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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국립공원은 법주사를 품고있는 속리산과 외곽의 화양, 선유, 쌍곡 등 수려한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 중부권의 산을 오르노라면 어디서든 훤출한 속리산의 기암을 볼 수 있다.
워낙 산세가 특출하여 궂이 방향을 잡지 않아도 금세 속리산임을 알아차린다.
신라 때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속리산을 찾아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俗離 俗離山(도불원인 인원도 산비속리 속리산)“이라는 시를 남겼다.
<바르고 참된 도(道)는 사람(人)을 멀리 하지않는데 사람은 그 도를 멀리하려 들고, 산은 속(俗)과 떨어지지 않는데 속이 산과 떨어졌다.>
이 한시 한 줄이 속리산으로 명명된 어원이다.
또 들판에서 밭갈이하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법주사 중창을 서둘던 진표율사를 맞았다.
농부들은 이 해괴한 풍경에 기가 막혀 그 까닭을 묻자 율사는 대답하기를
“이 소들이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깨우친 불법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율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풀이하여, 속(俗)을 버리고(離) 불도에 입문한 산이라 하여 속리산이 되었다는 것.
이곳에는 속리산만큼 유명한 사찰이 있으니 바로 불법이 깃들었다는 법주사.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가 속리산을 나누어 갖고 있지만 보은 속리산이라고 더 많이 알려진 이유는 바로 법주사가 보은에 있기 때문.
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에 널리 불법을 구하고자 머나먼 천축국(인도)으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의신조사.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을 지을 터를 찾아 다녔는데,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자 나귀가 꼼짝않고 제자리에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기이한 생각이 든 의신조사가 주변을 살펴보니 수려한 산세가 가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고 판단하여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法)이 머문다(住)"하여 "법주사(法住寺)"라 하였다고 한다.
법주사에는 국보 5호인 '쌍사자석등'과 55호인 '팔상전'그리고 64호인 '법주사석연지'등 국보 석점이 있고 각종 보물과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가히 보물의 창고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 클릭하면 큰 지도<1:25,000>를 볼 수 있습니다.
화북탐방지원센터에 대형버스는 일단 여기서 스톱이다. 탐방객들을 내려놓고 돌아 나가라고 한다.
우선 낯선 회원들이 많아 단체사진부터 한 장 찍고,다리를 건너면 50m 전방에...
산행 안내도와...
화장실이 있는 좌측 산길로 들어가는 길에...
이정표가 붙어있다.
금세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다시 나온다, 주차장이 제법 큰 이곳이 탐방지원센터.
탐방지원센터와 氣가 좋다는 바위.
이 지점의 이정표
이제 차량은 여기까지다.
반야교를 건너면서 성불사(오송폭포) 갈림길
반야교 다리 건너 좌측이 성불사와 오송폭포 방향.
우리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우측길의 문장대 3.1km
이정표 #1
이정표 #2
거대한 바위와 다리를 건너기 전...
또 이정표
이후 제법 숨가쁜 된비알을 차고 오르면 오른쪽에 거대한 바위에 '추락위험'푯말이 붙어있다.
그 바위로 기어오르면 WOW~~
미옥씨 뒷편에 북한산 인수봉을 닮은 암봉이 보인다.
사방이 막힘이 없어 조망이 그저그만인데...
아래쪽 화북방향으로 도장산 청화산 마루금이 장쾌한데, 눈 앞엔 어느새 추색이 완연하다.
단풍은 이쯤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가 보다.
무슨무슨 대(臺)가 많은 속리산에서 우리가 선 이 이름없는 이곳에 이름을 지어 새생명을 불어넣어야지.
그래, 문장대(文藏臺) 동생 문등대(文登臺)가 좋겠다. 문장대(文)를 오르면서(登) 만나니까 말이시...^^
문등대를 내려와서 올려다 본 문등대.
조금 뒤 다시 내려다 본 문등대엔 아직까지 아까 그 산객들이 머물고 있다. 그 뒤 흘러내리는 능선자락엔 작은 암봉들이 뭉툭뭉툭 솟아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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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에 올라섰다.
능선에 올라서 만나는 이정표
문장대는 해발 1,054m 의 석대(石臺)이다.
정상의 암석은 50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규모이다. 이곳 바위 틈새에 가물 때가 아니면 늘 물이 고여 있는 석천(石泉)이 있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라 하였으나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甘露水)를 마시면서
날마다 석대에서 시를 읊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십 년도 훨씬 전,묘봉을 타고 이곳으로 기어(?) 들어온 기억이 있는데,지금도 이렇게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다.
묘봉 방향은 물론이고 백두대간인 눌재방향도 출금(?)
고운 최치원의 속리산 시(道不遠人 人遠道, 山非俗離 俗離山)를 인용한 박찬선님의 글.
지금은 시대가 좋아 안전한 철계단을 이용하지만 예전엔 그저 얼기설기 나무사다리를 엮어 놓았을 것.
북쪽 백악산 방향과 멀리 대간줄기가...
뒤로 백악산이...
문장대에서의 망중한(忙中閑)
안내판을 아래 실제 사진과 비교해보면...
문장대에서의 속리주능의 조망.
문장대에서 묘봉 방향으로...<아래 사진과 비교>
가까운 관음봉부터 묘봉까지...
관음봉 뒤 도명산 마루금이 백악산에서 뻗어내려온 게 보인다.
몇 번의 문장대 인증샷에 하나를 더 보탠다. (경상북도 화북면 장암리 산 33번지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정상석은 충청북도 보은군 소속인갑다.
매점과 부속건물이 있던 자리는 이렇게 시원하게 치워져 있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나무벤치에서 늦은 식사를 한다. 이형규씨가 가져온 '야간문酒'와 '개복숭술'로 정상주를 삼았다.
이 지점의 이정표.
신선대에서 법주사로 내려가기로 계획을 잡고 주능으로 접어들었다.
앞에는 문수봉인 듯...
올려다본 문수봉.
진행방향으로 천황봉도 눈에 들어온다.
신선대휴게소에서 잠깐 쉬는 동안 성불사 샛길을 찾아 보는데...
휴게소 뒤로 돌아가니 화장실이다. 이 길로 간 것 같은데...ㅉ쩝
신선대휴게소의 이정표
신선대휴게소에 있는 신선대 표석.
휴게소에서 천황봉 방향으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신선대-법주사 갈림길이 나온다.
산행안내도와 함께 있는 이정표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우측으로 암벽이 나타난다.
그 지점에서 좌측 주능선으로 시선을 돌리면 뽀족히 선 입석대가 보인다.
살짝 당겨본 입석대.
바위 암벽을 거슬러 오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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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이 트이는 경업대이다.
조선시대 인조(1594-1646)때 임경업(林慶業)장군이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라
경업대(慶業臺)라 부른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지점에 뜀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장군이 공부하던 토굴 아래의 명천은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경업대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신선대(神仙臺)는 고고한 백학과 백발의 신선들이 노닐던 봉우리라고 이름 붙여졌다.
우측으로 당겨잡은 입석대(立石臺)는 바위 위에 비석처럼 우뚝 선 돌인데,임경업장군이 7년 수도 끝에 세운 것이라 한다.
속리산 마루금의 맨 우측 입석대와 맨 좌측 신선대
조금만 내려오면 관음암갈림길이 나온다.
가은데 쩍~ 갈라진 암문(巖門)이 있고,바위에는 가로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고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세심문(洗心門)이라는데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들어오라는 이야기.
편도 1인선(1人線)으로 10m를 넘게 좌로 휘어지며 들어가야 한다.
맞은편에선 이렇게 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ㅋㅋ (덩치 작은 사람은 교차가능 할 것.ㅎㅎ)
앙드래지드의 좁은 문(?)을 통과하여 만나는 법당.
성경(마 7:13,14)" 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즉, 좁은 문이란 '힘든 길', '아무도 가지 않는 길', '하지만 생명으로 향한 길' 등을 의미한다.
형태적으로 본다면 혼자 들어가야 하는 길, 많은 것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이 좁으니까...
바위 밑에 가부좌한 관세음보살
바위 법당위로 요사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지만...
하산을 서둘러 금강골휴게소를 지나고...
해학(諧謔)이 있는 바위를 지나면 ...
비로산장이 나오고...
산장앞에서 돌아서 보니 좌측길이 내가 내려온 길이고,오른쪽 나무다리는 천황봉과 상환암에서 내려오는 길.
위 지점의 이정표.
현위치
순조대왕태실 답사는 손에 잡았다가 그냥 놓았는데,여기서 태실 이정표를 만난다.
앞 뒤 전 후 가리지 않고 냅다 오르기로 한다.
그래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10여 분만에 두루뭉실한 봉우리를 오르자 230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가운 자태를 드러낸다.
속칭 태봉산(胎峰山) 산봉우리에 있는 조선 제23대왕 순조(純祖)의 태를 묻은 태실.
구조물에 내려앉은 돌이끼와 풍우에 닳고 닳은 문양이 연륜을 가늠케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태가 그 사람의 길흉을 좌우하므로 함부로 하여서는 안된다는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아 길지(吉地)를 찾아 태를 안장하던 풍습이 있었으며
궁중에서 태어난 아기의 출생의례로써 태실을 조성하고, 후에 왕위에 오르면 그 위용을 더하기 위하여 다시 석물(石物)로 가봉(加封)하였다.
1928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태항아리를 꺼내어 창경원으로 옮겨가면서 훼손된 바 있으며, 현재는 석조물과 태실비만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있다.
'주상전하태실(主上展下胎室)'이라는 비석을 등짐에 짊어진 거북이의 표정이 무척 힘겨워 보인다.
태실은 중앙에 사각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구형(球形)의 중동석(中童石)을 놓은 다음 보주가 조각된 팔각의 옥개석을 얹어 석실을 만들고 주위에 바닥돌과 호석난간을 설치한 팔각원당형이다.
거북 曰 "나 좀 놓아줘.제발..." 거북이는 닭똥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습니다.
안내판
세심정휴게소 갈림길에서 돌아보고...(좌측길이 문장대로 곧장 가는 길,오른쪽이 신선대에서 내가 내려온 길)
가을빛이 물든 저수지에는 가을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법주사를 들어가기 전에...
좌측으로 유형문화재 제 167호인'속리실기비각(俗離實記碑閣)'이 있다.
정식 명칭은 '보은 속리산사실기비 (報恩 俗離山事實記碑)'로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을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에 얽힌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그 옆에 돌 사각울타리 안에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는데...
하나는 유형문화재 71호인 '벽암대사비'로 조선 현종(1664) 때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썼다고 한다.
벽암대사(1575~1660)는 조선 중기의 스님으로 전쟁에 참여 승병장으로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때는 3천여 명의 승병을 모아 진군했으나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을 하였다.
이후 전쟁통에 불탄 법주사의 대웅보전,팔상전,원통전 등을 복원 중창하고,전국을 돌며 교화활동을 하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다른 하나는 봉교비(奉敎碑)이다.
비석 우측에 씌어진 봉교(奉敎)란 왕이 내린 명령으로 임금이나 웃어른의 가르침을 받든다는 뜻 .
비석 좌측에 씌어진 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정무기관이다.
비석 중앙에 씌어진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은 속리산에 들어와 흥청거리며 놀지 말고,또 승려들한테는 잡역을 시키지 말라는 이야기.
사찰 입구 오른쪽으로 석주(石柱)와 비석이 나란히 있지만 탐방객들에게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비석은 자세한 해독이 잘 되지 않고...
금강문을 들어선다.
금강문 편액엔 효당(曉堂)이라는...
그렇다면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이면서 차도인(茶道人)·정치가로 작지 않은 자취를 남긴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 1979) 선생을 말하는 듯.
전통사찰에서도 금강문은 찾아 보기가 어려운 곳이 되어 대부분이 천왕문만을 모시고 있다는데...
법주사 금강문에는 두분의 금강 외에도...
문수, 보현보살상도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계신다.
금강문을 통과하자 천왕문을 호위하듯 전너무 두 그루가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다.
두 그루 전나무의 배치가 기가막히게 균형잡혀 있다.
법주사로 들어오는 세 개의 문 중에서 마지막 문이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기둥에 세로로 걸린 주련(柱聯)엔...
威光遍照滿乾坤 위광변조만건곤
眞界無爲解脫門 진계무위해탈문
雲暗日明身內影 운암일명신내영
山靑水碧鏡中痕 산청수벽경중흔
四大天王威勢雄 사대천왕위세웅
護世巡遊處處通 호세순유처처통
부처님 위엄의 빛이 온 세상에 두루 비치니
참된 세계 무위의 해탈문이구나.
구름 속의 밝은 해는 몸 속을 비추고
푸른 산 맑은 물은 거울 속의 흔적이네.
사천왕의 위세는 웅장도 하여라,
세상을 지키며 곳곳을 다니고 통하는구나!
천왕문 안에 있는 사천왕은 신성한 사찰안으로 악귀나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동서남북을 나누어 지킨다고 한다.
동쪽: 지국천왕-'비파'를 들고 있다./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나쁜 사람은 벌하는 역할을 한다.
서쪽: 광목천왕-'용과 여의주'를 지니고 있다. /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선하게 변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남쪽: 증장천왕-'보검'을 들고 있다./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푸는 역할을 한다.
북쪽: 다문천왕-'탑'을 손바닥 위에 얹고 있다./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천왕문 좌측으로 쳐다보면...
철당간지주(鐵幢竿支柱)
당간이란 절 앞에 세워 부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고 정의구현을 목적으로 당이라 불리는 깃발을 달아 두기 위한 것인데 만든 재료에 따라
철 당간, 석당간, 목당간으로 불리우며, 간두의 모양에 따 라 용머리 모양을 취한 것을 용두당, 여의주를 장식하면 여의당 또는 마니당, 사람의 모양이면
인두 당이라 하였다.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목종(1006년)에 조성된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고종(1866년)에 국가재정 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 이곳 철당간은 22미터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된 것이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국보 64호인 '법주사 석연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다만 크게 갈라진 연지의 몸돌을 쇠붙이로 겨우 이어놓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안내판
청동미륵대불(靑銅彌勒大佛)
신라 혜공왕(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여에 걸쳐 노력한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는데 대원군이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몰수해 갔다고 한다.
1939년 다시 조성되다가 6.25로 80%의 공정상태에서 중단된 불상은 1964년 시멘트 미륵불로 완성되었다.
1986년 붕괴위험으로 해체되고 4년뒤인 1990년 다시 청동미륵불상으로 복원되었다.
2002년 월드컵 성공개최와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2년여의 노력으로 청동녹을 벗겨내고 순금 3㎛두께로 황금 80Kg 을들여 2002년 본래의 금동미륵불상으로
복원된 셈이다.
법주사석조(法住寺石槽)
이 돌로된 커다란 통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긴 네모꼴의 큰물통으로 높이 1.3m, 길이4.46m, 폭2.42m이다.
신라 성덕왕(서기720년)에 만든 것 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잘 보존되고 있으며 법주사의 3,000승려가 물을 저장하고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능인전(能仁殿)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
건물의 뒤편에는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이 있으며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건물의 기단석 및 기둥 등이 옛 형태대로 잘 유지되고 있다.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온갖 괴로움을 참아 견뎌야
한다는 뜻에서 감인(堪忍)세계라 말하기도 한다)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能忍)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교화력을 갖춘 분,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건물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능인전(能仁殿)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羅漢)이 모셔져 있다.
조선후기 호영(呼映)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다면 통도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불상이 조성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이곳이 16나한을 모신 나한전(羅漢殿)이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羅佛)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는 16나한의 상이 모셔져 있어 현재로서는 건물 당초의 성격을 추정할 수 없다. ‘
정면 사리각 옆 바위 위에 살짝 고개를 내민 저 탑의 정체는?
그리고 바쁜 마음에 빠뜨린 법주사 마애불이 산행후에도 내내 걸렸다. 그래서 불교신문에서 아래의 사진을 빌려왔다.
법주사 사리각 옆 추래암 암벽에는 미륵부처님(보물 제216호)이 계신다.
활짝 핀 연꽃의 꽃턱에 앉은 미륵부처.
미륵부처가 연꽃대좌 위에 의자를 걸터앉은 형상을 ‘미륵불의좌상’이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온전한 모습이 남아있는 것은 여기와 경주 삼화령 미륵세존 정도이다.
6m가 넘는 마애불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앞뒤로 삐죽 튀어나온 거대한 자연석은 외호신장같다. <불교신문 2890호>
조선후기 호영(呼映)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속리산을 배경으로 대가람 법주사의 배치.
공식 명칭은 '보은 법주사 팔상전(報恩 法住寺 捌相殿)이다. 국보 제 55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팔상전의 디테일한 세부 모습.
<내부 촬영금지라는 팻말에 ...>
석가모니의 일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여덟 가지의 큰 주제로 나누어 그린 것으로, 사찰의 팔상전이나 영산전에 봉안한다.
팔상도(八相圖)의...
첫 번째 그림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으로,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모습이다.
두 번째 그림은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으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모습이다.
세 번째 그림은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사문에 나가 사람들을 관찰하는 모습이다.
네 번째 그림은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으로,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이다.
다섯 번째 그림은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으로, 눈 덮인 산에서 수도하는 모습이다.
여섯 번째 그림은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으로,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모습이다.
일곱 번째 그림은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으로,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모습이다.
여덟 번째 그림은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사라쌍수 아래에 누워 열반하는 모습이다. <자료>
공식명칭 '보은 법주사 쌍사지 석등(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법주사 대웅전 앞에 있으며 보물 제15호로 공식명칭은 '법주사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이다.
전체적으로 팔각의 구조이고 높이는 3.9m.
불을 밝히는 화사석의 각 면에 화창과 사천왕상 조각을 번갈아 두었는데, 사천왕의 조각은 매우 역동적이다.
지붕돌(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고 끝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신라석등의 전형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장식성이나 조각기법으로 보아 8세기 중기 이후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석등’이라 부른다.
조선 중기의 사찰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옛 기록과 기단석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대웅보전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조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짓고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철종 2년(1851)에는 국가적 규모의 중수작업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안에는 불상 위를 장식하는 덮개인 닫집 없이 후불탱(부처 뒤에 그려진 그림)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으며,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佛典) 중 하나이다.
절집은 본전을 모신 부처님에 따라 대웅전(석가모니),부속건물은 명부전(지장보살),비로전(비로자나불),관음전(관세음보살),산신각(산신님)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대웅보전 기단부의 계단 난간석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태극문양과 연꽃문양이 두드러진다. 태극은 도교사상에서 나오고, 연꽃은 불교에서 나왔는데, 이 둘이 불교건축에서 잘 어울린다.
그리고 난간석 상단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원숭이 한 쌍이 놓여 있다.
이들 원숭이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제후 또는 사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숭이는 예로부터 가의지물(嘉儀之物)로 봉후복록(封侯福祿)을 가져다주는 영물로 여겨져 왔다.
법주사 진영각(眞影閣)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곳으로 조사각(祖師閣)이라고도 한다.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호영 스님의 법주사 전경도에 당시 영자전(影子殿)이라 불렀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진영각은 1991년에 새로 지었으며, 정면 7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명부전·삼성각과 나란히 서 있다.
진영각 안에는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 조사와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진영각 앞엔 새로 만들은 당간지주가 나란히 섰다.
공식명칭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으로 보물 제 1417호이다.
이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법주사를 들어오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이 두 석주는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바리케이트 역활을 하는 듯.
일주문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고 적혀있다.
호서(湖西)란 호수 서쪽 이라는 말인데,그렇다면 어느 호수를 말함인가?
첫째는 제천의 '의림지(義林池)'를 일컫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그리고 세번째는 '금강(錦江)'을 이른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천의 의림지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으로 말하면 충청남북도와 대전광역시,세종시를 총 망라한 지역중에서 제일 큰 사찰이라는 뜻.
그 안엔 다시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大'자가 흡사 수풀 '林'자를 닮아 착각을 하기가 쉽다.'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大'자를 두 개 써 놓았남?)
일반적인 건축물이 4개의 기둥위에 지붕을 얹는 것과 달리 2개의 기둥을 일직선상에 두고 지붕을 얹는다.
이는 불교의 일심(一心) 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사찰에 들어올때는 하나의 지극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와야한다는 의미.
* 그래서 하나(一)의 기둥(柱)으로 받쳤다고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한다.
매표소 출구를 지나...
문화재관람료는 어른이 4,000원인데,아무리 법주시가 보물창고라 하더라도 좀 비싸다.
매표소를 통과한 후 화장실에서 대충 땀을 씻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온다.
시간은 이미 산행마감 시간인 4시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소형차 주차장을 지나고,상업지구를 벗어나서 '속리산 버스 터미널'안에 대형버스 주차장이 있다.
법주사로 올라간 일행들이 늦어지는 모양이다.
산행시간 5시간은 산행과 법주사 탐방을 겸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라 주마간산(走馬看山)일 수밖에...(5시간 30분 소요)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