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가는 길
◇세월 속에 묻힌 ‘王都’부여
언제부터인가 부여는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수학여행 때면 빠지지 않던 필수 코스. 앨범 속에 백마강과 낙화암의 빛바랜 사진이 남아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요즘 가보고 싶은 곳으로 퍼뜩 부여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길이 불편했잖유. 학창시절에 백마강 낙화암만 둘러보고 나서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한다니까”
그러나 지난해 12월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이제는 가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 부여는 가장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왕도. 사적지와 문화재가 179점이나 흩어져 있다. 조금만 다리품을 팔면 곳곳에서 진귀한 역사의 보물들을
만날 수 있다.
백제를 만나기 위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궁남지. 궁남지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 때인 634년
‘궁 남쪽에 못을 파고, 못 언덕에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에서 무왕은 왕비와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1만여평이나 되는 연못 한가운데 포룡정이란 정자가 섬처럼 떠있고, 다리로 이어져 있다. 경주 안압지보다 40년 먼저 생겼다. 이러한
백제의 조원(造園)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원문화를 탄생시켰다.
김무환 부여군수는 “주민들은 이곳을 마래방죽이라 불렀는데 옛날 궁남지 주변에 마밭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궁남지가 바로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 설화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설명했다. 백제의 무왕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공주가 밤마다 마동이(무왕)와 잠을 잔다’는 노래를
퍼뜨려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마래’가 무왕이 아이들에게 나눠준 마와 관계있다는 것. 무왕·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원효대사·요석공주의 설화와
함께 삼국시대 최고의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순서가 맞지 않는 얘기지만 궁남지에는 또다른 무왕 설화가 얽혀 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어머니가 연못에 살던 용과 잠을
자고 난 뒤 무왕을 잉태했다는 기록도 있다.
궁남지 일대에는 요즘 연꽃이 한창 아름답게 피어 있다. 부여군은 궁남지 주변 10만평을 매입한 뒤 1만여평의 연지를 따로 조성했다. 지난
5월 홍수련을 시작으로 왜개연, 개연, 물양귀비, 노랑어리연, 백수련, 가시연, 백련 등 10여종의 연꽃이 앞다퉈 피고 있다.
연꽃은 9월까지 이어진다. 홍련은 지금이 한창 절정기다. 꽃송이가 어린아이 얼굴만큼 크고 탐스럽다. 연잎 위로 꽃대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홍련을 보고 있으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무릎을 탁 치며 백제금동향로(국보 제287호)를 떠올린다. 금동향로는 1993년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굴돼
삼국시대 문화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보물 중의 보물’. 바로 연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
연꽃을 보려면 오전에 찾아야 한다. 잎이 작은 수련류는 이른 새벽 꽃봉오리를 터뜨렸다가 햇살이 정수리를 쪼는 오후가 되면 잎을 닿는다.
자오련(子午蓮)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요즘은 가시가 돋친 가시연, 쟁반처럼 떠있는 수련, 고고한 백련 등을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궁남지에서 벗어나 차로 5분거리 내에 정림사지가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 석탑의 완성미를 볼 수 있는 작품.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오던 초기 작품으로 조형미가 뛰어나다. 높이 8.3m의 장중한 석탑이지만 둔중하지 않고 날렵하면서도 위엄을 갖췄다. 연대기로는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보다 앞선다고 한다.
“정림사지 석탑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탑 서쪽에 어느 회사 건물이 들어서면서 낙조를 가려버렸어요”
낙조를 만나려면 구드래 나루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학자들은 구드래가 일본의 ‘구다라’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큰
나라’라는 뜻의 구다라가 바로 백제를 의미한다는 것. 백마강이 휘감아도는 나루터 주변 둔치의 수십만평 잔디들판이 광활하다. 잔디밭 사이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은 자전거 하이킹 코스로 그만이다. 나루터에는 요즘도 옛날처럼 유람선이 떠다닌다.
둑방 옆에는 조각공원이 새로 들어섰다. 99년 국제조각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세계 각국 거장들의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밖에 의자왕의 가묘가 있는 백제왕릉군(능산리 고분), 2층 극락전과 고려탑이 아름다운 무량사, 강변에 있는 4개의 정자 등 볼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고구려 장수왕의 칼에 개로왕을 잃은 뒤 한성백제시대를 마감하고 공주에서 64년 동안 국력을 키웠던 백제. 성왕이 다시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부여로 천도한 뒤 의자왕까지 6대 123년에 걸쳐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꽃피웠던 고도. 미륵반가상의 은은한 미소, 아라비아의 것보다 화려한 백제의
문양, 고도를 둘러싼 산성…. 부여를 돌아보면 잊혀진 백제의 찬란한 역사가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백제/천오백년, 별로/오랜 세월이 아니다/우리 할아버지가/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몇번 안가서/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부여출신 시인 신동엽의 ‘금강’처럼 부여에선 백제의 숨소리가 들린다.
여행길잡이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남공주IC나 탄천IC를 이용할 수 있지만 초행자들은 서논산IC에서 빠져나온다. 부여 방향 국도 4호선을 탄다. 길은 왕복 2차선.
부여읍까지 15분 걸린다. 가는 길목에 백제왕릉군이 있다. 공주와 갈라지는 부여읍내 3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직진하면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를
끼고 군청쪽으로 좌회전하면 왼쪽으로 정림사지와 궁남지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군청에서 정림사지와 궁남지는 모두 승용차로 5분거리다. 국도
4호선을 타고 군청을 지나 보령쪽으로 직진하면 백제대교. 다리 바로 옆 둑방길로 들어서면 구드래 나루터로 이어진다. 부여군청 문화관광과(지역번호
041)830-2224. 충남 종합관광안내소 830-2585.
부여읍 부여여중 뒤에 2개월 전 세워진 ‘부여문화관광호텔’(835-5252)이 깨끗하다. 비교적 객실이 넓다. 온돌과 트윈베드룸
8만5천원. 식사로 메로구이와 메로매운탕을 잘한다. 읍내에 있는 ‘방울이네 집’(833-7772)은 우리콩으로 만든 숨두부 전문점. 구드래 나루
옆 ‘어라하’(832-5522)는 홍삼 찌꺼기를 사료로 먹여 키운 한우고기를 판다. 육질이 부드럽다. 규암면 규암리에 있는
‘영일루’(835-9242)는 30년 역사의 해장국집.
올해 제1회 궁남지 연꽃축제가 8월2일 열린다. 전통다도 시연, 연차 시음회, 연꽃 기획전, 연꽃문양 탁본체험, 문화유적 사진전,
원두막짓기대회, 연꽃 사생대회, 품바 공연, 국악 공연 등이 마련된다. 궁남지 사적관리사무소. 830-2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