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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기기 백성호의 예수뎐2
자식 죽음에 그저 슬퍼했다…‘평범한 엄마’ 마리아의 눈물
카드 발행 일시2023.07.08
에디터
백성호
백성호의 예수뎐2
관심
(41) 예수의 눈과 마리아의 눈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는 빌라도 총독의 관저를 나섰다. 좁다란 골목길 양옆에는 예수의 재판을 지켜보던 유대인들이 길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예수를 향해 야유와 멸시를 퍼부었다.
예수는 그 사이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예수의 몸은 이미 상해 있었다. 동물의 뼈와 쇳조각이 달린 채찍이 몸을 휘감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런 피투성이 몸으로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떠났다.
십자가를 짊어진 채 총독 관저를 떠난 예수는 골목의 모퉁이를 돌면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났다.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가 마리아를 만났던 지점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 교회에 새겨진 조각상이다. 백성호 기자
나는 빌라도 총독의 관저 앞 골목길을 따라 내려갔다. 발밑의 돌들. ‘예수는 이 돌의 어딘가를 디뎠겠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비틀대면서 걸었겠지.’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는 총독 관저 앞 골목의 모퉁이를 돌았다. 거기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누구였을까.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그녀는 10대 나이에 예수를 잉태했다. 어린 나이에 성령의 힘으로 아이를 잉태하는 초월적 사건을 온몸으로 뚫고 왔다.
마리아의 눈앞에 자신의 몸으로 낳은 자식이 서 있었다. 아들의 어깨에는 십자가가 얹혀 있다. 한두 시간 뒤 자식은 그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었다.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는 아들. 마리아의 눈앞에는 감당하기 힘든 비극적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마리아는 울었을 것이다. 나는 ‘마리아의 눈물’을 묵상했다. 동양의 어머니든, 서양의 어머니든 똑같지 않을까. 사형장을 향해 발을 떼는 자식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리라. 마리아의 어깨는 얼마나 들썩였을까. 마리아의 얼굴은 눈물로 젖었을 것이다. 그녀의 몸과 마음, 어디 하나 피눈물이 솟구치지 않는 곳이 있었을까.
성전경비병에게 잡혀가 밤새 고문을 당하고, 총독 관저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예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70㎏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골고타 언덕까지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는 수차례 쓰러졌다. 백성호 기자
당시 유대 여자들은 초경을 하는 나이가 되면 결혼을 했다. 마리아도 결혼 적령기 때 배 속에 예수를 가졌다. 그러니 열셋에서 열다섯 살쯤 되지 않았을까.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30대 초반의 나이였다면 마리아는 40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젊은 엄마’다. 그러니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의 젊은 마리아가 비현실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40대 중반의 엄마가 십자가를 짊어진 30대 초반의 아들을 바라본다. 나는 골목 어귀에 서서 ‘그들의 눈’을 생각했다.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눈.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는 예수의 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예수는 말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을까. 예수가 말하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 나라를 깊이 깨닫고 있었을까. 그래서 간장을 끊어내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니면 마리아도 다른 이들과 똑같은 엄마였을까. 자식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엄마였을까. 사실 예수의 제자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예수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마리아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비록 성령으로 잉태하는 신비를 겪었다 해도 말이다.
예수가 재판을 받았던 빌라도 총독의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는 직선 거리로 800m였다. 야트막한 오르막이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에는 지금도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성호 기자
만약 마리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예수의 나라’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면, 성경에는 그에 대한 마리아의 말이 몇 마디라도 기록돼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리아의 ‘평범한 아픔’에 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 아픔은 우리 모두가 갖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흘리는 눈물이고, 우리 모두가 토하는 비명이다.
그 모두를 우리와 공유하는 마리아가 내게는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죽으러 가는 자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가 내게는 ‘더 큰 마리아’로 다가온다.
짧은 생각
처음 종교가
생겨날 때는
생명이 있습니다.
마음의 이치,
인간의 이치,
삶의 이치,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를 관통하는
생명의 강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치를 마시며
예전에 몰랐던
평화와 안식을
얻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면서
사람들은
생명의 이치를
수학 공식처럼
공식화하고 도식화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의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공식화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더 쉽지 않을까.
그런 의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예수의 메시지에 담긴
이치의 강물을 마시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내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
돼 봐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돼야 합니다.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통하고 흘러야 합니다.
깊은 궁리와
진지한 묵상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구절을
도식화하면
수월해집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고,
신앙을 가져라.
그럼 당신은
이미 예수 안에
거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도
당신 안에 거한 것이다.”
이렇게
간단해집니다.
이걸
한 번 더
도식화하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되는 겁니다.
종교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냐고요?
종교가
처음 생겨날 때
흘렀던
생명의 강이
말라버립니다.
정확히 말하면
강은 여전히 흐르지만,
그 강물을
마시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종교의 껍데기만 먹고,
종교의 알맹이는
먹기 어려워진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감리교 신학대의
박종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가 뭔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게 된다.
그게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고백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통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통함을 위해서는
신앙을 도식화하고
공식화해선
곤란합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마케팅을 위해선
플러스가 되겠지요.
그러나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마이너스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종교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왜
이 땅에 왔는가,
기독교는
왜 생겨났는가.
첫 물음 속에
늘
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에디터
백성호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5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