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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9일 눅 9:28~36 하늘에 속한 자로 살라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2022년도가 이제 밝은 지 1주일이 좀 지났는데요. 우리는 과학이 발달하고 고도산업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화두가 건강입니다. 삶이 풍요로워지고 의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건강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삶의 제1순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간의 건강문제는 신체로부터 정신으로 확대되었는데요. 스트레스관리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마음 상태나 정신건강에 대해서도 점차 관심이 높아져가도 있습니다.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 신체적인 결함과 함께 정신적 상태의 불균형 상태에서도 비롯됩니다. 세계보건기구(WHO, 2000)에서 정의한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만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만족한 안녕(Wellbeing)의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특히 소속감이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중요한데요. 일정 그룹에 속하면 어려운 시기에 상호 지원을 받으면서 문제를 해결을 할 수 도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이 있기에 그룹을 잘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우리의 소속감은 친구, 가족, 각종 동호회, 정치나 종교단체 등이 있는데요. 성도들에게도 신앙안에서 이러한 그룹들로 인해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섬기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늘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하늘에 시민권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금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진정한 영적 웰빙을 구한다면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로, 또한 하늘에 속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만약 성도가 마치 땅에 속한 자들처럼 썩어질 것들에 집착하며 살아간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부활의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고들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전에 세 제자, 즉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변화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1. 하늘에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28~31절)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의 5대사건이 있는데, 성육신, 변모, 십자가 수난, 부활, 승천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중에서 ‘변모’(Transfiguration)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18~20절)과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21~27절)을 말씀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십니다. 몇일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의아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진정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임을 교육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 광채가 나더라”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마 17:2)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본문은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 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줍니다. 결국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가 진정으로 ‘메시야’라는 사실(35절)을 확실히 해줍니다.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산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변화는 예수께서 장차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더라도(22,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할 것(빌 2:8~11)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영광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롬 8:34)과 부활 승천후 다시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세례요한도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1:6)이었으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이 참된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로부터 온 자요 하늘에 속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위에 계셨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2. 땅에 속한 자, 세 제자(32~33절)
아담의 후손은 모두 땅에 속한 자이다. 아담의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죄가운데 자라나고 살게 된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자는 구원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위에서 오시는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밖에는 없다(행4:12). 베드로와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함께 선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된다(32절). 순간 예수의 영광에 압도되어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 대표하는 인물로, 그들의 대화를 통해 구약에 예언된 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때가 이제 드디어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다(31절). 그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33절)라고 한다. 베드로는 몇 일 전 들었던 예수의 수난예고(22절)와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31절)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듯하다. 제자들은 거듭되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묻기조차 두려워했고(45절), 변화산에서도 주의 수난이 분명하게 예고되었지만, 곤고하여 졸다가 엉뚱한 질문을 하였으며(33절), 서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누가 크냐’고 다툼과 논쟁을 일으켰다(46,47절). 또한 귀신들려 간질병을 앓는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음(37~43절)과 더불어 이기적인 동기에서 그들과 친분관계가 없는 자들의 사역활동에 대해서 시기했다(49절). 이와 같이 제자들은 언제나 영적 차원의 문제보다 육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영적무지함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된 이들은 아직도 땅에 속해서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3. 하늘에 속한 자로 살라
예수님은 성경에서 안타까운 모습으로 제자들을 책망하신다. 그 교훈의 핵심은 하늘에 속한 자로 살라는 것이다. 땅에 속한 자에서 하늘에 속한 자가 되려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셨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거듭나야 합니다. 즉 하늘에 속한 자는 사도 바울처럼 자기 마음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옛날 청교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 번만 죽고, 한 번만 태어나면 두 번 죽습니다.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 번만 죽는다는 말은 주님을 영접함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언젠가 육신은 한 번 죽지만, 영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과 사후에 있을 둘째 사망 곧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 은 물로 씻어 깨끗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도 그것은 육일뿐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두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 태어난다 해도 인간의 죄성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게 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다시 태어날 때 받는 생명은 영적 생명인데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요 11:25).
그러면 하늘에 속한 자로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째, 하늘에 속한 자로 살려면 비록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거인 ‘십자가의 도’(23~27절)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모라비안 교도의 진젠도르프 백작은 영적인 지도자로서 1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며 크게 쓰임받았는데요. 그의 삶의 전환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면서 부터입니다. 그가 어느날 미술 전시회에 들렀다가 ‘스타인백’이라는 사람이 그린, 예수님이 십자가가 달린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머리에는 굵은 가시관을 쓰고 양손과 양발, 머리와 옆구리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밑에 “나는 너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의 삶이 변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나는 너를 위해 몸버려 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깨닫고, 그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여 자신의 전 인생을 복음사역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그는 후에 모라비안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10년동안 100 명의 선교사를 세계 각 곳으로 파송하는 큰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의 부활하심과 같이 살아남으로 새생명을 얻는자,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자는 사도바울처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갈 6:14) 충분한 이유를 갖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들의 삶에서 자랑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적용의 말씀) 여러분은 여러 분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나요?
둘째,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자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마6:20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늘에 속한 자는 이 땅이 아닌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합니다. 주님은 땅에 쌓아둔 보물은 부패되고 없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어리석은 부자를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재물로 섬기기에 인색하지만, 자신의 육신을 위하여는 잔치하며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영원히 부패되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되는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는 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히11:16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본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나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세상을 향한 소망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이 세상을 향하여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롯은 소돔성을 거처로 삼아 살아가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소망’이라고 하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 이 곡을 지으신 분이 정말 하늘에 속한 자로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나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걸. 내 아버지 널은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있네. [후렴] 주님 그 나라에 이를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세째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자는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을 소망하되 땅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높이고 도리어 ‘자기부인’(23,24절)을 통한 희생과 헌신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땅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할 지라도 하늘에 영광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닏. 그러므로 성도는 한눈으로는 하늘을 바라보고, 한 눈으로는 땅의 사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면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도취되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광경을 모두 물리시고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만 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23절)고 하신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직은 영광을 누릴 때가 아니니,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에만 머물려 하지 말고, 불의와 맞서고 죄와 싸우며 약한 자를 돌보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영광은 그 길 끝에 있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