 타고 망명하려는 소망이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살길이 있다는 소망입니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19도 조만간 통제하게 되기를 온 국민이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9월에는 모든 학교가 대면수업을 하게 될 것으로 희망을 품었었는데, 개학을 앞둔 시점에 불가능해졌습니다.
백신을 더 이상 안 맞으려는 나라에서는 백신이 남아돌고, 맞으려고 하는 나라에서는 백신이 부족합니다. 마음 놓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여행도 가지 못하는 현실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우리 온 인류가 지금 품고 있는 소망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소망”이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망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의 역할은 미래의 목표를 이루는 것 이전에, 현재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에 나오는 골로새의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골로새는 터키 서남부에 폐허로 그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데니즐리라는 대도시 바로 옆에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매우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그 골로새에 에바브라가 교회를 세웠는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짓교사들이 혼란스러운 가르침을 들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정상적인 사람이 왜 빠져들게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빠지는 이유는 서로가 다 생각이 혼란스럽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게 거짓된 티가 크게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한 종교 안에도 서로의 입장을 놓고 얼마나 다투고 있습니까? 같은 교단 안에서도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여성이 목사가 되는 일도 우리 교단(통합)에서 허락이 된 것이 1993년경입니다. 그것도 수년간 투쟁을 벌여서 겨우 얻어낸 결정입니다. 장로교 합동측은 여전히 여성 안수를 불허합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독일 루터교와는 달리 기독교한국루터회에 여성안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안수를 금지하는 교단은 성서를 기준으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감독들이 모두 남자였다고 주장하지요. 하지만, 세상은 시대에 따라 그 가치관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골로새교회의 예를 들면, 그 그릇된 교훈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논리만 내세우는 사람들, 유대교의 전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 자기가 체험한 환상을 기준으로 내세우는 사람들 등등, 저마다 자기만의 기준을 내세우니 골로새교회는 혼란에 빠졌고, 보다 못한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장 9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인데,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지식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둘째, 행동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바라는 선행을 하고,
셋째, 힘을 발휘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에, 그리스 철학을 내세우거나, 유대교 관습을 주장하거나, 자기만 본 환상을 고집하는 것은 “그릇된 교훈”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이 살고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하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런 삶을 “뒤로 물러나서 침잠하는” 삶이라고 그들은 부릅니다.
세 명의 수도사가 한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기도 끝에 저마다 선행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는 서로 반목질시하는 사람들을 평화로 이끌어주는 선행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복되어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분쟁이 있는 곳마다 찾아다녔지만, 동시에 모두를 다 평화롭게 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다가 두 번째 수도사를 찾아갔습니다.
두 번째 수도사는 병자들을 돌보겠다고 결심하고 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수도사가 자기를 찾아올 즈음 그는 이미 지쳐버린 상태였습니다. 돌보아야할 환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기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근처에서 지진도 나고, 또 전쟁도 벌어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막으로 들어 가버린 세 번째 수도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얻었는지 설명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세 번째 수도사는 그릇을 가져와 물을 부었습니다. 잠시 후 물이 잔잔해지자 물속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라고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 뒤엉켜있으면, 자기의 과오를 볼 줄 모른다네.” 기준도 없이, 깊은 묵상도 없이,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만 하면 결국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있어야 하며,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라”(23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과 복음의 소망에 관해서는 그 앞에서 언급합니다. 우리의 악한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21-22절)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는 말이 참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정반대로 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행동 이전에, 생각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거나, 아니면 생각이 없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도 안 해보고, 또 그 생각을 깊이 묵상도 안 해보고, 그저 행동에만 옳기는 일이 결국에는 악행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복음의 소망”이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복음을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죽어라 노력하고, 평가를 받고, 인정을 얻어야만 된다면, 그것은 복된 소식이 아닙니다. 복된 소식이란 부족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나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의 부족을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에 소망두기를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늘날 우리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해결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여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분쟁을 해결하려고 개입했는데, 더 큰 분쟁이 되기도 하고, 백신으로 전염병을 빨리 퇴치할 계획을 세웠는데, 자유를 탄압하는 일이라고 맞서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평화유지 방식은 무기를 많이 소유하고 잘 싸울 줄 알아야 된다는 역설적인 방식뿐입니다. 아이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난 싸움이 싫어 안 싸울 거야!”라고 말하면 얕보고 더 달려든다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평화목교우 여러분,
복음에 소망을 두라는 것은, 극복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인지 모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소망하는 마음이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심을 갖는 것이나, 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마음은, 비록 그 모든 문제들이 당장 극복되지는 못하더라도 그 “소망” 덕분에 절망을 이기게 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마치 세 번째 수도사가 평온해진 물에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보라고 말한 것처럼, 세상은 시끄럽고 분쟁으로 가득하여도, 우리 마음의 소망만큼은 모든 평화로움을 향하여 집중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품은 마음의 소망입니다. 지금 당장 나의 현실이 부족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며,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복음의 내용을 붙잡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에게 바울이 남긴 말처럼 “이 복음은 하늘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것을 깨닫고 그 복음의 소망을 붙잡고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