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19일. 김영배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장은
공주사대 안승주 교수와 함께 부여로 향했다.
3년 전 공주 남산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일했던 최영보씨가
도굴 위험이 있는 옛 무덤을 발견했으니 급히 와달라고 연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의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최씨가 안내한 곳엔 돌판을 조립해 만든 무덤의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파괴된 고분일 것이라 추측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표토를 벗겨 내자 곧 길이가 2.6m나 되는 석관묘의 뚜껑돌 윤곽이 드러났다.
마을 주민 20여명과 함께 뚜껑돌을 들어 올렸다.
무덤 속에 쪼그려 앉아 꽃삽으로 연방 흙과 돌을 제거하던 김 분관장은
마침내 한 무더기의 돌화살촉과 함께 사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특별한' 동검을 발견했다.
그는 차분하게 발굴을 계속했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은 모두 환호의 탄성을 터트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 발굴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에선 마제 석검도 출토됐다.
훗날 김 분관장은 "마치 무령왕릉 입구를 열었을 때 느꼈던
그 경이와 흥분이 재현되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10월 8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물을 공개했다.
한병삼 고고과장은 "마제 석검이 세형동검을 모방했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은 근거가 없어졌으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라 설명했
고,
주요 언론에는 '선사고고학 최대 발견'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존재 확증' '60년 만에 무릎 꿇린 일본 학설' 등으로 대서특필됐다.
주민 신고로 우연히 발굴된 동검 한 자루가
한국 고고학계가 품고 있던 고민을 일소했고,
국가사적 '부여 송국리유적'을 찾아내는 실마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기원 및 성격을 해명하는 신호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개설
검신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요령지방(遼寧地方)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에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광복 전에는 ‘만주식 동검’으로 불렸다. 학자에 따라서는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예에 따라 ‘부여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형태에 따라 ‘곡인청동단검(曲刃靑銅短劍)’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용
일반적인 형태는 검신의 아랫부분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형태를 이루었고 검신 중앙부에는 돌기부가 있고 이 돌기부 양쪽으로 날이 약간씩 휘어 들어갔다.
경부(莖部)가 그대로 연장되어 검신의 중앙부에서 등대〔背〕를 이루며 인부(刃部)의 돌기부와 병행한 등대부분에는 마디가 약간 도드라져 있다. 이 도드라진 마디는 비파형동검을 다른 동검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마디 위쪽의 등대부분에는 등날〔稜角〕이 서 있는데 경부쪽으로는 대부분 등날이 서 있지 않다.
검파부(劍把部)는 ‘ㅗ’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손에 쥐어지는 부분은 속이 빈 나팔형으로 생겨 검의 경부를 삽입해 결합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검신과 검파가 따로 주조되어 결합시키는 조립식은 중국식 검 및 오르도스식 검과는 다른 뚜렷한 특징이며 한국식 동검에도 이어진다.
검파의 두부(頭部)는 대부분 평면이 호콩모양인 테두리를 가졌다. 속이 비어 있어 이 속에 같은 형태의 검파두식(劍把頭飾)을 맞추게 되어 있다. 이 검파부에는 삼각문(三角文)·뇌문(雷文) 등의 무늬를 베푼 것이 많다.
이 동검은 검파부의 형태에 의해 세 가지 형식으로, 검신의 형태에 의해 세 네 가지 형식으로 나눠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Ⅰ·Ⅱ기의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경부 끝쪽에 홈이 파인 형태가 우리 나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어 새로운 형식으로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현재까지 약 40여 자루가 알려져 있다. 함경도 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주로 서부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유적의 분포가 중국의 동북 지방과 한반도 서부 지방에 조밀한 것은 당시에 이 지역이 동일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적의 성격은 석관묘·고인돌(지석묘) 등이다.
최근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에서 출토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는데, 전남지방 보성강유역과 여수반도의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에서 수 점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해방 전에 비파형동검은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세형동검의 이형(異形)에 지나지 않고, 전형적인 세형동검보다 늦은 형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 차오양 쓰얼타이잉즈에서 한반도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비파형동검과 거친무늬거울〔粗文鏡〕이 출토되고, 부여 송국리 유적 등 한반도 여러 곳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견되면서, 명실공히 세형동검에 앞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 출토된 동검은 현지에서 직접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요령식 동모 및 비파형동검과 세트를 이루는 부채도끼〔扇形銅斧〕의 거푸집〔鎔范〕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비파형동검문화는 고조선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뒤의 한국식 동검〔細形銅劍〕문화는 이 동검문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공반유물로는 동포(銅泡)·동착(銅鑿)·선형동부·청동도자(靑銅刀子) 등을 들 수 있다.
부여의 송국리 석관묘에서는 마제석검·마제석촉 등이 반출되어 소위 마제석검의 한국식 동검 모방설을 뒤엎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문화의 주인공을 중국 동북부의 동호족(東胡族)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연대에 대해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동검의 한반도 유입시기는 서기전 8세기설부터 서기전 4세기설까지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