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모기 따라 풀도 기가 죽는 철
입추 지나고 말복도 지나니 쓸쓸한 기운이 한낮에도 느껴지는 철이 되었다. 며칠 전에는 비가 오더니 한낮에도 추운 기운이 확연히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온누리에 퍼져있던 여름 기운이 철수할 때가 된 것이다.
“처서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고 했다. 극성을 부리던 모기도 이제 추위를 만나 점차 기운을 잃어 제대로 바늘을 찌르지도 못해 나온 말이다. 그런데 모기만 기운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온 세상에 뭇 생명들이 점점 드센 기운을 잃어가고 춥고 긴 겨울을 준비하는 철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서가 지나면 풀들도 힘을 잃는다. 그래서 “처서 지나면 풀들도 울며 돌아간다”고 했다. 처서 지나 산소 벌초도 하고 논둑 풀도 깎고 가축들 먹일 목초도 베어 말리는 것이 다 그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죽을 때 그냥 죽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후손을 남기며 죽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풀들도 이때부터 열심히 후손을 낳으려 애를 쓴다. 씨를 맺는 게 그것이다. 그러니 풀들 씨 맺기 전에 열심히 풀을 매야 다음 해 덜 고생을 한다.
사실 기운을 잃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정확히 말한다면 2세를 준비하는 철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가을 들녘의 뜨겁고 맑은 하늘은 벼와 곡식들을 영글게 하고 튼실하게 해준다. 자신들의 인생은 중년을 넘었지만 후손들을 열심히 키워 종족을 보전하려 한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란 뜻도 다 이와 관련이 깊다. 높고 맑은 하늘의 따가운 가을 햇살이 알곡을 여물게 해주며 그런 곡식을 먹고 살을 찌운 말이 추운 겨울을 잘 날 수 있다.
처음으로 직파한 고추에 제법 붉은 고추가 곳곳에 달렸다. 지주도 박지 않고 끈도 띄우지 않아 반쯤 쓰러진 놈도 많고 어떤 놈은 열매인 고추를 뻗뻗하게 받쳐 그에 의지하고 있는 놈도 있다. 일주일 전쯤에는 마지막 풀매기를 하며 북주면서 쓰러진 놈들 세워주기도 했다. 그리고 웃거름으로 오줌을 사이사이에 골고루 뿌려주었다.
장마가 지나도 전혀 탄저병이 오질 않는다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내 교만을 조롱이나 하듯이 결국 한포기가 병이 걸렸다. 자세히 보니 이번 장마에 풋마름병 걸린 놈이었다. 연작을 많이 했거나 배수가 되질 않아 습해서 오는 병인데 낮에는 잎이 푹 쳐져 있다가 밤에는 제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결국엔 말라 죽어버리는 병이다. 풋마름병에 걸린 놈들이 줄잡아 전체에 1/3은 되었다. 그런데 장마가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가 알아서 싹 나아서 좋아했는데 그 중 한포기에 탄저병이 침입한 것이다. 과감하게 병 걸린 놈을 뽑아 버렸지만 계속 찝찝했다. 그리고 오늘 가보니 다른 포기에는 아직 전염된 것이 없어 일단 안심했다.
요즘 고추들은 일찍 빨개진다. 장마 지나면 꼭 탄저병이 찾아오니 아예 장마 전에 빨개지도록 육종한 것이다. 그러니까 장마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빨간 고추를 수확하고 장마 지나 탄저병이 오면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냥 갈아엎어 배추라도 심으면 땅 효율이 높아져 좋다고들 한다. 오이도 비슷한데, 오이는 노균병이 일찍 찾아온다. 밑에서부터 잎이 누레지면서 타 죽는데 누렇게 올라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위에서 열린 열매들을 수확한다. 그리고 포기 전체가 다 누레지면 갈아 엎어 김장이라도 심는다.
그런데 고추는 원래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추는 후손을 많이 퍼뜨리려는 의지로 열매를 맺고 그 안에 많은 씨들을 보관한다. 그리고 튼튼한 씨들을 받으려면 따갑고 맑은 가을 햇살을 흠뻑 받아야 한다. 열매를 맺어도 그리 크지 않으며 열매 과육도 단단하지 않고 두껍지 않다. 하지만 씨는 매우 많다. 후손을 많이 퍼뜨리려는 식물들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습하고 후텁지근한 한여름 날씨는 곡식의 영양생장을 돕지만 맑고 따가운 햇살은 곡식의 생식생장을 돕는다. 수분이 풍부하고 날도 더워야 곡식이 키를 키울 수 있다. 키가 다 크고 생식생장, 그러니까 사춘기로 들어서려면 곡식은 그동안 쌓아둔 영양으로 2세를 낳을 꽃대를 밀어 올려야 한다. 그러려면 뿌리에게는 물보다는 산소가 필요하고 열매에 영양을 공급해줄 광합성을 위해서는 따가운 햇살이 필요하다. 덧붙여 아침 저녁으로는 기온이 쌀쌀해 일교차도 점점 커져야 열매가 맛있게 여문다. 날이 점점 추워지면 당분을 만들어 저장해두어 추운 겨울을 대비하므로 과실이 맛이 난다.
속담이란 참으로 그 과장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또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 같은 맛이 깊은 울림을 주곤 한다. 그 가운데 벼와 관련된 가을 입추와 처서의 속담이 주는 맛도 일품이다. “입추에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했다. 벼는 입추 전후해서 눈에 띄게 자란다. 입추가 되면 마지막 영양생장을 마무리 하면서 보이지 않는 밑동 밑에서는 어린 이삭을 피어 올린다. 그 자람이 눈에 띌 정도로 빨라 그 소리에 놀란 개가 짖는다니 그 과장도 재미있지만 그만큼 한꺼번에 빠르게 성장한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처서가 되면 일시에 이삭이 팬다. 처음 밭벼 농사를 지을 때, 말복 즈음 마지막 풀매기를 하는데 마침 갑작스레 지나가는 소나기에도 불구하고 조금 남은 풀을 마저 매겠다는 욕심에 그 비를 다 맞으며 풀을 매다 그만 감기 몸살에 걸린 적이 있다. 그리곤 벼에 질려 밭에 가기를 뜨악해 하다 어느새 처서가 지났다. 더 이상 궁금증을 어찌하지 못해 찾아가보았더니 일거에 이삭이 팬 밭벼를 보고는 얼마나 감동했던지.....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니 그때의 기분이 살아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사방에 일이 갑작스레 일거에 벌어지는 일을 비유할 때 “처서에 장(長)벼 패듯” 한다 했다.
입추 지나면 귀뚜라미들이 서서히 노래를 부르다가 처서가 되면 함성을 지르는지 꽤나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잠자리에 들려니 그 소리가 정겹기도 하지만 그 볼륨에 “그 놈들 소리 한번 크네”하고 투덜대며 잠을 청한다.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첫댓글 '처서에 장벼 패듯'이란 말은 처음 듣습니다. 그렇잖아도 어제 맑은 하늘을 보며 사진을 찍다가 고개 숙이는 벼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계절은 숨길 수 없는가 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안철환님 글이군요.울 애들 어릴때 보낸 자연학교에서 본분인데...//처서에 장벼패듯.입추에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다 너무 재밌는 속담이네요^^*많이 써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