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尹澤)은 자(字)가 중덕(仲德)이고 3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7세에 책을 받으면 문득 외워서 윤해(尹諧)가 매번 〈윤택이〉 경구(警句) 외는 것을 볼 때마다 울며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가 바로 너로구나!”라고 하였으며, 조금 자라서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책을 읽으면 통달하고 특히『좌씨춘추(左氏春秋)』에 뛰어났다. 항상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의 ‘천하가 근심하는 것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다음에 즐거워한다.’라는 말을 암송하면서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만만하고 호락호락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충숙왕(忠肅王) 4년(1317)에 과거에 급제하여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교감(校勘)이 되었고 검열(檢閱)로 옮겼다. 나이 45세가 되어 관직이 겨우 9품이었으나 스스로는 재상[宰輔]으로 보았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기도 하였는데, 윤택은 담담하게 처신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뒤에 왕이 연경(燕京)의 저택[燕邸]에 있을 때 윤택이 단기(單騎)로 나아가 알현하였는데, 왕이 한 번 보고 그 재기(才器)를 중히 여겨 아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으니, 그 뜻은 공민왕(恭愍王)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윤택이 절하고 사례하며 말하기를, “신(臣)이 늙었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왕이 서경(西京)에 와서 머물 때 윤택이 검열로서 서경참군(西京叅軍)을 임시로 맡아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 격식에 맞았으므로, 왕이 매번 감탄하며 말하기를, “어질다, 안회(顔回)여!”라고 하였다. 〈윤택의〉 용모가 회회족(回回族)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조서(詔書)가 도착하자 왕이 윤택에게 명하여 읽게 하니, 주변에서 말하기를, “조서를 읽는 것은 본래 내제(內制)와 외제(外制)의 일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참군(參軍)을 양제(兩制)로 삼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었던가?”라고 하고, 드디어 〈윤택을〉 권응교(權應敎)에 임명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서경부윤(西京府尹)으로 발탁하여 임명하려 하였으나, 관품이 부족하여 판관(判官)으로 승진시켰다. 어떤 사람이 윤택이 공손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방하자, 왕이 말하기를, “윤생(尹生)은 충성스러우니 반드시 네가 그릇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충숙왕〉 7년(1320)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되어 전선(銓選)을 맡았다. 왕이 윤택의 아들에게 호군(護軍)을 주려고 하자,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름난 그릇은 지극히 중요하며, 현명하고 공로 있는 자가 오히려 적체되어 있사온데, 감히 사사로이 신의 아들이겠나이까?”라고 하여, 왕이 더욱 중히 여기며 우대언(右代言)으로 전임(轉任)시켰다. 왕이 병으로 눕자 다시 연경의 저택에서 하였던 말을 윤택에게 하니, 윤택이 무릎 꿇고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번민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충목왕(忠穆王) 초에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왕이 훙서(薨逝)하자 민(民)이 공민왕이 돌아오기를 바랐는데, 윤택이 먼저 논의하여 전 밀직(密直) 이승로(李承老) 등과 함께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형제와 숙질(叔姪)간에 왕위를 서로 계승하는 까닭에 어린 임금이 다스림을 보전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이었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이에〉 충정왕(忠定王)이 반감을 품었다가 즉위하게 되자 〈윤택을〉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좌천시켰다.
〈윤택은〉 공민왕 초기의 정사(政事)에서 밀직(密直)으로 들어갔다가 제학(提學)이 되자, 상소하며 건의하였으나, 왕이 윤허(允許)하지 않으므로 결국 개성윤(開城尹)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근신(近臣) 중에 향악(鄕樂)을 원에 바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윤택이 이를 듣고 상소(上䟽)하여 이르기를, “세조(世祖)께서 이미 일찍이 이를 물리치셨는데, 지금 다시 바치면 질책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며, 또 비용을 절약할 것을 상소하니 왕이 깊이 느끼고 받아들였다. 승려 보우(普愚)가 도참설(圖讖說)로 왕에게 말하기를, “한양(漢陽)에 도읍하면 36국(國)이 조공(朝貢)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그 설에 미혹되어 한양에 궁궐을 크게 건축하였다. 윤택이 다시 말하기를, “승려 묘청(妙淸)은 인종(仁宗)을 유혹하여 나라를 거의 뒤엎는 데 이르렀나이다. 그 교훈이 멀지 않거늘, 하물며 지금은 사방에 근심이 있으므로 군대를 훈련하고 선비를 양성하는 것도, 오히려 다 공급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상하게 할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일찍이 「무일편(無逸篇)」을 필사하여 재상에게 줄 것을 명령하고, 윤택을 불러 강론하게 하였는데, 윤택이 이로 인하여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공로를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성왕이 주공을 받아들인 교훈을 본받으시어, 엄격하고 공경하며 〈민심을〉 두려워하소서.”라고 하자 왕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윤택은 또한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본국의 최승로(崔承老)가 성종(成宗)에게 올린 글로 진강(進講)하였다. 당시에 왕이 불교[釋敎]를 깊이 믿어 초연히 세상 만물 밖에 떨어져 있으려고 생각하였다. 윤택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위로는 종묘(宗廟)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生靈]을 보호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필부(匹夫)를 본받아 윤리를 폐하고 끊는 일을 하시려 합니까? 만일 신의 말씀을 들으신다면, 공자(孔子)의 도(道)가 아니면 불가할 것이니, 잘 생각해보소서.”라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더하여 〈윤택(尹澤)을〉 치사(致仕)하게 하자, 말하기를, “제가 의릉(毅陵, 충숙왕)의 지우(知友)를 두터이 입었으나 그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였으니, 화공(畵工)에게 그 분의 어진(御眞)을 그려 신(臣)에게 하사하여 주시면 촌장(村莊)에서 밤낮으로 바라보며 사모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에 기근이 거듭 닥쳐오고 덧붙여 전쟁까지 겹치니 민(民)의 고통이 극심합니다. 전에 이미 남경(南京)의 궁궐을 지었는데, 이제 다시 백악(白岳)의 궁궐을 짓는다면 민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을 쓰는 것은 정치의 근본이므로, 청컨대 어진 이를 들이고 불초(不肖)한 자는 물리치소서.”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릇 일의 득실(得失)은 임금께서 비록 그 연유를 환하게 알고 계신다고 해도 대신(大臣)에게 맡기시고, 즉시 이루어지지 않아도 변통(變通)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조금의〉 겨를이라도 얻는다면, 피해가 생겨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술을 하사하자 윤택은 한 번에 큰 잔으로 세 번을 마셨는데도 기색이 태연하였다. 시중(侍中) 홍언박(洪彦博)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윤공(尹公)이 이같이 우직하고 곧다고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나는 미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윤택이 비록 치사하였으나 스스로 선왕의 부탁을 고려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혹은 간절하고 정직하니 왕도 또한 후하게 용납하여 주었다. 〈공민왕〉 12년(1363)에 또 찬성사(贊成事)를 더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이듬해에 병이 나서 금주(錦州)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여 산수(山水)와 함께 스스로 즐기며 살다가 7년 만에 죽으니, 나이가 82세였고 시호(謚號)는 문정(文貞)이다.
〈윤택이〉 병이 나서 위독해지자 자손 앞에서 훈계하며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한미(寒微)한 문지(門地)에서 관직에 나아가 청백(淸白)함과 충직(忠直)함으로 일시(一時)에 이름을 얻으셨다. 내가 밤낮으로 그 뜻을 잇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그릇되게 임금께서 알아주시어 총애와 녹봉이 넘쳤고 나이도 80세를 넘겼으니 이 모두가 조상이 남기신 바이다. 내가 죽어 장사지낼 때는 불교의 예법[浮屠法]을 쓰지 말라.”라고 하였다. 윤택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무덤에 가서 제사지내면 반드시 곡(哭)을 하고 애도를 극진히 하였다. 방책(方策)에서 부자(父子)의 정(情)을 쓴 것을 보면 일찍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주머니 하나를 차고 다니다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거기에 담아다가 어머니께 갖다드렸다. 일찍이 연경(燕京)을 여행 갔다가 길에서 금 100냥(兩)이 떨어진 것을 보고 그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며 지키고 있자 주인이 울며 사례하고 갔다. 평생에 베옷과 해진 이불로 살았으며, 조석(朝夕)의 끼니[饔飱]가 가끔 떨어지기도 하였으나 편안하고 태평하였다. 스스로 호(號)를 율정(栗亭)이라 하였으며, 공민왕이 손수 초상화를 그려주고 또 ‘율정’이라는 2개의 큰 글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저서로는 『율정집(栗亭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아들은 윤귀생(尹龜生)·윤봉생(尹鳳生)·윤동명(尹東明)이다. 윤귀생은 따로 열전(列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