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고을 문학기행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지역 수필문학회원들과 문학기행을 떠나는 날, 나는 비교적 최근에 펴낸 수필집 두 권을 지참했다. 남원의 ‘혼불문학관’을 들른다면 인연이 있는 그 곳에 기증을 하고 싶어서였다. 주인공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책임을 맡은 관장에게 전해준다면 의의가 있을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도착하여 건네주니 반기면서 나중에는 조그마한 성의라며 기념볼펜과 기념 우편엽서 묶음을 안겨주었다. 그러면서 짧은 시간에 몇 편을 읽었는데 필력이 대단하더라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모실 테니 사양하지 말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아마도 글 중에서 최명희 소설가와 인연을 말한 것을 보고서 말한 것 같았다.
제의를 받고 나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최명희 작가를 기리고 홍보하는 일을 맡은 그로서는 가급적 작가와 인연이 닿은 사람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함은 당연할 것이다. 한데 그런 뜻 말고도 건네는 말에 진정성이 느껴져서 곧바로 답을 했던 것이다.
나는 최명희작가와는 근 3년간 쌓은 면분이 있다.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고 <학원>에 함께 글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익힌 것이다. 당시 학원 잡지는 창작열로 끓어오르는 문학소년들에게 구세주같은 곳이었다. 마땅히 작품을 발표할 곳이 없는 시절에 그 잡지는 유일하게 지면을 할애해 주고 있었다. 잡지 뒷부분에 ‘우리네 동산’이란 글방이 있어 열심히 투고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면은 턱없이 부족했다. 다수의 작품이 탈락되는 건 어쩔수 가 없었다. 그런 형편에 언감생심, 매월 투고한 작품이 실리기는 어렵고, 겨우 이름과 학교, 작품명이 기재되는 ‘가작’으로나마 채택이 되는 것으로도 감지덕지를 할 형편이었다.
한데 그러한 공간에서 최명희 작가와 나는 나란히 작품이 채택되어 실리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것 말고도 또 다른 인연도 있다. 나는 학창시절 열심히 글을 썼지만 나중 군 입대를 하고, 나중 직장을 잡은 후로는 글쓰기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거의 10여년을 펜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서점을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낯익은 이름이 베스트셀러 책꽂이에 보란 듯 꽂혀있었던 것이다. 바로 최명희 작가가 쓴 ‘혼불’이란 소설이었다.
보자마자 반가워서 경력과 목차를 펼쳐보았다.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력과 장편소설 당선 이력이 적혀있었다. 이렇게 장족의 발전을 하다니. 반가운 한편으로 무엇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받았다.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간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반성과 후회가 밀려왔다.
‘ 나도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한때는 나도 삶의 목표를 문학으로 정하고 매진하지 않았던가.’ 그 생각이 불현 들자 나는 다시 펜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가 30대 후반. 그로부터 이어온 역정이 지금껏 계속되어 그간 작품집 13권과 작품 1,300여 편을 쓰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을 생각하면 어찌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까닭에 언제라도 문학관에서 연락이 오면 기꺼이 달려가 문학소년 시절에 불태웠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문학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광한루에 들러서 또다른 소설적 배경이 되어준, 신선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곳은 평일인데도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았다. 연못가 버드나무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늙은 몸을 부목에 의지하여 서 있고, 연못의 큰 잉어들은 영물이 다 되어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를 듣고서 따라 움직였다. 그것들은 눈치도 빨라서 먹이를 주는 곳으로 우우 몰리고 그렇지 않는 곳에서는 미동도 없었다. 나는 그런 배경위에 들어선 정자에 걸터앉아 춘향가 판소리 중 어사 출도대목을 떠올리며 나즉이 입속으로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일혈(千人血)이요’하고 시구를 읊조려보기도 했다.
이어서 들른 곳은 광양 소재의 전남도립 미술관. 그곳은 때마침 ‘이건희 컬렉션’이 열리고 있어서 홍재를 만난 기분이었다. 큰 기대를 않고 들었는데 의외의 수확이었다. 새로 지은 건물은 규모도 웅장했다. 지하로 내려서서 먼저 한국 서예의 거장 소전 손재형 작품을 만났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남을 대표하는 서예가. 예서와 전서에 두루 능하고 한글 서체에도 일가견을 이룬 분인데, 전시실 전면에 ‘修身進德溫故知新(수신진덕 온고지신)’이란 예서글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가 추사선생의 작품 ‘세한도’를 가져온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나중에 그곳이 지진으로 인해 불이 타버렸는데 만약 그 직전에 가져오지 않았다면 영원한 명품 유산은 영락없이 소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선생의 공덕을 잊을 수가 없다.
또 다른 이건희 겔렉션 특별전은 주로 남도작가 작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김환기 화백의 ‘무제’를 비롯하여 천경자화가의 ‘화혼’과 ‘만선’, 그리고 오지호화백의 ‘항구풍경’등이 있었다. 그리고 찬조 출연 격으로 충북괴산 출신 임직순의 ‘여인좌상’와 북청출신 유열의 ‘무제’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들이 하나같이 알차고 명성만큼이나 돋보여서 새삼 역작의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그것을 보고난 소감이다. 예술가들은 살아생전에 고뇌를 천형처럼 떠안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그러다가 세상을 떠난 뒤 더러는 이름 없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정당한 평가를 받아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그런 존재가 바로 오늘 만나본 최명희 작가이고, 손재형선생을 비롯한 화가들이 아닌가 한다. 최명희 작가는 당장 수술을 하면 목숨을 건질 확률이 높은 지병을 앓고 있었으나 몸을 돌보지 않고 작품쓰기에 매진하다가 절명하고 말았다. 손재형 선생 또한 마찬가지다.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살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지만 생각하면 얼마나 잘 산 인생인가. 살아생전에는 마음 편 할 날이 없었을 지라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그들의 생애 전반을 돌아볼 때 같은 예술의 길을 걸어가는 입장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간 행적이 여간 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 깊어가는 가을에, 모처럼 떨쳐나선 문학기행이 풍성하고 보람차지 않았나 생각한다. (2021)
첫댓글 모처럼 뜻 깊은 문학기행에 동참하게 되어 반갑고 설렜습니다 혼불도 완독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최명희 작가님 앞에 서니 무엇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하지만 때늦은 각오나마 다지는 계기도 된 것같습니다 광한루는 저와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연못의 잉어들의 나이를 짐작해 보았군요 도립미술관이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큰 데에 놀랐네요 선생남과 최명희 작가님의 인연을 전해들은 그곳 관장이나 직원들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그분들로서는 최명희 작가님의 생애의 한 대목을 발견한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당시 최명희 작가님과 선생님의 작품이 발표되었던 학원지가 수집되어 전시되면 좋겠습니다 혼불문학관과 긴밀히 연대하셔서 찾아냈으면 합니다
모처럼 보람된 문학기행을 다녀온것 같습니다.
혼불 문학관을 다녀온 감회가 사라지기 전에 그 기분을 오롯이 담아두고자 바로 돌아와 작품을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