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 원년) 4월 28일[1] (음력 3월 8일) ~ 1598년 (선조 31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발포만호, 만포첨사,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관직은 정헌대부 삼도수군 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 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
이순신은 1545년 음력 3월 8일 / 양력 4월 1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이름 순신은 삼황 오제중 순임금에서 나온 것인데,
이순신의 형제들 모두 복희씨, 요, 순, 우 임금을 따라
시대순으로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지어졌다.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중종 17년)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동네에서 살았던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징비록》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
이로 인해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무과에 응시, 급제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32세 나이가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이순신의 나이 36세가 되던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이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이순신의 무관 생활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전사 직후인 1598년 12월에 의정부 우의정에 증직되고, 1604년에는 선무일등공신 덕풍부원군에 봉해지고 의정부 좌의정이 가증(加贈)된다. 이때는 이순신을 그렇게 질투하고 시기한 내부의 가장 강력한 견제 세력이었던 국왕 선조가 죽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이순신에게는 1643년(인조 21년)이 되어서야 정부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가 비로소 내려진다. 국란을 자초한 점에서 영락없이 선조를 빼닮은 국왕 인조가 1627년과 1637년에 정묘,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내린 것이니 절치부심의 결의가 작용한 때문인지 심리적인 위안이라도 얻으려 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