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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시조에 나타난 현실 비판 의식
고전문학 연구부 (1999)
Ⅰ.서언
시조는 독특한 형태와 특성을 지닌 우리의 노래로서, 민족의 정서와 감정이 녹아있는 문학형태이다.
조선 전기의 시조란 형태상 평시조에 한정되어 있었고, 주된 향유층도 양반이나 기녀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내용적 측면에서도 戀君之情, 憂國忠情, 江湖閒丁, 愛情 등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많은 예술 장르들이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시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식이나 내용, 향유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이러한 시조들을 통상 辭說時調라 칭하고 있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색다른 형태를 통해 평민적 익살과 풍자, 자유분방한 삶의 체험을 표현하여 전아한 기품과 관조적 심미성을 존중하는 사대부 시조와는 달리 거칠면서도 활기에 찬 삶의 역동성을 담고 있다. 사설시조를 지배하는 원리는 웃음의 미학이라 할 수 있겠는데, 현실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반어, 중세적 고정관념을 거리낌없이 추락시키는 풍자, 고달픈 생활에 대한 해학 등이 그 주요한 내용을 이룬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설시조 작품들을 보면 내용면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나타낸 작품이 많고, 人生無常, 自然親和, 恨歎, 稱頌, 風流 風俗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설시조에는 중세적, 봉건적 교의에서 나온 자연미를 읊는 것과 같은 낡은 것과 함께, 봉건 의식에 대한 비판과 같은 새로운 것이 공존하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내용을 담은 사설시조 중에서 현실비판 의식이 두드러지는 시조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사설시조가 생겨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함게 작가층을 추론해보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설시조 작품에 나타난 현실비판 의식을 접목시켜 봄으로써 이러한 작품들의 의의와 한계점에 대해 살펴보겠다. 기본자료는 심재완의 「歷代時調全書」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Ⅱ. 시대적 배경 및 작자층
1. 시대적 배경
사설시조가 주로 지어진 조선 후기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특징 지워지는 중세 해체의 징후가 다방면에서 나타나던 시기였다. 조선 후기 사회는 체제의 변화로 인한 격동의 시대로 봉건 국가를 유지하던 유교적 전통윤리는 그 모순을 드러내고 새로운 사회 질서와 저항과 비판의 의식이 형성되던 시기이다.
농촌사회는 농업기술의 발달을 기반으로 생산력을 증대되면서 대토지 경영 현상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지주층이나 자작농뿐만 아니라 일부 소작농의 경제력도 향상시켰다. 또한 농민들 가운데서는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으로 팔기 위하여 생산하는 기업농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廣作과 상업적 농업을 통해 성장해 간 농민층은 적극적으로 부를 축적해서 토지를 사들여 庶民地主로 변신하기도 했다.
한편 상업에서는 禁難廛權의 폐지로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은 자유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되었고, 상품·화폐 경제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상품경제의 발달에는 화폐의 유통이 필요하였고 화폐의 유통은 상품경제를 더욱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상업의 발달은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을 축적케 하였으며, 자본축적에 따른 巨商이 출현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예술 역시 조선 후기 시대적 흐름과 그 특징과 호흡을 같이하였다. 특히, 농촌 분화의 가속화는 도시 발달의 촉진을 가져왔고, 이러한 도시 공간의 확장은 市政人들의 유흥공간이 광범하게 창작 유통되었던 바, 그 성격 또한 전대와는 달리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相異한 것이었다. 결국 사설시조는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저항과 비판의 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장르라할 수 있다.
2. 사설시조의 작자층
사설시조의 작가신분을 중인이나 일부 양반을 배제하고 그 작자층을 평민에만 국한시켜 다루고자 한다면 사설시조에 대한 성격파악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사설시조는 양반의 의식은 물론 평민의 의식을 담고 있고, 기존의 연구 성과의 영향으로 인해 사설시조의 작자층을 평민으로 보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장르 경계의 붕괴현상\'과 그 내용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그 작자층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중인 계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설시조가 중인 계층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로는 다음의 것들을 들 수 있다. 첫째, 이름이 알려진 사설시조 작가들의 신분이 주로 중인계층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서리 출신의 가객이 많은 점, 둘째로 조선 후기 3대 歌集인 『靑丘永言』, 『海東歌謠』, 『歌曲源流』의 편찬자가 중인 계층이라는 점(장시조는 작가 미상의 작품들이 대부분이고, 내용이 외설적일수록 더욱 작자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 이현상은 여러 가지로 해석 할 수 있겠지만, 편찬자가 책을 편찬할 때 자신의 작품 또는 그 이웃들의 작품들을 無記名으로 하여 책에 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사설시조는 창을 하기 위한 唱歌였기 때문에 사설시조는 작가는 작품을 짓고 창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생활상의 여유가 있어야 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근거 중에서 첫 번째의 경우 작자가 밝혀진 작품의 작가가 모두 중인이라고 하여 사설시조 전체의 작가가 중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고, 두 번째의 경우 歌集의 편찬자가 책을 편찬할 때 작품들을 무기명으로 하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세 번째 근거를 중심으로 작자층을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사설시조는 판소리와는 다른 성격의 문학이다. 물론 사설시조를 문학적인 장르로 보지 않고 여러 시가 장르들의 형식이 복합된 현상의 것이라고 하여 판소리적 성격이 다분히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사설시조가 판소리처럼 享遊될 수는 없다. 중인에 해당되는 작가들이 평민들과 어울려서 사설시조를 짓고 같은 자리에서 향유했다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다. 평민들은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던 시대, 신분의 질서가 무너지는 경향은 있었지만 중인들이 평민들과 어울려서 사설시조를 공유했다는 자료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신분상승의 욕구가 있었던 중인들은 양반들의 작품세계를 자기화함으로 신분상승을 기함은 물론 중인들도 양반과 같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효과와 그들 스스로의 자족과 불만을 노래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사설시조에 표현되는 주제와 내용은 단순하게 평민성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독특한 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주제와 내용에서 평민성이 표출될 수는 있으나 이것만 가지고 작가가 평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반들이 지은 작품에서도 양반의식과 평민의식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인은 중인적 사고는 물론 양반적 사고와 평민적 사고를 함께 할 수 있는 특이성을 지니기에 이는 문학연구에서 작품내용의 다양성을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사설시조는 바로 18세기라는 역사적인 변혁의 시대에 중인의 중간적 성격과 그 포용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사설시조가 사대부의 관습의 답습에서부터 파격적 폭로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산출의 배경상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Ⅲ. 유형분류
본고에서는 사설시조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 유형 분류를 아래와 같이 피지배층의 현실인식,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고발, 궁핍한 삶에 대한 저항, 봉건적 가족 제도 모순에 대한 비판, 부패한 불교와 승려에 대한 비판으로 나누어 보았다.
1. 피지배층의 현실 인식
조선 초기에는 평민의 최소한도의 생존과 노동력을 보호하겠다는 의도에서 조세의 한계를 법으로 규정했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한계마저 무너지고, 지배층의 收奪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한대로 확대되어 나갔다. 수확량의 반 이상을 조세라는 이름으로 가져갔으며, 춘궁기의 농민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가진 곡식대여는 농민을 파멸시키는 고리대금업으로 변모했고 공납과 군역, 부역 등은 이중삼중으로 괴롭혔다. 수탈하는 방법도 여러가지였는데 이를 드러낸 작품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一身이 아사자하니 믈것계워 못 살니로다
皮人겨갓튼 갈랑니 모리알갓튼 슈통이 잔벼룩 굵은벼룩 왜벼룩 뛰는놈 긔난놈의 琵琶갓튼 빈대세기使令갓튼 등에 어이 갈따귀 사메 여기 셴박휘 누른 박휘 바금이 거져리 부리 뾰족한 모기 다라 기다한 모기 살진 모긔 야윈모기 그리 화진에 뾰오룩이 晝夜로 뷘들 업시 물거니 쏘거니 빨거니 뜻거니 심한 당버리에 어려이왜라
그듕에 참아 못견딀슨 五六月 伏더위에 쉬피인가 하노라 (2437)
이 작품에서는 당시의 평민들이 세상에 적응하여 살려고 하여도 \'믈것\'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고 있다. 특히 종장의 \'그듕에 참아 못견딀슨 五六月 伏더위에 쉬피인가 하노라\'에서 당시의 평민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가 없어도 六月의 伏더위처럼 살아 가기가 힘들고 어려운 세상인데, \'쉬피\'같은 존재가 항상 괴롭히니 살기가 더욱 어려움을 드러낸다. \'믈것\'에 대한 하나하나의 단서를 문면에서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使令갓튼 등에비\'에서 \'등에비\'의 원관념이 \'使令\'임을 밝힘으로써 평민을 못살게 괴롭히는 존재가 官衙의 下僕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리들을 이런 하찮고 혐오감을 주는 해충에 비유하여 이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이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어떻게 착취했는지를 \'물거니 쏘거니 빨거니 뜻거니\'라고 사실적이고도 익살스럽게 나열·고발하고 있다. 즉, 이는 피지배 계급인 평민들이 숱한 믈것들인 관리나 양반들에게 착취를 당하여, 즉 강자의 횡포 때문에 살 수 없다는 것으로 당시의 사회 모순을 준엄하게 꼬집어 내고 있다.
부러진 활 것거진 툥땐 銅爐口 메고 怨하나니 黃帝 軒轅氏를
相奪與 아닌 前에 人心이 淳厚하고 天下 太平하여 一萬八天歲 사랏거든
엇더타 習用千戈하여 後生 困케 하연고 (1286)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쟁에 시달린 병졸이다. 부러진 활, 꺾어진 총에다 땜질한 동로구를 메었다는 묘사에서 남루하고 지친 군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처지의 병졸답게 그는 고달픈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전쟁을 원망한다. 그런데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초점은 그의 원망이 황제 헌원씨를 향한다는 점이다. 황제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으로서, 문자·수레·배·도량형·曆法 등을 만을 만들었고, 蚩尤가 난리를 일으키자 무기를 처음 제작하여 무찔렀다는 인물이다. 황제가 \'習用千戈\' 했다는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 말이다.
단순히 전쟁에 대한 원망으로 황제가 거론된 것이라면 그의 순진함과 어리석음이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軍役에 시달리는 그의 고난과 황제에 대한 원망보다는 잘못된 군역제도나 군사체계 혹은 전쟁에 그 원인을 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은 작가가 가진 사고의 정당성보다는 작가가 당시의 시대상황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다. 비록 전쟁과 군역의 고달픔을 설화 속의 황제를 차용하여 우회적·희화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으나 그 내면에는 당시의 군역으로 인한 삶의 고달픔과 함께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둑거비 뎌 둑거비 한눈 멸고 다리져난 저 둑거비
한 나래 업슨 파리를 물로 날낸 쳬하야 두험싸흔 우흘 속꼬다가 발딱 나뒤쳐 지거고나
모쳐로 몸이 날낼세만졍 衆人僉視에 남 우릴번 하거다 (923)
\'둑거비\'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두꺼비의 음흉한 성격을 적절히 묘사하여, 조소와 야유로서 汚吏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한다. 즉, \'둑거비\'는 못된 주제에 권력을 가지고 있어 파리 목숨 같은 백성의 고혈을 착취한다. 이렇듯 약한 자에 대하여는 허세를 부리면서 강한 자에 대하여는 그 당당한 위세가 꺾이며 오히려 비굴해지면서도 그 비굴을 합리화시키는 탐관오리들의 꼴을 희화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둑거비\'는 평민을 수탈하는 貪官汚吏로 비유되어 온전한 존재가 아닌 불구(한눈 멀고 다리저는)로 그려졌으며, 이 작품에서는 힘없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汚吏를 조소하고 야유한다. 이는 억눌림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분노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백성들의 사회 고발이며, 그 시대 현실의 풍자이다.
皮組쌀 못먹인 해예 물이끌이도 하도하다
陽德孟山 酒湯이와 永柔肅천 換陽이년들 저 다 타먹은 還上를 이늘은 내게 다 물립쏜야
邊利란 네 다물찌라도 밋츨안 내다 擔當하오리라 (3125)
이 작품은 피좁쌀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春窮期에 타먹은 還子의 본전은 물론 변리까지 물어야 하는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 賑恤制度가 오히려 課稅, 이식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還稅제도의 문란상과 부조리를 풍자한 작품이라 하겠다.
還上에 볼기 셜흔맛고 掌利갑셰 외숏 하나 떠여간다
사랑둔 女妓妾을 원의 差使 등 미러난다
아해야 粥湯罐에 개 보와라 濠氣를 겨워 하노라 (3287)
위의 두 작품은 조선조 후기 농정책의 일종인 還上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으로 사회질서가 문란해져 가는 것을 냉소적으로 비웃으면서 핍박당하는 평민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평민을 위해 만들어졌다던 환상제도가 오히려 평민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위정의 불합리를 나타내고 있다. 還子가 課稅, 이식의 수단이 되어가는 것을 냉소적으로 비웃고, 날로 핍박해져 가는 평민의 고충을 나타냈다.
2.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고발
유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형성된 문화의 주체는 양반들이었으며 또 양반 계층은 무조건 신뢰되고 추앙되어 왔던 대상들이었다. 그러나 국란에 처하자 그들의 무능, 무력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대부층은 空理空論만 일삼고 성현들의 높은 도학의 경지를 따르려 하지도 않고 말로만 읊고 있다. 또한 양반의 무능력과 그들이 가진 재산을 빌미로 평민을 유인하여 신의를 저버리는 사악함을 비판한 시조가 나타났다.
가마기가 가마기를 됴차 셕앙사로에 나라든다 떠든다 임의집 흥졍뒤로
오르면 골각 나리면 길곡 갈곡길곡 하난 즁에 어늬 가마기 슈가마기냐
그 즁에 멈졈 나라 안졋따가 야즁 나라가는 그 가마기 긴가 (10)
이 작품은 동물우화의 형식을 빌어 까마귀와 같은 속성을 지닌 탐관오리나 썩은 선비를 풍자하고, 이들이 판을 치는 혼탁한 세상을 개탄하고 있다. \'가마귀\'는 不正(혼탁한 사회상-貪官汚吏)을 상징하는 것이며, 청렴결백한 충신들이 고고한 반면 附和雷同하는 貪官汚吏 혹은 간신들의 속성을 나타낸다.
都련任 날 보려할졔 百番남아 달내기를
高臺廣室 妓婢田畓 世間汁物을 쥬마 판쳐 盟誓ㅣ하며 大丈夫ㅣ 혈마 헷말하랴 이리져리 조찻떠니 至今에 三年이 다 盡토록 百無一實하고 밤마다 불너내야 단잠만 깨이오니
自今爲始하야 가기난커이와 눈 거러 달희고 닙을 빗죽 하리라 (853)
도련님 날 보시할제 피나모 굽격지에 잣징박아 주마터니
도련님 날보신 後난 굽격 지는카니와 헌신쨕 하나토 나 몰내라
이 後란 도련님 날보고 눈금젹할제 나난 입을 빗쥭하리라 (854)
위의 두 작품은 양반의 위선적 행각에 피해를 본 평민 여인의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난 폭로한 작품이다. 노래의 내용으로 보아 여인의 허영심에서라기 보다는 대장부의 맹세만 믿고 정조를 허락하였으나 백에 하나도 진실은 없음을 폭로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기녀이거나 혹은 몰락한 선비의 후예로도 보이며 또는 가난에 허덕이는 여인이거나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일 것이며 이런 여인을 거짓맹세를 하고 정조를 빼앗은 자는 \'都련任, 大丈夫\'등의 용어로 보아 양반집 자제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 심약한 피해자인 여성은 대단한 사랑의 무력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쪼들리는 가난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상기 예의 작품을 검토해 보면 그 내면에는 작가자신은 피해자 자신의 가난과 곤궁보다 사대부가 도령이 通情時의 盟約을 어기는 위선적 행각을 더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大丈夫 되어나셔 孔子顔曾을 못하양이면
찰하리 다 떨치고 太公兵法 외와내야 말만한 大將印을 허리아래 빗기차고 金坍에 놉히 안자 萬里千兵을 指揮間에 너허두고 坐作進退함이 긔아니 쾌할소냐
아마도 尋章적句하난 석은 션배난 나난 아니 불우리라 (830)
위의 시조는 大丈夫가 되어서 孔子, 孟子와 같은 聖賢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太公의 兵法을 외워 萬千兵을 지휘하는 大將이 될 것이지, 옛 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는 썩은 선비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선비들이 덕행이 있는 성현들의 경지에는 이르지 않고, 성현들의 글귀나 지껄이면서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병든 유학자를 신랄히 풍자한 것이다.
가마귀 가마귀를 따라 들거고나 뒷東山에
늘어진 괴향남게 휘듯나니 가마귀로다 잇틋날 뭇가마귀 한대 나려 뒤덤범 뒤덤범 두로 뎝젹여 싸오니
아모 어재 그 가마귄 줄 몰내라 (11)
이 작품은 까마귀를 貪官汚吏에 빗대어 풍자한 것이다. 온 세상에 양심있는 志士는 숨어버리고 까마귀처럼 추악한 貪官汚吏들만이 횡행하여 서로 싸우는 혼탁한 사회상을 개탄한 작품이다. 탐관오리로 비유되는 까마귀떼가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여 부화뇌동하는 貪官汚吏 또는 간신들의 작태를 나타내고 있어 웃음을 자아내는데, 그 웃음은 날카롭고 싸늘한 가시가 돋힌 웃음이다. 당시의 사회 또는 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한 의미있는 발언이며 인간생존에 대한 절실한 문제를 제기 고발하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해결점을 구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까마귀는 흉조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는 인물을 야유하기 위하여 까마귀를 등장시킨 것은 물론이다. 사설시조에는 이같이 까마귀가 서로 뒤범벅이 되어 다투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 더러 보인다. 단시조에서 옳은 선비와 부패한 문신과의 대비를 통한 현실비판이 자주 보이는데 반해, 사설시조인 이 작품에서는 옳은 선비와 부패한 문신과의 대비가 아니라 옳고 그른 것은 가리기 어려운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리공론을 일삼은 유신 또는 유자들을 총체적으로 비꼰 것이라 생각된다.
한눈 멀로 한다리 졀고 痔疾三年 腹疾三年 邊頭痛 內外丹骨 알난 죠고만 삿기개고리가
一百쉰대 자장남게를 올은 졔 긔 수이 너겨 수로록 소로록 허위허위 소습 뛰여 올나 안자 나릴졔란 어니할고 내 몰내라 저 개고리
우리고 새님 거러두고 나종 몰라 하노라 (3160)
\'한눈 멀고 한다리 저는 삿기 개고리\'는 거역도 반항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소시민으로, 욕망의 함정에 빠져들어 구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실제로 권력이나 금전과는 거리가 먼 힘없는 계층인 평민의 무모함을 들어서 상류계급의 비리를 고발하고 있으며 우매한 민중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3.궁핍한 삶에 대한 저항
사설시조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종래 평시조에서 볼 수 없었던 평민의 삶을 많이 나타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시조에서는 대부분 유교적 관념과의 상치 속에서 상층의 고민을 표현한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사설시조에서는 계층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거나 평민의 생활을 읊기도 하고, 탈규범화 된 경험적 원리가 자리잡게 되면서 현실의 문제를 자신과의 상관 속에서 파악하려고도 하였다. 자신의 불우한 현실을 한탄하거나 빈곤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정적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가마귀를 뉘라 물드려 검따하며 백노를 뉘라 마젼하야 희다더냐
황새다리를 뉘라 이어 기다하며 오리다리를 뉘라 분질너 자르다하랴
아마도 검고 희고 길고 자르고 흑백장단이야 일너무삼 하리오 (22)
이 작품은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감동없이 단순한 서술에 그치며 평민들의 현실에 대한 체념을 나타내고 있다. 까마귀와 백로의 색깔, 황새와 오리의 다리를 예로 들어서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만을 가장 진실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 통념을 말하고 있다. 성실과 정직, 인간 자세 삶의 의지 등의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데에는 외형상 보이는 빛깔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심이 문제이다. 여러 문제가 인간다운 데는 겉이 희고 검고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다시말해 사회 전반에 걸친 기존 질서가 잘못되어 있음을 나타내며 인간의 어떤 작위적인 행동도 그 본질성을 바꿀 수 없음을 자각케 해준다. 그러면서도 \'흑백장단이야 일너 무삼\'하겠느냐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극도의 반감이 차가운 웃음으로 비판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있다.
불 아니 때일지라도 졀노 익난 솟과
녀무쥭 아니 먹어도 크고 살져 한건난 말과 질삼하난 女妓妾과 술 샘난 酒煎子와 양부로낫난 감은 암쇼 두고
平生의 이 다삿 가져시면 부를거시 이시랴 (1338)
저절로 익는 솥과 먹이지 않아도 살찌고 잘 달리는 말, 길쌈 잘하는 女妓妾, 술이 샘솟는 주전자, 양부로 낳는 검은 암소가 있으면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나타난 욕망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는 헐벗고 굶주린 궁핍한 평민의 무기력한 생활에서 탈출하고픈 강렬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부지런히 노력해도 빈곤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도 감지해 낼 수 있다. 이 작품은 평민들이 유고의 이상적 윤리 덕목과 상반되는 제재를 선택하고 수용하여 자신들의 정서로 구체화하고 있다.
4. 봉건적 가족제도 모순 비판
18세기 후반부터 주자학적 가치관에 대한 민중의 불신 내지 회의는, 지배층의 주자학적 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邪學이나 邪術의 성행을 가져왔으며, 주자학적 윤리의 바탕인 綱常을 범하는 일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군신, 부자, 부부, 主從 등의 관계에 대한 엄격한 차별 규정은 조선 왕조의 통치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대전제가 되어온 것으로, 이를 선양하기 위하여 충신 및 효자, 열녀에 대한 포상 등 각종 장려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오면 각종의 綱常罪다 범해졌으며 그 실례를 <律例要覽>과 같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기 평시조에서 누누이 강조되어 온 忠이나 孝라든가 節義와 같은 기존 윤리 대신 처첩 간의 갈등이나 고부 간의 문제 또는 부녀의 부정과 관계된 내용이 사설시조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전통적 도덕률에 대한 도전 내지는 반발로 파악할 수 있다. 아래 작품은 조선시대 가족제도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싀어마님 며나리 낫바 벽바닥을 구로 지마오
빗에 바든 며나린가 갑셰 쳐온 며나린가 밤나모 셕은 등걸 휘초리나니 갓치 앙살픠신 싀아바님 볏뵌 쇠똥갓치 되죵고신 싀어마님 三年 겨론 망태에 새 승곳 부리갓치 뾰죡하신 싀누의님 唐피가튼 밧태 돌피나니 갓치 새노란 외곳갓튼 피똥 누난 아달 하나 두고
건밧태 메곳갓튼 며나리를 어듸를 낫바 하시난고 (177)
이 작품은 媤母의 허식을 풍자한 작품인데 여기서는 강자의 橫暴와 약자의 반발이 풍자의 성립요소가 된다. 작품내용을 보면 媤母는 한결같이 며느리를 驅迫하고 있는데, 며느리는 시부모를 공경하고 남편에게 순종할 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아준 고마운 존재이다
그런데도 빚에 받은 것같이 驅迫만 일삼는 媤母의 處事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위 사설시조에서는 이미 여성의 가치가 봉건적 가정 윤리나 정조에 있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자질 및 생활 현장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시의 화자가 객관적으로 보아 그 누구보다 며느리의 능력과 자질, 인품이 뛰어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를 옥토에서 충실히 잘 자라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메꽃(건밧태 메곳)이라 한다. 이렇게 며느리와 시댁간의 생활현장에서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려 여권의 신장을 피력한 조선 전기의 시가는 없다. 관념과 형식보다는 실제에서의 자질이나 능력을 강조하는 여성의 새로운 각성이 마침내 조선의 성리학적 봉건체제를 결정적으로 해체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妾을 조타 하되 妾의 說弊 드러보소
눈에 본 종 계집은 紀綱이 紊亂하고 노리개 女妓妾은 凡百이 如意하되 中門안 外方官妓 아니 어려우며 良家女卜妾하면 그中에 낫건마난 안마루 발막짝과 방안의 쟝옷귀가 士大家貌樣이 저절로 글러가네
아무리 늙고 病드러도 規模 듸히기는 正室인가 하노라 (2828)
이는 一夫多妻에 기인한 作妾의 病弊를 공격하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한 작품의 예이다. 이 작품에서는 일부다처주의의 병폐를 노골적으로 공격 비판하고 있다. 이 作妾에 대한 폐단으로는 눈요기하는 妓妾은 가정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노리개로 맞이하는 기첩은 범백이 여의하되 외방관기를 데려오기 어려운 것이고 양가집 처녀를 첩으로 함이 그 가운데 낫겠지만 이 또한 사대부가의 체면에 어긋난다. 그러기에 아무리 병들어도 규모를 지키는 정실밖에 없다고 노래하여 조강지처의 권익보호를 도모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5. 부패한 불교와 승려 비판
사설시조에서 볼 수 있는 풍자 중에는 불교나 승려를 그 대상으로 한 것들이 상당수 있다. 양반만을 위한 정치만 행해지고 正道로 가지 않는 사회상에 대한 불신은 승려에게까지 이어진다. 이를 전규태는 "계급 격차가 엄존한 조선사회에서 귀족들과 맞서 싸울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평민문학은 자연 그 불만이 완곡하게 표현될 수 밖에 없거나 지하문학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서 자칫 적극성이 결여되기 일쑤였기에 사설시조에서 남녀승의 타락상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들을 \'중놈, 중년, 승년\'이라는 등 거침없는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을 평민들이 양반들로부터 받아 온 압박과 수모를 승려에게 돌려 그들의 억압된 감정과 욕구 불만을 발산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고 말하고 있다. 종교적 행위와 수도보다는 정염과 탐심의 화신이 된 승려의 외도, 탈선을 다룬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있다.
長衫 뜨더 中衣赤衫진고 念珠 글너 唐나귀 밀치하새
釋王世界 極樂世界 觀世音菩薩 南舞阿彌陀佛 十年工夫도 네 갈듸로 니거스라
밤中만 암居士 품에 드니 念佛경 업셔라 (2512)
이 작품은 승려들의 파계과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승려들이 공들여 쌓아올린 十年工夫의 수도 생활을 내치고 파계하여 직분을 망각하는 탈선을 비판하고 있다. 승려들이 성적 향락에 탐닉하여 破戒를 자행한 것은 일종의 宗敎的 戒律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동과 반발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 파계승을 통하여 문란해져가는 사회상, 정도를 벗어난 사회를 풍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削髮爲僧 앗가온 閣氏 이내 말을 들어보소
어득寂寞 佛堂 안해 念佛만 외오다가 자네人生 죽은 後ㅣ면 홍독개로 탁을 괴와 柵籠에 入棺하야 더운 불에 찬 재 되면 空山 구즌비에 우지지는 鬼ㅅ것시 너 안인가
眞實로 마음을 들으혐연 子孫滿堂하여 헌멀이에 니꾀 듯이 닷는 놈 긔는 놈에 榮華富貴로 百年同樂 엇더리 (1420)
물욕이나 貪心이 없이 종교적 수도에만 전념해야 할 승려가 육정적인 情念의 화신이 되어 비구니를 유혹하는 破戒僧을 풍자하고 있다. 斥佛的인 요소가 濃厚한 이 작품은 승려가 어둡고 寂寞한 佛堂 안에서 念佛만 외우다가 죽으면 산에서 우는 鬼神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불교를 信奉하는 여승생활이 속세생활보다 못하다고 格下시킨 諷刺作品이다.
듕놈은 승녕의 머리털 손의 츤츤 휘감아 쥐고 승년은 듕놈의 상토를 풀 쳐 잡고
듯그등이 마조 잡고 이 왼고 저 왼고 작작공이 쳣난듸 뭇 소경놈이 굿보난고나
어듸셔 귀먹은 벙어리난 외다 올타 하나니 (2659)
상투 튼 중과 굿을 보는 소경과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 벙어리가 대조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중은 상류층의 대치적 존재일 것이며 굿을 보는 소경은 자신(백성)의 비유적 존재다. 그리고 \'외다 올타\'고 하는 벙어리는 意識狀況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불합리성과 보고도 말할 수 없는 작가의 인식이 풍자적으로 표현, 고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비리가 만연한 세태에 저항하면서도 그들은 또한 그것이 불가항력의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Ⅳ. 작품에 나타난 현실 비판 의식의 의의와 한계점
앞에서 살펴 본 사설시조 작품에는 관리 또는 양반에게 수탈당하고 억압받는 평민들의 생활 모습과 불교나 종교인인 승려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등의 그 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사설시조는 평민들의 사유와 삶을 수용함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의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작품들에게는 비판의식에 있어 약간의 한계점도 지닌다. 먼저 탐관오리의 평민에 대한 수탈을 비판한 「일신이 아사자하니」와「둑거비 뎌 둑거비」등의 작품은 단지 하급관리의 평민 수탈에만 관심을 두어 그 부당성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 조선 후기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을 간과하고 있다.
「부러진 활 것거진 툥땐 銅爐口 메고」에서는 앞서 다룬 작품을 다루면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위정에 의한 전쟁과 군역의 고달픔에 대한 원망을 무기를 제작하였다는 황제 헌원씨에게 돌림으로써 순진함과 어리석음으로 포장된 우회적인 비판으로 나타내고 있다. 작가의 내면에는 당시 군역으로 인한 삶의 고달픔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이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위정을 하는 지배층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패한 불교와 승려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한계점은 찾을 수 있다. 고상한 행동 규범을 가진 사람들이 즐겨 풍자의 대상이 된다는 법칙에 의한다면 종교인이긴 하지만 조선후기 팔천민의 하나로 천시 받던 승려층보다는 양반 사대부층이 보다 적절한 풍자 대상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서민 대중을 대상으로 한 민속극이나 인형극에서는 양반에 대한 풍자와 모욕이 끊임없이 이어지나, 서민적 성격이 강하다는 사설시조에서는 아직 양반 계층에 대한 풍자는 구체화되지 않았다. 이것은 사설시조가 평민의식을 나타내어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아직도 기존의 유교적 테두리에 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양반 문학에서 평민 문학으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기적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점이라 하겠다.
즉, 사설시조는 전체의 내용을 총괄해서 말한다면 모든 면에 있어 중세적 구속을 박차고 나가고자 하는데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그 추동력을 새로운 것의 창출로 방향을 모아내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사설시조의 주담당층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인계층이 지닌 역사적 한계, 즉 봉건 해체를 기반으로 성장했으나 완전히 봉건적 의식에서는 탈피하지 못했던 점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Ⅴ. 결언
사설시조는 조선 후기 중세 해체의 징후가 다방면에서 나타나던 시기에 성행하던 것으로 조선 전기 평시조와는 달리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형태를 통한 평민적 익살과 풍자, 자유분방한 삶의 체험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설시조는 내용 또한 다양한데 여기에서는 현실비판적 의식이 나타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사설시조가 생겨난 조선 후기의 시대 상황을 체제의 변화로 인한 격동의 시대로 봉건 국가를 유지하던 유교적 전통윤리가 모순을 보이며 저항과 비판의 의식이 형성되던 시기라 보고, 그에 따라 주작자층 또한 역사적인 변혁의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중간 계급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중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중인들의 현실 비판적 의식을 살펴보기 위하여 「역대시조전서」에서 작품을 선별하여 유형별로 피지배층의 현실인식,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고발, 궁핍한 삶에 대한 저항, 봉건가족 제도의 모순 비판, 부패한 불교와 승려 비판의 5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 유형으로 살펴본 중인들의 현실비판 의식의 의의와 한계점을 살펴 본 결과 이들 사설시조는 그 시대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려는 태도에서는 큰 의의를 가지게 되지만, 근본적인 비판과 저항의식을 드러내는 점에 있어서는 한계점을 지니게 되고 이러한 한계점의 원인은 주작자층의 신분이 중인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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