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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굿
박 완 서
나는 소년이 내 동생과 비슷한 보통 아이인 데 적이 실망했다.
“인사드려라. 오늘부터 너를 맡아줄 선생님이시란다.”
소년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어머니 옆에 앉더니 밝게 웃으며 나를 빠안히 바라다보았다. 나는 “이리 온”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내 옆자리로 옮겨와 앉더니 자연스럽게 나에게 몸을 기댔다.
나는 소년의 부드럽고 정갈한 곱슬머리를 빗질하듯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너무 귀여워하다가 버르장머리 없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에게 한 말이었고, 또 별로 듣기싫게 한 말도 아니었는데도 소년은 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보통 아이일뿐더러 다루기 쉬운 아이구나 하는 짐작이 나를 맥 빠지고 짜증나게 했다. 부인은 차를 날라온 아줌마에게 소년을 데려다 씻기고 간식을 주라고 일러서 소년을 내보냈다.
천장이 드높은 넓은 홀에 부인과 나만 남았다. 부인이 “들우” 하면서 자기가 먼저 차를 들었다. “들우” 하는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어중간한 말이 귀에 심히 거슬려 들릴 만큼 부인은 젊어 뵀다. 나에게 이 집에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준 친구 말대로라면 부인에겐 소년이 막내아들일뿐더러 유치원 다니는 외손자까지 있다니 우리 어머니보다도 나이가 많을 수밖에 없겠는데 나는 그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입주(入住)는 싫다고 했다구?”
“네, 실은 부모님께선 반대하시는 걸…….”
“아, 알았어요. 괜찮아요. 시간제라도 상관없으니까. 뭐 우리 애가 공부가 남만 못해 가정교살 물색한 건 아니라우. 그냥 내버려둬도 죽 일이등은 맡아놓고 하는걸, 뭘. 다만 걱정은 누나들 틈에서만 자라서 너무 계집애 같은 게 탈이라우. 그러니까 선생님 노릇보다는 형님 노릇을 해주는 셈 쳐요. 일부러라도 거칠게 다루도록 해요.”
“거칠 게라뇨, 어떻게?”
나는 부인의 저의를 몰라 맹꽁이같이 맹한 질문을 더듬거리며 했다.
부인이 계집애같이 드높은 소리로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가 눈부셔 눈을 껌벅이다 못해 시선을 창 밖으로 비꼈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요. 공부하는 짬짬이 집의 동생들한테 해주듯이 해주란 말예요. 남자형제들끼린 보통 거칠게 놀잖아요. 레슬링이니 권투니 하면서 치고받고 말예요.”
일요일을 빼고 매일 두 시간씩 봐주고 한 달에 이만원씩 받기로 하고 나는 고용됐다.
성북동 골짜기에 자리잡은 고급 주택가의 한낮은 묘지처럼 고요했다. 우거진 녹음 사이로 드문드문 상반신만 드러낸 흰 건물도 주택으로서의 인기척이라곤 없이 타인의 간여를 철저하게 거부한 채, 정적과 장중미만을 풍기는 게 꼭 비석 같아 내 그런 느낌을 더욱 짙게 했다.
나는 힘에 겨운 소임을 다한 것처럼 다리가 약간 후들댔다. 그러면서도 하다못해 돌멩이라도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쳤다. 그러나 이 주택가의 토로는 모래알 하나 없이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어 나는 그런 충동까지를 참아야 했고 그게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나는 내 내심의 혼란을 처리할 방도를 몰라 “제기릴” “제기랄” 투덜대면서 거칠게 땅을 걷어차며 걸을밖에 없었다.
내 혼란은 부잣집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품었던 선입관이 보기 좋게 빗나간 데서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나는 일찍부터 부잣집이라기보다는 부잣집 아이라는 것에 대해 단순하고도 확고한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이란 모조리 문제아다 하는 게 그거였다. 내가 그런 고정관념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아,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아버지에겐 문제아를 자식으로 둔 부자 친구도 부랑아 때문에 속을 썩이는 부자 친척도 없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신문 사회면이나 주간지 같은 데서 부랑아, 패륜아들이 일으킨 사건 기사를 읽기를 좋아했고, 읽고 나선 “부잣집 자식새끼들이란 이렇다니까” 하며 재미나하고 고소해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즐겁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고, 마치 장사가 잘 돼 한잔하고 들어올 때처럼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정말 때때로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는 문제아들이 부잣집 출신이었는지, 지금 와서 그걸 확인할 길은 없지만, 나도 어느 틈에 아버지를 따라 부자들이란 으레 못된 자식을 둔 것으로 단정하고, 고소해하고 재미나하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또 부자들이 자식을 어떻게 웅석받이로 버르장머리 없이 키워 망쳐놓나 하는 실례를 얼마든지 들어서 우리를 웃기기를 즐겼다. 아버지에겐 절대로 부자 친구도 부자 친척도 없었으니 아마 그건 다 아버지가 적당히 꾸민 이야길 게다. 아버진 왜 그랬을까. 아버지에겐 이야기를 꾸미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진 장사꾼보다는 소설가가 될걸 그랬나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문제아여야 할 소년이 조금도 문제아스럽지 않게 굶으로써 나를 속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식품점이 있다. 가게는 작지만 번창하는 편이다. 아버지는 방금 배달을 다녀와서 콜라병을 자전거 꽁무니에서 내리고 있는 점원애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며 환타를 한 상자 새로 실어준다.
“온석아, 좀 빨랑빨랑 다녀와라! 너 부려먹다 화퉁 터져 죽겠다. 전화통에선 연방 불이 나는데 젠장! 배달 나간 놈은 함흥차사니 네놈 믿고 어디 뮐 해먹겠냐, 온석아!”
점원애는 대답 없이 씩 웃더니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씽 달린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식품점을 돌아 들어가서 서너 집이나 더 들어가야 집인데도 나는 국민학교 적부터의 습관으로 가게 앞을 지날 땐 으레 그렇게 외친다.
“오냐, 짜아식, 인제 오냐?”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우선 내 얼굴을 보고는 티셔츠 깃에 달린 내 배지를 본다. 서울대 배지다. 난 KS마크인 것이다. 내 배지에 머무를 때의 아버지의 눈은 알사탕을 핥는 어린애의 혀처럼 츱츱하고 황홀하다. 아버지와 내 배지와의 황홀한 교접의 시간, 나는 소외된 채 멍하니 서 있다.
“저, 어제 말씀드린 그 가정교사 자리, 방금 정하고 오는 길이에요. 한 달에 이만원이면 어디예요.”
“그래, 짜아식, 동생들 공부나 봐주라니까. 동생들 봐주면 인마, 애비가 네 용돈 안 줄까봐서 그래.”
그러면서 괜히 못마땅한 척 입 속으로 몇 마디 더 중얼대곤 돌아선다. 그러나 아버진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비록 구멍가게를 하고 있을망정 너희들 학비쯤은 문제없다고 툭하면 으스대기를 좋아했지만 올해 내가 대학교, 동생들이 고등학교 중학교로 삼 년 터울인 삼형제가 일제히 하나씩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학비 부담의 과중으로 아버지의 어깨가 휘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다.
집에 들어가서 나는 어머니에게 좀더 자세히 내가 맡게 된 소년과 그의 집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부잣집 애들에 대한 그런 지독한 편견은 없었으나 그 대신 부잣집 어머니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아 있었다. 중학교 입시도 없는데 그까짓 국민학교 아이들 과외공부까지 시켜가며 시험 점수나 오르라고 달달 볶다니 쯧쯧 하며, 그런 어머니가 오죽한 어머니겠느냐는 투로 우선 경멸부터 나타냈다.
그건 편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월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이런 우월감은 우리 형제들이 과외공부라곤 모르고도 공부를 잘한 데서 비롯돼서 내가 마침내 KS마크를 달게 되자 한층 공고해졌다. 그래서 어머니 얼굴엔 그 나이에 그만큼 생활에 시달린 부인네들에겐 좀처럼 희귀한 긍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엉뚱한 긍지가 어머니의 찌든 모습과 제대로 조화를 이룰 리 없어, 마치 서투른 화장처럼 어머니의 피부에 더덕더덕 얼룩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맡은 소년의 어머니는 학교 성적에만 열이 난 그런 오죽잖은 어머니 같지는 않더라고, 공부보담 레슬링이나 권투나 하고 놀아주라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역력히 실망한 것 같았다.
“아니, 뭐라구? 서울대 학생을 뭘로 보았길래 즈네들 장난 상대로 고용하려고 그래. 돈이면 단가? 아니꼽게스리.”
그렇게 분해하면서도 그만두라는 소리는 안 했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이 허세가 덜했다.
이런 양친을 가진 나는 나대로 부자들의 생태에 대해서 만만찮은 날(刃)을 세우고 있음직했다. 부자들의 점잖고 우아하고 견고한 생활의 외피(外皮)를 사정없이 절개하고 그 속에 감추어진 허위를 보기 위한 날을.
그러나 소년의 집에 드나드는 날이 거듭되고 소년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됨에 따라 내 날은 자연스럽게 그 집의 유족한 생활양식 속에 함몰됐다. 내 날에 저항해오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이 문제아가 아닌 것처럼 그 집의 부(富)도 내 날에 저항해올 만한 아무런 문제성도 없이 다만 쾌적했다.
나는 소년을 가르치러 저녁에 가기로 되어 있고 나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소년을 시중드는 인상 좋은 아줌마였지만, 문을 들어서자마자 “선생님” 하며 손에 매달리는 건 소년이었다. 소년은 나를 잘 따랐다.
나는 소년을 좀 거칠게 다루라는 부인의 말을 잘 명심해서 툭 하면 소년에게 장난을 걸었다. 슬쩍 딴죽을 결어 잔디 위에 메다꽂으면 소년은 오뚝이 같은 탄력으로 발딱 일어나 대신 나에게 딴죽을 걸어오고, 나는 소년을 부둥켜안은 채 넘어져주고, 그럼 우린 넓은 잔디를 엎치락뒤치락 레슬링 비슷한 흉내를 내면서 마냥 데굴데굴 굴렀다. 손질이 잘된 잔디 위에 몸을 뒹굴리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길까. 그러다가도 재빨리 소년으로부터 도망을 쳐 “나 찹으면 무둥 태워주지” 하며 넓은 잔디의 외곽을 둘러싼 숲속으로 도망쳤다. 마당에 숲이 있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정정한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가 하면 꽃이 피는 키 작은 떨기나무도 있었다. 나는 기분좋게 피로할 만큼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도망치고 숨고 하다가 소년에게 잡혀주었다. 그러고는 무등을 태운 채 현관을 들어섰다. 소년은 쾌활하고 자랑스럽게 웃으며 엄마 나 좀 보라고 외쳐댔다. 부인은 아름답고 고상한 홈웨어를 입고, 이층으로 통하는 붉은 융단이 깔린 우아한 계단이 보이는 넓은 홀에서 혼자 신문이나 책을 읽고 있다가 “저런, 버르장머리 좀 봐” 하며 내게 미안해했다. 그제서야 소년은 몽그적대며 내 어깨에서 내리고 우린 나란히 계단을 올라간다.
그 시간에 부인은 꼭 집에 있었다. 우리 어머니 말대로라면 부잣집 여편네들이란 소위 유한 부인들로서 매일같이 집을 비우고 돈지랄이나 싸다니느라 집안 꼴, 자식 꼴을 엉망으로 만들어야 할 터인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부인은 내가 소년을 가르치는 동안 갓 짜낸 듯 신선한 오렌지주스나 진기한 과일을 모양 있게 썰어 담은 과일 칵테일 같은 걸 손수 갖다놓고 나갔다. 나는 과일이란 본디 타고난 제 모양이 가장 아름다운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갖은 과일을 전연 새로운 모양으로서 재구성해서 깜찍한 조형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나는 너무 아까워서 차마 입에 넣을 수조차 없었다.
내가 소년을 가르치는 일을 끝내고 계단을 내려올 때쯤엔 홀에 이 집 식구들이 다 모여 있었다.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고, 소년의 누나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을 적도 있었고, 때로는 출가한 누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제법 떠들썩하니 희희낙락할 때도 있었다.
이런 일가 단란의 시간에는 으레 소년의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좀 야한 빛깔의 가운을 결치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시종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소년의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치는 걸 피해 빨리 홀을 가로질렀다. 딱 한 번 시선이 마주친 일이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내가 긴장한 것과는 딴판으로 그는 부드럽고 만족한 웃음을 띤 채 그냥 나를 무심히 보아 넘기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사를 하려다 만 채 한동안 무안해할밖에 없었다. 소년의 아버지뿐 아니라 그 시간에 거기 모인 식구들은 다 그랬다. 나에게 아는 척을 해 내가 그 단란의 자리에 끼어들까봐 꺼려서 그러는지 내가 정말 안 보이는지 다 못 본 척했다. 그래서 나는 미풍처럼 살짝 그곳을 지나야 했다. 그런 일에도 곧 익숙해졌다. 다만 한 가지 두고두고 신기한 게 있었다.
이 집을 소개해준 친구 말대로라면 소년의 아버지는 검찰청에 다니고 있을 터였다. 직위 같은 건 말 안 해줬지만 검찰청이란 어감이 강요하는 외구(畏懼)와 그는 조금도 상관이 없어 뵀다. 그냥 식구들에게 할 노릇을 충분히 하고 있는 가장다운 만족스러움과 기품이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에겐 그런 것까지가 신기했다. 나의 아버진 집에서 아버지 노릇을 할 때도 꼭 장사꾼 티를 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내놓을 때는 그까짓 콜라 한 박스 팔아야 몇푼 남는 줄 아느냐, 이렇게 헤프게 살림하다간 곧 밑천 들어먹고 여러 식구 거지 되기 알맞다고 공갈을 쳤고, 우리가 학비를 달래도 너 이놈들 에누리를 얼마나 붙여먹었냐고 꼬치꼬치 따지고 의심을 해대고 나서도 으레 몇 푼씩 깎아서 돈을 내놓곤 했다.
이를테면 우리집의 생활과 우리 아버지의 직업은 두 톱니바퀴처럼 엇물려 있어서 서로 쇳소리를 내면서 쇳가루를 묻혀가면서 힘들게 어렵게 돌고 있는데 이 집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 이 집 가장의 직업을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이 집의 부와 관직과를 연결지어 생각했었는데 어느 틈에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천박한 놈이라고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 식구들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대개 빛깔 고운 음료와 모양이 아름다운 케이크 과일 등을 들고 있었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아이들까지도 자신에 넘쳐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유로워 보였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본보기를 바라보듯 부럽게 바라보았다. 부(富)야말로 사람이 지녀야 할 최상의 미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점점 내 집의 구질구질함이 싫어졌고, 식구들의 상스러움이 짜증이 났다. 아버진 겉보기보단 예민한 데가 있어서 “너 용돈이나 좀 벌게 됐다고 애빌 우습게 알기냐” 하면서 나에게 알밤을 먹이고 섭섭한 듯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선생님, 잠깐만.”
어느 날, 소년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려는 나를 부인이 불러 세웠다.
“넌 먼저 올라가 있거라. 엄만 선생님하고 잠깐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는 첫날 이후 처음으로 부인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재가 오늘 학기말 시험지를 받아왔더군요.”
“그래서요?”
“국어를 형편없이 했더군요. 92점이던가, 아마.”
“그만하면 괜찮잖습니까?”
“한 반에 100점짜리가 열두 명씩이나 된다는데두요?”
부인이 기가 막힌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찬물이라도 끼얹힌 듯 내가 이 집 가정교사일 뿐이라는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뭐 그까짓 점수에 열이 나서 이러는 줄 알아요? 아이들이란 으레 실수도 좀 하게 마련이지만 이번 실수는 그게 아니고 순전히 선생님 실수더군요. 앞으로도 이런 실수가 있으면 곤란해서 내 좀 주의를 주려고.”
부인은 92점짜리 시험지를 내 앞에 펼쳐놓았다. 나란히 두 개가 틀렸는데 다 ‘그리운 노래’ 라는 단원에서 출제된 문제였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라는 보기가 나와 있고 보기의 노래 중 ‘작년에 간 제비’ 는 어떤 뜻으로 씌었느냐는 문제와 ‘다시 찾아온다’는 무엇이 찾아온다는 뜻이냐는 두 문제였다.
사자택일 문제로서, 정답은 하나씩 작년에 간 제비는 ‘빼앗긴
조국’ 에, 무엇이 찾아오느냐에는 ‘조국의 광복’ 에 각각 ○표를 해야 하는 건데 소년은 정답에도 ○표를 하고, ‘제비’ 니 ‘희망’이니 ‘작년 봄의 추억’ 이니 하는 함정에도 ○표를 해서 틀려 있었다.
나는 흥분을 억누르고 될 수 있는 대로 찬찬히 대답하였다.
“글쎄요, 점수를 염두에 두시지만 않는다면 이게 뭐 큰 실수가 되겠습니 까?”
“그러니까 우리 애 실수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선생님이 그러셨다면서요. 아무리 참고서엔 그렇게 돼 있더라도 작년에 간 제비를 굳이 빼앗긴 조국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요. 네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고요.”
“네, 그랬습니다. 이 동요는 우리 부모님 적부터 부르던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뜻도 쉽고요. 아이들이 우전 이 노래를 즐겨 부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란 천성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노래를 부르면서 어떤 공상의 나래를 펴든 우리 어른들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일제(日帝) 하도 아닌데 구태여 작년에 간 제비를 빼앗긴 조국이라고 규정지을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저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구속하는 것은 어떠한 일도 아이들에게 무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아이들에게 지금부터 조국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주는 것도 무익하다 이 말이군요.”
“이름까지 일본식으르 갈아야 했던 일제시에 이런 고운 우리말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 것만도 그 시절 아이들의 훌륭한 애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이런 고운 노래를 통해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익히고 차츰 그 말이 나타내는 자연이나 사물 ― 제비니 버들잎이니 고향의 봄이니를 사랑할 줄 알면 그게 애국이지 별게 애국입니까.”
나는 좀 흥분하고 있었지만 할 말은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인이 느닷없이 드높은 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 소리에 의해 자신이 무참히 헐벗기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수치감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리고 언제고 나트 한번 이 여자를 그렇게 웃어줄 수만 있다면 목숨이 몇 년 줄어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고지식한 복수에의 염원으로 몸을 떨었다.
“주제넘게 굴지 말아요. 누가 요즘 대학생보고 애국하는 법 가르쳐 달랠 사람 없으니까. 차라리 도둑놈보고 집 지키는 법을 가르쳐달래는 게 낫지. 공부나 제대로 가르칠 생각해요. 조금도 어려울 게 없을 텐데. 교과서나 참고서에 조리(調理)해놓은 걸 그대로 우리 애에게 먹여주는 셈만 치면 될 텐데. 학생이 조리까지 할 생각일랑 말아줘요.”
어느 틈에 내 호칭은 선생님에서 학생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이제 이 집 가정교사 노릇을 그만둘 테니까. 나는 딴 이유로 몹시 초조했다. 이왕이면 나는 이 여자의 오만한 콧대를 푹 꺾어놓을 수 있는 짧고도 결정적인 웅변을 한마디 내뱉고 명배우가 무대를 퇴장하듯이 집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짧고도 멋있는 한마디를 도무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멋있는 한마디는커녕 내일모레로 박두한 이 집에서의 첫 보수를 받을 날짜와 이만원이란 액수가 머릿속에서 벌떼처럼 어지럽게 윙윙 댈 뿐이었다.
내 첫 보수는 나뿐 아니라 우리 온 집안의 관심사였다. 모두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고 뭔가 조금씩 기대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노골적으로 구체적인 요구를 해왔다. 큰동생은 싸구려라도 좋으니 기타를 사달랬고 막내동생은 빵집에 가서 빵을 실컷 먹여주고 덤으로 극장 구경까지 시켜달랬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은근히
“너 첫 월급 타면 아버지 섭섭잖으시게 담배라도 한 보루 사다드려라. 백원짜리 말고 백오십 원짜리로. 알았지?”
아버지는 또 아버지대로
“너 인석 돈 타서 쓱싹하면 안돼. 딴사람은 몰라도 느이 엄만 구리무라도 한 통 사다줘. 여자들 소갈머리란 그렇지 않은 거야. 인석아, 알았쟈?”
그러나 이건 두 분이 각각 뒷구멍으로 한 소리요, 두 분이 합의한 당당한 요구는 이만원 중 만원은 등록금으로 매달 저금을 하라는 거였다. 이렇게 우리 식구들은 내 이만원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내 이만원은 엿가락처럼 얼마든지 늘어나는 이만원인 줄 알고 있었다. 나도 그놈의 이만원 때문에 이 집을 분연히 떨치고 나가면서 해야 할 한마디 말도 생각해낼 수 없었고, 그 맞춤한 시간도 놓치고 말았다.
마침 소년이 계단 위에 나타나 짜증을 냈다.
“엄마, 선생님하고 얘기 그만 해. 오늘 선생님하고 할 것 많단 말야.”
“그럼 선생님, 올라가보시죠.”
부인은 학생을 다시 선생님으로 승격시키며 부드럽고 너그럽게 웃었다.
나는 비실비실 이층 계단을 밟았다. 그까짓 것 내일모레까지만 꾹 참자고 생각했다.
마침내 내일모레가 됐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부인은 여전히 손수 과일과 주스를 갖다주었고 내가 들어가고 나갈 땐 꼭 계단이 보이는 홀에 있었는데도 내 손에 돈봉투를 쥐여줄 기색이란 전연 없었다. 다시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이 나에겐 못 견디게 길게 느껴졌고, 이만원이란 돈 생각 외에 딴생각이란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치사한 노릇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일 지겨운 건 밤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식구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였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부인이 나를 불렀다.
“보수를 드릴 날이 지났는데.”
“네, 벌써 그렇게 됐던가요?”
나는 태연히 딴전을 부렸다.
“그런데 어떡 헌다·….”
부인이 난처한 듯 눈살을 모았다. 나는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걸 느꼈다:
“우린 해가 진 후엔 절대로 돈 지불을 안 하기로 돼 있어요.”
“네?”
나는 부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해 떨어진 후 금전 지불을 하면 영락없이 손재수가 끼거든요. 그래서 우린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은 사위를 해왔다우. 시체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웃을지 모르지만 돈푼이나 지니고 살려면 누구나 그만 사위는 하는 거라우. 그러니까 수고스럽지만 낮에 들러줘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부인이 어찌나 당당하게 하는지 가난뱅이가 줄곧 가난뱅이일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밤의 금전거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날 소년을 가르치는데 바른생활 책인가에서 남이 장군 얘기가 나오니까 소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선생님, 우리집에 남이 장군 할머니가 다니시는데 아주 무서워요. 툭하면 엄마 아빠한테 호령을 하고 야단을 치고, 그럼 엄마 아빤 굽실굽실하면서 뭐든지 그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하셔요.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보다 더 으스대요. 그래도 난 안 무서워요. 나한테는 아주 잘해주거든요. 그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나도 그 할머니가 점지해줬대요. 선생님, 점지가 뭐죠?”
소년의 말은 황당무계한 것 같았으나 뭔가 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점지란 부처님이나 신령님이 사람들에게 자식을 갖게 해주는 걸 말한다고 했더니, 소년은 그럼 아기가 생겨나게 하는 데 아버지가 하는 일과 신령님이 하는 일이 어떻게 다르냐고 꽤 심각하게 물었다. 나는 요 또래의 소년과 이런 문제를 어느 만큼 이야기해야 될지를 몰라 중학교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얼버무렸다.
그렇지만 나는 소위 남이 장군 할머니와 이 집과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을 누를 수 없어 소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남이 장군 할머니란 이 집에 무상출입하는 단골 무당의 호칭인 것 같았다. 소년은 일 년에 한 번 자기 생일날 남이 장군 할머니네를 간다고 했다. 양력 생일날은 집에서 손님을 청해 생일 파티를 서양식으로 하고, 음력 생일날은 아침 일찍 거기 가서 생일 치성을 드리고 아침밥을 먹고 온단다. 그 집에는 여러 신령의 화상이 모셔 있는데 그중 무섭게 생긴 이가 남이 장군 화상이고 그 할머니도 딴 신령보다 남이 장군이 지폈을 때 제일 영검해지기 때문에 남이 장군 할머니라고 한다고 했다. 소년은 또 자기를 점지한 건 남이 장군 할머니네 남이 장군이 아니라 칠성님이라고도 했다. 그 집엔 별의별 신령이 다 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우리 남이 장군 할머니는 나도 점지해줬지만 우리집 재산도 맨날 점지해주나봐요. 그 할머닌 우리 엄마한테 돈을 많이 받고도 하나도 안 고마워하고 ‘오냐, 되로 받고 말로 돌려주마. 너희들이 이만큼 사는 게 다 뉘 덕인 줄 아느냐’ 한다니까요.”
하며 재미있다는 듯 깔깔댔다.
나는 그 다음날 낮에 돈을 받으러 갈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참고 안 갔다. 참을 때까지 참아볼 터였다. 돈을 타면 뭘 해라, 어떻게 해라 하고 그렇게 미리부터 보채던 식구들도 돈 타는 날로 되어 있는 날부턴 일체 그 돈에 대해선 함구들을 하고 내 거동만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혼자서 다 써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상태가 도무지 싫었다. 그렇다고 여직껏 돈을 못 탔다고 실토를 하기도 싫었다.
밤에 공부를 끝내고 나오려는데 홀에서 부인이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
“왜 낮에 들르면 보수를 드리겠다는데 안 들러요?”
부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생글대며 면구스럽도록 나를 빠안히 바라다봤다. 나는 그 동안의 내 구질구질한 고민을 부인이 모조리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얼굴을 붉혔다.
“돈이 퍽 아쉬울 텐데 왜 허셀 부리는 거죠? 설마 취미 삼아 우리 앨 가르치러 다닌다곤 못 할 덴데. 금전 거래는 분명히 매듭져두는 게 상책이에요. 없는 사람일수록 제 몫, 저 찾아먹는 것 갖고도 괜히 점잔을 빼며 미적미적 미루기를 좋아하니, 참.”
혀를 쯧쯧 차더니 느닷없이 그 깔깔거리는 드높은 웃음을 웃었다. 그 웃음이 다시 나를 헐벗기기 시작했다.
아아, 이 비참함. 나도 이 여자를 한번 저렇게 웃어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그까짓 거액 이만원과 바꾸리라. 드디어 버스값도 떨어진 날, 오후 두시쯤 나는 성북동을 찾을 밖에 없었다. 늘 문을 열어주던 젊은 아줌마가 반색을 하며
“어마나, 선생님도 굿 구경 오셨군요!”
“굿 구경이라뇨?”
“그럼 모르고 오셨군요. 오늘이 이 댁 재수굿날이에요. 거의 매달 하는걸요, 뭘. 지금 우리 남이 장군 할머니, 사슬 세우기를 하는데, 돈 더 우려내려고 어떻게 엉큼을 떠는지 볼 만해요.”
나는 굿이라는 소리에 호기심이 동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딱 한 번 할머니를 따라 할미당에 굿 구경을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어린 내가 받은 인상은 등골에 소름이 돋게 외경스럽고도 한편 흥겹고 신바람나는 거였다. 나는 아직도 퇴색한 신령들의 화상 앞에 차려놓은 울긋불긋한 종이꽃 색떡 떡시루 각종 유과 과물 등과 함께 비단옷 위에 남색 전복 같은 걸 입고 자지러진 풍악 소리에 맞춰 빠르고 격렬한 춤을 추던 무당의 모습을 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건 밑도끝도없는 단순한 기억이지만 할미당이 있는 고풍스럽고 퇴색한 마을과 떼어놓고는 떠올릴 수없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 세련되고 호사스런 서구식 주택에서 하는 그 짓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디서 하고 있습니까?”
“홀에서요.”
응접실과 거실은 따로 있기 때문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이층 천장으로부터 늘어져 있고, 그랜드피아노가 있고, 군데군데 소파가 있고, 벽에는 적어도 백 호 이상의 추상화가 즐비하니 걸려 있고,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 것 외에는 몇십 명이 춤이라도 출 수 있는 거울 같은 마룻바닥이 그대로 비어 있는 넓은 방을 이 집에선 그냥 홀이라고들 부른다.
홀이 넓어서 그런지 굿을 위한 전물상(奠物床)은 자개상을 이어서 놓고, 바나나에 파인애플까지 있는데도 생각보다 초라해 보였다. 신령님의 화상이 모셔져 있어야 할 자리에 자리잠은 붉은 물감을 엎질러놓은 것 같은 추상화는 더욱 웃겼다.
장구도 피리도 멎어 있었다. 옥색 치마저고리 위에 남색 쾌자에 붉은 돌띠를 두른 남이 장군 할머니는 지금 한창 한 길이나 되는 큰 삼창에다 돼지 대가리를 꽂은 것을 소금이 담긴 접시 위에 곧추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게 설 듯 설 듯하면서도 좀처럼 서주지를 않았다. 창끝에 돼지 대가리를 꽂은 채 제법 균형을 잡아, 손을 떼도 서 있을 듯싶다가도 막상 할머니가 손을 떼면 삼창은 휘청했다. 할머니는 다시 질겁을 해서 창대를 잡고 소금이 담긴 접시에다 미친 듯이 비벼대며 넋두리를 했다.
“그저 쉰세 살 강씨 대주, 마흔여덟 살 서씨 계주, 이 미련한 인간들이 뭘 압니까. 그저 받들어주시고 도와주시고 관재구설 손재수 실물수 횡액수 몸수 상문 다 제해주시고, 대주 가는 곳 어디 가나 귀인을 만나게 해주시고, 어디 가든 남들이 꽃 본 듯이 보게 하시고, 높이 보고 우러러보고 받들어 모시게 하시고, 이 정성 받으시고 사흘이 못 가 져다주신 듯 안아다주신 듯 재산이 불 일듯이 일게 하시고, 무엇보다 이 집 강씨 대주 관운이 순풍에 돛 단 듯이 트이게 하시고…….”
그 동안 부인은 빌고 절하고, 빌고 절하느라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창대를 다시 놓았다. 창은 또 휘청댔다. 할머니는 얼른 창을 잡더니, “암만 해도 관재구설이 무섭다고 하시는구먼” 했다.
부인이 황망히 오백원짜리를 한 움큼 갖다가 할머니의 돌띠 사이에 주섬주섬 끼워주고 오천원짜리는 창끝에 꽂힌 돼지 대가리의 삐죽한 주둥이에 물렸다.
부인의 표정은 초조와 불안과 공구(恐懼)로 오그라들고 초라해 뵀다. 그 도도하던 기품은 어디로 갔는지 구래서 전연 딴사람 같았다. 할머니는 아까와 비슷한 말을 지껄이며 다시 시작했다. 이때 이 집 바깥주인이 들어왔다. 관청이 파하긴 아직 이른 시간인데 아마 굿을 위해 들어온 것 같았다. 부인이 반색을 하며 남편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남편의 얼굴에도 당장 부인을 닮은 짙은 초조와 공구가 떠올랐다.
부부가 나란히 돼지 대가리 앞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여남은 번쯤 절을 하고 나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두 손바닥을 싹싹 문질러 빌기 시작했다. 검찰청이란 위엄 있는 관청에 다닌다는 점잖은 양반이 돼지 대가리의 은총을 구걸하는 “싸악싸악” 소리가 느닷없이 내 뱃속으로부터 힘찬 웃음을 촉발했다. 나는 내 웃음을 참기 위해 전신을 강직시키고 어금니를 고통스럽게 악물었다. 그들은 계속해 빌었다. 손이 발이 되게 빈다는 소리가 생각났다. 손뿐 아니라 그들은 지금 온 정성을 다해 그들의 모든 것을 한없이 비굴하게 비하시키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과연 돼지 대가리는 예배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건 어떤 부처님이나 보살님보다 더 오묘한 거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무심한 미소를 띠고 이 부부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종교라는 게 돼지 대가리의 미소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남이 장군 할머니의 넋두리는 “싹싹” 소리를 반주로 한층 구성졌다.
“쉰세 살 강씨 대주, 마흔여덟 살 서씨 계주, 그저 이 미련한 인간들이 뭘 압니까. 그저 받들어주시고 도와주시고 관재구설 손재수……” 넋두리를 해가며 어떡하든 돼지 대가리가 꽂힌 삼창으로부터 손을 떼려 해도 삼창은 할머니가 손만 떼면 따라서 휘청댔다. 할머니의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암만 해도 관재구설이 있다고 그러시는데.”
삼창을 따로 세우기를 단념한 듯 창대를 꽉 움켜쥔 채 우뚝 선 할머니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할머니의 넋두리가 멎자 따라서 빌기를 멈춘 이 집 강씨 대주, 떨리는 손을 안주머니에 넣더니, 오천원짜리를 서너 장 꺼내 막걸리에 적셔 할머니의 이마와 빰에 붙여주고는 만원짜리는 꺼내서 돼지 아가리에 물렸다. 만원짜리를 받아문 돼지 대가리의 미소는 온 인류라도 구원할 듯 자비와 연민의 극치를 보였다.
강씨 대주는 다시 빌기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을 믿는 자의 끈질김으로 감돈(感豚)을 꾀하고 있었다.
마침내 돼지 대가리가 꽂힌 삼창이 할머니의 손을 떠나 꼿꼿이 섰다. 득의에 찬 할머니가 삼창이 서 있는 자개소반을 여기저기 탕탕 쳤다. 삼창은 말뚝이 되어 소반을 뚫고 거기 박혀내린 듯이 끄덕도 안 했다.
부부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감격의 탄성이 터져나오자 장구, 피리, 꽹과리가 일제히 울리며 호기 있게 부채를 활짝 펴든 남이 장군 할머니가 남색 쾌자자락을 날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희색이 만면한 부인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길래 나는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려 들었다. 그러나 부인은 무슨 불길한 거라도 본 듯이 질겁을 하면서 황망히 다가왔다.
“아니 어쩌자고 남 재수굿 하는 날 돈을 받으러 와요, 오긴!”
그리고 아줌마에게
“아줌만 어쩌자고 재수굿 날 돈 받으러 오는 사람을 집 안에 들이우. 사위스럽게스리!”
“돈 받으러 온 사람이라뇨? 도련님 선생님이신데?”
나는 그들의 대화를 더 듣지 않고 황망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 동네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인기척이 안 들려 묘지처럼 아름다운 동네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웃고 싶었다. 이 동네를 인기척으로, 웃음소리를 자자하게 채울 만큼 크게 웃고 싶었다. 나는 아까 어금니 사이에 가둔 웃음을 풀어주고자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헛김만 나오고 웃음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영영 못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이만원이 아까워서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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