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洪陵)과 유릉(裕陵)
1. 홍릉(洪陵)-고종(高宗)과 명성황후의 릉

홍릉의 홍살문

홍릉 제정각(제사를 올리는 곳)

좌우에 문인석,무인석,기린석,코끼리석,사자석,해치석,낙타석,마석 등이 차례로 서있다.

제정각 뒤로 홍릉의 봉분이 조금 보인다. (접근 금지)

홍릉 제실이다.

홍릉과 유릉 사이에 있는 연지(蓮池)
2.유릉(裕陵)-순종(純宗)과 원후 순명황후와 계후 순정왕후의 능.

유릉 홍살문

제정각과 석상들

제정각에서 밖을 보면서 찍은 사진이다.

유릉(裕陵)-순종(純宗)과 원후 순명황후와 계후 순정왕후의 묘(세분이 합봉된 유일한 묘이다.)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일곱 동물의 석상이 릉를 지키고 있다.

유릉의 제실이다.
1. 홍릉(洪陵)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의 능이다.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익종(추존 문조)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나이에 즉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
였으나, 1873년(고종 10) 친정을 선포하고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1876),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을 체결하는 등 대외개방 정책을 펼쳤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혁명
(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등 근대 한국의 주요 사건을 겪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외세에 대쳐하지 못하고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명성황후(明成皇后, 1951~1895)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고종 친정 이후 조선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에 의해
1895년 시해 된 비운의 황후가 되었다. 명성황후의 릉이 청량리 홍릉에 있다가 고종이 승하 한 후
금곡 홍릉에 합장하였다.
2. 유릉(裕陵)
조선 제27대 순종과 원후 순명효황후와 계후 순정효황후의 능이다.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에 즉위 하였다. 1926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순종 국장일에 맞추어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명효황후(純明
孝皇后, 1872~1904)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1897년에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승하하여 지금의 능동 어린이 대공원에 모셨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천장하여 함께 모셨다.
순정황후(純貞皇后, 1894~1966)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순종의 계후가 되었다. 순정황후는 일
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겪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슬픔을 달래다가 1966년 73세로 승하
했으며 순종과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유릉은 순종과 순명황후와 순정황후 세분을 모신 조선 왕
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 홍릉과 유릉은 남양주시 금곡에 위치해 있다. 홍릉과 유릉은 태조에서
25대 철종의 릉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25대 철종까지는 문인석과 석상등이 릉 앞에 도열해 있는데, 이곳 홍릉
과 유릉은 홍살문과 제정각 앞에 도열해 있는 것이 다르다. [순명효황후=순명황후/순정효황후=순정황후]
그 차이는 태조에서 철종까지는 중국의 지배를 받는 조선의 왕으로 존재 하였는데, 비해 고종과 순종은 중국의
지배를 받지않는 조선의 황제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황제에 준하는 릉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
다.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황제릉으로 조성된 홍릉과 유릉은 기존 조선왕릉과 석물의
위치와 종류, 숫자가 다르며 정자각 대신 일자각 침전(제정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홍릉에는 원지원도 형
식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밖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이고 안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연못이 아닌 가운데 둥그런 섬을 두고 연못 전체의 형태도 원형인 원지원도 형식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3.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의 명성황후
"명성황후는 갓 마흔을 넘긴듯 했고, 아주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만짝 윤이 나는
흑단 같았으며 피부는 매우 투명해 마치 진주가루를 뿌린듯 했다. 눈빛은 날카로워 이지적으로 보였다. 왕비는
아름답고 풍성한 남빛 비단 치마와 진홍색과 푸른색이 조화로운 비단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목 부분은
산호 장식이 되어 있었다. (중략) 대화가 시작 되었다. 특히 흥미루운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그녀의 얼굴 빛은
지성미가 넘쳐 흘렸다" 언뜻 보면 영국 왕비를 묘사라 해도 손색없을 이 서술은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한국 견문록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밝힌 명성황후
에 대한 인상이다. 비숍은 1894년부터 4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총 11개월에 걸친 현지답사를 했다.
명성황후와의 만남은 4번에 걸쳐 이뤄졌는데, 그 중 한번은 전적으로 사적인 자리였다고 한다. 한시간 남짓한
사적인 대화를 나눈 후 그녀는 명성황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 그리고 통역관이 전달 했음에도 불구하고 느
껴지는 탁월한 말솜씨에 감명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 대화 내용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없지만, 만남이 끝난
후 그녀는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 "명성황후의 삶은 하나의 투쟁이었다."라고 말했다. 비숍과 명성황후가 만난
자리에는 또 한명의 여인이 동석하고 있었다. 선교사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미국인 릴리어스 호톤 언더
우드다. 그녀 역시 자신의 저서 「상투의 나라 한국에서의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Life in Korea)」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황후는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그의 반대자라도 그분의 기지를 당해내지 못했다. 또한 명성황
후가 시해되기 직전까지 우정을 나눈 이야기를 하면서 "따뜻한 정을 지닌 분이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부드러
운 사랑을 주었다." 고 말하고 있다. 두 외국 여인의 기록은 어쩌면 한낱 사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러나 지금껏 우리가 명성황후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단면적이었다. 시아버지 흥성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야욕 넘치는여인, 혹은 일본인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된 비운의 국모,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
의 시각은 명성황후의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더욱이 한국과 일본, 어느 쪽
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들 시각은 객관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비숍과 언더우드 외에도 당시 한국에 거처했던 많은 외국인들이 명성황후에 대한 인상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
다. 황후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 이야기의 공통점은 명성황후는 강한 의지와 총명함을 지닌
여인이라는 것이다. 의지할 곳 하나 없었던 소녀가 한 나라의 국모가 되어 국운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
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명성황후의 삶 곳곳에는 그녀만의 뛰어난 기지와 노력, 그리고 영욕이 서린 세월을 살
다간 한 여인의 노고가 우리의 역사 곳곳에 숨어 있다.
4.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다음해인
1875년 2월 18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 19) 여흥부원군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에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순명효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이하니 순정효황후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순종은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융희 1) 7월 24
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융희 4) 8월 22일 한일합
병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
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
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순종의 유언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
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
을 거두었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 해 6월 10일 발인
하였는데,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
하였으나, 마지막 국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ㅇ 조선 최초이자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는 1906년 황태자의 계비로 책봉되었다가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조선최초의 황후이자 마지막 황후인 셈이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문에 찍으려는 옥새를 치마 밑에 감추고 저
항한 일화는 유명하다. 나라 잃은 황후 윤씨는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조
선왕조 마지막 중전, 마지막 황후로 당당하게 살았다.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겨 지내다가 해방 후 6. 25전
쟁을 맞아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며 호통 쳐서 내쫓은 일
등 낙선재를 지켜낸 당당한 기품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부산으로 피난 후에는 정부의 비협조로 낙선재로 들어가지 못하고 어느 누구 하나 황후라고 돌보아주
는 이 없이 혹독한 가난과 고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저 버리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말년
에 대지월이라는 법명으로 불교에 의탁하여 지냈으며 한때는 성북동 흥천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그 절을 매일 찾아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고 전한다. 흥천사의
기도 덕이었는지 이승만 정부와의 끈질기고도 외로운 싸움 끝에 끝내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등 미약하나마 자신의 몫을 다하려 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는 1966년 2월 3일 72세를 일기로 낙선재 석복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어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 글 : 조선왕릉 안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