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맞선 ‘체코 저항의 심장’
6월 8일 체코의 역사가 모여있는 프라하 옛 시가지 광장, ‘스타로메스케 나메스티’는 즐거웠다. 지난 며칠 줄곧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비가 잠깐 멎고 아쉬운 대로 먹구름 사이로 얄팍한 햇살이 보이자 이내 광장의 색조는 밝아졌다.
팔방으로 큼직한 여덟 개 큰 길이 트인 직사각형의 광장 한 쪽에 얀 후스가 서 있다. 거리의 악사들이 후스의 턱 밑에서 한창 공연 판을 벌였다. 반가운 햇살만큼이나 이곳을 찾은 이들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마냥 이러기만 해라.’
지난 날들은 그렇지 못했다. 더러 왕실 결혼식이 열리기도 하여 잔치 마당이 되기도 했지만, 이미 얀 후스를 기억하고자 세운 동상 그 자체가 이 광장의 이야기, 체코의 이야기는 ‘고난’이라 말한다. 진리를 위해 투쟁한 고난의 역사라 말한다.
옛 시가지 광장에서 두세 모퉁이만 돌면 베들레헴 광장(베들렘스케 나메스티)이라 부르는 작은 광장 하나가 나오고 그 옆에 베들레헴교회가 있다. 이 교회에서 후스는 루터보다 한 세기나 앞서 개혁을 외쳤다.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에 95개 항의 반박문을 내걸어 비판했던 성직과 면죄부 매매는 이미 100년 전에도 자행되고 있었다. 후스는 성직을 팔고 면죄부를 팔아 치부에 열중하는 교회에 대고 재산을 포기하고 청빈하게 살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의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공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후스를 불태운다고 개혁의 정신 마저 불태워 없앨 수는 없었다. 교회는 후스의 육신을 불태움으로 오히려 그의 개혁 정신을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후스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일어났다. 후스주의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사람의 후스를 죽임으로 이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수 천, 수 백 만의 후스를 상대해야 했다.
결코 소멸될 수 없는 후스의 개혁과 저항 정신은 1620년 11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빌라호르 산에서 비장하게 표출되었다. 가톨릭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와 이에 맞서 체코 민족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일어선 저항군이 빌라호르산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전투는 체코 저항군의 패배로 끝나고 만다.
후스의 동상을 중심으로 옛 시가지 광장 오른쪽 한 켠 바닥에 예사롭지 않은, 그렇지만 눈여겨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마련인, 큼지막한 문자가 박혀 있다. 윗줄에는 ‘21-VI’가, 그 아랫줄에는 ‘L.P. 1621’이라고 적혀 있다.
사연을 모르고서는 쉽게 시선을 끌 수 없는 타일 장식의 이 숫자는 ‘1621년 6월 21일’을 나타낸다. 바로 이날 이곳에서 저 빌라호르 전투에서 패한 후스주의 체코 저항군의 지도자 27명이 처형당했다.
빌라호르 전투의 패배로 체코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고, 후스를 따르는 무리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는 제국의 압제를 피해 더러는 망명과 이민으로, 더러는 숨어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6월 9일 프라하의 하늘은 다시 먹장 구름으로 덮혔다.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흩뿌리는 빗속에서 바츨라프 광장(바츨라프스케 나메스티)은 고즈넉한 일몰의 시간처럼 다가왔다. 경박이 어울리지 않는 날씨가 더해져서일까? 체코 역사의 심장, 체코 저항의 상징 공간 바츨라프 광장은 그 역사의 무게만큼 차분하고 묵직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국립 박물관(나로드 무제움)이 가로막으면서 끝나는 바츨라프 광장은 1000미터는 족히 됨직한, 사실은 대로이다. 아마도 국립박물관 정면에 우뚝 서있는 체코의 수호 성자 바츨라프의 동상과 그 주변이 광장의 기능을 하면서 이 거리는 그렇게 광장으로 불렸을 것이다.
바츨라프 동상 앞에 작은 원형 화단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 조그만 나무 십자가 아래 적힌 글귀, ‘공산주의에 희생당한 이들을 기억하며’이다.
이 기억의 장소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탱크로 짓뭉개며 밀고 들어온 소련군에 항거하다가 그들의 총탄에 체코 의대생 얀 팔라치가 숨져간 곳이며, 그를 기리며 이곳에 꽃 한 송이 갖다 놓고 개혁을 부르짖던 이들이 또 그렇게 쓰러져간 곳이다.
체코 시민은 ‘프라하의 봄’ 20주년이 되는 1988년이 되면서 더욱 자주 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1989년 11월 17일, 50년 전 나치에 저항하다가 그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체코 카렐대학교 학생 얀 오플레탈이 숨진 바로 그날부터 시작된 시위는, 열흘간 거의 매일 이어지면서 수십 만의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민 항거로 발전하고 마침내 체코 공산당의 항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체코 민주화 혁명, 1989년 11월 ‘벨벳 혁명’이었다.
바츨라프 광장에는 그렇게 소규모 학생 시위도 금새 대규모 시민 항거로 증폭해 내는 어떤 힘이 있었다.
화형당하기 며칠 전 얀 후스는 그를 회유하는 교회와 제국에게 최후 진술서를 보냈다. “진리를 거스를 수 없기에, 나는 나의 주장의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다.”
진리를 위해, 불의에 맞서 끝까지 싸운 체코의 힘이었다.
□건강한 체코 시민사회
바츨라프 광장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장애인 재활 교육 기관 설립을 위한 기금 모금 활동을 하고 있는 자원 봉사자였다. 기금을 내고 나무 블록에 서명을 하면 그것으로 탑을 쌓는 일이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개혁과 개방의 길에 들어서고 어느 덧 10년이 지난 체코는 한편으로 개방의 몸살을 앓고 있다.
익숙지 않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좋은 싫든 적응해야 하는 과정에서 공산 체제에서와는 또 다른 부조리와 모순이 노출되기도 했다. 어렵게 얻은 자유를 자본주의의 탐욕과 너무나 허무하게 바꿔버리는 이들도 생겨났다. 공산체제에서의 생존을 위한 이기심보다 더 지독한 탐욕의 이기심이 이웃을 갈라놓기도 했다. 그래서 더러는 옛 체제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이 청년 자원봉사자와 같은 이들이 있는 한 10년 전 체코 시민들이 그토록 어렵게 쟁취한 자유는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제발, 체코에 이 젊은이처럼 약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체코 시민사회의 건강한 모습을 보았다.
□개혁 대상은 종교 넘어 삶의 영역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저 17세기의 개혁(The Reformation)은 한낱 ‘종교’의 영역이나 ‘교회’에 한정된 좁은 개념의 개혁이 아니었다. 그 개혁은 분명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또한 그것에 머물지 않았다.
개혁의 대상이 종교를 넘어 삶의 모든 영역이었으며, 개혁의 결과 역시 교회의 개혁으로 끝나지 않고 중세의 사회 질서를 근본부터 뒤집어 놓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특집으로 ‘종교개혁의 현장에서’가 아니라 ‘개혁의 현장에서’라 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헝가리와 체코를 찾아 그들 교회가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삶 전체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을 전하려고 한 뜻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오늘 개혁을 지향하는 우리 역시 종교의 영역으로 좁게 설정한 개혁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개혁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적어도 루터와 칼빈의 저 17세기의 개혁은 실로 ‘종교개혁(The Reformation of Religion)’이 아니라 ‘개혁’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보다 한 세기 앞선 얀 후스의 개혁 역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