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궤의 치수의 의미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출 25:10)
1. 불완전한 숫자인 “반”
성막 안에 있는 기구 중에서 장과 광과 고 모두가 “반” 이란 치수를 가진 기구가 없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의 치수는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이라는 말이 반복됨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생명이 성장하여 증거궤의 성숙에 이를 때 주님은 “완전하다”라고 말씀하기 보다 “매우 좋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반”이란 숫자는 불완전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완전한 증거를 산출하기 위해서 “반”은 또 다른 “반”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간증이 아무리 풍성할 지라도 시간 안에서는 완전하지 않다. 어떤 성도가 충만한 성숙에 도달할 지라도 거기에는 항상 부족한 것이 있음을 가리킨다.
2. 교회가 승리하건 연약하건 “반(1/2)”이다
분향단과 마찬가지로 증거궤도 교회의 간증을 의미한다. 증거궤는 개인적 또는 단체적인 간증을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생활은 “반”의 원칙 안에 있다. 초대 교회의 시작을 볼 때 성령의 강한 움직임을 있었다 (행 2:1-4). 베드로의 복음 전파로 인하여 오순절에 구원받은 수가 삼천명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행 2:41-42). 이 당시 교회에 접촉한 사람은 성령의 충만으로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절대적으로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다(행 4:34-37).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서 이 강한 성령의 흐름은 의견과 실행으로 인하여 손상을 입게 되었다 (고전 1:12, 행 5:1-2, 15:1-2). 결국에는 교회 생활이 건강하지 않게 되었다(계 3:15-18). 사데 교회는 죽어 있었다 (계 3:1-3). 라오디게아 교회는 교만했다 (계 3:17-18). 하지만 아무리 비참한 교회 생활이라도 주님의 오래 참고 기다리심으로 인하여 감사한다. 주님은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승리하여 증거궤의 간증을 표현하는 교회도 “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계 3:19-20). 교회가 승리한 교회나 비참할 정도로 죽어 있는 교회이건 간에, 교회는 항상 “반”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신다. 교회생활은 “반”이기 때문에 항상 완전하지 않으며 쉽게 어려움에 봉착한다. 교회 생활이 좋은 이유는 교회가 “일 규빗 반”이고 “삼 규빗”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삼 규빗”이라면 교회들 사이에 서신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골 4:16-18). 교회가 “반”이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교회 생활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분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 3;18-19). 교회가 완전하게 좋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아직 계시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계 3:20-22). 그러므로 아직도 형제 자매들의 헌신과 성도들의 사랑이 있고 진리의 실제와 생명의 성숙과 풍성한 공급이 있다. 이것은 비록 교회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성도에서도 마찬가지다.
3. 아무리 성숙한 성도일지라도 “반”이다
아무리 성숙하고 영적인 성도일지라도 개인적으로 항상 불완전하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지게 하고, 주님께 헌신하게 하고, 그들을 목양하는 성숙한 형제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가 젊고 영적이며 성숙한 형제라도 단지 “반”이다. 그가 나이가 들어서 경륜이 생기고 진리와 체험과 계시와 실제를 가졌다 할 지라도 “반”이상일 순 없다.
어느 누구도 증거궤의 치수가 온전한 숫자를 가질 수 없다. 대신 장과 광과 고가 각각 이 규빗 반, 일 규빗 반, 일 규빗 반이다. 각각의 치수는 불완전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매우 직선적이시다. 마치 하나님은 사람이 절반 정도의 영적이길 원하시는 것 같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관념과 정 반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적이라면 우리는 그가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가 “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이 “반”인 영적인 사람이다. 비록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체험이 풍부한 사람일 지라도 “반”에 불과하다.
4. 주님의 사역자(종)들은 “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앞서 가신 영적 선배들을 존경한다. 우리는 그들이 간직한 생명과 진리와 계시와 이상과 체험과 조성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도 하나님이 척량하신 제한안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반”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인 사역자가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다. 한면에서 이 사역자들 가운데에서 성령이 역사와 부흥을 인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로 완전하신 분이 오직 그리스도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극단적이다. 우리는 항상 좌가 아니면 우, 선 아니면 악이다. 이것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어떤 사역자와 그의 사역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선하지도 않을 수 있고 또한 배척할 만큼 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역자는 단지 “반”이다. 사역자는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아니다. 요한 웨슬리, 존 넬슨 다비, 앤드류 머레이, 마담 기용, 웟치만 니 등 많은 역대 사역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주님을 대치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의 사역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따르는 유일한 분은 오직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5. 모든 사람과 사물은 “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당신은 완전한 10x10x10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반x반x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급은 완전하다. 그의 역사와 경륜도 완전하다. 반면에 우리가 아무리 성숙한다 해도 시간 안에서 질투의 하나님은 우리를 제한하시어 우리가 “반”이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매우 가깝게 동역을 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의 기질과 성격이 매우 다르고,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조금 높게 생각하고 일을 잘 수행하리라 기대할 때마다 어려움에 봉착하곤 한다. 주님은 점진적으로 우리가 단지 “반”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단지 “반”에 지나지 않는데 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온전케 됨을 강조하는가? 이점에서 우리는 영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규빗 반, 일 규빗 반, 일 규빗 반이다. 우리는 이 규빗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의 간증을 의미함) 이 부족하거나 일 규빗 (삼일 하나님) 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사람의 공동의 간증을 표현할 때 증거궤의 장과 광과 고의 치수에서 보듯이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6. 예수 이외에 아무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풍성한 생명을 공급했던 사역자들을 존경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그들을 과도하게 추종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오직 주님 자신만을 따르기를 원한다. 사역자들의 풍성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알고 누리고 체험하며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는가?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변형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바로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17:8). 외형적으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다”라고 선포하셨다 (마 17:5). 오직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분이다. 우리의 존재는 “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하신 그리스도께 이끌려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모두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날에 우리는 “할렐루야! 영광의 해방, 놀라운 해방, 모든 근심과 걱정과 죄의 사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고 당연히 존경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이 “반”이라는 사실을 깊게 인지해야 한다. 사역자는 형제 자매들과 교회와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의 사역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사역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며 온전케 된 성도들을 하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엡4:12-13).
우리는 예수 자신 이외에 아무도 보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숙한 사람과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존경할 필요가 있지만 그리스도 보다 더 높이거나 받들어 모시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축복이지만 그 누구도 이 규빗 반, 일 규빗 반, 일 규빗 반이상을 넘지 않는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