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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门颂
민승준 작품 40 *110 石门颂集联
春靜曲堂垂麗日
秋經空谷歷寒霜
봄에는 곡당에서 고요히 고운 해를 드리우고,
가을엔 인적드문 골짜기에서 찬 서리를 맞으며 지낸다.
曲堂 굽은 집, 초라한 곳
麗日 밝게 빛나는 태양
空谷 인적이 드문 골짜기
寒霜 된서리를 겪다.
柳宗元
寂滅本非斷,文字安可离。曲堂何爲設,高士方在斯。 聖默寄言宣,分別乃无知。趣中即空假,名相與誰期。 愿言絶聞得,忘意聊思惟。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柳宗元
온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온 길엔 사람 하나 자취 없다.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눈 내린 차가운 강 위에서 홀로 낚시한다.
蓑 도롱이 사
짚, 띠 따위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
예전에 주로 농촌에서 일할 때 비가 오면 사용하던 것으로 안쪽은 엮고
겉은 줄거리로 드리워 끝이 너털너털하게 만든다.
눈 내린 강의 풍경
눈 내린 대자연속에서 홀로 고기를 낚는 어옹의 고적한 모습
이해와 감상
유종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문적으로 노래한 당나라의 '산수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만큼 이 작품에서도 눈 내린 뒤의 강산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 내고 있는데,
먼저 기와 승에서는 온통 눈으로 뒤덮힌 산골 마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 곳에는 새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으며, 다만 하얀색으로 채색된 대자연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전과 결에서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 홀로 배를 탄 채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때 노인의 모습은 전반부의 넓은 대자연에 대비되어 더욱 외롭게 비쳐진다.
石門頌
석문송은 東漢 建和 2년(서기 148년)에 섬서성 褒斜谷 石門 암벽을 갈아서 쓴 마애석각으로
글자의 크기가 가로 세로 무려 6cm에 달하는 큰 글씨의 古拙美가 넘치는 예서입니다.
작자는 미상이고 王升이 撰했다고 알려집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서예가와 서예이론가들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분한예의 명석지서가 완전히 성숙함과 동시에 각종 풍격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증명 할 수 있다. 필력이 좋은 자는 골력이 많고 필력이 좋지 못하는 자는 획에 살점이 많다. 골력이 많고 획에 살점이 적은 것을 근서라 하고, 획에 살점이 많고 골력이 적은 것을 묵저라고 한다. "힘이 많고 근력이 풍부한 글씨로 근력으로 골력을 나타낸 대표적이다. 용필에서는 조세가 변화가 매우 미묘하며 흔히 보여지는 한예와는 차이가 있다. 필봉을 암암리 전환하는 법과 파동이 곡절하는 형태는 일종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미 방필과 다르며 또한 일반적인 원필과도 다르다. 제안돈좌의 표현이 매우 은근하고 간략하나 곳곳에서 중우하고 혼박한 정취가 나타나 스스로 천기를 이루고 있다. 구속 받지 않는 듯이 넘쳐 흘러 자연스럽게 스스로 방종했다. 이처럼 변화무궁하고 의취를 얻어 자유자재로 붓을 휘둘러 형체를 이루었으나 조금도 조작된 느낌이 없어 야일소방한 일파를 이루었다. 장조익의 발문에서 "300년동안 한 비를 스승으로 삼은 자가 많았으나 석문송을 제대로 배운자는 없다. 대개 웅혼하고 자유분방한 기는 담력이 약한 사람이 감히 배울 수가 없고, 필력이 약한 자 또한 배우기가 어렵다."라고 했다.
全称《汉司隶校尉楗为杨君颂》.又称《杨孟文颂》。 东汉建和二年(148年)十一月刻,摩崖隶书。 20行,行30 261厘米,横205厘米。藏汉中博物馆。 它卷镌刻在古褒斜道的南端,即今陕西汉中市褒城镇东北褒斜谷古石门隧道的西壁上。 内容为汉中太守王升表彰杨孟文等开凿石门通道的功绩。文辞为王升撰。 此摩崖刻字书写较随便,不刻意求工而流露出恣肆奔放、天真自然的情趣,为后世书家所珍爱。 北魏郦道元《水经注·沔水》云: “褒水又东南历小石门,门穿山通道,六丈有余。刻石,言汉明帝永平中, 司隶校尉楗为杨厥之所开”,这是有关《石门颂》的最早记载。 郦道元精于古历史地理之研究,为世所公认,但疏漏失察之处,也在所难免。 以上记载中就有两处失实: 一是颂文中因有“杨君厥字孟文”一语,郦氏便误以为这位杨君名厥字孟文。 后世不少学者沿袭郦说,不加深究,遂致以讹传讹。 如宋欧阳修《集古录》即从郦说,赵明诚《金石录》更将《石门颂》径称为《杨厥碑》了。 经过宋代洪适《隶释》一书的考证,才弄清此处的“厥”字, 实际是语助词,也可解释为“其”或“他的”的意思,并不是这位杨先生的名字。 洪氏引《华阳国志》所载,杨君实名涣,字孟文。 二是郦道元及其以后的许多人,以为古石门是杨孟文开凿的,这也与史实不符。 开凿石门之举,早在汉高祖刘邦时代就开始了,只是没有完成。 据石门的另一著名摩崖《鄐君开通褒斜道刻石》明确记载, 东汉明帝水平六年至九年(63~66),汉中太守鄐君最后完成了开通褒斜、石门的任务。 后因安帝初年屡遭战乱毁坏,石门阻塞不通。顺帝初年,经杨孟文再三奏请,才重新修复。 因此,杨孟文与石门之首次开通,没有直接关系。 동한말기는 서예사에서 또 한 차례 중흥기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이는 한편으로 전문적인 서예가와 서예 이론가들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분한예(八分漢隸)의 ‘명석지서(銘石之書)’가 완전히 성숙함과 동시에 각종 풍격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한나라의 팔분예서는 가장 휘황찬란한 정상으로 향했으며, <석문송(石門頌)>은 그러한 정상에서 반짝 빛나는 구슬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양맹문송(楊孟文頌)>이라고도 하며, 한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148)에 새겼다. 이는 마애에다 새긴 예서로 왕승(王升)이 지었으나 이를 쓴 사람의 성명은 없다. 모두 22행으로 행마다 30-31자씩 씌어졌다. 내용은 한나라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냈던 양맹문(楊孟文)이 석문(石門)을 뚫어 교통을 편리하게 했다는 일을 적었다. 이 작품은 섬서성 포성현(褒城縣)의 동북쪽 포사곡(褒斜谷) 석문의 벼랑이 있다. 이 작품은 한비(漢碑) 가운데 가장 종횡경일(縱橫勁逸)하고 기자호매(奇姿豪邁)하다.
善筆力者多骨, 不善筆力者多肉. 多骨微肉者謂之筋書, 多肉微骨者謂之墨猪. 多力豊筋者聖, 無力無筋者病 “필력이 좋은 자는 골력이 많고, 필력이 좋지 못한 자는 획에 살점이 많다. 골력이 많고 획에 살점이 적은 것을 근서라 하고, 획에 살점이 많고 골력이 적은 것을 묵저라고 부른다. 힘이 많고 근력이 풍부한 것은 좋은 글씨이고, 힘이 없고 근력도 없는 것은 좋지 못하다" -위부인의 筆陣圖- ‘골력이 많고 살점이 적으며’, ‘힘이 많고 근력이 풍부한’ 글씨로 근력으로 골력을 나타낸 대표작이다. 용필에서는 조세(粗細)의 변화가 매우 미묘하여 흔히 보여지는 한예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필봉을 암암리 전환하는 법과 파동이 곡절하는 형태는 일종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미 방필과 다르며 또한 일반적인 원필과도 다르다. 추획사(錐劃沙), 옥루흔(屋漏痕)과 같이 표일하고 신기하며 중간은 풍윤하여 비록 제안돈좌(提按頓挫)의 표현이 매우 은근하고 간략하나 곳곳에서 중우하고 혼박한 정취가 나타나 스스로 천기(天機)를 이루고 있다.
필력이 굳세고 침착한 것이 마치 오래된 등나무와 같아 곡절(曲折)하는 곳에서 강인함이 나타난다. 뱀이 기어나는 듯한 행필을 채용하여 붓끝에서 호매하여 구속받지 않는 뜻이 넘쳐흘러 자연스럽게 스스로 방종했다. ‘中’, ‘道’자에서 전절(轉折)하는 곳은 붓을 들어 암암리 지나갔고, ‘靈’자에서는 한 모서리를 펴서 전절하여 내렸고, ‘圍’, ‘復’에서는 붓을 들어 종이를 떠나 허공에서 내려 필치가 끊어진 것 같으나 필의는 연결되었다. 이처럼 변화무궁하고 의취를 얻어 자유자재로 붓을 휘둘러 형체를 이루었으나 조금도 조작된 느낌이 없어 야일소방(野逸疏放)한 일파를 이루었다. 조형은 크고 넓으면서 표일하며 대소와 종횡의 변화가 많고 행렬의 격식에 구속되지 않았다.
《石门颂》的艺术成就,历来评价很高。 其结字极为放纵舒展,体势瘦劲开张,意态飘逸自然。 多用圆笔,起笔逆锋,收笔回锋,中间运笔道劲沉着,故笔画古厚含蓄而富有弹性。 通篇看来,字随石势,参差错落,纵横开阖,洒脱自如,意趣横生。 《石门颂》为汉隶中奇纵恣肆一路的代表,素有“隶中草书”之称。 文中“命”、“升”、‘诵”等字垂笔特长,亦为汉隶刻石中所罕见。 《石门颂》对后世影响很大。
예를 들어 ‘命’ ‘升’ 등의 글자는 세로획이 매우 길다. 이는 한예에서는 매우 보기 드물고 오히려 한간(漢簡)이 남긴 법으로 ‘예서 가운데 초서[隸中草書]’라 할 수 있다. 풍격은 심후하고 웅기(雄奇)하며 자유분방하여 한간의 노숙하면서도 굳세고 거칠면서도 졸한 맛이 있어 일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별도로 천진한 예술효과를 갖추었다.
杨守敬《平碑记》云: “其行笔真如野鹤闲鸥,飘飘欲仙,六朝疏秀一派,皆从此出。” 양수경(楊守敬)은 《평비기(平碑記)》에서 “그 행필이 마치 들 학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떠돌다 변화하려고 하니, 육조의 소수(疏秀)한 일파가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其行筆如野鶴聞鳴, 飄飄欲化, 六朝疏秀一派皆從比出 <석문송> 마애석각의 풍격과 기도(氣度)는 한비에서는 둘도 없는 것으로 한예의 경일호상(勁逸豪爽)한 서풍을 열어주었다. 清张祖翼跋此碑云: “然三百年来习汉碑者不知凡几,竟无人学《石门颂》者,盖其雄厚奔放之气, 胆怯者不敢学,力弱者不能学也。” <석문송>은 한예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작품의 하나이다. 장조익(張祖翼)은 발문에서 “300년 동안 한비를 스승으로 삼은 자가 많았으나 <석문송>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없었다. 대개 웅혼하고 자유분방한 기는 담력이 약한 사람이 감히 배울 수 없고 필력이 약한 자 또한 배울 수 없다.”라고 했다. 제 10회 서예문인화 4월호 연재기사 이제 “비첩금낭을 토대로 새로 쓰는 서예사”에서는 본격적인 비의 세계에 접어들면서 ‘북해상 경군비’에 이어 두 번째로 마애비(磨崖碑)에 접근하게 되었다. 자연적 형질의 암벽을 갈고 닦아서 문자나 화상을 새긴 것이니 그 기원이 오랜 것이 대부분이며 이 중에 포사도(褒斜道) 각석으로는 축군개통포사도각석(鄐君開通褒斜道刻石), 석문송(石門頌), 서협송(西狹頌), 부각송(郙閣頌), 양회표기(楊淮表記) 등의 한대의 마애가 유명하고 「오서도(五瑞圖)」와 같은 화상을 새긴 것도 있다. 지금의 석문잔도 풍경구 실제의 마애비는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성행하였는데, 산동성의 운봉산(雲峯山), 천주산(天柱山), 태기산(太基山)에는 북위(北魏) 정도소(鄭道昭)의 서(書)만도 마애작품이 수십 종이 있을 정도다. 산동성 저래산의 『대반야경(大般若經)』, 태산경석욕(泰山經石浴)의 『금강경(金剛經)』이 또한 유명한데 이는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의 이야기고 이제 최초의 마애비가 등장하는 시점의 역사이니만큼 그 효시 구실을 하는 석문송을 논할 것이다. 그림-1개통포사도각석(開通褒斜道刻石) 물론 마애각석으로는 석문송 보다 훨씬 앞선 개통포사도각석(開通褒斜道刻石)이 있으니 기원 63년에 각한 것으로 동한 명제 영평 6년의 시기의 것임을 독자들은 잘 알 것이다. 석문송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마애비의 실상과 특징을 다루기 위하여 개통포사도각석(開通褒斜道刻石)에 대해 먼저 개략을 살펴본다.
동한 말기는 서예사에서 또 한 차례의 중흥기를 이루었던 시기였다.
위부인의 <필진도>를 보면
<석문송>은 골력이 많고 살점이 적으며
뱀이 기어나는 듯한 행필을 채용하여 붓끝에서 호매하여
<석문송>은 한예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작품의 하나이다.
石 門 頌
<석문송>의 원래 이름은 <고사예교위건위양군송(故司隸校尉楗爲楊君頌>이며,
축군개통포사도각석(鄐君開通褒斜道刻石)과 석문송(石門頌)
마애비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마애(磨崖)’는 ‘벼랑의 바위를 깎았다’는 뜻이고 거기에 서화나 불상을 새겨 넣은 것을 그대로 마애, 또는 마애비(磨崖碑)라 칭한다.
그 고졸함에서는 여느 마애비가 따라갈 수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본 “비첩금낭”이 채록할 명문이 없이 목록에 못 넣은 점이 아쉬울 뿐이다.
정식 명칭으로 회자되는 축군개통포사도각석(鄐君開通褒斜道刻石)은 동한(東漢) 시기인 명제(明帝) 영평(永平) 6년인 서기63년에 포성현(褒城縣-지금의 陝西省 勉縣)의 북서문(北西門) 석문(石門)벼랑 바위에 새긴 것이다.
얼핏 보면 바위 위에 자연적으로 생긴 균열이나 무늬 같아 보일 정도로 자체가 가늘고 자형이 크고 작은 것이 參差不齊하다.
그래서 마애(磨崖) 각석(刻石)으로는 효시(嚆矢)로 불리어지는데 남송(南宋) 시대사람 안무(晏袤)에 의해 명창(明昌) 5년(1194년) 발견되었으며, 당시에 탁본한 내용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한중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한중시의 예전 한중군(漢中郡)의 태수 축군(鄐君)이 석문에 포사도(褒斜道)를 개통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각석의 명문은 16행으로 행마다 5자에서 11자까지 모두 159자가 새겨져 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永平六年漢中郡以詔書受廣漢蜀郡巴郡徒二千六百九十人開通褒余道太守鉅鹿鄐君部掾冶級王弘史荀茂張宇韓岑弟典力乍太守丞廣漢楊顯將相用?始作橋格六百卅三?大橋五為道二百五十八里郵亭驛置徒司空褒中縣官寺并六十四所最凡用功七十六萬六千八百餘人瓦卅六萬九千八百八” 이상 124자 남아있으며 이하 35자정도 궐자(闕字)되었고, 도합 159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체는 고예(古隷)에 해당하며 돌의 자연형태에 따라 새겼기 때문에 포치가 한 대 후비에서 보는 것처럼 정연 하지가 않다.
비록 글자의 크기와 공간의 포치가 크게 차이가 나지만 필세의 자형 내지 기세의 흐름은 서로 간 긴밀한 소통을 하고 있어 도획(圖劃)적인 한비를 접하던 초심자들에게는 새로운 미적 감각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돌파구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자료다.
물론 여기 축군 각석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법 운운하는 법식을 따질 게재는 없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생동하는 기운(氣韻)은 현대 탐미적 서법가들 에게는 무시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으니 이어지는 석문송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졸한 멋의 효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이다.
행간과 자간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자간의 포치가 바위벼랑의 생긴 모양을 따라가며 새기다 보니 그리 된 것이며, 그러나 이 또한 매력이니 그리하여 결체(結體)가 넉넉하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필획의 굵기가 가늘고 일정하지만 곧게 뻗은 것이 드물고 중봉을 지키고 있음이 뚜렷하다.
그래서 이 비를 보면 이어지는 석문송의 특징에서 보여주는 강하고 질긴 모습 그래서 조금도 묵저(墨猪)의 흔적을 볼 수 없는 바싹 마른 근골(筋骨)의 미(美)를 곧바로 발견하게 된다.
이 마애비는 매우 독특한 서체에 해당된다고는 하나 아비 없는 자식이 없듯이
이 또한 전대의 ‘곽거병석각’이나 ‘래자후각석’의 서법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예서의 자형에 전서의 필의(筆意)를 넣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양수경(楊守敬)은 평비기(評碑記)에서 “그 서체가 장단광협(長短廣狭)하고 천연고수(天然古秀)하니 마치 석문(石紋-돌의 무늬)과도 같다. 백대에 걸쳐 모방할 방법이 없으니 이것이 신품(神品)이다."라고 극찬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자형의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에 있어서 들쭉날쭉 참치(參差)의 미가 있으며, 천연스럽고 옛 스러우며 수려함이 마치 돌에 난 무늬와도 흡사하다는 말로 겉으로 드러난 결구 자형의 의미를 매우 잘 표현한 말이라 본다.
이 마애는 실제 글자마다 기백이 웅대하고 포만감이 있다. 필획(筆劃)은 밖으로 뻗는 외향(外向)의 기세이며, 필의는 전서의 필의로 하였으나 자형은 예서와 같으니 이는 또한 ‘래자후각석’과 다른 면모를 보여줌이라.
필획이 비록 가늘지만 가볍지 않고 약하지 않으며, 오히려 필력과 필세는 매우 강하다. 횡획과 수획은 기우는 듯 하지만 곧고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정립(定立)한 형태를 취하여 경직(硬直)되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니 이래서 신품이라 하는가?
특히 참치(參差)한 변화는 정돈된 도식의 미를 벋어난 천진한 미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금상첨화다. 더불어 기이함과 위엄을 함께 취하게 하는 기품이 있다 하겠다.
진나라의 대전의 복잡한 자형이 점점 간략해지면서
한나라시대로 들어서 예서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변화는 자형만이 아니라 필획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예서(隸書)를 쓰듯 운필하였지만 마치 못이나 송곳으로 긁어 놓은 것처럼 날카로운 필세는 전서의 철필(鐵筆)을 연상하게 하는 강인한 멋을 풍긴다.
그래서 청의 말기 서화가인 오준경(吳俊卿 1844년~1927년, 호 부도인缶道人)은 ‘褒斜道刻石 字界在篆隸之間’(포사도각석의 글자는 전서와 예서의 가운데 있다)이라 평했고, 일찍이 처음 이 각석을 발견한 송나라 안무(晏袤)는 이 각석에 발문(跋文)하기를 ‘筆法奇勁古意有餘’(필법은 기이하고 굳세며, 고인의 뜻이 남아있다) 라고 평가했다.
옹방강도 이 비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특히 예서의 대가인 이병수(李秉綬)는 이 각석을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득법(得法)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한 역발상하여 보면 험준한 마애의 벼랑을 뚫어 잔도를 내고 공사를 끝내고 개통할 당시 그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공인에게 명하여 절벽의 바윗돌에 새겨 넣게 하여 공인이 손 가는대로 새기고 뚫었을 수 있으려니 소위 팔분이니 예서니 고전(古篆)이니 하고 논할 까닭이 없을 수도 있는데 후대에 지나친 심미주의가 박석을 옥으로 둔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시대는 85년을 넘어 동한(東漢)의 환제(桓帝) 시기인 건화(建和) 2년(서기148년)으로 내려간다.
한대(漢代)에 중원과 사천지역을 연결해 주던 중요한 노선 포사도(褒斜道)는 이미 전국시기에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최초로 수레와 말의 통행이 가능했던 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길이 험한 벼랑에 깎아 만든 잔도이니만큼 때로는 끊기고 때로는 통행하곤 하던 일이 반복되었는데 기원 148년경에 당시의 사예교위(司隸校尉)벼슬에 있던 양맹문(楊孟文)이 험난한 석문의 벼랑길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한중군태수인 왕승(王升)이 문장을 지어 새긴 마애각석이 있다.
바로 석문송이다.
이 비문의 원래 이름은 고사예교위건위양군송(故司隷校尉犍爲楊君頌)이다. 일명 양맹문비(楊孟文頌碑) 또는 양궐비(楊厥碑)라 칭하기도 한다.
현재의 석문잔도
양맹문(楊孟文)이란 인물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여러 자료를 통해 그의 단면 만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동한시기의 건위군(犍爲郡) 무양(武陽),
지금의 사천성 미산시(眉山市) 팽산(彭山)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사예교위(司隷校尉-감찰관)시절 인물이 걸출했고 정적(政績)이 탁월하였다고
화양국지(華陽國志)에서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도 그의 공적을 ‘유훈유영(有勛有榮)하니 착우용문(鑿禹龍門)이라’ 하여 ‘빛나는 공로는 우임금이 마치 용문을 뚫은 것 같다’고 찬할 정도이다.
아직은 당시에 글씨의 예술적 인식이 부족하여 서자(書者)의 명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아마 왕승이 직접 썼거나 아니면 당대의 최고 서법가를 동원했으리라 추측된다.
잔도(棧道)의 남쪽에 있는 석문 안팎에는 이곳을 지나치던 문인들이 남긴 시로 가득하다.
그 중 13폭의 석각을 일러 “석문13품(石門十三品)”이라 칭하여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저수지를 개발하면서 이 일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석문13품(石門十三品)”을 한중시 박물관(漢中市 博物館)으로 옮겼다.
석문송은 높이가 261cm의 거비에 속하며 폭도 205cm에 달한다. 본문은 모두 22행, 매행 30~31자가 새겨져 있다.
위부인의 필진도(衛夫人筆陳圖)를 보면 “善筆力者多骨,不善筆力者多肉,多骨微肉者謂之筋書,多肉微骨者謂之墨豬。多力豐筋者聖,無力無筋者病”고 했다.
위부인(272년~349)은 하동 안읍인으로 이름은 삭(鑠), 자는 무의(茂猗). 진대(晉代)의 여서법가(女書法家)다.
여음(汝陰)태수를 지낸 이구(李矩)의 처로 대대 서법(書法)에 능했고, 이구도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위부인은 종요(鍾繇)의 제자이고, 왕희지와 계몽(啟蒙)의 스승으로 알려졌다.
최초의 서론(書論)으로 유명한 필진도도 그가 썼다고 전해지는데,
위의 필진도 내용을 다시 풀어보면
“필력이 좋은 사람의 글씨는 근골(筋骨)이 많고 필력이 좋지 않은 사람의 글씨에는 살이 많다. 뼈가 많고 약간 살이 적은 글씨를 근서(筋書)라 이르며 살이 많고 뼈가 적은 것은 묵저(墨猪-먹 돼지)라 이른다. 힘이 많고 근육이 풍부한 글씨를 성(聖)이라 이른다면 무력 무골(無骨)하여 근육 없는 살찐 글씨는 병(病)이라 이를 것이다”.
이른바 살만 통통히 찐 집돼지를 연상하면 곧 묵저(墨猪)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파리한 듯 하지만 뼈와 근육이 드러나 보이는 야생의 짐승을 연상하면 근서(筋書)의 의미를 이해 할 것이다.
이상의 위부인 필진도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곧바로 석문송을 살펴볼 까닭이 있다.
석문송(石門頌)은 결자 결구에 있어서 크기와 자형의 변화가 많은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필세(筆勢)의 기운(氣韻)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게 강한 장력(張力)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필법이다. 이러한 근골의 강인한 장력 때문에
청나라의 장조익(張祖翼-1849~1917)은 이 비의 발문에 이르기를,
“三百年來 習漢碑者不知凡幾, 竟無人學石門頌者,盖其雄厚奔放之氣, 膽怯者不敢學, 力弱者不能學也.”라.
“300년 동안 한비(漢碑)를 학습한 사람이 많았으나 종래 석문송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없었다. 대개 웅후(雄厚)하고 분방(奔放)한 기(氣)의 글씨는 담력이 약한 사람이 감히 배우기가 힘들며, 또한 필력이 약한 사람도 배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석문송 전탁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이런 표현이 특히 중국 서법가들에게 이해가 되는 말인 것은
그들의 운용하는 모필을 보면 이해가 갈 일이다.
따라서 이 비는 장봉(長鋒)으로 하되, 강한 필력을 지니지 않으면 흉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석문송을 임서한 사람은 느낄 것이지만
획의 360도 종횡무진 변화하는 필법에서는 모필의 절법(折法)이 무쌍하다.
이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획의 각도에 따라 꺾이는 준법(蹲法)이 필요한데
단봉 세필로는 겨우 흉내 내는데 이르는 정도일 것이니
어찌 저 거대한 바위 위에 대자를 함부로 쓸 수 있단 말인가?
심수쌍창(心手雙暢)하여 편안한 마음이 너그럽게 붓 끝으로 옮겨 전달될 때 붓끝에 일렁이는 파란은 매자 매 획에 요소요소 급소를 찔러대는 무희의 칼끝처럼, 돈좌(頓挫)를 거듭하고 돌아서는 무희의 발끝처럼 비상치 않음이 없는 절세(折勢)를 일으킨다.
석문송을 이해하는 데는 필의 자체가 일단 허공에서 형세를 얻고 필봉에서 변화를 구하는 난이도를 겸전해야 하니 어찌 장조익의 평단이 그르다 할 수 있으리오.
석문송의 내부를 심미적인 안목으로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우선 ‘命, 升, 誦’ 등의 글자를 살펴보면 세로획이 매우 길게 뻗어 내려 한 획이 두 글자 이상의 길이를 차지한다.
이러한 필획은 대개 한간(漢簡)이나 백서(帛書)에서나 볼 수 있는 필법인데 예서로서 완숙기에 접어들지 않은 시기에 이러한 장법(章法)을 썼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흔히 馬王堆漢簡이나 居延漢簡 등의 簡牘 隸書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刻石 漢隸 중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보다 전인 노효왕각석(魯孝王刻石-五鳳刻石-b,c 56년)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거연한간(居延漢簡)
마애비의 장법(章法)은 마애(磨崖) 바위의 형태에 따라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므로 결코 인위적 규칙에 구속되어 있지 아니한다 할 수 있다.
특히 석문송(石門頌)의 경우는 장법의 규율을 법칙성보다는
자연스럽고 비인공적인 율동감과 리듬을 표현하고 있는데,
대개의 마애각석의 서체가 모두 이러한 특징을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점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질박한 심미적 특징을 찾는 것이다.
노효왕각석(魯孝王刻石)
마치 완숙한 멋의 묘지명(墓誌銘)보다는 석굴의 조상기(造像記)에서 그 질박함을 일부러 취하듯이 말이다. 석문송을 “삼석(三石)” 중 하나로 칭하는데 전국시대의 석고문, 북위시대의 석문명과 함께 석문송을 더불어 일컬는 말이다.
양수경(楊守敬,1839~1915)은 평비기(評碑記)말하기를 “其行筆眞如野鶴閑鷗, 飄飄欲僊, 六朝疏秀一脈 皆從此出”이라 하여 ‘행필은 진실로 野鶴閑鷗(학과 갈매기)와 같으니, 신선이 표표(飄飄)히 날아오르려는 것과도 같다.
육조시대의 소수(疏秀)한 서맥(書脈)은 모두 석문송을 근거로 하여 탄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라 하여 석문송이 육조서예의 근본임을 강조하였으며, 강유위(康有爲,1858년~1927)역시 석문송을 한나라 예서 작품 중에서 예술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하여 이르기를 "楊孟文碑 勁挺有姿 與開通褒斜道 疎密不齊 皆具深趣-양맹문의 비는 굳세고 자태가 빼어나 개통포사도와 더불어 성글고 빽빽함이 같지않아 모든면에서 깊은 의취(意趣)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실로 석문송은 마애석각 중, 풍격과 기운(氣韻)에 있어서 한비(漢碑)에서는 둘도 없는 경일(勁逸)하고 호상(豪爽)한 서풍(書風)을 열어주었다고 평할 수 있는데. 따라서 석문송을 감평(敢評)하자면 골력이 강하고 살점이 적으니 근력이 풍부한 힘의 글씨로 근력과 골력을 나타낸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본다.
돈좌(頓挫)의 표현이 매 획에 비상(非常)치 않음이 없다.
어떤 때는 은근하고 간략한 듯 하여도 곳곳에 중후(重厚)하고 혼박(混樸)한 정취가 나타나는 것이 마치 뱀이 구불구불 기어 다니는 듯한 행필(行筆)의 모습을 보이며, 무엇에도 구속 받지 않는 듯한 도가적 방일(放逸)한 기운이 넘쳐흘러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방종함을 보인다.
따라서 아무리 보아도 그 기자(奇姿)함과 호매(豪邁)함이 무극하며 종횡(縱橫) 경일(剄逸)하여 서법의 진취를 이루고자 함에 유한한 경계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필세가 굳세고 용필에서 조세(粗細)한 변화는 매우 미묘하여 그 흔한 한예(漢隷)에서 보이는 자태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서예의 미를 논함에 있어 요구되는 대립적 관계가 있으니 대대관계(待對關係)라하여 상호 대립하여 모순된 현상을 일으켜 마치 상호 괴리된 현상 같아 보이나 오히려 그 참치부제함이 정연함에서 오는 식상함을 상쇄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원초적 미의 추구를 함양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데 본 석문송에 있어서는 그러한 제반 요소를 고루 지니고 있다고 평하고 싶다.
이를테면 대소(大小) 소밀(疎密) 방원(方圓) 곡직(曲直) 지속(遲速) 경중(輕重) 비속(肥瘦) 허실(虛實) 주객(主客) 이합(離合) 기정(奇正) 아속(雅俗) 음양(陰陽) 등의 대립이다. 이 모든 표현이 어우러져 자연주의적 미를 추구함에 서예도 예외가 아님을 잘 보여주는 예증(例證)이라 본다.
오랜 등나무와 칡이 서로 갈등(葛藤)을 빗 듯, 곡절하는 운세는 이미 행서 필의와 초서 필의의 시단(始端)적인 묘사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기필이 주로 원필로 이루어졌지만 기실 방필의 굳센 기운이 공장(空藏)에서 드러난다.
그림-1 여여 김삼선 선생의 의임작품
그림-2
이처럼 변화가 무궁하고 자재한 의취를 얻어 형체를 이루었으므로 조금도 인위적
조작된 느낌이 없다. 그래서 석문송은 한예(漢隷) 중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작품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비첩금낭을 토대로 석문송의 진수를 감상해 보고 석문송 본문의 주옥같이 연주(聯珠)된 문장을 가려 활용해 보자.
그림-3
紀綱有常<기강유상>기강이 있어 유상한 바라.
貞雅以方<정아이방>정절과 우아함으로 몸의 법도를 삼다.
寧靜烝庶<녕정증서>서민을 편안케 하는 정치를 펼침.
有勛有榮<유훈유영>공훈이 있고 영화가 있을 뿐이다.
明哉仁知 豫識難易<명재인지 예식난이>밝도다. 인과 지혜여, 쉽고 어려움을 미리 알도다.
履尾心寒<이미심한>범의 꼬리를 밟으면 마음이 서늘하듯, 매사에 항상 조심하라는 말.
淸凉調和<청량조화>맑고 서늘함이 조화를 이룸.
그림-4
脩禮有常<수례유상>예를 수행함에 법도가 있음.
知世紀綱<지세기강>인간사에 기강을 알다.
春宣聖恩 秋貶若霜<춘선성은 추폄약상>성은은 봄날의 따듯함 같이 선양되고 위엄은 가을에 내린 서릿발 같도다.
無偏蕩蕩 貞雅以方<무편탕탕 정아이방>편벽됨과 사심이 없어 호탕하니 정절과 우아함으로 몸의 법도를 삼다.
寧靜烝庶 政與乾通<녕정증서 정여건통>서민을 편안케 하고 정치는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
繹艱卽安 有勳有榮<역간즉안 유훈유영>어려움을 풀면 곧 평안하니 공과 영화가 있을 것이다.
君子安樂 庶士悅雍<군자안락 서사열옹>군자는 안락하고 서사(선비)는 열옹 하며 상인은 다 기뻐하고 농부는 기쁨을 함께 하도다.
그림-5
그림-6
綏億御彊<수억어강>편안한 마음으로 강직함을 어거함.
恢弘大節 讜而益明<회홍대절 당이익명>굳은 의지를 나타내며 대절을 넓히고 바른말로 더욱 충절을 나타내다.
讜而益明<당이익명>바른말로 더욱 충절을 나타내다.
揆往卓今<규왕탁금>옛 것을 헤아려 지금의 것을 밝힘.
原度天道<원도천도>천도를 근본 법도로 삼는다.
勤勤竭誠<근근갈성>부지런하고 성심을 다함.
榮名休麗<영명휴려>영예로운 이름은 매우 아름다운 것.
原度天道 安危所歸<원도천도 안위소귀>인간의 근본 법도
는 천도이니 평안함과 위태로움은 정해진 대로 돌아간다.
그림-7
그림-8
勤勤竭誠 榮名休麗<근근갈성 영명휴려>부지런하고 성심을 다하면 그 영예로운 이름은 매우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言必忠義<언필충의>말은 반듯이 충의를 나타내야 한다.
庶士悅雍<서사열옹>선비는 온화한 모습으로 즐거워 함.
그림-1 여여 김삼선 선생의 의임작품
*如呂 金三先-창신대 문예창작과 졸업/한국서예협회 거제시 지부장/대한민국서예대전 우수상/한국서예협회 초대자가/경남서예대전 운영,심사위원장역임.
그림-2 寧靜烝庶<녕정증서>서민을 편안케 하는 정치를 펼침.
그림-3 貞雅以方<정아이방>정절과 우아함으로 몸의 법도를 삼다.
그림-4 有勛有榮<유훈유영>공훈이 있고 영화가 있을 뿐이다.
그림-5 春宣聖恩 秋貶若霜<춘선성은 추폄약상>성은은 봄날의 따듯함 같이 선양되고 위엄은 가을에 내린 서릿발 같도다.
그림-6 君子安樂 庶士悅雍<군자안락 서사열옹>군자는 안락하고 서사(선비)는 열옹 하며 상인은 다 기뻐하고 농부는 기쁨을 함께 하도다.
그림-10
그림-7 恢弘大節 讜而益明<회홍대절 당이익명>굳은 의지를 나타내며 대절을 넓 히고 바른말로 더욱 충절을 나타내다.
그림-8 知世紀綱<지세기강>인간사에 기강을 알다.
그림-9 履尾心寒<이미심한>범의 꼬리를 밟으면 마음이 서늘하듯, 매사에 항상 조심하라는 말.
그림-10 脩禮有常<수례유상>예를 수행함에 법도가 있음.
[출처] 축군개통포사도각석(鄐君開通褒斜道刻石)과 석문송(石門頌)|작성자 고은글씨
첫댓글 고박하고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 잘 보고 갑니다. 다음에도 좋은 작품 부탁할께요.
겸임교수 되심 축하의 맘 올려요. ^^
아 그렇게 좋은 소식이... 저도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이렇게 빨리 좋은 평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인사가 늦었습니다. 덕산선생님 올 한해 좋은 작품 많이 하시길 빌어봅니다.
잘 보고 갑니다.
청대님 좋은작품과 함께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자주 공부할 기회 주세요. ^^
저는 청재 민승준입니다. 청대는 김동훈 님입니다. ^^ 같이 중국에 있고 전각을 공부하니 호가 조금 비슷해서 헷갈리렸나 봅니다. ^^ 한자로는 많이 다릅니다. ^^ 淸齋 靑臺
정성이 대단하십니다.너무수고하셨습니다.감사드립니다.
귀한작품 감사합니다 ...
좋은글 잘읽고감니다
멋진 작품 잘 감상하고 갑니다.
과찬이십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이제서야 작품창작하는 방법을 알았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제 대학시절 아호와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승준형님 작품 잘 감상했어요. 농묵,담묵,질 삽의 느낌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입니다..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들게 하는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느낌이 났다니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작품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작년의 글에 이제서야 답글 남깁니다. 즐겁게 봐 주셔서 저도 기쁩니다. 최근에 작업할 여유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