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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 주석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태복음 13:1-23)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다. 1. "언제" 그리스도는 이 설교를 행하셨는가? 이 설교는 그가 앞장(12장)에서 행하셨던 설교와 똑 같은 날에 행해졌다. 그는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나 그를 보내신 자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피곤하시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둘 따 마지막 때에 대하여 설교하셨으며, 또한 실례를 들어 그의 교회에 대해 실천할 것을 권고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아야"한다(전 11:6). 귀담아 잘 들은 오후 설교는 아침 설교를 추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설교(아침 설교)를 꽉 붙잡으며, 또한 확실한 장소에 고정시킬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아침에 그의 원수들에 의해 반대와 비난을 받으셨고, 그의 친구들에 의해 혼란과 방해를 받으셨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과업을 계속 수행하셨다. 오후에는 그가 이러한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 있어서 부딪치는 모든 난관들을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극복하는 자는 아마도 그 난관들이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만큼 그렇게 회복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대항하라. 그러면 그것들은 도망갈 것이다. 2. "누구에게" 그는 전파하셨는가?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몰려들었으며," 그들은 모두 청중들이었다. 거기에 어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있었다는 기사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은 그가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는 기꺼이 들었지만(마 12:9, 14),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시더라도 바닷가에서 설교를 듣는 것은 자기들을 저속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편이 나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없기 때문에 그는 조용하게 또한 아무런 방해 없이 설교를 진행하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종 종교의 "허식"이 없는 곳에 종교의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자가 복음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해변"에 가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왕이 있는 곳에 궁전이 있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비록 그것이 해변가라고 할지라도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씀으로 좋은 것을 얻으려는 자는 그 말씀이 옮기는 곳은 어디든지 기꺼이 따라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법궤가 옮겨지면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야비한 중상과 제안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애써 수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만큼 여전히 그를 따랐다. 그리스도는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추종을 받으실 것이다. 3. "어디에서" 그는 이 설교를 행하셨는가? (1) 그의 집회 장소는 바닷가였다. 그는 집을 떠나(왜냐하면 거기에는 청중을 수용할 만한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외로 나가셨다. 이러한 설교자를 마땅히 로마 극장과 같이 설교하기에 편리하며 또한 웅대하고 값진 장소를 가져야 했지만 그것 하나 가지지 못한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겸손(비천)의 신분에 머무셨으며 또한 이 일에서도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친히 그에게 합당한 영예를 거절하셨다. 그는 자신이 살집을 가지지 못했던 것처럼, 또한 그가 설교할 예배당 하나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배의 외적 환경에 있어서 웅장한 것을 탐내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허락하신 장소를 최선의 편리한 장소로 난들 것을 가르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마굿간으로 몰려들었으며, 지금 바닷가로 모든 사람들은 마음대로 올 수 있었다(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바닷가에 계셨다). 진리 그 자체이셨던 그리스도는 이교의 신비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구석진 곳(adyta)을 찾지 않으셨다. "지혜는 길거리에서 부른다"(잠 1:20; 요 13:20). (2) 그의 강단은 배였다. "특별히 지은"(느 8:4) 에스라의 강단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곳을 더욱 유용하게 사용하셨다. 이렇게 위대하신 설교가(a Preacher)가 있는 곳은 반드시 위엄이 있고 성별 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 비록 설교하기에 불편하고 초라한 장소를 가졌을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관찰하기를, 사람들이 마르고 견고한 땅에 서 있었을 때 설교자이신 주님은 위험하게 물위에 계셨다고 하였다. 사역자들은 누구보다도 고통을 받게 되는 법이다(고통에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다). 이것이 참된 설교단, 즉 배의 강단(a ship pulpit)이었다. 4. "무엇을, 어떻게" 설교하셨는가? (1) "그는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셨다." 아마도 여기에 기록된 것들보다 더 많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것은 무엇보다도 탁월하고 필수적인 말씀, 즉 우리의 평화에 속하며 하늘 나라에 속한 말씀들이었다. 그것들은 쓸모 없는 시시한 말씀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영원한 결과에 대한 말씀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많은 말씀들을 우리에게 하셨을 때 우리는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함이 없이 주의를 집중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2) 그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는 종종 교훈을 주는 어떤 지혜스럽고 무거운 말씀들을 전해 준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복음에서는 이 비유가 일반적으로 계속된 비사나 비교를 전달해 주고 있는데,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것들은 이 비유에 의해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차용된 언어로 기술되었다. 이 교수법은 유대인 랍비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인들, 그 밖의 동양의 현자(賢者)에 의해 매우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비유는 매우 유익하며 또한 재미도 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많이 사용하셨으며, 또한 그것으로 백성들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셨으며, 그들 자신의 말로 바꾸어 말씀하셨다(의역).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푸셨으며"(호 12:10) 또한 지금은 그의 아들에 의해 비유를 사용하시고 있다. 정녕 그들은 하늘로부터, 하늘에 속한 일들을 말씀하시고 그러면서도 세상적인 일들로부터, 차용한 표현들로 그들에게 돌려주시는(옷 입혀 주시는) 그를 존경할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2절을 보라. Ⅰ.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데 약간 놀랐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는 설교하실 때 비유를 많이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으로 그 백성들이 이해성을 가지고 듣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말하지 않고(그들은 비유를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저희"에게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전파된 말씀에 의해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교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강하다면, "연약한 자의 연약성을 감당할 수"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는 광범위하게 대답하시고 있다(11-17절). 이곳에서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비유를 쓰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들이 즐거움으로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던 자들에게는 보다 명백하고 쉽게 되며 동시에 고의적으로 무지하였던 자들에게는 어렵고 애매모호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와 같이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맛(향기)"이 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맛"이 될 것이다. 비유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애굽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들을 혼란케 하는 어둠이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들을 혼란케 하는 어둠이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들을 위로하는 광명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비유는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동일한 빛이 어떤 사람의 눈을 지시해 주고. 또 어떤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해 준다. 1. 이 이유는 설명되어 있다(11절).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다시 말하면, (1) 제자들은 지식을 가졌으나, 백성들은 가지지 못하였다. 너희는 이미 이러한 비밀들에 대해 알았으므로 이러한 쉬운 방법으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무지하며, 아직도 어린 아기이며 또한 다른 방법으로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한 비유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눈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는, (2) 제자들은 복음의 신비에 대한 지식 얻기를 열망하였고, 비유를 탐구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러한 신비에 대하여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헛되이 들으며 또 더욱 찾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비유의 의미를 물으려고도 하지 않는 육적인 청중들은 결코 지혜롭게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나태함에 해당되는 고통을 당연히 받을 것이다. 비유는, 부지런한 자를 위하여는 좋은 과일을 보존하지만, 나태한 자에게서는 닫아 버리는 조개(shlel)와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천국에는 신비들이 많이 있으며, "상충됨이 없이 경건의 비밀은 크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죄, 중보, 창의, 그리스도와 연합에 의한 성화, 그리고 그 속의 모든 사역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들"이며, 이 신비는 신적 계시가 없이는 결코 발견될 수 없으며(고전 15:51), 또한 이 때에도 제자들에게만 부분적으로 발견되었으며, 장막이 찢어지기 전에는 완전하게 발견될 수 없다. 그러나 복음 진리의 신비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찾고 탐구하는데, 실망을 주지 않고 오히려 격려할 것이다. [1] 이 비유는 이러한 신비들을 잘 알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은혜스럽게 주어졌다. 지식은 하나님의 첫 번째 은사이며, 또한 두드러진 선물(잠 2:6)이다. 그것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항구적인 제자들이며 수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점점 더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또한, 그와 더불어 대화하면 할수록, 우리는 복음의 신비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2] 그것은 복음의 신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진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다. 또한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의 지식이다.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에 대한 경외"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나 비유의 의미를 빨리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색맹자와 같이 "중생"에 대하여 물었던 것이다. [3] "이 지식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 또한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은혜는 그의 자신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주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신다(롬 11:35). 그 차이는 앞에서와 같이(마 11:25, 26) 하나님의 주권으로 결정되어야만 한다. 2. 이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들을 분배함에 있어서 준수하시는 규칙에 의해 더욱 설명되고 있다. 즉 그는 그러한 선물들을 보람있게 활용하는 자에게는, 그것들을 부여하시지만, 그것들을 파묻어 버리는 자에게서는 빼앗아가 버린다. 게으름으로 자기들의 재산을 축내는 자들에게보다는 근면하게 재산을 증가시키는 자들에게 돈을 맡기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규칙이기도 하다. (1) 여기에는 은혜의 선택을 따라 참된 은혜를 소유한 자, 즉 그것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것을 사용하는 자에게 대한 약속이 있다. 그는 더욱 풍성하게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많은 은혜의 보증(earnests)이시다. 그는 여기에 기초를 두시며, 그 위에 건축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금 가졌던 지식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때 더욱 풍성한 것을 가질 것이다(행 2장). 은혜의 "진리"를 가진 자는 원만한 영광에 이르는(잠 4:18) 은혜의 "증가"(the increase)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요셉"이란 말은 "그가 더할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창 30:24). (2) 여기에는 은혜를 바라지 않는 자, 그가 가진 은사와 은혜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경고(위협)가 있다. 그들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견고한 원리도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가지고 있지만 가진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가진 것 또는 가졌다고 보여지는 것을 "빼앗길 것이다." 그의 입들은 시들 것이며, 그의 은사들은 쇠할 것이다. 은혜의 방편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곧 파산자가 될 것 같은 자들에게서 그의 달란트를 "회수하실 것이다." 3. 이 이유는 그리스도와 관련을 가진 두 가지 사람들이 언급됨으로써 특별하게 설명되고 있다. (1) 어떤 사람들은 자진해서(willingly) 무지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유를 듣고 재미있어 하였다(13절).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백한 설교의 분명한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두움 속에 버려져 있다. 그리스도의 인물을 보지만, 그들은 그의 영광을 보지 못하며, 그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 그의 이적을 보고 그의 설교를 듣지만 어떤 관련이나 적용을 가지면서 보고나 듣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복음의 빛을 보고 복음의 소리를 듣지만, 그것이 마음에 이르거나 그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2]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에게서 빛을 가져가 버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당연하다. 무지한 자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와 같이 취급하시는 것은 그의 제자들에 대한 자신의 두드러진 은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제 이러한 사실에서 성경 말씀은 성취될 것이다(14, 15절). 이 말씀은 이사야 6장 9, 10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가장 명백하게 복음적인 은혜에 대해 말했던 복음적인 선지자(이사야)는 복음에 대한 멸시와 그 멸시의 결과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 말씀은 신약 성서에서 6번이나 인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즉, 복음시대에는 영적인 심판이 가장 일반적이 될 것인데, 이 심판은 거의 소리(소음)가 없지만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시대에 있었던 죄인에 대하여 언급되었던 것이 그리스도 당시에 있던 죄인에게서 성취되었다. 또한 여전히 매일 성취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완악한 마음이 동일한 죄를 보존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의로우신 손은 동일한 형벌을 부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첫째, 죄인들의 고의적인 맹목(소경이 됨)과 강퍅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자신들이 죄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졌다." 그것이 "커지면" 그 말씀도 커진다(역주:말씀의 성취를 가리킴). 즉 이 말씀은 육욕성과 무감각성을 의미한다(시 119:70). 하나님의 말씀과 지팡이 아래에 있으면서도 "살찌고 부패하였던"(신 32:15), 여수룬과 같이 멸시를 받게 된다. 마음이 이와 같이 무거울 때 귀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들은 성령의 속삭임을 전혀 듣지 못한다. 크게 부르는 소리를, 비록 그 말이 가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또한 그 말에 하등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들은 "귀를 막고 있다"(시 58:4, 5). 또한 그들은 무지하려고 작정하였으므로 지식의 판단력을 닫아 버렸다. 또한 그들은 눈을 감았기 때문에 의의 태양이 떠올랐을 때 세상에 오신 빛을 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창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요 3:19; 벧후 3:16). 둘째, 이러한 것(소경)에 대한 공평한 형벌인 재판상의(judicial) 소경에 대한 묘사.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너희가 가진 은혜의 방편이 너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행할지라도 그들이 계속적으로 너희를 판단한다면 그들에게 대한 축복이 거절될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옥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상태는 메마르고(죽고) 어리석고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가장 생명력 있는 규율 아래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섭리를 보면서도 어느 것에서든지 그의 뜻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죄요 심판이다. 다음 사실에 유의하라. 즉, "깨닫는 마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또한 그는 종종 의로우신 심판의 방법으로 그가 들을 귀와 보는 눈을 주셨던 사람들에게 그것을 무위(無爲), in vain)로 돌리신다는(거절하신다)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인들의 유혹을 택하여(사 6:4), 그들을 자신의 마음의 정욕에 내버려둠으로써(시 81:11, 12) 그들을 큰 파멸로 넘기시는 것이다. "그들을 버려 두라"(호 4:17).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창 6:3). 셋째, 이것에 대한 무서운 결과와 결말. 즉 "그들이 볼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이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은 회개(돌이키는데)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의 사역에 있어서 사람을 이성적인 행위자로 취급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끈(또는 속박, cords)으로 이끄시며, 눈을 여심으로 마음을 바꾸시며, 언제 "어두움에서 광명"(행 26:18)으로 돌이키심으로써 "사탄의 능력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이키신다. 2. 참으로 하나님께 돌이킨 자들은 확실히 그에게서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돌이킨다면, 나는 그들을 고칠 것이며, 구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죄인들이 당한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돌이킴이 없이 구원받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3.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그리고 종종 그의 은혜의 제안을 거부하고 그 능력을 거절한 자들에게 그의 은혜를 거절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로는 한동안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하였으며(출 8:15, 32), 그 후에는 하나님이 그를 강퍅케 하셨다(마 9:12; 10:20). 그러므로 우리는 신적인 은혜를 거스려 범죄함으로써 그것을 잃지 않도록 두려워하자. (2) 또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또한 참으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러한 비유들에 의해 특별히 그것들이 설명되었을 때 지식을 많이 얻게 되었다. 비유들에 의해 하나님의 일들은 더욱 분명하고 쉽게 되었으며, 또한 더욱 이해하기 쉽고, 친근하게, 기억하기가 더욱 쉽게 되었다(16, 17절). "너희 눈은 보고, 너희 귀는 듣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들었다. 그들은 많이 보았고, 더 많이 듣기는 열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보다 더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날마다 청종함으로써 이러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그것을 날마다 가져야만 하며 그것을 은혜스럽게 지녀야만 하였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것을, [1] 축복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그것은 너희의 행복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에 대해 빚진 것은 행복한 일이다." 메시야의 날에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않을 것이라"(사 32:3)는 사실은 약속된 축복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적으로 아는 초라한 신자의 눈은 하나님을 모르는 위대한 학자나 경험 철학의 대가의 눈보다 더 복이 있다. 다른 신들을 섬기기 좋아하는 자들은 "눈을 가졌으나, 보지 못한다." "너희의 눈은 복이 있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된 축복은 올바른 이해와 천국의 신비에 대한 적절한 향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성화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지으신 것, work)이다. 그것들은 그의 은혜의 역사(잠 20:12)이다. 그것들은 축복된 역사로써 "지금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는 자들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때 능력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무지 속에 내버려진 사람들의 불행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축복을 설명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눈을 가졌으나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복이 있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두드러진 은혜이며, 또한 이 때문에 그 지식은 큰 의무 아래 놓여있다. 요한복음 14장 22절을 보라. 사도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신적인 진리의 분명한 발견에 의해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파숫군의 눈은 마주 보게 될 것이다"(사 52:8). [2]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에 의해 열망되었으나 주어지지 않은 탁월한 축복으로 말씀하고 계시다(17절). 복음의 빛을 희미하게 보았던 구약의 성도들은 더욱 더 찾으려고 열심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와 예언들만을 가졌으며, 오히려 그 실체(Substance), 즉 그들이 확고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것들의 영광스러운 끝을 보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큰 구원, 즉 이스라엘의 위로자를 보기를 원하였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때의 완성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더욱 알려고 열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 신적인 은혜는 선지자와 의인에게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해 있던 세대에 따라 발견되었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진 하늘의 사랑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이 보기를 열망하였던 것들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아직 빛에로 데려오기를 작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스러움이 그의 계획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에도 지금과 같이 "계시된 영광은 있었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될"(히 11:40) 어떤 것이 보존되어 있었다. 셋째,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근면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속죄에 대한 계시에 있어서 구약 시대에 살았던 자들이 가졌고 즐겼던 것에 비하여, 복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즐기고 있는 방편들과 주어진 발견(계시들)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구약에 비하여 신약의 유익(특권)은 무엇인가를 살펴 보라(고후 3:7; 히 12:18). 또한 우리의 향상이 우리의 특권에 조화가 되는지를 살펴 보라. Ⅱ. 여기에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들 중의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씨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이다. 또한 그 비유와 그것에 대한 설명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비유들은 철학적인 개념이나 사색들, 또는 특수한 자연 현상에서 인용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들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것은 손쉽게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매우 분명한 것들로부터 인용된 것으로써 매일 관찰할 수 있고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들 중 많은 것이 씨뿌리는 자나 가라지의 비유와 같이 농부들의 직업(명칭)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하신 것은, 1. 이로 말미암아 영적인 일들이 보다 분명하게 되고 또한 잘 아는 비유들에 의해 더욱 이해하기가 쉽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이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행동들이 정신적인 의의로 해석되고(spiritualize), 또한 우리들이 종종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그러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즐거움으로 묵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에 우리의 일손이 바빠질 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인도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더불어 이야기할 것이며, 우리와 더불어 친근하게 대화할 것이다(잠 6:22).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매우 명백하다(3-9절). 그 해석은 그 뜻을 가장 잘 아셨던 그리스도 자신이 하셨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10절) 물은 것은 백성들을 위하여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를 소원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그것을 알기 위해 자신들의 지식에 대해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친절하게 그 요지를 파악하시고 그 의미를 알려 주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도 많은 무리들이 듣는 데서 그 비유를 알게 하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36절까지 그들을 잊어 버리셨다는 기사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는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18절). 너희는 그것을 들었으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들은 것을 다시 듣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해 유익을 얻는 데 쓸모가 있고 도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빌 3:1). "너희는 그것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에 대한 해석을 들어라." 우리가 들은 것을 이해할 때에만 그 말씀을 올바르게, 또한 유효하게, 듣게 된다. 만일 들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들은 것이 전혀 아니다(느 8:2). 이해심을 주시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면 그 비유와 설명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1) 뿌려진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여기에서는 "천국 말씀"으로 불리워지고 있다(19절). 천국은 왕국이다. 세상 왕국은 천국과 비교하면 왕국이라고 불리워지지 못한다. 복음은 왕국"에서"(from) 오며 그 왕국"을"(to) 가르친다(역주:전자는 천국, 후자는 이 세상 왕국). 복음의 말씀은 왕국(천국)의 말씀이다. 그것은 왕의 말씀이며, 거기에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배를 받아야 되는 법칙이다. 이 말씀은 죽은 것 같이 보이며 마른 물건 같이 보이는 뿌려진 씨이다. 그러나 모든 소산물이 실제로 그 속에 있다. 그것은 "썩지 아니할 씨"(벧전 1:23), 마음속에 "열매를 맺는"(골 1:5, 6) 복음이다. (2) 씨를 뿌리는 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친히 그 자신이 그의 사역자에 의해 씨를 뿌리신다(37절). 백성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말씀은 농작물이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고전 3:9). 많은 무리에게 전파하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 씨가 어디에 뿌려져야 하는 지를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 땅은 좋고 깨끗하며 씨를 뿌리기에 알맞다는 것뿐이다. 말씀의 씨를 뿌리기에 알맞다는 것뿐이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들판에 백성, 즉 "그의 타작 마당의 곡식"을 뿌리는 것이다(사 21:10). (3) 이 씨가 뿌려진 땅은 사람들의 마음으로써, 그 자격이나 성품이 각각 다르며 따라서 그 말씀의 성공도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의 마음은 향상할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토양과 같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묵혀지거나 게으른 자의 밭과 같이 되는 것(잠 24:30)은 서글픈 일이다.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역사하고 지배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그 작용은 양심 위에 근거하며, 주님의 촛불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말씀도 우리에게 임한다. Recipitur ad modum recipients─즉 영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종류의 땅은 많은 수고를 들여 좋은 씨를 심었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좋은 땅은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다. 여기에 네 종류의 땅(즉, "셋"은 나쁘지만, "하나"는 좋다)에 의해 묘사된 서로 상이한 특징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열매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느뇨?" 넷 중에 겨우 하나만이 완전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전파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비유가 주는 서글픈 전망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소명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이 부르심의 효력에 의하여 영원히 선택함을 받았음이 입증되고 있다(마 20:16). 이제부터 이 4종류의 땅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길가의 땅(4-19절). 그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갔다(마 12:1 역주:사잇길이 곧 "길가"를 말한다). 그곳에 떨어진 씨는 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므로 새들이 그것을 쪼아 먹어버렸다. 그리스도의 청중들이 지금 서 있는 장소는 그들 대부분의 특징들을 잘 나타내는 곳, 즉 바닷가 모래 위다. 그것은 길가와 같은 곳이었다. 씨였다.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자. 첫째,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길가"에 비유되었는가? 그것은 즉,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과 같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그들은 그것을 유의하지도 않으며,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길가가 씨를 심기우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좋은 것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같이 그에게 나오며, 그의 백성이 앉는 것처럼 그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고 보여지려는 과시에 불과하다. 그들은 말해진 것에 유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한쪽 귀로 와서는 다른 쪽 귀로 나가 버린다. 또한 감명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둘째, 그들은 얼마나 무익한 청중이 되었는가? "악한자," 즉 마귀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가 버린다"-이와 같이 부주의하고 경솔하며 경박한 청중들은 사탄에게 쉽사리 먹이가 되어버린다. 마귀는 마음의 큰 살인자이며, 설교의 큰 도적이다. 만일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말씀을 빼앗아가 버릴 것이다. 마치 새가 땅을 갈기 전에나 써레질한 후에 떨어진 곡식을 쪼아먹듯이 만일 우리가 말씀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그것에 대해 겸손하며 우리의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묵은 땅을 갈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가 명상과 기도에 의해 씨를 덮지 않는다면," 우리는 길가와 같은 자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익을 얻는데 있어서 극악무도한 원수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평화에 속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야만 할 때 그 밖의 것에 대해 생각하는 부주의한 청중이야말로 마귀의 계획에 동조하는 자들이다(의역). (2) "돌밭,"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졌다"(5, 6절). 이 돌밭은 전자보다는 조금 나은 청중들로서, 말씀에 대해 좋은 인상은 받았지만 오래 계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0, 21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나을 수는 있으나 우리가 되어야만 할 사람에까지는 썩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이웃보다 탁월하지만 하늘 나라에는 미치지 못할 수가 있다. 이제부터 돌밭으로 묘사된 이러한 청중들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들은 어디까지 갔는가? 1. 그들은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말씀에 대하여 등을 돌리거나 귀머거리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매우 자주, 그리고 엄숙하게 말씀을 듣는다 할지라도, 만일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우리를 결코 천국으로 데려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 그들은 "말씀을 듣고 즉시(euvqu,j) 그것을 받되," 즉 말씀을 받는 데는 빠르며,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한다. "곧 싹이 나오나"(5절), 즉 좋은 밭에 심기워진 것보다 더 빨리 땅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선자들은 종종 신앙 고백을 보임으로써 참된 기독자의 출발을 한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여 이를 감당치 못하는 때가 많다. 그는 말씀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그것을 곧장 받는다." 그들은 씹지도 않고 삼켜 버리기 때문에, 그 말씀을 좋게 소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자들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만"(살전 5:21)한다. 3. 그들은 그 씨를 "기쁨으로" 받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설교 듣기를 기뻐하면서도 그것에 의해 유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말씀을 즐거워할지 모르나 그것에 의해 변화되고 지배받지는 않는다. 그 마음이 말씀 아래 녹아질지 모르나 말씀에 의해 녹아지지 않는다. 더욱이 옥토에 묻히는 것 같이 말씀에 묻혀지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며"(히 6:5), 그 말씀 안에서 고상함을 발견했다고 말하지만, 어떤 애지중지하는 정욕이 "혀 밑에서 굴려진다"(역주 자신의 정욕을 혀가 놀리는 것 같이 반복하여 사용한다는 뜻). 이것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또 다시 침을 뱉았는다. 4. 그들은 힘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계속되지만 그것이 다 없어졌을 때는 멈추고 마는 맹렬한 동작과 같이 "잠시 견딘다." 많은 사람이 잠시 견디기는 하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견디는 자에게만 약속된 행복에 못 미친다(마 10:22)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잘 달렸지만 어떤 것이 그들을 방해하였다(갈 5:7). 둘째, 그들은 어떻게 시들어 버렸는가? 그들은 시들어 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 습기를 흡수할 수 있도록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곡식은 태양열에 의해 시들고 말라버린다. 또한 그 이유는, 1. 그들은 "뿌리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판단에 있어서 안정되고 고정된 원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들의 의지에 있어서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들의 애정에 있어서 뿌리를 내린 습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의 신앙 고백의 활기나 힘이 될 견고한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은혜의 뿌리가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신앙 고백의 푸른 잎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마음이 강퍅하며, 표면에만 이 흙이 있고 부드럽다. 내적으로는 돌(stone)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뿌리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신앙에 의하여 우리의 뿌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에게서 나오지 않으며 그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2) 원리(principle)가 없는 곳에는 비록 신앙 고백이 있다고 할지라도 인내를 기대할 수 없다. 뿌리를 가지지 못한 자들은 잠시 동안만 견딜 수 있다. 밸러스트(ballast, 역주:배의 바닥 짐)가 없는 배는 비록 처음 항해는 순조로울지 모르지만 날씨가 사나우면 파선되어 결코 입항할 수가 없을 것이다. 환란의 때가 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 환란이나 핍박은 그가 견딜 수 없는 길가의 장해물이며, 따라서 그는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앙 고백이 다달은 막바지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기회라고 하는 고요한 미풍이 지나간 다음에는 대개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나 안 받아들인 사람을 시험하기 위하여 환란의 폭풍이 뒤따른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이 될 때(계 3:10), 그때가 바로 그 말씀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에게 시련이 된다(계 1:9). 이러한 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지혜이다. (2) 시련의 때가 올 때, 뿌리를 가지지 못한 자들은 곧 넘어진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신앙 고백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다가 그것을 포기해 버린다. 처음에는 그것의 결점을 잡다가 아예 팽개쳐 버린다. 우리는 여기에서 "십자가의 거치는 것"에 대해 읽을 수 있다(갈 5:11). 핍박은 "시들게 하는 해"(6절)로 비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뿌리가 잘 뻗어있는 것은 따뜻하게 키우는 동일한 해(태양)가 뿌리가 없는 것은 시들케 하고 태워버린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향기"가 된다. 어떤 사람을 배신과 파멸로 몰아 넣는 동일한 환란이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의 심히 크고 중한 것"이 되게 한다. 어떤 사람을 흔드는 시련이 어떤 사람은 견고케 한다(빌 1:12). 그들은 얼마나 빨리 시들어 버렸는가를 살펴 보라. 그들은 익자마자 곧 썩어버렸다. 심사숙고함이 없이 취해진 신앙 고백은 흔히 심사숙고함이 없이 시들이 버린다. "쉽게 와서는 쉽게 가버린다." [3] 가시떨기의 밭.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가시 떨기는 울타리에 있을 때는 곡식을 잘 보호해 준다. 그러나 그것들이 들판에 있을 때는 장애물이 된다), "가시가 자라서"란 말은 가시가 곡식이 심기웠을 때는 보이지 않거나 약간 보이다가 그 후에 꽉 차게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7절). 이것은 전자의 경우보다는 훨씬 낫다. 왜냐하면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신앙 고백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의해 구원받는 특권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말씀에 의해 얻은 좋은 것이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 서서히 압도되고 눌리워진다. 번영(부귀 영화)이 핍박이 하는 것 이상으로 마음에 있는 말씀을 파괴해 버린다. 더욱 조용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스러운 것이다. 돌들은 뿌리를 못쓰게 하지만 가시나무는 열매를 못쓰게 한다. 그러면 이 막아버리는 가시떨기는 무엇인가? 첫째, "이 세상의 염려"이다. 저 세상(천국)에 대한 염려는 이러한 씨를 돋아나게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염려는 그것을 막아버린다. 세상의 염려들은 가시떨기와 적절하게 비교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죄와 더불어 세상에 들어 왔으며 또한 저주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제나름대로 부족한 곳을 메꾸는 데는 좋을지 모르나 그것들을 많이 다루는 자는 잘 무장되어야만 한다(삼하 23:6, 7). 그것들은 얽히게 하며, 괴로움을 주며, 할퀸다.. 그러나 "그들의 나중은 태워지는 것이다"(히 6:8). 이러한 가시 떨기는 좋은 씨를 막아 버린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적인 염려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유익을 얻거나 또한 경건의 연습을 하는데 있어서 큰 장해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신적인 일들에 소비되어야 할 마음의 생동력(활기)를 삼켜버리고 만다. 우리를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며 혼란시킨다. 또한 이에 뛰따르는 최악의 해독을 우리에게 끼친다. 선한 애정의 불을 꺼버리며, 선한 결심의 줄을 끊어버린다. "많은 일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자들은 대개 "한 가지 필요한 일을" 무시하는 법이다(역주 :마르다와 마리아). 둘째, "재리의 유혹"이다. 염려와 근면에 의해 재산을 쌓았으며, 따라서 염려에서 발생하는 위험이 극복된 것처럼 보이며, 그러면서도 "말씀을 계속 청종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덫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렘 5:4, 5).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그들은 실제와는 다르게 그리고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기대하기 쉽다. 즉 그들은 그것들(재리들)을 의지하며 그것들에 대해 지나친 만족을 한다. 이것도 염려를 했던 것 이상으로 말씀을 막아 버린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재리의 유혹"과 같이 불행을 주는 것은, 부(富)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것들을 신뢰하거나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것들은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라고 말해질 수는 없다. 만일 그것들을 신뢰하고 기대한다면 그것들은 좋은 씨를 막고 말 것이다. [4] "좋은 땅"(1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좋은 씨가 언제나 좋은 땅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만일 좋은 땅을 만난다면 손실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의 좋은 청취자"(23절)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은혜의 말씀을 "헛되이 받는 자들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이 좋은 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남은 자를 가지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사 55:10, 11)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좋은 땅이 다른 땅과 구별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참된 기독자들이 외식자들과 구별되는 점은, 즉 그들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될 것이다"(요 15:8). 그는 이 좋은 땅이 돌이나 가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열매를 맺히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성도들은 이 세상 죄의 잔유물에서 완전히 자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지배에서부터 즐겁게 자유하는 것이다(해방된다). 좋은 땅으로 묘사된 청중들은, 첫째, 깨닫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들은 말씀의 뜻과 의미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계를 깨달아 안다. 그들은 임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임무에 대해 깨닫는 것처럼 그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서 사람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하시며, 깨달음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의지로 사랑을 얻으시는 것이다(역주:그들에게 먼저 깨달음을 주신 후 그들로 하여금 결심하고 사랑하도록 하신다는 뜻). 그러나 "도적이며 강도"인 사탄은 "문으로 오지 않고 다른 쪽으로 기어오르는 것이다." 둘째, 결실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그들이 잘 깨달아 안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역시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모든 씨에 대해 그 자체의 몸이며, 받아들인 말씀에 적용한다면 마음과 생활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산물이다. 우리는 말씀에 따라 실천할 "때,"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의 마음의 기질과 생활의 성향은 우리가 받았던 복음과 일치가 되며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셋째, 열매를 맺는 정도는 똑 같지 않다. "혹 백배, 혹 육심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열매를 맺는 기독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결실한다는 사실이다. 참된 은혜가 있는 곳에도 역시 그 정도의 차이는 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성결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해서 모두가 똑 같은 형은 아니다. 우리는 이삭의 땅(창 26:12)과 같이 "백 배의 결실을 맺으며," "주님의 일에 풍성"(요 15:8)할 수 있도록 최고의 목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땅도 좋고 열매도 훌륭하며 마음도 정직하며, 또한 생활도 그러하다면, 단지 삼십배 밖에 열매를 못 맺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질 것이며 또한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지"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그는 엄숙하게 주의를 환기시키심으로써 비유를 끝마치시고 있다. "귀 있는 자들 들으라"(9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청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상으로 더 나은 작용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역주:청각 작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만 그 진가를 더욱 최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뜻).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려 한다. 그들의 귀는 단지 "음악하는 여자들"(전 12:4)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좋은 멜로디는 없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것"(행 17:21)을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것처럼 새로운 것은 없다.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 (마태복음 13:24-43) 이 구절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설교하신 또 다른 이유(34,35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천국 비밀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명백하게 발견하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경청하고 고대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유"로 설교하셨으며,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다시 말하면 이 때와 이 설교에서는 비유로만 말씀하셨다(역주:비유로 말씀하시지 않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혼에 대해 선을 행하시기 위해, 또한 그들을 감동시키시기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강구하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사람들이 분명한 설교에 의해 가르침을 받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비유를 가지고 그들을 가르치시려고 노력하신다. 그 이유는 여기에 제시되어 있으니, 곧 "성경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이를 위해 여기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역사적 시편의 서문의 한 부분으로써, 곧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시 78:2)이다. 시편 기자인 다윗이나 아삽이 거기에서 그의 이야기에 대해 말한 것이 그리스도의 설교에 적용되고 있다. 또한 이 위대한 전례(precedent)는 어떤 사람이 행하였던(내걸었던) 반대에서부터 이 설교법을 변호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에 보면, 1. 그리스도의 설교의 주제가 있다. 그는 "창세로부터" 하나님 안에, 즉 그의 계획과 작정들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엡 3:9). 로마서 16장 25절, 고린도 전서 2장 7절, 골로새서 1장 26절과 비교하라. 만일 우리가 옛날 일들의 기록들을 즐거워한다면, 비밀스런 일들의 계시를 즐거워한다면 이러한 고풍(antquity)과 신비를 지닌 복음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것은 "창세로부터" 모형과 그림자에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개봉되었다." 그러한 비밀스런 일들이 지금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속한"(신 29:29) 계시된 일들이 되었다. 2. 그리스도의 설교 방법. 그는 비유로 설교하였다. 즉 지혜로운 말씀이지만 비유적으로 설교하셨으며, 또한 이것은 흥미를 끌게 하며 부지런히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비유로 가득찬 솔로몬의 교훈적인 칙서는 "잠언," 또는 "비유"라고 불리 운다. 그것은 동일한 말(동의어)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보라, 지혜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솔로몬보다 더 큰 자가 여기에 있느니라." Ⅱ. "겨자 씨"의 비유와 그 해석. 그것들은 함께 취급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해석은 비유를 설명하고 있고 그 비유는 해석을 예증(例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이 비유를 설명해 줄 것을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님께 요구함(36절). "이에 예수는 무리를 떠나셨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올 때 보다 더 지혜롭게 되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는 것은 걱정되는 일이다. 그들은 좋은 말씀을 들었으며, 그것이 전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말씀을 지닌 설교를 귀로만 듣고 마음에는 가지지 않은 채 떠나가 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슬프기 한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집에 들어가신 것"은 그 자신의 휴식을 위해서라기 보다 그가 행한 설교에서 주로 의도하였던 점을 제자들에게 특별히 이야기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소에서 선행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제자들은 기회를 포착하였으며, 그래서 "그에게로 왔던 것이다." 다른 모든 일에 현명하려고 하는 자는 특히 그리스도와의 대화, 즉 은밀한 묵상과 기도에 있어서 그와 더불어 대화하는 기회를 포착하고 향상시키는 데 지혜로워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경건한 모임에서 돌아왔을 때 거기에서 들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또한 친근한 대화로써 이해와 암기를 위해 서로가 도우며,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끝난 후 헛되고 무익한 대화에 의해 많은 설교의 유익한 점을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4장 32절, 신명기 6장 6,7절을 보라. 특별히 할 수만 있다면 그 말씀의 뜻을 그 설교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기"(말 2:7) 때문이다. 사사로운 의논은 공중 설교에 의해 얻는 유익에 큰 보탬을 줄 것이다. 나단 선지자가 "네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다윗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에게 요구한 것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였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이것을 물어 보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그들은 이 비유의 일반적인 개요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보다 더 특별하게 이해하는 것과 그들이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했는지를 확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닫고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올바르게 배치된 사람이라(역주:그의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다)는 사실이다. 그는 "겸손을 가르치실"(시 25:8, 9) 것이며, 오히려 "이것에 대해 질문 받게 되실"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르침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스도는 앞의 비유에서 요청 받지 않으셨는데도 그 해석을 하셨지만,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그들이 요청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받는 자비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지시와 우리의 기도에서의 격려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점이다. 2.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이 비유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해석.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답변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셨다. 그런데 이 비유의 취지는 우리들에게 천국, 즉 복음적인 교회의 현재와 미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즉 이것(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보살핌, 교회에 대항하는 마귀의 적개심,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의 혼합, 저 세상(내세)에서의 그들의 구별 등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시적(可視的)인 교회는 천국이라는 사실이다. 교회 안에는 비록 많은 위선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이를 지배하신다. 교회 안에는 하늘의 백성과 상속자가 되는 남은 자가 있으며, 이들로부터 교회는 보다 나은편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즉 교회는 지상 위에 있는 "천국"이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예수 그리스도는 밭의 주인, "추수의 주인," 좋은 씨를 뿌리는 자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셨을" 때, 그는 세상에 "선물들을 주셨다." 좋은 사역자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선한 사람들에게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씨는 그의 손에서 오며 또한 그가 뿌리는 것이다. 전파된 진리들, 심어진 은혜들, 성화된 마음들은 좋은 씨이며 또한 모두 그리스도에게 기인되고 있다. 사역자들은 좋은 씨를 뿌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도구이다. 또한 그에 의해 그 밑에 채용되었으며 그들의 수고의 성공 여부는 순전히 그의 축복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공포가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 중의 하나인 "인자"이시다. "인자," 즉 중보자는 권세를 가지신다. (2) "밭은 세상이다." 즉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큰 밭, 즉 인간 세상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이 세상은 악한 열매를 너무 많이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 세상은 가시적인 교회로써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며, 한 국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에서 세상은 "그의 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세상"은 그리스도의 "밭"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마귀가 세상에서 어떠한 능력과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빼앗은 것이며, 불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소유하러 오실 때 그는 당당히 권리를 가지시고 오신다. 세상은 그의 밭이다. 세상은 그의 밭이기 때문에 그는 좋은 씨를 그곳에 심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3)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참된 성도들이다. 그들은, [1] "천국의 아들들"이다. 유대인들과 같이(마 8:12) 신앙고백상 아들들이 아니라 참된 아들들이다. 유대인들은 내적으로, 이스라엘은 실제로 교회의 위대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앙과 순종에 있어서 편입되어 있다(역주:그들은 다 같이 신앙과 순종을 해야 할 입장에 있다). [2] 그들은 좋은 씨이며, 씨와 같이 귀중하다(시 126:6). 씨는 밭의 본체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씨이다(사 6:13). 씨가 뿌려지듯이 성도도 뿌려진다. 비록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두껍게 뿌려지기는 하지만 이곳 저곳에 흩어진다. 씨로부터는 열매가 기대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가지신 영예와 봉사의 열매를 그리스도는 "그가 친히 땅에 심으신"(호 2:23) 성도로부터 가지고 계신다. (4)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여기에는 죄인들, 즉 위선자들과 모든 악독하고 사악한 자들의 특성이 기록되어 있다. [1] 그들은 악한 자인 마귀의 아들들이다. 비록 그들은 그의 이름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들을 지배하며, 그는 그들 안에서 역사 한다(엡 2:2; 요 8:44). [2] 그들은 이 세상 밭의 가라지들이다. 그들은 선을 행하지 않으며, 남에게 해독을 끼친다. 그들 자신들에게는 무익하며, "좋은 씨"에게는 시험과 박해에 의해 해로움을 준다. 그들은 정원에 있는 잡초로서, 좋은 식물들과 같이 동일한 비와 햇빛, 그리고 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좋은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다. "가리지는 밀들 가운데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으므로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이 세상에 함께 병존하는데, 선한자는 쓰여지지만 악한 자는 용서 없이 내버려진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일 것이다. (5)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즉 마귀는 그리스도와 모든 선한 것,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극악무도한 원수이며, 또한 모든 선한 사람의 위로와 행복에 대한 철천지원수이다. 그는 세상 밭에 원수로서 이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라지를 거기에 뿌린 자이다. 악한 영이 된 이래로 마귀는 열심히 악을 조장하여 왔으며,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것이 그 주요 임무이다. 이제 가라지를 뿌리는 비유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들은 "사람들이 잘 때에" 가라지를 심었다. 통치자들은 그들의 힘으로, 사역자는 그들의 설교로 이러한 불행을 막아야만 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탄은 모든 기회들을 엿보며 또한 사악과 모독을 조장시키기 위하여 모든 특권들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특별한 사람에게 손상을 끼치는 것은 이성과 양심이 잘 때 그들이 그 보호에서 떠나게 될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일이 밤에 일어나는 것은 이때가 잠자는 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탄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지배하신다는 사실이다. 밤의 흑암은 마귀로 하여금 가라지를 심을 기회를 제공한다(시 104:20). 그 일은 "사람들이 잘 때" 일어난다. 사람들이 자지 않고 지내는 방법은 없다(잘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농부가 잘 때 원수가 그의 밭을 못쓰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외식자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가라지를 심은 원수가 "가버린 것"(25절)은 그가 행했던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탄이 큰 손상을 입힐 때는 그 자신을 숨기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일 정체가 탄로 나면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심으러 올 때 그는 "빛의 천사로 가장을 하는 것이다"(고후 11:13, 14). 그는 마치 자기가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은 것처럼 "가버렸다."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다"(잠 30:20). 이것이 사람의 죄로 타락하게 되는 쉬운 이치이다(역주:사람은 위와 같은 식으로 타락하게 된다). 원수가 가라지를 심고 가버린다고 해도 가라지는 저절로 자라나서 해독을 끼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씨가 뿌려질 때에는 그것을 돌보고 물을 주며 울타리를 둘러 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헛일이 되고 말 것이다. [3] 가라지는 "싹이 나고 결실 할 때"(26절)까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큰 죄악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오랫동안 그럴 듯해 보이는 신앙 고백의 외투 속에 숨겨있지만 마침내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좋은 씨와 마찬가지로 가라지도 잠시동안은 흙 속에 묻혀있다. 그리고 처음에 싹이 나올 때 그것들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시험하는 때가 올 때, 열매가 맺힐 때, 너희는 돌이켜 참된 자와 외식자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이것은 밀이고 저것은 가라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종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불평을 하였다(27절).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게 하였다. 교회에 잘못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심으신 씨에 대해 생각한다면, 우리는 놀라움을 가지고 "그러면 이러한 가라지들은 어디에서 왔나이까?"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오류가 생기고 추문이 일어나고, 이단 사교가 자라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에게는 큰 불행이 되는 사태라는 사실이다. 특히 그 밭의 임자에게 그러한 사실을 불평하게 되어 있는 그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큰 불행의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의 정원에서 이러한 가라지 즉 이러한 잡초들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또한 슬픈 일은 좋은 땅이 못쓰게 되고 좋은 씨가 질식되며, 그리스도의 이름과 명예에 마치 그리스도의 밭이 "가시덤불로 꽉 차 있는 게으른 자의 밭"보다 못한 것 같은 인상을 던지는 것을 보는 일이다. [5] 주인은 그 가라지들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를 곧 아셨다(28절).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그는 종들을 나무라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으며, 자신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신실하고 근면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판단 받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에 의해 비난을 받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밭에는 선과 악이, 외식자와 신실한 자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대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한다면 비록 우리가 바랐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의 책임으로 돌려지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잠을 자기는 했지만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비록 가라지는 심기워 졌을지라도 그들이 그것들을 심거나 물을 주거나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책망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6] 종들은 이 가라지들을 뽑으려는 데 앞장을 섰다.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들의 주인과 상의하기도 전에 지나치게 서두르거나 무분별하게 열심을 냄으로써 교회가 위험하더라도 그들이 가라지라고 추측되는 것은 모두 뽑아버리려고 할 때가 종종 있다. "주여, 우리가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오리까?" [7] 주인은 매우 현명하게 이를 말렸다(29절).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떤 사람이 가라지와 밀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밀을 위험스럽게 하기보다는 가라지를 허용하려고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혜요, 은혜이다. 중상모략하는 방해자는 분명히 비난을 받게 되며 우리는 그들에게서 물러나야만 한다. 공공연하게 "악한 자의 아들들인" 자들은 특별한 의식에 참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참으로 경건하고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말하자면 그 규칙에 있어서 잘못되고 그것들의 적용에 있어서 까다로운 연단이 있을 수 있다. 교회에 비난이 가해지고 지속될 때는 밀이 밟혀 지지 않도록(만일 뽑히지 않았다면) 큰 주의와 절제심이 필요하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그것이 "순수한"것처럼 "평화스러우며," 또한 그것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잘려져서는 안 되며, "온유함으로"(딤후 2:25)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가라지들은, 만일 은혜의 방편들 아래에 계속적으로 머문다면 좋은 곡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6)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39절). 이 세상은 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오래 지속되기는 하지만 언제나 끝없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멀지않아 영원에게 삼킨 바가 될 것이다. 세상 끝 날에는 큰 추수의 때, 곧 심판의 날이 있게 될 것이다. 추수때는 만물이 익으며, 잘릴 준비가 되어 있다. 선과 악은 심판 날에 익는다(계 6:11). 그것은 "땅 위의 추수"(계 14:15)이다. 추수때에 추수꾼은 그 모든 것을 베어낼 것이다. 어느 밭도, 어느 구석도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큰 심판 날에는 모든 것이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계 20:12, 13). 하나님은 "추수할 일을 정하셨다"(호 6:11). 그것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창 8:22). 추수 때에 모든 사람은 그가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모든 사람의 토지, 씨, 기술, 구면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 6장 7, 8절을 보라. 그 때에 "귀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사 9:3) 그 단을 가지고 "기뻐하면서 돌아올 것이다"(시 126:5, 6).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잠 20:4). "주여, 주린 자들에게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사 17:11)이 될 것이다. (7) "추수군은 천사들이니" 그들은 큰 심판 날에 그리스도의 공의의 사역자로서(마 25:31) 찬동과 정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판결을 수행하도록 채용될 것이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지혜롭고 강하며 민첩하고 순종하는 종들이며, 악한 자에게는 거룩한 원수들이다.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는 신실한 친구들이며, 따라서 이와 같이 채용되기에 알맞은 자들이다. "거두는 자는 삵을 받지만," 천사들은 그들의 수종에 대해 지불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할 것이기"(요 4:36)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즐거워하는 하늘의 기쁨"이다. (8) 지옥의 고통은 "불"이며, "가라지들"은 이것에로 던짐을 받아 태워질 것이다. 큰 심판 날에는 구별이 되어질 것이며,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그 날은 시로 주목할 만한 날이 될 것이다. [1] 가라지들은 그 때에 모아들여질 것이다. "거두는 자"(그의 주요 임무는 곡식을 모아들이는 것이다)는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들이는"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과 악이 이 세상에서는 구별되지 않은 채로 있었지만 큰 심판 날에는 구분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에 가라지들은 하나도 밀 가운데 있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죄인도 성도들 가운데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구분하기가 힘든"의인과 악인 사이"가 그 때에는 명백히 분간될 것이다.(말 3:18; 4:1). 그리스도는 언제나 참으시지는 않을 것이다(시 50:1). 저는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실 것이다. 그가 시작하시면 완전히 끝장을 내실 것이다." 그가 시작하시면 완전히 끝장을 내실 것이다." 넘어지게 하였던, 즉 교회에 대해서는 장해물이 되었고 사람의 양심에는 거침돌이 되었던 그러한 모든 타락한 교훈들과 예배들, 행위들은 그 날에 의로운 재판장에 의해 정죄함을 받을 것이며, "그의 오심의 광채"에 의해 소멸될 것이다. 모든 "나무와 풀과 짚"이 태워질 것이다(고전 3:12). 또한 그 때에는 "불법을 행하는 자, 불법으로 거래하는 자." 그리고 그것을 고집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지상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마지막 시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각 시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아마 여기에 있는 것은 스바냐 1장 3절, 즉 "내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 할 것이라"에 대한 암시인 듯하다. [2] 그들은 그 때에 "단으로 묶일 것이다"(30절). 동일한 종류의 죄인들은 큰 심판 날에 함께 묶이게 될 것이다. 즉 한 묶음의 무신론자들, 한 묶음의 향락주의자들, 한 묶음의 박해자들, 한 묶음의 외식가들 등. 죄 가운데 연합한 자들은 슬픔과 수치에도 그렇게 연합될 것이다. 영화된 성도들에게 축복이 더해지듯이 그들에게는 비참함이 증가될 것이다.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이여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자(시 26:9). "우리 주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의 단"이 많게 하자(삼상 25:29). [3] 그들은 "풀무 불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 "밭의 가라지"와 같이 도사리고 있는 악하고 해독스러운 자들의 최후가 이러할 것이다. 그들에게 적합한 것은 불밖에 없다. 그들은 불로 들어갈 것이며, 그곳이 그들에게는 가장 적당한 장소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지옥은 풀무 불(불 아궁이)로써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불붙여지고 그곳에 던져진 가라지 묶음들에 의해 계속 탄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가라지들은 계속적으로 탈것이며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은유법을 이용하여 그가 설명하시려고 한 그러한 고통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계시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위로 받을 수 없는 슬픔과 구제 받기 어려운 하나님께 대한 분노는 그들 자신과 서로 서로에게 저주받은 영혼의 끝없는 고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두려움을 알고"불법을 행하지 말도록 하자. (9) 하늘은 추수 때에 하나님의 곡식이 모아지는 "창고"이다. "곡식은 창고에 모아진다." 그와 같이 비유에서 설명되어 있다(30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이 세상 밭에서 선한 사람들은 알곡, 즉 가장 귀한 곡식이며 밭의 가치 있는 부분이다. [2] 이 알곡은 머지 않아 가라지들과 잡초들 사이에서 모아들여질 것이다. 모든 사람들, 즉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총회에 함께 모아질 것이다."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시 50:5). [3] 하나님의 모든 알곡은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특별한 영혼들은 곡식단(욥 5:26)처럼 죽음 가운데 기거되어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모아들여지는 것은 마지막 때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밀은 그 때에 함께 두어질 것이며 결코 더 이상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라지들의 묶음과 같이 곡식의 묶음(곡식단)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때에 안전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폭풍우나 악천후, 죄와 슬픔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밭에서와 같이 떨어져 있지 않고 창고에서 가까이 있게 될 것이다. 아니, 하늘은 "곳간"(마 3:12)이다. 이곳에서 알곡은 나쁜 친구인 가라지로부터 분리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패의 겨로부터 가려질 것이다. 비유의 설명에서 이러한 사실은 영광스럽게 묘사되어 있다(43절).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첫째,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은 그들의 현재의 영광이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거기에서 왕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가셨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요 20:17)에게로 가셨다. 하늘은 우리 "아버지의 집"이다. 아니 "우리 아버지"의 궁전이요 그의 보좌이다(계 3:21). 둘째, 그들을 위해 예비된 영예는, 곧 그들이 "그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불분명하고 감추어져(골 3:3)있으며, 그들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가난과 외적 조건의 초라함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 그들 자신의 연약성과 부족성, 또한 그들에게 던져진 비난과 불명예는 그들을 가리웠다(구름이 가리듯). 그러나 그 때에 그들은 어두운 구름 속으로부터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이다. 죽을 때에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빛날 것이다. 큰 심판 날에 그들은 모든 세계 앞에 공개적으로 빛날 것이며, "그들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되어질 것이다." 그들은 빛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빛을 반사함으로써 빛날 것이다. 그들의 성화는 완전해질 것이며, 그들의 창의는 선포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인정하실 것이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봉사하고 고난받은 모든 기록들을 제시하실 것이다. 그들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즉 볼 수 있는 모든 존재들 중 가장 영광스러운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구약에서 성도들의 영광은 궁창과 별들의 영과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이곳 신약에서는 해의 영광에 비유되었다. 왜냐하면 "생명과 불멸"은 "복음에 의하여" 율법 하에서보다 더욱 "밝게 빛나야"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화스럽게 되도록 이 세상에서 빛과 같이 빛나는 자들은 저 세상에서 "그들이" 영화스럽게 되도록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앞에서와 같이 주의를 환기시키는 요구, 즉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들에 대해 듣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며, 그것을 경청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Ⅲ. 여기에는 "겨자 씨"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31, 32절). 이 비유의 목적은 복음의 시초는 "작은 것이로되 나중에는 크게 될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복음적인 교회, 즉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건설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역사, 즉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수행될 것이다. 이제 복음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복음의 역사는 대개 "모든 씨보다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이" 처음에는 약하고 적다. 지금 세워진 메시야 왕국은 보잘 것 없이 미미하다. 이 세상의 광활(매우 넓음)함에 비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겨자씨와 같이," 즉 "세상의 약한 것들"과 같이 나타났다. 특별한 장소에 있어서 복음의 빛이 처음으로 비춰질 때는 단지 "새벽 동트는 여명"에 불과하다. 또한 특별한 영혼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처음에 상한 갈대와 같이 "작은 일의 날"(슥 4:10 참조)이다. 초신자는 "손으로 안고 다녀야 하는(사 40:11) 어린 양"과 같다. 거기에는 믿음이 적고 부족함이 많다(살전 3:10).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있으며, 그들은 매우 작다. 영적인 생활의 원리와 약간의 움직임이 있기는 하나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2. 그러나 겨자씨는 자라고 있으며 올라오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상하게도 기반을 쌓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접근해 왔다. 국가들은 사방에서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생겨난다. 참된 은혜가 있는 영혼에게 있어서 그 나라는 실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비록 그 자라나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겨자씨"는 작지만 그래도 씨는 씨이다. 또한 그 속에 자랄 수 있는 소질(생명)을 가지고 있다. 은혜는 더욱 더 빛남으로써 기반을 확보할 것이다(잠 4:18). 은혜스러운 습관이 확증되고 행동이 서둘러지며, 지식이 보다 분명해지고 신앙이 더욱 확인되는 것, 여기에서 씨는 자라나고 있다. 3. 그것(복음의 역사)은 마침내 힘과 유용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겨자씨가 성숙하게 "자라나며 나무가 되는데," 유대에 있는 겨자 나무는 우리 나라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교회는 "애굽에서 가져온 포도나무"(시 80:9-11)와 같은 뿌리를 박아 "땅에, 편만 하였다." 교회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와 같다. 하나님의 백성은 양식과 휴식, 그늘과 피난처를 위해 여기에 의지하였다. 특정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혜의 원리는 만일 참되다면, 끝까지 인내할 것이며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성장하는 은혜는 강력한 은혜가 될 것이며, 또한 많은 것을 성취시킬 것이다. 장성한 기독자들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새들에게 유익을 주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되기를 열망해야만 한다. 그들의 곁에, 또는 그늘 아래에 거하는 자들은 그들보다 더 나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호 14:7). Ⅳ. 여기에는 "누룩"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33절). 이 비유의 목적은 앞의 겨자씨 비유와 매우 흡사하며, 복음이 조용하고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확장되고 성취될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복음 전파는 누룩과 같으며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누룩과 같이 역사 하는 것이다. 1. "여자는 이 누룩을 가졌다"(33절). 그것이 그 여자의 임무였다. 사역자들은 복음을 가지고 장소들이나 영혼들을 부풀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여자는 연약한 그릇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보화를 이러한 그릇들 안에 가지고 있다. 2. 누룩은 "가루 서말 속에 넣어졌다"(영역 :숨기워졌다). 마음은 가루와 같이 부드럽고 유연하다. 부드러운 마음은 말씀에 의해 유익을 얻는다. 누룩은 가늘게 부순 가루가 아니면 부풀지 않으며, 복음은 겸손하고 죄를 회개한 영혼이 아니면 부풀게 할 수 없다. 율법은 마음을 잘게 부수며, 복음은 그것을 부풀게 한다. 그것은 "가루 서말," 즉 큰 양(量)이다. 따라서 "작은 누룩이 전부 부풀게 한 것이다." 가루는 누룩을 넣기 전에 반죽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마음은 깨어져야 하며 습기가 젖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의 영향력을 받기 위하여 그것을 준비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누룩은 비밀을 위해서 보다는 (왜냐하면 누룩은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 "마음속에 감추어져야만"(시 119:11) 한다. 우리의 내적인 생각은 그것 위에 두어져야만 하며,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직했던 것처럼(눅 2:51) 그것을 간직하여야만 한다. 여자가 누룩을 가루 속에 감춘 것은 누룩이 그 맛을 전달하여 맛있게 되게 하려 함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에 의해 성결함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을 우리의 영혼 속에 쌓아야만 한다(요 17:17). 3. 이와 같이 가루 반죽에 넣어진 누룩은 발효하는 작용을 한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 4:12). 누룩은 급속도로 작용을 한다. 말씀도 그와 같기는 하지만 점차적으로 작용을 한다. 엘리야의 외투는 엘리사에게 얼마나 급작스런 변화를 일으켰는가!(왕상 19:20) 누룩은 조용하면서도 남이 있지 못하게(막 4:26), 그러면서도 강하고 저항할 수 없게 작용한다. 누룩은 소리 없이 그 임무를 수행한다. "성령의 방법"도 이러하지만, 그러나 실패함이 없이 수행된다. 누룩은 반죽 속에 감추어지지만, 온 세계는 누룩이 그 맛을 전달하여 맛을 내게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또한 누룩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지만, 점차적으로 모두가 부풀게 되는 것이다. (1) 이와 같은 누룩이 세상에 있었다. 사도들은 그들의 설교에 의하여 거대한 인류 속에 한 줌의 누룩을 가져다 넣었으며, 그것은 기묘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누룩은 세상을 발효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누룩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며"(행 17:6), 또한 점차적으로 그 맛과 풍미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복음의 냄새가 "각 처에서 나타내어졌다"(고후 2:14; 롬 15:19). 누룩(복음 전파)이 이와 같이 효과적이 된 것은 외적인 힘에 의해서나 또한 항거하거나 정복할 수 있는 이러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 하시며 또한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만군의 여호와의 성령"에 의해서이다. (2) 이와 같은 누룩이 마음속에 있다. 복음이 마음속에 들어 왔을 때, [1] 복음은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역주 :복음 자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가루 반죽은 여전히 가루 반죽이다. 그러나 질적인 변화를 한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우리가 행하였던 것과는 다른 맛을 내게 하며, 다른 것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늘 일상적으로 했던 것보다는 다른 맛을 우리에게 내도록 하는 것이다(롬 8:5). [2] 복음은 보편적인 변화를 한다. 복음은 그 자체를 마음의 힘과 능력으로 발산시킬 뿐 아니라 지체들의 성질까지도 변화시킨다(롬 6:13). [3] 이러한 변화는 가루 반죽이 누룩에 의해 변화되듯이 영혼으로 하여금 말씀의 본질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우리의 주형(鑄型, mould)에 넘겨진 것처럼 복음에 넘겨져서(롬 6:17), 밀랍(蜜蠟) 위에 있는 문장(紋章)과 동일한 형상으로 바꾸어진 것이다(고후 3:18). 하나님과 그리스도, 값없는 은혜, 내세 등에 대한 복음의 냄새들은 영혼을 더욱 맛있게 해 준다. 복음은 신앙과 회개, 거룩과 사랑의 말씀이며 이러한 것들이 영혼에 작용된다. 이러한 냄새가 서서히 전달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분리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은혜란 그것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좋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루 반죽이 부풀게 되면 화덕에 올려놓는다. 시련과 고통은 대개 이러한 변화에 수반된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성도는 주님의 식탁 위에 놓이는 빵이 되기에 적합하게 되는 것이다. |
밭에 감추인 보물의 비유 (마태복음 13:44-52) 이 구절들에는 네 가지의 짤막한 비유가 있다. Ⅰ.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지금까지 그는 "천국"을 적은 일들에 비유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초는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들이 이 경우를 들어 천국에 대해 하찮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 비유와 다음 비유에서 천국은 그 자체가 매우 값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로 기꺼이 나아오려고 하는 자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여기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에 비유되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원한다면 그 보화를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보화이시다. 그에게는 부요하고 유용하며, 또한 우리의 몫이 돌 모든 것이 풍부하게 있다. "모든 충만"(골 1:19; 요 1:16),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 2:3), 의와 은혜와 평강의 보화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 놓여져 있다. 만일 우리가 그와 관계를 맺으면(또는 흥미를 가지면) 그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 된다. 2. 복음은 이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밭이다. 이 보화는 복음, 즉 신,구약복음의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다. 복음의 계명 속에 이 보화는 유방 속에 있는 젖과 같이, 뼈 속에 있는 골수, 이슬 속에 있는 만나, 우물 속에 있는 물(사 12:3), 벌집 속에 있는 꿀과 같이 감추어져 있다. 이 보화는 "밀폐된 정원"이나 "닫혀진 샘"에 있지 않고 밭 즉, 야외에 있는 밭에 감추어져 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와서 성경을 조사하라." "이 밭"(잠 2:4)을 파도록 하라. 우리가 발견하는 금광은 바른 과정을 거치기만 한다면 모두 우리의 것이다. 3. 이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그것의 말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경시하고 큰비용을 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그것을 환영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그 밭의 표면만을 바라다보고 그 밭의 가치를 판단하려고 하며 또한 철학자들보다 앞선 기독교의 탁월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종종 매장량이 많은 광물들은 매우 황폐하게 보이는 땅에 묻혀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밭에 값을 매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값을 올리려고는 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무어냐?"(역주:마 5:46 참조) 성경이 다른 좋은 책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풀라톤의 철학이나 공자의 도덕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와 "영생"(요 5:39)을 찾으려고 "성경을 상고한" 자들은 무한히 가치 있게 해 주는 이러한 보화를 이 밭에서 발견하였다. 4. 이 보화를 밭에서 분간해 내고 그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한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기 전에는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이 보화를 발견한 자는 "우리가 미치치 못할 까 보아"(히 4:1), "열심히 돌아보며"(히 12:15) 또한 사탄이 무리와 그 보화 사이로 들어오지 않도록 이를 감춘다(이것은 거룩한 열심을 나타낸다). 그는 아직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즐거워한다. 그는 이러한 계약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또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됨을 즐거워한다. 또한 그들은 그 문제를 교섭하고 있음을 즐거워한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은 즐겁다"(시 105:3). 그는 밭을 "사기로" 결심한다. 복음적인 의미에서 볼 때 복음의 선물들을 받아들이는(포옹하는) 자는 이 밭을 산 것이다. 그들은 그 밭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보화 때문에 그 밭을 자기의 소유로 만든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 갈 필요가 없다. 말씀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 그는 그러한 목적이 있으므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의 유익을 얻으려는 자는 그것을 확실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야만 한다." Ⅱ. "값진 진주"의 비유(45, 46). 이 비유도 전자와 똑같이 보화에 대한 비유이다. "꿈이 이처럼 두 번 꾸어진 것은, 그것이 그 만큼 확실하기 때문이다." 1. 사람의 모든 자녀들은 "좋은 진주를 찾기에" 분주하다. 어떤 사람은 부요하기를 바라며, 또 어떤 사람은 존귀를, 또 어떤 사람은 박학하게 되기를 바란다(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가짜 진주의 모조품에 속고 있거나 그것을 지니고 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값진 진주," 즉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으로써, 이 진주(보석)는 그것을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부요하게, 참으로 부요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하게 만들 것이다. 그를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이곳에서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넉넉히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3. 참된 기독자는 이 값진 진주를 찾아 발견하는 영적인 "상인"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지 못한 물건은 취급하지 않으며 또한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기를 결심한 자로서 고급 장사를 한다. "그는 가서 그 진주를 샀다." 그것을 흥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버렸다. 만일 우리가 그를 우리의 것으로 알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혜로 삼지"(고전 1:30)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4. 그리스도와 구원하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자는 그를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떠나야 하며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한다. 그리스도에게 반대하는 것이나 우리의 사랑과 봉사 때문에 그와 충동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친근한 것이라 할지라도 즐거움으로 버려야 한다. 사람은 매우 소중한 금을 살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값진 진주는 사지 못할 것이다. Ⅲ. "바다에 던지는 그물"의 비유(47-49절). 1. 여기에는 비유 그 자체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세상은 넓은 바다이며, 사람의 자녀들은 그 바다에 있는 "무수한 대소 생물"(시 104:25)이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인간은 그들을 지배하는 자가 없는 "바다의 물고기와 같다"(합 1:14). (2) 복음 전파는 바다의 통치권을 가지신 그의 영광을 위해 거기에서 어떤 것을 잡으려고 그 바다 속으로 그물을 던지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이 그물을 던지고 끌어당기는 일에 채용된 "어부"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실 때는 재빨리 내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수고하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다." (3) 이 그물은 큰 쎄래 그물(끌어당기는 그물)과 같이 각종의 것들도 끌어 모은다. 현세적인 교회에는 고기와 마찬가지로 오물과 쓰레기, 더러운 것과 잡초들, 해충들이 있다. (4) 이 그물이 가득 차서 해안으로 끌어다닐 때가 온다. 복음이 보내어진 목적이 성취되고 우리가 그것을 확신하는 정해진 때는 결코 헛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사 55:10, 11). 그물은 지금 채워지고 있다. 종종 그것은 어느 때보다 더 빨리 채워진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 채워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비밀이 완성될 때"에는 해변으로 끌어 당겨질 것이다. (5) 그물이 채워지고 해변가에로 끌어 당겨질 때 거기에는 함께 모여진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를 구분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외식가들과 참된 기독자가 구분될 것이다. 좋은 것은 가치 있는 것으로 그릇 속으로 모아지며 따라서 소중하게 보존되지만, 나쁜 것은 사악하고 무익한 것으로 내어던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날에 내어던짐을 받는 사람의 처지는 비참하다. 그물이 바다에 있는 동안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모른다. 어부 자신도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해변가로 끌어당기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좋은 것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현세의 교회를 돌보시며, 또한 사역자들은 비록 혼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책임 아래 있는 자들에게 이와 같은 관심을 집중시킨다. 2. 여기에는 비유의 후반부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더욱 분명하고 명백하다. 우리는 현세의 교회에 "각종의 것"들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는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따라서 더욱 특별하게 설명되고 있다(49, 50절).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그때에, 또한 그때가 되기 전에 분리하고 발견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물에 좋은 고기만이 가득 차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릇들에도 그러할 것이며, 그들 속에도 그것들은 섞여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1) 의인들 중에서 악인을 갈라냄. 하늘의 천사들은 교회의 천사들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기 위해 올 것이다. 그들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낼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아시며 극히 자신에게 속한 사람인지의 여부를 잘 아시는 자(하나님)로부터 위임과 지시를 받고 올 때 그들이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신 것인가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없으며 또한 거기에는 하등의 오류나 실책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2) 그들이 이와 같이 갈라질 때 악한 자의 운명. 그들은 "풀무불에 던짐을 받을"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영원한 비참과 슬픔은 정녕 성결된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지만 성결치 못한 죽은 자들의 몫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에 보았던 구절(42절)과 동일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은 종종 외식자에 대한 영원한 심판으로써의 지옥의 고통에 대해 설교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각성시키고 일깨우는 진리에 대해 종종 회상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된다. Ⅳ. 여기에는 "좋은 집주인"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유의 의도는 나머지 모든 것을 못박기 위한 것이다. 1. 이 경우는 제자들이 터득하고 또 특별히 이 설교에 의해 유익을 얻는 데 있어서 잘 숙달이 되었다. (1) 그리스도는 그들을 향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면 그들이 이해 못한 바에 대해 설명할 용의가 있음을 나타내어 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씀을 읽고 듣는 모든 자들이 그 뜻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말씀에 의해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우리 자신을 살펴보거나 또는 우리가 그 뜻을 이해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깨어 물어보는 것은 결코 수치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자신을 찾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며, 또한 사역자들은 들은 바에 대해 물어 보려는 자들에게 답변해 주어야만 한다. (2) 그들은 주님에게 "그러하오이다"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대답은 참되었다. 그 이유는 앞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을 때는 그에게 설명해 주실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36절). 또한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은 나머지 것에 이르는 열쇠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설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좋은 진리들은 서로가 설명하며 해석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이해하는 자에게 쉽다." 2. 그 비유 자체의 목적은 그가 찬동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숙달에 대해 칭찬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학교에서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기꺼이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을 격려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잘 하였다, 잘 대답하였다"고 말씀하신다. (1) 그는 그들을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으로 칭찬하고 계시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가르칠 수 있도록 배웠다. 유대인 가운데 선생은 서기관이었다. "이스라엘에서 가르치도록 그 마음을 준비하였던" 에스라는 "익숙한 학사(서기관)"(스 7:6, 10)로 불리웠다. 유능하고 신실한 복음 사역자들은 역시 서기관이다. 그러나 구분하기 위하여 그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즉 복음의 일들에 정통하며 그러한 것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서기관으로 불리 우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자는 그들 자신이 잘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제사장의 입술이 지식을 지켜야 한다면 그의 머리가 먼저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2] 복 사역자의 가르침은 "천국"에 대한 것이어야만 하는데, 그의 임무는 천국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나 정치가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대해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악한 지도자에 불과할 것이다. (2) 그는 그들을 "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가져오는" 좋은 집주인에 비유하고 있다. 즉 그의 친구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각양 귀한 실과를 새 것과 묵은 것을 구비하여(아 7:13), 그것을 곳간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사역자의 물건. 즉 "새 것과 옛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많고 다양한 기회를 가진 자들은 그들의 수집하는 날에 구약과 신약에서부터 새 진리와 옛 진리를 잘 쌓아둘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케 되기 위하여" 고대와 현대의 진보를 쌓아야 한다(딤후 3:16, 17). 옛 경험들과 새로운 관찰들은 모두 사용의 가치가 있다. 우리는 옛 발견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새로운 것을 더 해야만 한다. 살면서 배우라. [2] 그는 이 물건을 어떻게 이용하실 것인가? 그는 "가져올"(가져다")것이다. 쌓아 두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쓰기 위한 것이다. Sic vos non vobis─즉 너희가 쌓아 두는 것은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많이 채워지지만 배출구가 없다(욥 32:19). 달란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묻어 버린다. 이와 같은 자들은 무익한 종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가 줄 수 있도록 받으셨다(역주:주기 위하여 받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많아 가지게 될 것이다. 가져올 때 새 것과 옛 것은 둘 다 좋다. 옛 진리이면서도 새로운 방법과 표현, 특히 새로운 사랑! 그 어찌 좋지 아니한가! |
예수님 고향의 불신앙 (마태복음 13:53-58)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고향에 계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선을 행하시면서 두루 다니셨다. 그는 그 당시 모든 장소를 다니면서 그의 증거를 마치셨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언젠가 그를 거절하였지만 그는 또다시 그들에게 오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그들의 첫마디에 거절하시지 않으시며 또한 그를 종종 배척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직무를 되풀이하신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다른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그의 형제와 같았다. 그는 그 자신의 고향에 대해 자연적인 애정을 가지셨다. Patriam quisque amat, non quia pulchram, sed quia suam─즉 모든 사람들이 그의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고향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Seneca). 이 때에도 그에 대한 취급은 그 전과 같이 조소적이고 악의적이었다.
1. 그들은 어떻게 그에 대해 멸시를 하였는가? 그가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니" 그들이 놀란 것은 그의 설교나 교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정녕 그의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를 이와 같은 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두 가지 일로 그를 비난하였다.
2. 그의 학문적인 교육의 결핍. 그들은 그가 지혜를 가졌고 또한 전능한 일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 질문은,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랍비의 발 근처에도 다니지 못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대학을 다니거나 학위를 받은 적이 없으며 또한 사람들에게서 "랍비, 랍비"라 불리움을 당한 적도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보잘 것 없고 편견을 가진 자들은 사람을 교육의 정도에 의해 판단하려고 하며 또한 그들의 생각보다는 그들이 태어난 출생지를 묻는다는 사실이다."이 사람의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그는 정말로 그 일들을 행하였는가? 그가 마술을 연구한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그들은 실제로 그에게 있었던 사실을 그를 대적하는 구실로 삼았다. 만일 그들이 고의적으로 눈이 어둡지 않았다면, 그들은 마땅히 아무런 교육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러한 비상한 지혜와 능력의 증가를 제시한 그를 신적인 도움과 위임을 받은 자로 결론을 내렸어야만 했다.
3. 그의 친척들의 초라함과 가난(55, 56절).
(1) 그들은 그의 아버지를 들어 그를 비난하였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가 그러한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잘못인가? 정직한 직업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대한 멸시는 되지 못한다.
그들은 이 목수가 "다윗 가문"(눅 1:27)에 속한, "다윗의 후손"(마 1:20)임을 알지 못하였다(그들은 그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요셉은 목수이기는 했지만 존귀한 사람이었다. 시비를 걸려고 하는 사람은 가치 있고 당연한 것은 간과해 버리고 단지 초라하게 보이는 것만 주시하려고 한다. 어떤 강퍅한 영혼들(사람들)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사 11:1)를 가장 높은 가지로 생각지 않고 무시해 버리고 있다.
(2) 그들은 그의 어머니를 들어 그를 비난하였다. 그 여자에 대해 논쟁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불리웠다." 또한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이름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그녀에 대해 잘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를 평범한 여자로 알았다. 그녀는 "마리아로 불리워졌다." "마리아 여왕"이나 "마리아 부인" 또는 "마리아 여사"불리워지지 않고, 단지 "마리아"라고 불리워졌다. 이러한 것은 남자가 이색적인 칭호나 고귀한 출신, 또는 경이적인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가치 있게 인정되지 않는 것처럼, 그녀를 비난하는 어투인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사람을 측정한다는 것은 어설픈 일들이다(그것들은 사람을 측정하기에는 빈약한 것들이다).
(3) 그들은 그의 형제들을 들어 그를 비난하였는데, 그들은 그 형제들의 이름을 알았으며, 이러한 경우에 그들을 들어 비난할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 형제들의 이름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며, 좋은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가난하였고 그러므로 멸시를 받았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 때문에 멸시를 받았다. 이 형제들은 아마도 요셉의 전처에게서 난 자녀들이 아닌가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간에 그들은 그와는 동일한 가족으로 자랐던 것 같다. 이들 중 세 사람의 이름(야고보, 시몬, 다대오와 동일한 유다)이 12제자의 이름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들이 영광스럽게 제자들의 이름으로 불리웠다는 기사는 찾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태여 그리스도께서 젊은 시절에 잘 아는 동반자라고 해서 그 이름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4) 그 누이들도 역시 다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사랑하여야 하며 그를 더욱 존경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였다"(영역:걸려 넘어지게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거침돌에 걸려 넘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기 때문이다"(눅 2:34; 사 8:14).
Ⅱ. 그는 이 멸시에 대해 얼마나 분개하셨는가?(57, 58절)
1. 이 멸시는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 사실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더욱 모욕을 주거나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들의 어리석은 제안에 대해 당연한 답변을 하시지 않고 오히려 온유하게 이러한 멸시를 사람의 자녀들의 공통적인 기질로 돌렸다. 인생들은 값싸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또 자기 마을의 산물 등은 좋은 것이라도 업신여기는 법이다. 그것은 대개 그러하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명예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대개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대하고 존귀한 사람이며 또한 존경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이다. 선지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2)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개 자신들의 고향에서 업신여김과 멸시함을 받았으며, 더구나 종종 큰 시기를 받았다. 친숙함은 멸시를 일으키는 법이다.
2. 이러한 멸시는 당분간 실제로 그의 손을 묶어 버렸다(역주:그로 하여금 일을 못하게 만들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58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으시다"(마 19:26). 또한 특별히 "믿는 자에게도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 9:23).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우리에게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능력이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았으며," 또한 그것이 능력 있는 역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엡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