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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안 15년쯤 되니까 이런 일이,
즉 그 운동을 하는 중에 이런 일이 있어서 마음이 참 기쁩니다.
그것은 그렇고 오늘 화엄경 菩薩問明品. 314 쪽.
菩薩問明品이, 문수보살이 열 명의 보살에게 묻는데,
그 묻는 내용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모든 존재의 그 실상을
화엄경의 안목에서 드러내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 菩薩問明品도 내용이 참 좋고, 그 다음에 정행 품인데,
정행 품도 우리 입에 익숙한 그런 내용들이 많이 나오지요.
이번에는 세 번째
三. 業果甚深
1. 文殊問寶首菩薩
* 受報十種事 *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問寶首菩薩言하사대 佛子야
一切衆生이 等有四大호대 無我無我所어 云何而有受苦受樂과
端正醜陋와 內好外好와 少受多受와 或受現報와
或受後報이닛고 然이나 法界中엔 無美無惡니이다
문수사리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으셨다.
"불자여, 일체중생이 한 가지로 사대(四大)가 있되
아(我)도 없고 아소(我所)도 없거늘
어찌하여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으며,
단정하고 누추하며, 안으로 좋아하고 밖으로 좋아하며,
적게 받고 많이 받으며,
혹은 현생(現生)의 보(報)를 받고
혹은 후생(後生)의 보를 받나이까.
그러나 법계 가운데는 아름다운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나이다."
業果甚深. 업의 과보.
우리가 업을 짓고,
그 지은 업에 의해서 받는 과보가 너무나도 깊고 오묘하다.
지극히 깊고 깊은 그런 도리다. 이 도리가 보통도리 아니다.
모두 똑 같은 사람인데 왜 얼굴이 다 달라요? 왜 성격은 다 달라요?
똑 같은 사물을 보고 거기에 대한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왜 그렇게 다른가? 한 가지 사물을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게 다른가?
똑 같은 사람인데 얼굴은 왜 그리 다르고 성격은 왜 다른가?
하나하나 아주 깊이 뜯어보면
참으로 甚深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無上甚深微妙法이기도 하지만,
모든 존재의 실상 그 자체가 사실 또 無上甚深微妙法입니다.
그러니 그 실상을 확연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無上甚深微妙法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치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는 業果甚深, 업과 과보가 甚深하다.
文殊問寶首菩薩,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다.
受報十種事. 그랬습니다. 과보를 받는데 대한 열 가지 일.
爾時에, 그 때에
文殊師利菩薩이 問寶首菩薩言하사대,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어 말하사대
佛子야 一切衆生이 等有四大(등유사대)호대,
평등하게 사대가 있어요.
지수화풍 四大.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無我며 無我所(무아무아소)어늘,
우리가 다 四大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대육신 그러잖아요. 사대가 화합해서 지금 이렇게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좀 더 다른 눈을,
거기서 조금 눈을 밝게 뜨고 보면 無我입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無我所입니다.
“나의 것” 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없으니까 “나의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四大는 假名無主(가명무주)라.
거짓 이름이고 주인이 없다.
또 우리가 무상게 에도
四大忽散(사대홀산) 今者妄身當在何處(금자망신당재하처).
지금 사대가 홀연히 흩어지고 나면
이 망념된 이 몸뚱이, 이 몸뚱이는 마땅히 어느 곳에 있는가?
그것이 원각경 보안장하고 똑 같은 내용이지요.
무상게도 세상에 참~ 좋은 글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바로 슬퍼하기는 커녕 快活快活(쾌활쾌활)이로다.
이 거치적거리는 몸뚱이 벗어버렸으니 얼마나 유쾌하고 유쾌합니까?
이것 아파본 사람들은 알아요.
사실은 참~~ 애먹이던 몸뚱이 벗어버리고 나면 정말 快活快活입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보고 快活快活이로다.
참 유쾌하고 유쾌하십니다라고
이렇게 우리 한번 사대를 먼저 외우잖아요? 그 생각부터 하라 이겁니다.
몸뚱이 벗었을 때 그 생각부터 먼저 하라 라고
시달림 가서 맨 처음 외우는 것이 무상게 아닙니까?
저도 옛날에 시달림 더러 다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무상게 읽는 재미가 있어서 그래서 참 좋더라고요.
우리 잘 아시는 게송 있지요?
승조법사, 서른두 살엔가 어떤 국법에 연루 돼가지고
사형언도를 받게 됐지요. 그때 지은 게송.
四大元無主(사대원무주).
사대육신으로 된 이 몸은 원래 주인이 없다.
지수화풍으로 되었으니까 누구를 주인이라 하겠습니까?
땅의 성질을 주인으로 하려니 불의 성질도 있고,
불의 성질을 주인이라고 하려니 물의 성질도 있고,
물의 성질을 주인이라고 하려니 풍대도 있고, 四大元無主라.
五蘊本來空(오온본래공)이라.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이더라.
以首臨白刃(이수임백인)하니, 그럴 때 목을 갖다가,
새파란 칼날 = 흰 칼 앞에다 목을 들이댔는데,
猶如斬春風(유여참춘풍)이라.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더라.
이런 게송, 이것은 다른 종교ㆍ다른 철학에서는요?
거짓으로 꾸며내려고 해도 나올 수가 없는 글입니다.
四大元無主.
사대가 본래 空한 도리를 체득한 사람들이, 깨달은 사람들이
그냥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ㆍ다른 철학에서 어떻게 이런 내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은 거짓말도 못합니다.
그렇고 보면요? 불교 참~~ 위대한 종교입니다.
한 경지를 뛰어 넘었기 때문에,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無我며 無我所어늘, 그런데
云何而(운하이), 어찌하여
有受苦受樂(유수고수락)과,
고를 받기도 하고 즐거움을 받는 것이 있느냐?
苦와 樂이 상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천 상 낙을 누릴 수도 있고,
똑 같은 공덕인데 그것이 왜 있느냐? 이 겁니다. 그 다음에 또
端正과 醜陋(단정추루)와,
단정한 사람. 잘생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못난 사람도 있고, 또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병고로 골골거리는 사람도 있고, 그 다음
內好外好(내호외호)와, 안으로 좋은 사람ㆍ밖으로 좋은 사람,
이것이 내적으로, 개인적으로 좋은 것.
바깥 조건, 환경적인 조건이 또 좋은 것. 이것이 다 다른 겁니다.
사람마다 다르지요.
少受多受(소수다수)와, 예를 들어서 월급도 그렇지요.
하루 여덟 시간ㆍ열 시간 일하면
어떤 사람은 하루에 5ㆍ6만원 받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 100만원 씩 받는 사람도 있고, 少受多受.
그 외에 다른 어떤 받는 일도 다 그렇습니다.
다 다른 것이지요. 참 미묘한 것이지요. 그리고
或受現報(혹수현보)와 或受後報(혹수후보)이닛고?
現報. 後報. 이것 우리 염불에는 順現ㆍ順生ㆍ順後報(순현순생순후보).
세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는 둘로, 두 가지만 이야기했습니다.
現報 = 현생에 받는 것, 금생에 바로.
그 다음에 或受後報 라고 하는 것은 후생 받는 보입니다.
다음 생ㆍ그 다음 생, 전체를 다 합쳐서 “후생” 그래요.
그런데 順現ㆍ順生ㆍ順後報하면,
“順生 보” 하면 바로 다음 생, 한 생만을 말하는 것이고,
그 다음 “順後報” 하면 그 다음 많고 많은 생들을 “順後報”
이렇게 셋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여기는 둘로 나눴습니다.
10 배로 이야기하다보니까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然(연)이나, 그러나
法界中엔 無美無惡니이다.
진리의 세계 가운데서는 받는 차별이
= 우리 업과의 차별이 각양각색 합니다.
각양각색 하지만, 근본이 無我이고 無我所입니다.
아도 없고, 아소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좋다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無二입니다. 또 나쁘다고도 할 수도 없습니다.
좋고 나쁜 것을 초월한 자리가 法界입니다.
우리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방금 외웠지만 바로 그 진리의 자리에서는 그런 뜻입니다.
진리의 자리에서는 아름다움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이런 것을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이제 보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는 것이지요.
*
업과심심(業果甚深) : 업과(業果)가 매우 깊음을 밝히다
*
우리가 업을 짓고 그 지은 업에 의해서 과보를 받는다.
그런데 그 업과 과보가 너무나도 깊고 오묘하다.
업과의 도리가 보통도리가 아니고 지극히 깊고 깊은 도리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인데 왜 얼굴이 다른가. 성격은 왜 또 다른가.
똑같은 사물을 보고 거기에 대해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왜 그렇게 다른가.
한 가지 사물을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왜 그렇게 다른가.
왜 그렇게 다른가 하는 것을 하나 하나 깊이 뜯어보면
참으로 깊고 깊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상심심미묘법이기도 하지만
모든 존재의 실상 자체가 무상심심미묘법이다.
그러니 그 실상을 확연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상심심미묘법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치가 그렇게 된다.
여기에선 그 가운데 업과 과보가 심심한 것을 말하고 있다.
*
문수문보수보살(文殊問寶首菩薩): 문수보살이 보수(寶首)보살에게 법을 묻다
*
수보십종사(受報十種事):과보를 받는 일의 열 가지를 묻다
*
이시(爾時)에 : 그 때에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문보수보살언(問寶首菩薩言)하사대 : 보수보살에게 물어 말하사대
*
불자(佛子)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등유사대(等有四大)호대: 평등하게 사대가 있다.
우리는 지수화풍 사대가 화합해서 지금 이렇게 앉아있다.
그런데 그 사실에서 좀더 다른 눈, 밝은 눈을 뜨고 본다면
무아무아소(無我無我所)어늘: 무아며 무아소다.
나라고 할 것이 없고 나의 것이라고 할 것도 없다.
내가 없으니까 나의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사대(四大)는 가명(假名) 무주(無主)라’ 고 표현한다.
몸은 거짓 이름이고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무상게에도 ‘지금 사대가 홀연히 흩어지고 나면
이 망령된 이 몸뚱이는 마땅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는 내용이 나온다.
원각경의 보안장과 똑같은 내용이다.
[사대홀산(四大忽散)금자망신(今者妄身) 당재하처(當在何處)]
무상게도 참 좋은 글이다.
돌아가신 분에게 슬퍼하기는 커녕
‘쾌활쾌활이로다. 이 걸리적 거리는 몸뚱이 벗어버렸으니
얼마나 유쾌하고 유쾌합니까’하는 무상게를 외워준다.
아파본 사람들은 애먹이던 몸뚱이를 벗어버릴 때가 쾌활쾌활임을 안다.
돌아가신 분을 보고 ‘참 유쾌하고 유쾌하십니다.
쾌활쾌활(快活快活)이로다’라고 무상게를 먼저 외우는 것은
이 몸을 벗었을 때 그 생각부터 먼저 하라는 것이다.
시다림에 가서도 맨처음 외우는 것이 무상게다.
나도 옛날에 시다림을 더러 다녔다. 그럴 때마다 무상게 읽는 것이 좋았다.
*
승조법사(僧肇法師)는 32살인가 국법에 연루되어서 사형언도를 받게 되는데
그 때 지은 게송이 다음과 같다.
사대원무주(四大元無主) 이 몸 본래 없으니
오온본래공(五蘊本來空) 마음에 망상 또한 비었네
장두임백인(將頭臨白刃) 저 칼이 내목을 자른다 해도
유여참춘풍(猶如斬春風) 불어오는 봄바람 자름과 같도다
사대육신으로 된 이 몸은 원래 주인이 없다.
지수화풍으로 되어 있으니 누굴 주인이라 하겠는가.
땅의 성질을 주인이라고 하려니 불의 성질도 있고
불의 성질을 주인이라고 하려니 물의 성질도 있다.
또 물의 성질을 주인으로 하려니 바람도 있다.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이다.
흰 칼날 앞에 목이 들이댔는데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더라.
이런 게송은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에서
거짓으로 꾸며 내려고 해도 나올 수가 없는 글이다.
사대가 본래 공한 도리를 체득하고 깨달은 사람들이
그냥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소리다.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서 이런 내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거짓말로도 못한다.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
운하이유수고수락(云何而有受苦受樂)과 :
그런데 어찌하여 고를 받기도 하고, 즐거움을 받는게 있느냐.
고와 낙이 상대다.
앞서 똑같은 몸이라 했는데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고통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천상락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 또 있는가.
단정추루(端正醜陋)와: 단정과 추루가 있는가.
단정한 사람, 잘 생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못난 사람도 있다.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병고로 골골 거리는 사람도 있다.
내호외호(內好外好)와:
안으로 좋은 사람, 밖으로 좋은 사람이 있다.
개인적으로 좋은 것은 내호이고 환경적으로 좋은 것은 외호다.
이것이 또 사람마다 다 다르다.
소수다수(少受多受)와: 소수와 다수가 다르다.
월급을 예로 든다면 어떤 사람은 하루 6시간 일해서 5,6만원 받는 사람도 있고, 같은 시간을 일해서 하루에 100만원씩 받는 사람도 있다.
소수 다수가 다르다.
혹수현보(或受現報)와 : 현보와
혹수후보(或受後報)이닛고 : 후보가 다르다.
염불에는 순현(順現) 순생(順生) 순후보(順後報)를 이야기 하는데
여기는 두 가지만 이야기 했다.
열 가지 대(對)로 이야기 하다보니까 둘로만 나눈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지은 업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 순현보이고
그 다음 생에서 받는 것은 순생보이고
이것을 이생(二生) 이 후에 받는 것이 순후보다.
이 게송에서는 순현보는 현보로, 순생보와 순후보는 합쳐서 후보라고 하였다.
다음생과 그 다음생 전체를 다 쳐서 후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연(然)이나 : 그런 차이가 있으나
법계중(法界中)엔 : 진리의 세계 가운데서는
무미무오(無美無惡)니이다 :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업과의 차별이 각양각색하지만 근본은 무아이고 무아소다.
아도 없고 아소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법회 전에 법성게에서 ‘법성원융무이상’을 외웠는데,
좋고 나쁜 것을 초월한 자리가 법계다.
진리의 자리는 둘이 아니다. 아름다움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이런 것을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다.
그러자 보수보살이 게송으로 답을 한다.
첫댓글 우리가 업을 짓고 그 지은 업에 의해서 과보를 받는다.
그런데 그 업과 과보가 너무나도 깊고 오묘하다.
업과의 도리가 보통도리가 아니고 지극히 깊고 깊은 도리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거기에 대해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왜 그렇게 다른가.
한 가지 사물을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왜 그렇게 다른가.
왜 그렇게 다른가 하는 것을 하나 하나 깊이 뜯어보면
참으로 깊고 깊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상심심미묘법이기도 하지만
모든 존재의 실상 자체가 무상심심미묘법이다.
그러니 그 실상을 확연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상심심미묘법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치가 그렇게 된다.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