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거짓 예언자가 여기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여 넘길 것입니다.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마태 24, 11).
주 예수의 이 예언 말씀은 16세기에 놀랄 정도로 맞아 들어갔다. 즉 루터를 위시해 쯔빙글리나 칼빈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각각 이단을 주장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세우므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여러 지방의 인심을 현혹케 했다.
그러나 자비 깊으신 하느님께서는 가련한 양(羊)인 신자들이 포악한 사람인 이단자들에게 현혹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인의 유명한 인물을 보내셔서 교회를 개혁케 하셨다. 그들은 즉 독일에 있어서는 성 베드로 가니시오,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프랑스에 있어서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이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1567년 8월 21일에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사토 드 살에서 후작가(候爵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모두 경건하고 독실한 신자였고, 특별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아들의 교육을 세심한 주의로 시행하는 동시에 그 순진한 어린 마음에 신앙과 덕행의 씨를 뿌리며 이를 양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첫째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파리에 있는 예수회의 대학에 입학하고 오래지 않아 그 지혜와 성실한 점으로 단연 출중한 성적을 올려 교사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신앙 도덕을 위협하는 많은 위험 중에서는 자숙하여 기도와 고행에 힘쓰고 그러한 십자가의 길로써 무사히 백합화와 같은 마음을 끝까지 보존할 수가 있었다. 그가 가장 정덕에 대해 노력한 것은 그때에 비로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렸을 때 성 마리아 제대 앞에 엎드려 일평생 동정을 지킬 서원을 발한 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파도바 대학으로 가서 신학과 법학 박사의 학위를 획득하고 대 성공리에 졸업했지만, 옛 고향인 사보아에 금의환향(金衣還鄕)하기 전에 먼저 성도(聖都) 로마를 방문하고 세상에서 출세해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사제가 되어 희생의 생활을 하려고 결심했다. 그런 줄도 모르던 아버지는 벌써부터 그를 사보아에서 변호사 개업을 시킬 예정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관계로 아들의 희망을 듣고 나서 즉시 승낙하게 되어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수도 생활을 위해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교황에게 아네시 주교의 참사원(參事員)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제단에서 처음으로 미사성제를 드린 것은 1593년 12월 초순경이었다. 그 후 그는 뜨거운 신앙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며 사제로서의 성무를 완전히 이행했고, 아네시 주교는 그의 수완을 인정하여 특히 중대하고 어려운 사명을 그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보아의 남부에서 세력을 부리고 있던 칼빈파 이단에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개종시키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지만 일단 착수해보니 그 사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이단자들에게 쫓겨 깊은 산으로 피신한 때도 있었고, 초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일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위험하게도 생명을 빼앗길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은 영웅적인 인내와 온순과 겸손으로 취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후 비로소 크리스마스 밤 미사를 이단의 중심지에서 봉헌하고 8백 명의 개종자에게 성체를 영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칼빈파의 지반은 점차 붕괴하여 연거푸 개종자들이 증가해, 1597년에는 프란치스코의 노력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7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참으로 사보아의 남부에 있던 칼빈파의 이단이 전멸된 것은 오로지 성인의 감탄할 만한 기도와 희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네시 주교는 자기의 후계자로서는 이 젊은 사도 프란치스코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교황에게 추천했으므로, 그는 1599년에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는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어도 항상 겸손하며 자기가 맡은 영혼을 돌보는데도 각별한 열의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자기 교구에 있어서 성직 지원자의 전형(銓衡)을 엄격히 하고, 참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을 뽑고, 모든 이에게 모범을 보이는 완덕의 생활과 그의 스승다운 깊은 학문 등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은 주교직에 있으면서도 주일에는 신자들에게 도리를 설명해 주고 성사를 주는 등 보통 사제들과 같이 영혼의 지도에 노력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사도적 활동이 세상에 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유명한 명성은 프랑스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국왕은 파리나 리용의 대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칼빈파 이단을 전멸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를 초빙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시에서 강론과 기타 모든 방법으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덕이 높고 학식이 많은 성인에게 영적 지도를 청하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여서 그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기에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지만, 끝까지 친절하고 온순한 주교는 서간으로써 각자에게 적당한 권고와 교훈을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의 희망을 채워주려고 했다. 또 그의 유명한 저작 필로테아라는 신심생활의 입문서도 그의 지도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청으로 저술한 것이다.
성인의 개인적 지도로 가장 훌륭하게 된 이는 한 수녀원을 창설한 샹탈의 백작(伯爵)부인 성녀 프란치스카였다. 성인은 1604년 사순절의 강론때에 처음 프란치스카를 만나 즉시 그녀가 하느님께 간선된 부인이라 이미 1610년 6월 6일 두 동료와 같이 하느님의 전선을 찬미하여 유화(柔和), 소박(素朴), 자비(慈悲)의 정신을 세상 사람에게 알려주는 새 수도회(방문회)를 세웠다.
그 이상(理想)에 대해서 성 주교 자신의 얼마나 열렬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가는 그가 프란치스카에게 말한 다음의 말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는 언제 참된 사랑과 온순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 나는 온전히 자기를 끊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모든 사람들의 희망대로 하고 그를 위해 진력하고 싶다!" 이와 같이 사랑이 대단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아무리 완고한 이단자라 해도
그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전후 20년간 주교직에 있으면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감화를 주며 제네바에 있는 600여개의 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심을 북돋아 주고 교리를 모르면 그들에게 잘 깨닫게 해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중부 프랑스, 동부 프랑스의 사람들도 이 성스러운 주교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인을 초대하고 교훈을 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무와 영혼의 지도에 진력한 결과, 과로하게 되어 아직 노년이라 할 수 없는 55세 때인 1622년 12월 28일, 리용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모인 사람들이 병자를 위한 기도문을 외울 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신심 생활 입문(1609년)과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 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55년에 시성되었다. 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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